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大小國 공존하는 지구대협동사회 건설하자”

‘오토피아’ 주창하는 조영식 경희학원장

  • 글: 이명건 gun43@donga.com

    입력2003-02-24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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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토피아는 ‘ought(당위)’와 ‘topia(장소)’의 합성어로 ‘인간 중심 사상을 바탕으로 인류가 대단결해 구축한 평화로운 세계’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세계평화의 날’ 제안자이기도 한 조영식 경희학원장을 만나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大小國 공존하는 지구대협동사회 건설하자”
    지난해 11월14일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대학에서는 한국의 학자가 창안한 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생존한 학자가 만든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에 연구센터가 설립된 것은 중국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연구센터의 과제는 ‘오토피아(Oughtopia) 사상’ 연구. 이 사상의 창안자는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경희학원 원장인 조영식(趙永植) 박사다. 오토피아는 ‘ought(당위·當爲)’와 ‘topia(장소)’의 합성어로 ‘인간 중심 사상을 바탕으로 인류가 대단결해 구축한 평화로운 세계’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박사는 82세의 고령이다. 그러나 2∼3시간 쉬지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강연을 할 수 있는 체력과 또렷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랴오닝대학 연구센터 개소식을 겸한 한·중수교 1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도 휴식 없이 2시간 동안 이어진 강연을 통해 ‘지구공동사회(Global Common Society)’와 ‘지구대협동사회(Global Cooperation Society)’의 건설을 부르짖었다. 지구공동사회, 지구대협동사회는 그가 말하는 오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조박사는 또 유엔(UN)이 제정한 ‘세계평화의 해(1986년)’와 ‘세계평화의 날(9월 셋째 화요일)’의 제안자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오토피아 사상의 실천을 통해 맺은 대표적인 열매다. 1월 중순 경희대 학원장실에서 만난 조박사는 여전히 청년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오토피아에 대한 꿈을 불태우고 있었다.

    대소국 공존이 보장되는 세계 건설



    -랴오닝대학과 특별한 인연이 있나요.

    “1989년 처음 랴오닝성을 방문해 공무원들을 상대로 동북아시대 한국 중국 일본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했어요. 반응이 좋았던지 랴오닝성 정부가 고위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시장경제에 대한 연수 프로그램을 부탁하더군요. 1993년부터 매년 랴오닝성 공무원들이 경희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1차례에 걸쳐 랴오닝성 중앙 및 지방 관리 200여 명이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1994년 랴오닝대학을 방문하게 됐고 랴오닝대학의 요청으로 경희대학과 자매관계 협정을 체결하게 됐습니다.”

    -생존한 학자의 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센터가 만들어진 게 매우 이례적인데요.

    “랴오닝대 총장이 대학원 철학과에 오토피아 사상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설치하고 연구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제의할 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랴오닝대 총장이 그러더군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는 어렵겠다고. 그래서 그 대안으로 철학과 과학이 하나로 결합된 오토피아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겠다고요.”

    -중국 다른 대학에서도 오토피아 사상을 연구하고 있나요.

    “베이징(北京)대학 철학과 예랑(葉郞)교수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그는 경희대학에서 오토피아 사상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베이징대 다른 교수와 학생들도 연구중입니다.”

    예랑 교수는 랴오닝대학이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도 참석해 오토피아 사상을 주제로 쓴 논문을 통해 “현대사회는 물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정신을 가볍게 다루고 있는데 그러한 분위기는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오토피아 사상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헤겔은 ‘인간은 되풀이되는 역사에서 배우는 게 없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복되는 인간의 잘못 중 대표적인 게 전쟁 아닙니까. 전쟁의 근본 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오토피아입니다. 오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와 달리 실존이 가능한 사회입니다.”

    -저서 및 강연에서 주장하신 지구공동사회, 지구대협동사회가 오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대규모의 파괴와 인명살상을 가져오는 전쟁을 피하는 길은 패권적 국가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이념적 계급주의를 없애고 보편적 민주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보편적 민주사회는 유엔헌장 정신처럼 만민의 자유평등 및 공영(共榮), 대소국(大小國)의 공존이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국가를 해체하고 세계 국가를 만들자는 말이 아닙니다. 각국이 독립과 번영을 누리면서 인류 공동체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 지구공동사회·지구대협동사회입니다.”

    -오토피아 사상을 언제 창안하셨습니까.

    “1978년입니다.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사색을 거듭한 결과 ‘정신적으로 아름답고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 또 인간적으로 값 있고 보람 있는 사회’가 결론이었습니다. 그게 ‘ought’ 차원에서 실현 가능한 지향점이라고 생각했죠.”

    조박사는 1979년 저서 ‘오토피아’를 출간했으며 이 책은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됐다.

