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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미동맹 50주년, 흔들리는 한미 관계

‘혈맹’에서 촛불시위 ‘타깃’으로

주한미군의 어제와 오늘

  • 글: 동아일보 hoon@donga.com

‘혈맹’에서 촛불시위 ‘타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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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 이후 주한미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해왔다. 미국은 마지막 주한미군인 2사단의 철수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大戰略 속에서 한국의 국가전략을 원활히 운용하려면, 한국은 모든 작전부대를 한미연합사에 배속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국군은 합참이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부대를 갖고 있어야 한다.
‘혈맹’에서 촛불시위 ‘타깃’으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한미 양국군 병사가 악수하고 있다. 6·25전쟁을 계기로 한미 양국은 견고한 군사동맹 관계에 돌입했다.

새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현재 미군은 이 조약을 근거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조약 체결 50주년을 앞두고 사상최대의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촉발한 것은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반미주의는 친미주의만큼이나 감정에 기인하는 측면이 많다. 반미주의를 외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 ‘사고 직후 미 2사단장이 사과하고 2사단에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세웠고, 피해자 가족에 대해 보상을 약속했으며, 군사작전과 훈련 중에는 사고가 일어나도 작전과 훈련을 중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에게 주한미군은 무엇인가. 한국과 미군은 어떻게 만났고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 반미주의 파고로 인해 새삼 관심이 높아진 주한미군의 모든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에 주둔한 미군을 미8군이라고 한다. 왜 8군인가? 한국 육군에 1군·2군·3군이 있으니, 미국 육군에도 1군에서 8군까지 있는 것인가.

오래 전부터 외신은 미국 육군은 사단을 12개에서 10개로 줄였다고 보도해왔다. 49개 사단을 가진 한국에 3개 군이 있는데, 10개 사단밖에 없는 미국에 어떻게 8개 군 이상이 있겠는가. 이러한 의문을 풀려면 미 8군이 서울에 자리잡게 된 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왜 미8군이 서울에 주둔하는가

미8군은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6월10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창설되었다. 미8군이 한국과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이었다. 미8군이 창설되기 직전인 1944년 6월6일 유럽전선의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독일군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이 상륙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미 육군 1군·영국 육군 2군·캐나다 육군 1군 등 3개 야전군 60만명을 투입해 독일 침공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상륙작전 과정에서만 8975명의 사망자와 5만179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945년 4월, 태평양의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노르망디의 상륙작전과 비슷한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참고삼아 대략 60만 병력을 동원해야 성공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위해 미 육군의 6군과 8군 그리고 24군단 등 태평양 전선에서 싸워온 전 육군을 동원키로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50세 이하 남성은 모두 출정하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700만 대군으로 결사 항전한다고 선언했다. 상륙작전에 성공하더라도 이들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면 연합군에서도 상당한 희생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

‘희생자가 너무 많을 것’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은 두 가지 방안을 선택했다. 연합국의 일원이면서도 중립조약을 맺어 일본과 싸우지 않고 있던 소련을 설득해, 남(미국)과 북(소련)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자는 것이 첫째 방안이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해 북상할 때 북쪽의 소련군도 독일군을 궤멸시키며 남진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둘째는 ‘공포의 무기’인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유도한다는 것. 원자폭탄을 맞고 일본이 바로 항복한다면 미군은 수만명의 젊은 목숨을 아낄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조기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일본은 (원폭 투하) 9일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군이 유황도나 사이판, 오키나와에서처럼 결사적으로 저항하리라고 예상했던 미국은 너무 빠른 일본의 항복에 오히려 당혹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이 시기 미군은 오키나와에 머물며 원폭을 맞은 일본이 어쩌는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원폭이 없는 소련군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만주에 병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 미군보다 훨씬 더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이 먼저 일본을 점령한다면 1941년부터 일본과 싸워 온 미국은 ‘닭 쫓던 개’가 된다. 당황한 미국은 ‘소련군은 혼슈(本州)는 물론이고 홋카이도(北海道)로도 상륙하지 말라. 한반도에서는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개발한 원폭의 힘을 의식한 소련은 이에 순응했다.

엄포가 먹힌 덕분에 미군은 일본과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진주할 수 있었다. 미군은 6군과 8군을 일본에 상륙시키고,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은 한반도에 상륙시켰다.

그 직후 미군은 한 가지 미묘한 문제에 봉착했다. 미군은 두 개의 통합군사령부로 태평양전쟁을 치렀는데,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남서태평양군사령부와 니미츠 원수가 통솔한 태평양군사령부가 그것이었다. 이 두 사령부 중 어느 쪽이 일본을 점령해 군정(軍政)을 펼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부를 선택했다.

이로써 호주에 본부를 두고 있던 남서태평양군사령부가 도쿄(東京) 부근의 자마(座間)로 옮겨오며, 이름을 극동군사령부로 바꾸었다. 니미츠의 태평양군사령부는 원래 본부가 있던 하와이로 물러나게 되었다. 남한에 상륙한 24군단은 극동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948년 미군과 소련군은 남북한에 각각 친미·친소 정부를 세우고 철수했다. 이 시기 미군은 2차대전 기간 동안 어머어마하게 커진 군대를 축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한에서 철수한 24군단과 일본에서 빠져나온 6군은 곧바로 해체되고 일본에 남은 8군도 4개 사단 체제로 대폭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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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아일보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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