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겨울, 라디오에서는 전에 듣지 못했던 이상한 스타일의 노래들이 마구 흘러나왔다. ‘아니 벌써’ ‘문 좀 열어 줘’ ‘불꽃놀이’‘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제목부터 요상할 뿐더러 마치 AFKN에서 듣는 팝송처럼 다이내믹하고 파격적인 ‘청각적 경험’을 몰고 온 약관의 3인조 형제그룹 산울림의 등장은, 이름처럼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 가요계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우리 가요역사에서 청소년들이 길거리에서 집단으로 가사 주요대목을 목청껏 노래한 경우는 딱 세 차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펄시스터즈의 ‘님아’, 산울림의 ‘아니 벌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다.”
산울림이 등장할 무렵 가요계는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으로 청춘문화의 상징이던 포크와 록의 기가 꺾이고 다시 트로트 음악이 판세를 장악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이 기쁨’ ‘노래 불러요’ ‘내 마음은 황무지’ 등 연쇄적으로 폭발한 삼형제의 록 사운드는, 나른해진 음악계의 틀을 깨면서 가요가 트로트로 획일화되는 것을 막아섰다. 비틀스의 미국 상륙을 일컫는 말인 ‘British Invasion’에 빗대어 흔히 ‘산울림 침공’으로 표현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중음악계는 단숨에 청춘의 에너지와 핏기를 회복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사운드도 생판 달랐고, 노랫말도 기존의 틀과 완전히 별개였으며, 심지어 크레파스로 그린 앨범 표지도 그때까지의 일반적인 제작양식을 거부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획기적’ ‘파격’ ‘혁명’ 같은 어휘들은 산울림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을 다니던 사람들에게 산울림의 음악은 청춘의 통쾌함이든 조용한 위안이든 음악적 상호작용의 핵심이었다. 특히 산울림의 구성원 김창완과 김창훈이 서울대 농대, 드럼을 쳤던 막내 김창익이 고려대 공대 출신이라는 ‘신분조건’은 막 출범한 방송사의 대학가요제와 맞물려 한층 대학생들의 관심과 선망을 자극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산울림은 음악적인 시도와 실험을 거듭하며 계속 진화했다. 초기의 통쾌한 록 사운드를 벗어나 이 무렵에는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독백’ ‘내게 사랑은 너무 써’ ‘너의 의미’와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때문에 가요 관계자들은 “대중의 폭발적 정서와 포근한 정서를 순차적으로 정복한 대중음악가는 가요사상 산울림밖에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산울림은 국내 록밴드로는 마의 벽이라는 ‘앨범 10장’을 넘긴다. 1997년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수록된 13번째 앨범 ‘무지개’가 공식적인 산울림의 최근 앨범. 이후 김창완이 라디오·TV 출연, CF 등에 집중하면서 음반활동은 잠정적 휴지기를 맞았다. 그런 탓에 요즘 신세대들은 김창완을 산울림 전설의 기린아가 아닌 중견 방송연기자로 인식할 정도다.
화석이 된 공룡?
필자와의 인터뷰 약속시간 또한 라디오 방송을 마친 직후였다. 오랜 방송생활 덕분일까, 인터뷰에 관한 한 그는 어느새 프로였다. “근래에는 술을 줄였다면서요?”라는 필자의 의례적 인사에 “누가 그래요? 어디서 틀린 얘기를 들었나 보네. 지난주에도 매일 술 마셨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는 음반활동을 하지 않는 사정, CF모델로 더 유명해진 데 대한 생각, 산울림 음악의 과거와 현재 등 자신의 전반에 대해 마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듯 나긋나긋하게, 때로는 능란하게 이야기를 펴나갔다.
-요즘 음악활동이 뜸합니다. 지난 2001년 여름 ‘록 글래디에이터’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가진 이후에는 별다른 음악활동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음악은 아예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음악적 욕구는 있어요. 지난 연말에도 재즈 팀과 홍대 근처 카페에서 연주하며 놀았는데요. 시간이 나면 공연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음악인에게 중요한 앨범활동이 6년째 무소식입니다. 방송에 전념하는 것 같고요. 솔직히 외부에서 볼 때는 음악에 별 의욕이 없어 보입니다.