    -어떤 삶의 태도가 오토피아 사상과 맥락이 닿을까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오직 자족을 알고 서로 감사하며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가는 데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생 항로에서 계속 맑게 갠 날만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 없는 완전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은 허망한 욕구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 영원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사상 창안의 배경이 있을 텐데요.

    “청년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정치입니다. 그러나 1960∼70년대 군사정권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견제와 박해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학교 운영에도 차질을 많이 빚었죠.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습니까. 답답한 현실이었죠.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려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가치관이나 사상이 없을까 고민했던 겁니다.”

    -군사정권에 의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군부에서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중앙정보부장 내무부장관 병무청장을 지낸 사람들이지요. 나보고 5·16혁명동지회 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더군요. 내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죠. 그랬더니 박정희 소장이 당신을 신임하고 있으니까 반드시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데타로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 드는구나.’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3일 뒤에 경희대학 총장 승인 취소 처분이 내려지더군요.”

    -어떻게 대응하셨습니까.

    “그때는 제가 젊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의 뜻으로 학교를 폐교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가 없이 학교를 정부에 넘겨 국립대학으로 만들면 학생들에게는 피해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문아무개 대령이 문교부장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문대령을 만나 제 생각을 얘기했더니 ‘도대체 이유가 뭐냐’며 화를 벌컥 내더군요. 그래서 나도 ‘지금 상황을 몰라서 그러냐’고 화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뒤 문대령이 집으로 찾아와 ‘학원장으로 있으면서 총장 역할을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저를 설득하더군요. 생각해보면 어려운 고비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군사정권의 요직 제의 거절

    -당시 정권에서 다른 요구를 한 적은 없나요.

    “유신학술원을 만들어 나에게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도 못하겠다고 거절했어요. 그 외에도 세 차례 정부의 요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계속 거절하니 다시 공격을 해오더군요.”

    -왜 그렇게 집요했을까요.

    “아마 내가 1965년 세계대학총장회 설립을 주창해 그 모임의 1차 총회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개최한 것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서구 선진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던 때입니다. 박정권은 자신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려줄 명성 있는 문민 인사가 필요했던 겁니다.”

    조박사는 1968년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 총회를 경희대학교에 유치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또 어떤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1979년 12·12사태 직후 보안사령부에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자문을 해달라고 해서 좋게 얘기해줬습니다. 나를 의지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더니 며칠 뒤 다시 불러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요구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교육하는 사람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이유를 댔지요. 그랬더니 며칠 뒤 검찰이 학교 사무실과 집을 압수수색하더군요. 학교 공금을 유용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말입니다. 집사람과 함께 대검에 끌려갔어요. 학교 간부들도 모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검사와 수사관들이 참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아마 죄 없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냥 두더라고요. 일부 검찰 관계자는 사과도 했습니다. 참 별의별 일을 다 겪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해외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1981년 유엔이 ‘세계평화의 해’와 ‘세계평화의 날’을 제정하도록 한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심하게 갈등을 빚어 유엔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유엔 폐지론까지 대두됐지요. 미소간 반목으로 3차 세계대전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한다는 게 당시 미국 등 외국 전문가들의 분석이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2차 세계대전으로 핵폭탄의 피해를 입은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생각이 났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추진한 게 ‘세계평화의 해’와 ‘세계평화의 날’ 제정이었습니다.”

    -당시 유엔에서의 한국의 인지도를 감안했을 때 쉬운 일은 아니었겠습니다.

    “그랬죠. 당시 우리나라는 유엔 가입국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대학총장회를 통해 뜻을 이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81년 코스타리카에서 열린 제6차 세계대학총장회 총회에서 ‘세계평화의 날, 달, 해 제정을 유엔에 제안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회원 만장일치로 얻어냈습니다. 이 결의문은 코스타리카 정부의 명의로 유엔 총회에 의안으로 제출됐고 유엔 157개국 대표 만장일치로 세계평화의 해와 날이 제정됐습니다.”

    “大小國 공존하는 지구대협동사회 건설하자”

    2000년 9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9회 세계유엔의 날 기념식. 조영식 경희학원장을 비롯, 900여 명의 국내외 인사가 참석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유엔 총회에서 과반수 이상 득표를 하기 위해서는 제3세계 국가들의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에 가서 닥치는 대로 관련 인사들을 만났습니다. 점심도 사고 저녁도 사면서 설득을 했습니다. 가장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은 뉴욕 주재 코스타리카 대사였어요. 유엔본부를 수시로 드나들었더니 유엔본부 정문을 지키는 경관이 저를 유엔에 파견된 대사인 줄 알고 볼 때마다 경례를 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밤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구한말의 이준 열사가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당시 조박사는 세계평화의 해와 날 제안에 이의를 제기한 8개국 대사가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우리가 평화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저를 포함해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평화의 날 행사를 위해 필요자금이 부족하면 그 모금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곳에 오신 평화의 사도들이 아닙니까. 평화는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주장을 존중하고 나의 아집을 양보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오늘의 긴박한 국제정세를 깊이 염두에 두고 인류와 평화를 위하는 인간가족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협력해주시길 간곡히 호소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신 뒤 감회가 어땠습니까.

