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삼성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2분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에 메디슨벤처타워라는 빌딩이 보인다. 이 빌딩은 주변의 대형 빌딩에 비하면 아담한 느낌이 들 정도로 크기가 작다. 그러나 이곳에는 최근 우리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의료기기인 초음파진단기를 만드는 (주)메디슨. 나머지는 메디슨과 관련이 있는 벤처기업들이다.
이 자그마한 벤처 빌딩의 주인인 이민화(李珉和·47) 메디슨 회장의 영향력은 빌딩의 크기를 휠씬 넘어선다. 이 회장은 1995년부터 벤처기업협회장을 맡아 벤처산업의 ‘프런티어’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30개의 벤처업체에 투자하고 있다. 2년전 부도 위기에 몰린 국산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인 ‘글’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인수하려 했을 때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민화 회장은 2월말 벤처기업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지난해에 임기가 끝났지만 IMF 상황에서 1년간 더 맡아달라는 회원사들의 요청이 있었던 것.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것과 때를 맞춰 이 회장은 이광형(李光炯)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교수와 공저로 ‘21세기 벤처대국을 향하여, 뒤집어보니 벤처국민이네’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정보화시대에 우리나라가 벤처강국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략과 벤처기업의 육성 방안 등을 담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부정적인 국민성 중 하나로 꼽히는 ‘빨리 빨리 문화’나 ‘냄비 근성’이 벤처산업에는 맞다든지,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수의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엔젤펀드’를 만든다거나 주식거래 차익에 과세를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을 담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을 펴낸 이민화 회장을 지난 2월10일 저녁 메디슨벤처타워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회장은 1976년에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85년에 메디슨을 창업했다.
우리 국민 벤처 근성 있어
“그 녹음기 쓸 만해요?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만든 건데 저는 그것도 별도로 가지고 다니기가 불편해 아예 녹음기능을 갖춘 휴대폰을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주 자그마한 만년필형 디지털 녹음기를 꺼내놓자마자 이민화 회장은 벤처기업가답게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묻고 새로운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우리 국민의 조급성이 벤처산업에 오히려 적합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
“전세계가 빠른 속도로 정보화사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 산업화시대의 변화 속도와 강도에 비해 20~30배 빠르고 강합니다. 따라서 1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이 서로 앞서기 위해 지식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 결과는 무섭습니다. 산업사회에서는 10등만 해도 차지할 것도 있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정보화사회에서는 3등안에 들지 않으면 차지할 것이 없어 살아남기 힘듭니다. 지식전쟁의 전사들이 바로 벤처기업가들인데, 그 벤처 근성이 우리 국민에게는 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와 ‘냄비근성’ 때문에 지난 4년 동안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벤처기업이 가장 발전했고 앞으로도 발전할 겁니다.”
―벤처 근성이 있어도 이를 뒷받침할 제도가 갖춰져야 할 터인데… .
“우리 나라는 벤처기업을 하기 좋도록 제도가 잘 정비돼 있습니다. 스톡옵션제, 세금 혜택을 주는 벤처빌딩, 실험실 벤처 등이 있어요. 실험실 벤처가 가능하려면 대학교수가 강의와 연구를 하면서 학교에서 상품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재작년부터 노력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제 우리나라 벤처산업이 도입기에서 도약기로 들어가면서 장차 한국을 이끌고 나갈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봅니다. 2005년까지는 한국 GNP의 4분의 1이 벤처기업에서 만들어질 겁니다. 그래서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혁명에서는 일본보다 30년 뒤졌기 때문에 식민지가 됐지만 이제 지식혁명에서 1년을 먼저 가면 우리가 일본을 앞지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산업화는 일본보다 뒤졌지만 정보화는 이미 일본을 앞질렀다고 하는데… .
“그동안 산업화시대에는 대부분 일본의 제도를 베껴왔어요. 그러나 벤처산업에 관한 제도는 일본이 이제 우리 것을 베껴가고 있어요. 실험실 벤처의 경우는 일본에서는 대학교수가 기업인을 겸직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일본은 산업화시대 제조업의 강자이기 때문에 그 미련 때문에 정보화시대에는 뒤처지는 것 아닐까요.
“그렇죠. 일본이 자스닥은 코스닥보다 먼저 시작했어요. 그러나 작년말까지 자스닥의 거래 규모가 코스닥의 10분의 1도 안됩니다. 인터넷 이용자 수만 하더라도 인구비례로 볼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60% 수준입니다.”
인터넷사업, 일본보다 앞서
―인터넷사업에서도 우리 나라가 앞서간다는 이야기입니까.
“물론 더 늦은 분야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인터넷 사업 모델이 일본보다는 1년, 중국보다는 2, 3년, 유럽국가들보다 6개월 정도 빠릅니다. 인터넷 사업 모델은 우리가 더 빨리 개발했습니다. 요즘 1년의 차이는 예전이면 10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델을 가지고 일본이나 중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을 수출하는 겁니다.”
―미국과 비교해서도 경쟁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그러나 우리 나라 벤처기업이 모든 면에서 미국처럼 잘할 수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가지 점은 우리가 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터넷기업인데, 우리 국민 근성에 참 잘 맞아요. 두번째는 신제조업입니다. 미국은 신제조업을 잘 못합니다. 미국은 소프트웨어는 잘 만드는데 그것을 기계와 접목시키는 신제조업은 시원찮아요. 반면 중국은 하드웨어는 잘 만드는데 소프트웨어가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성공한 벤처기업은 모두 신제조업이나 인터넷기업입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벤처기업 중 성공한 사례는 10%도 못되지 않아요?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겁니다. 한국 벤처기업은 ‘3년간 생존율’이 70%가 넘어요. 3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망하지 않거든요. 미국은 3년 생존율이 10%밖에 되지 않아요. 미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지요. 소프트웨어를 주로 만드는 미국에서는 1등만 살아남습니다. 소프트웨어의 경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품에 소비자들이 몰리게 돼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 나라는 2, 3 등도 살아 남습니다. 가령 모빌 폰을 만든다면 1, 2, 3 등이 각각 차지할 시장이 있습니다. 미국 벤처기업은 생존율은 낮지만 일단 살아 남으면 크게 성공합니다. 포털사이트 업체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야후가 압도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야후, 네띠앙, 다음의 규모가 비슷합니다.”
다음과 네띠앙은 국내에서 운영하는 포털사이트(모든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는 관문격의 사이트)업체다. 이 포털사이트업체의 우열은 가입회원수에 달려있는데 세계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야후도 우리나라에서는 ‘토종’을 쉽게 꺾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랄까, 사이버 공간의 커뮤니티는 우리 나라가 제일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보통 인터넷사업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커뮤니티, 커머스 등이 중요한데 궁극적으로 커뮤니티가 핵심입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조직을 만들 듯이 사이버상에서도 똑같은 조직을 만듭니다. 이것을 우리 국민들이 잘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학연 지연 등에 관심이 많찮아요.”
―인터넷 사업의 마지막 승부처는 역시 컨텐츠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
“그럴 수 있죠. 그러나 컨텐츠는 이 분야에서 3D에 속합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다른 업체와 차별화가 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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