“가수가 음반에 왜 관심이 없겠어요? 이미 신곡도 만들어놓았고 부분적으로 녹음한 것도 있지만 판을 내지 않을 뿐입니다. 살 사람이 없잖아요. 몇 번 내봐서 안 된다는 걸 아는 거죠. 그렇다고 소비자에게 동정을 구하는 ‘읍소형’ 앨범을 낼 수도 없고….”
시작부터 이야기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그의 말에는 대중의 반응과 국내 음악환경에 대한 섭섭함이 지그시 배어 있다. “물론 수요자 반응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산울림이고 김창완인데, 음반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그치듯 물었더니, 그는 ‘공룡과 화석론(論)’을 꺼내면서 산울림의 현재 위상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산울림)는 한때 공룡이었죠. 수억 마리의 공룡이 살다가 결국은 소멸했지만 화석을 남긴 경우는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나마 화석이라는 흔적이라도 있다면 안위할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산울림의 현재 위상이 그렇다면 그것으로 고마워해야지요. ‘박물학적’ 가치라면 감수하겠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공룡은 없지 않습니까?”
-두 동생은 현재 무슨 일을 합니까? 두 분은 산울림 활동에 아예 관심이 없는 상태입니까?
“창훈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해태상사에서 일하다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식품관련 자영업을 했고 막내 창익이도 합류해 함께 일했죠. 그러다가 얼마 전 창훈이는 제일제당 로스앤젤레스 지사에 스카우트됐어요. 아직도 둘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대단해요. 오히려 시간이 없고 입장 정리가 안 된 내가 문제지요.”
음악인 김창완 VS CF모델 김창완
-1997년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실린 앨범 ‘무지개’는 굉장히 의욕적인 작품이었고 CF를 통해 신세대들에게도 산울림의 존재를 알렸을 만큼 분위기가 좋았지만, 막상 대중적으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후 김창완씨는 음악과는 멀어진 채 연기자나 광고모델로 돌아선 느낌을 주었고요. 일각에서는 그 앨범이 준 충격 때문에 방향선회를 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 앨범은 의도 전달에 실패한 경우입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대중가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어떤 점에서는 ‘놀이감’으로 끝나버렸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지요. 그냥 쉽게 ‘대중들이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작가의 불찰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대중들은 복잡하게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절감했지요.
그렇지만 그 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에요. 좌절이라기보다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노력’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 뿐입니다. 연기나 CF 일은 그와는 관계없습니다. 남들이 그걸 보고 변신이라고 한다면 인위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런 흐름이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쇼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산울림 신화를 주조해낸 당사자라는 그의 ‘과거 신분’과, 최근 그가 방송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소 어벙해 보이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라는 캐릭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정상급 조연연기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작(多作)인 CF모델로의 전업. 김창완 스스로도 지난 송년모임에서 “참석자 한 사람이 날 보고 ‘CF계의 남자 이영애’라고 해서 좌중이 폭소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그의 이러한 전향(?)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혹자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한 대중음악계에 보내는 김창완식 야유’라고 비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스스로 창조한 신화를 스스로 저버린 일종의 자기모독’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음악활동 대신 방송에 주력하는 최근의 모습은 다소 본말이 전도된 양상입니다. 산울림 신화를 기억하는 팬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그건 받을 수밖에 없는 비난입니다. 대중연예인에게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환경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솔직히 ‘노래는 안하고 연기만 한다’는 비난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비난의 대상이 돼야겠지만, ‘대중음악인’이 소비자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산울림의 데뷔시절. 왼쪽부터 김창훈(베이스), 김창익(드럼), 김창완(기타).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후배 누군가가 저더러 ‘형의 연기가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마 제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 아닐까요. 전 데뷔하던 1978년부터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단 하루도 대중과 떨어지지 않았어요. 앨범이든 TV든 라디오든 줄창 함께했죠. 휴지기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제 스스로 너무 싫어서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거위 배를 갈라 황금알을 다 꺼내는 기분으로 대중적 활동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얼굴을 내미니까 시청자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 거겠죠.”