    “만장일치로 통과돼 더욱 기뻤습니다. 세계평화가 목표인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전쟁은 한 나라에서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한국 정부의 방해

    조박사는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주는 여러 상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은 1993년 평화교육 및 연구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유네스코가 6만달러의 상금과 함께 수여한 평화교육상. 또 유엔은 1996년 ‘세계평화의 해’ 10주년을 기념해 조박사에게 평화공로 특별상을 줬다.

    -세계평화의 해와 날 제정에 한국 정부의 도움도 받았습니까.

    “아니요. 도움은커녕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너무 절박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인사 아무라도 소개시켜달라고 뉴욕 주재 한국대사관에 부탁을 했어요. 처음에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추켜세우더라고요.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어요.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북한은 전쟁 준비에 열심인데 우리만 평화를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북한을 도와주는 꼴이 되지 않느냐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당신 도대체 여기 왜 나와 있냐’고 막말을 했습니다. 아마 당시 한국 정부가 그런 방침을 세웠던 모양입니다.”

    문화사관 정립해야

    -1990년 소련을 방문해 평화 정착을 위한 활동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소련 정부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했습니다. 그쪽 사람들에게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등 6개국으로 구성된 지역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결과 1991년 ‘세계평화의 날’ 10주년 기념으로 소련 모스크바에서 ‘2+4’ 즉 6개국 정부와 학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가 처음으로 개최됐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과 미국 대표들의 참석을 주선했고 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지금의 국제정세를 어떻게 보십니까.

    “적어도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진 것 아닙니까. 한 걸음씩 세계평화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상태라고 판단됩니다. 오토피아는 결코 허구가 아닙니다.”

    -큰 틀에서는 그렇더라도 각국이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가 팽배해 문제입니다. 물질의 풍요와 편익 속에서 이해득실과 효용가치, 용도의 유무와 쾌락의 다과(多寡)만을 따지고 그것을 가치기준으로 삼는 가치관이 갖가지 범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게 심화되면 인간이 인간이 아니고 가족이 가족이 아닌 사회가 됩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먼저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올바른 해답이 나옵니다. 진취적인 기상, 이룩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건설적인 협동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모두의 이익이 되는 협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볼 때 외세를 끌어들이는 등 비건설적인 협동 탓에 내부적인 단결을 해쳐 결국 모두 피해를 보게 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올바른 역사관은 어떤 것일까요.

    “문화사관에 기초를 둬야 합니다. 힘이 정의요 선이라는 입장을 떠나야 합니다. 인간이 역사와 문명의 주체자로서 사회의 중심이 되고 사회의 모든 것이 인간의 생활은 물론 행복과 가치를 창조하는 요건이 되고 도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게 문화사관입니다.”

    새로운 르네상스운동 필요

    -저서에 ‘네오 르네상스(Neo Renai ssanc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서구의 르네상스는 중세 말 정신문명의 한계점에서 민간 차원의 지성인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자’ ‘인간성을 되찾자’는 주장을 펴 문예부흥 종교개혁을 이루고 찬란한 문명사회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물질문명의 한계점에서 인간경시 인간부재의 위기와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르네상스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조박사는 인터뷰 말미에 “새로 출범하는 정부 인사들에게 당부할 말이 없냐”는 질문에 대답을 미뤘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두 마디로 끝낼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얘기해도 공감이 가지 않을 겁니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언론에서 앞장서서 이끌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박사는 1921년 평북 운산 태생으로 195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30개의 명예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그는 오토피아 사상을 주제로 자신이 지은 시 한 편을 소개하며 “이 시에 모든 게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주리생성(主理生成)원리·전승화(全乘和)

    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시무종(無始無終) 덧없는 이 세상이 세상엔 까닭 없는 것 없다이 세상엔 홀로 있는 것도 없다이 세상 모든 사물에는 특성과 속성이 있다이 세상 만물은 서로가 생성변화 일으킨다

    아- 우주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자연을 보라!삼라만상(森羅萬象)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함을 보라!변화 속에 불변화(不變化), 불변 속에 또 새 변화어디 한 찰나, 단 한치의 어긋남이 있는가?주리생성원리, 전승화 깨달아 참되게 살자

    아- 우주는 살아 있는 유기적 통일체우주관을 모르고 세상을 논하지 말라세계관을 모르고 국가관, 인생관을 말하지 말라이 세상 만물은 우주원리에 따라 연동(連動)된다그러기에네오 르네상스 횃불 밝혀 새 천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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