-그래도 맡는 역할이 주로 어리숙한 인물이라는 점이 걸리진 않습니까? 실망했다는 옛 산울림 팬들도 있습니다.
“전 찰리 채플린이나 우디 앨런에게도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고하신 코미디언 서영춘씨도 마찬가지죠. 그 또한 하나의 캐릭터, 그것도 아주 의미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어리숙한 캐릭터여서 실망스럽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음반 내면 팝송이 타격받을 거야”
김창완은 미8군 군속 설계사였던 강원도 화천 출신의 아버지 김재혁씨(1925년생, 작고)와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장은성씨 사이에서 1954년 출생했다. 동생들은 모두 두 살 터울로 창훈은 56년, 창익은 58년에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느날 아침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해 보이지 않자, 그들을 찾아 무작정 학교에 놀러다니다 결국 자동 입학한 셈이 되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다. 덕분에 54년생이지만 52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것.
학업성적이 우수해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한 김창완과 두 동생은 1970년대 중반부터 열심히 기타와 드럼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어갔다. 학창시절에는 이들의 악기와 앰프에서 터져 나온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동네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동네사람들에게 사정하며 살다시피해야 했다.
1976년 군에서 전역한 뒤 취직이냐 음반 제작이냐의 갈림길에 놓였던 김창완은, 음악과 연을 끊을 수 없어 이듬해 레코드사를 찾아다니다 자신들의 앨범을 발표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1977년 개최된 MBC대학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서울대 그룹 샌드페블스의 ‘나 어떡해’가 둘째 창훈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가능성은 이미 확인된 상태였다. 이어 오래 전에 써두었던 ‘아니 벌써’ 등이 수록된 데뷔앨범은 발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세 형제는 평범한 인생코스를 일탈해 ‘결코 목표가 아니었던’ 록밴드로 숨가쁘게 내달리게 된다.
-1977년 12월에 나온 데뷔앨범이 빛을 보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꼭 음악활동을 해야 한다거나 록그룹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낸 앨범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음반을 만들었던 겁니까?
“첫 앨범은 우리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세상에 알려졌어요. 음반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음을 수록한 고정물(固定物)’이라고 돼 있습니다. 우린 그야말로 그 음반, 우리 음악을 수록한 고정물을 갖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걸 대량으로 복제해 홍보한다거나 성공을 거둔다는 일체의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뜻이 없었죠. 심지어는 우리 노래를 팔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파는 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중의 반응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공 여부를 떠나 음악적인 측면에서 어떤 자신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나 음반을 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농담 삼아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우리가 음반을 내면 팝송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죠. 팝에 비해 떨어질 게 없다는 거였죠. 이후에 팝송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가요가 많이 상승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잖아요.”
확실히 1970년대는 내내 팝송의 시대였다. 누구나 팝송을 듣던 시절이었고 음악인들도 예외 없이 팝송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창완 자신도 그 시절 보브 딜런, CCR, 레드 제플린,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 외국 팝을 애청했다고 한다. 지금도 ‘내 인생의 팝송’이라는 앤디 킴의 ‘베이비 아이 러브 유(Baby I love you)’를 들으면 ‘전주만 나와도 코끝에 싸한 풀 냄새가 스친다’는 것이다. 그는 서구 음악으로부터 악기편성의 역학과 전반적인 록의 감수성을 터득했다고 설명했다.
-산울림의 음반이 나온 시점을 돌이켜 보면 외국에서는 단순한 코드의 록음악인 펑크(Punk) 바람이 휘몰아치던 때였고, 우리 팝 음악 청취경향은 반대로 조금은 복잡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선호하던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당시에 산울림이 국내 팬들의 취향을 거스른 음악, 즉 단순한 코드로 구성된 음악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혹시 펑크의 영향은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선 저 스스로 섹스 피스톨스나 클래시 같은 펑크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그 부분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요. 산울림의 음악이 단순한 코드였던 것은 우리들이 그것밖에 몰라서 그랬던 겁니다. 그냥 단순한 록이 좋았던 거죠.”
-그럼 산울림이 그토록 음악계에 평지풍파를 몰고 온 이유는 뭘까요?
“그 무렵 가요에 대한 불만이랄까, 일종의 적개심 같은 게 저에게 있었어요. 젊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기성에 대해 반발하게 마련인데, 당시 가요의 본류(本流)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때 사람들이 주로 팝송을 들었던 것도 실은 팝송이 대단한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가요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인 거죠. 산울림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그걸 겁니다. 청춘의 요구를 음악적으로 반영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음반을 내면 팝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또한 그 부분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벌써’로 대표되는 산울림 음악은 확실히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애초 앨범에 수록하려고 만든 ‘아니 벌써’는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음악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음악을 내놓기 전에 공륜으로부터 사전심의라는 검열을 받아야 했죠. ‘아니 벌써’도 퇴폐적이라는 판정이 나와서 전면 개작이라고 할 정도로 깡그리 노랫말을 고쳐야 했습니다. 원래는 젊은이들의 흥청망청 놀이에 준(準)하는 가사였습니다. ‘밤새도록 신나게 춤추고 놀다 보니 아니 벌써 날이 샜네!’ 그런 내용이었죠. 원 가사는 소실돼서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앨범에 실린 건전가요 투의 가사와는 정반대였던 셈이죠. 하기야 당시에는 ‘둘이서’라는 곡도 음란하다는 지적을 받았죠. ‘소녀’의 원제목은 ‘늑대’였는데 공륜 통과를 위해 고치라고 해서 제목부터 가사에 등장하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전부 반대말로 바꿨던 케이스였습니다. 일종의 비웃음이었죠.”
-만약 ‘아니 벌써’가 원래 가사대로였다면 히트했을까요? 어느덧 발표된 지 4반세기가 흘렀고 김창완씨도 나이 오십 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청춘의 요구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지금도 그 곡이 마음에 드는지 궁금합니다.
“불가능했겠지만 아마 원가사로 나갔다면 더 히트했을 걸요. 원래 노랫말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곡이라고 봅니다. 내가 쓴 내 얘기인데 가사가 바뀌면서 내 얘기가 아닌 게 돼버렸던 것뿐입니다.”
-산울림 음악은 파격적인 노랫말 패턴으로도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글이 아닌 말로 하는’ 방식의 노랫말이어서 굉장히 새로웠던 것 같고요. 그렇게 가사를 쓴 것도 ‘청춘의 요구를 의식한’ 것이었습니까?
“그렇죠. 가사에 어떤 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저희에겐 틀이 이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꼭 정형화된 언어와 운율로 가사를 전개해야 할 이유가 없지요. 물론 하다보면 운율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구어체가 저의 음악 어법이었습니다.”
“음악은 대중과 뮤지션의 상호작용”
김창완과 산울림 음악의 핵심은 ‘대중과의 소통’에 닿아 있다. 확실히 그는 음반을 통해 스타덤에 오르거나 명예를 얻고자 하는 ‘출세지향’적인 대중음악인은 아니다. 팬들이 산울림의 음악에 열광했던 것도 역시 듣는 사람과 거리를 좁히려는 그들의 유난한 노력을 인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창완은 “만약 지금 앨범을 낸다면 만드는 자와 듣는 자 쌍방이 소통가능한, 이를테면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음악CD의 형태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는 일방적인 소비만을 의식하는 국내 음악산업 현황에서 돋보이는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지나친 고민’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다시 1997년 앨범 얘기로 돌아가봅시다. 결국 그 앨범이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즉 김창완씨의 생각은 이랬지만 음악 수요자들은 다른 측면만 본 것 아니었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서 실망한 것일 테고요.
“지금 이 시대에 가수가 무슨 얘기를 하면 팬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물론 대중가수라면 누구나 대중을 지배하고픈 욕구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지배할 수도 없고 지배되지도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솔직히 저 혼자 전적인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겁니다. 음악이든 공연이든 내 감정, 내 능력, 내 기분만큼 하겠다는 겁니다. 무한책임회사가 아니라 주식회사가 되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 때문에 팬들 또한 음악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1997년 앨범도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다 하기 싫으니 그대(대중)들이 부르세요’라는 의미였습니다. 제가 떠들면 대중들이 그에 대해 반응하고 탐구할 줄 알았던 거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제 실수였던 겁니다. 음악의 기능은 대중과 뮤지션의 상호작용이라는 게 제 믿음입니다. 그러니 그게 안 될 경우에 음반을 내기는 어려워지죠. 그게 지금 제가 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너무 고민하는 게 아닐까요? 때론 쉽게 접근해야 무모하더라도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안주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이 나이에 결심하기는 쉽지않은 일이지요. 반성도 많이 합니다. 우선 대중매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데 솔직히 용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란하게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없지만 끊임없이 도전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도전이 꼭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 외향적인 스타일이어야 할까요? 목소리가 높아야 무언가를 바꾸고 새로운 것을 성취하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대신 매번 스스로를 경계하고 다른 것을 꿈꾸지요.
물론 지금 당장 그 길이 쉽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질 않습니다. 그건 뭐 인정할 수밖에 없죠. 자꾸 술을 먹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어렵다. 자신이 만들어갈 음악의 형식과 방향을 두고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의 결은 알 듯 말 듯 따라잡기가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장르나 스타일의 차원이 아니라 의사소통 형식으로서의 음악 자체에 대한 고민. 그것이 지금 50대를 눈앞에 둔 한 대중음악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김창완의 분열, 감창완의 배반
-젊은 시절과는 달라진 생활이 그런 고민을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저런 활동으로 수입이 괜찮은 편일 테니까요. 1990년대 초반 활동이 상대적으로 뜸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겠죠.
“그렇지 않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이 크게 변한 건 없습니다. 고소득자라고 해서 재산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물론 씀씀이가 좀 커지긴 했지만 일반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중이 품고 있는 김창완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에 어느 정도 간극이 존재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넉넉한 웃음과 얼굴에 팬 주름살이 풍기는 낙천적인 인상 뒤편에는 정반대의 비관적이고 우울한 고뇌가 숨어 있다. 때문에 김창완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규정하는 키워드로 ‘배반’을 말하기도 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매사에 힘이 부치는 중년’이라는 정반대의 상이 동거한다는 것이다.
1991년에 발표한 ‘불안한 행복’. 짙은 패러독스를 느끼게 하는 제목의 이 노래에 대해 그가 “예술이건 인간의 삶이건 행복하지 못했던 세대의 피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숙명적인 불행감’, 좀더 뻗어나가면 불안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썼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염세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혼란스러운 것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의 음악에는 순수한 동요의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외가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산울림은 ‘개구쟁이’ ‘산 할아버지’ 등 동요 스타일의 노래로도 전성기를 풍미했다.
-산울림은 20·30대 지향의 록과 포크 말고도 줄기차게 동요를 발표해왔습니다. 1996년에 CD로 나온 ‘하늘색 꽃병’과 ‘초록색 대문’은 그 결정판으로 생각되고요. 하지만 비관적인 사고와 순수한 아이들 노래는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노래들은 동화적 감수성이나 순수의 발로가 아닙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제가 어렸을 적 우리 부모는 금실이 썩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집안 가득 무거운 침묵이 함께 드리우곤 했지요. 그 무서운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달아나려는 마음이 어린 시절의 저에게 혼자 침묵하고 공상하는 버릇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나만의 공간으로, 상상 속으로 도망치곤 했던 겁니다.
이런 버릇은 당연히 커서도 영향을 미쳤지요. 위기상황이 되면 숨어드는 습관이 고스란히 나타났어요. 유아기적 퇴행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동요를 하면 차라리 마음이 평안해졌던 거죠. 어린 시절 공상처럼 도망칠 공간을 만들어주었으니까요. 결국 동요풍의 노래들은 가정환경에서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들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죠. 누가 ‘김창완씨는 참 순수하신 것 같아요’ 그러면 구구절절 설명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신 ‘아 예’하고 웃고 말지요.”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1983년 9집과 1997년 13집 앨범을 가장 아낍니다. 특히 9집은 대중의 반응이 냉랭해 발표 후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게 만든 앨범이지만 저로서는 실험정신을 발휘해 열심히 만든 앨범입니다. 그러나 가장 자랑스런 앨범은 1991년의 12집 ‘아다지오’를 꼽고자 합니다. ‘불안한 행복’과 ‘꿈꾸는 공원’이 여기 수록돼 있는데, 시도도 좋았고 자전적인 얘기라서 맘에 들어요. 자전적이라는 것은 제가 작품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앨범도 묻혀버렸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거예요.”
-산울림이 아닌 김창완 독집으로 발표한 ‘어머니와 고등어’는 노래하는 방식에 다른 곡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언뜻 트로트 같기도 하고요. 이 곡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부터도 다르게 부르려고 애썼던 곡입니다. 친근하게 들리기 위해 애썼죠. 아마도 그 때문에 지금도 꾸준히 라디오 전파를 타는 것 같습니다. 괜찮은 곡 아닌가요?”
김창완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솔로 작품보다 산울림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앨범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12집의 경우처럼 그는 자신이 거의 전수록곡을 혼자 쓰고 만든 1인 앨범에도 굳이 산울림이란 타이틀을 붙여 발표하곤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 혼자 곡을 만들어도 산울림은 3인조 그룹”이라며 “나는 아직 산울림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고, 그래서 음악적으로도 자유롭지 않다”고 고백했다. “역시 형제 3인조 그룹인 비지스는 얼마 전 막내 모리스 깁이 사망하자 결국 해산을 발표했지만, 산울림은 그런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의 록밴드 문화에 대한 그의 집착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편으론 ‘아직 만족할 만한 대중접근방식을 찾지 못했을 뿐 언젠가 산울림은 돌아온다’는 뉘앙스가 배어났다.
예술이 1인칭의 산물이라면
마지막으로 ‘과연 산울림과 김창완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무슨 의미였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술술 말 보따리를 풀던 그가 이 지점에선 “중요한 질문인데…”라고 한마디를 던진 뒤 침묵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는 그렇게 5분여를 흘려보냈다.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끝에 그의 입이 열렸다.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의 기능은 위안에 있지요. 산울림 이전의 기성가요의 목표가 바로 그 위안이었고요. 그렇다면 산울림의 노래가 당시 세대에게 갖고 있던 의미는 위안과는 다른 일종의 ‘자기발견’이 아니었나 합니다. 제 음악을 사랑해준 사람들은 주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학번을 가진 사람들일 텐데요, 그들은 전 세대에 비해 자의식이 강한 특성을 보입니다. 자기를 새롭게 인식하고 또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도 알게 된 사람들이지요. 이를테면 ‘처음으로 자존심을 가진 세대’라고 할까요. 굳이 말하자면 산울림의 음악도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감이 없던 성격의 소유자인 나 자신도 산울림의 음악을 만들고 발표하면서부터 수줍고 나약한 수동태에서 벗어났다”고 보완 설명했다. 김창완은 산울림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응답의 대부분을 1인칭에 집중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나’와 ‘자기’가 있었다.
그가 산울림이라는 성(城)을 쌓은 것 또한 자신의 세계를 음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이 배제된, ‘내’가 소외된 음악과 행위는 그에게 일절 인정할 수 없는 것인 듯 했다. 만약 예술을 한 작가가 갖는 주체의식의 소산, 1인칭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면, 그는 우리 대중음악사에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역으로 고민에 휩싸여 있는 그의 현재는 근래 우리 가요계가 얼마나 ‘아티스트 부재’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TV광고에서는 절대 엿볼 수 없는 김창완의 또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