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DJ와 왕회장, 서로를 이용한 과욕의 드라마

남북정상회담과 대북비밀송금

  • 글: 이정훈 hoon@donga.com

    입력2003-02-24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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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대북비밀송금은 1996년 대북 밀가루 지원 사건 再版
    • 정주영과 김대중 경쟁시킨 북한의 꽃놀이패 전략
    • 대출서류와 송금서류에 서명 거부한 현대의 김충식과 황순영
    •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연결재무제표 제도 때문에 대북송금 단서 잡혀
    • 대출금 받기도 전에 국정원에 환전 요청한 현대
    • 임동원 “2억 달러는 6월9일 송금했다”, 감사원 “6월10일 송금했다”
    • 북한의 SOC 건설 약속 어긴 김대중
    2월14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대(對)국민 사과와 짤막한 기자회견을 지켜본 대북 전문가들 중에는 “어찌 그리 양김이 똑같은가. ‘머리가 좋다’고 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우(愚)를 그대로 반복했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우기는 것도 똑같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그 사례로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대북비밀송금 사건을 1996년 11월 국회에서 문제가 됐던 현대그룹의 대북 밀가루 비밀지원 사건(밀가루 사건)과 비교했다.

    1995년 북한에 대한 쌀 15만t 지원을 추진해온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미처 쌀을 받을 준비도 하지 못한 6월25일 동해항에서 요란한 출항식을 가졌다. 김영삼 정부가 쌀 수송선 출항식을 서두른 이유는 이틀 후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방선거 당일인 6월27일, 북한은 첫 번째로 쌀을 싣고 청진항에 들어온 씨아펙스호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게양한 후 쌀을 하역케 했다. 그 결과 김영삼 정부의 성급한 쌀 지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여당(민자당)은 광역단체장 지방선거에서 참담하게 패배했다.

    밀가루사건과 송금사건의 공통점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조선아세아태평양위원회(아태) 송호경(宋浩景) 부위원장과 협상을 벌여온 박지원(朴智元)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공표한 것은 2000년 4월10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인 4월13일에는 16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공동여당인 민주당과 자민련이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비록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공동여당을 누르고 원내 1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1995년의 대북 쌀 지원 때는 삼선비너스호 선원이 몰래 청진항을 촬영했다고 해서 북한에 억류되는 등 사건이 많았다. 이로써 북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10월17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더 이상의 대북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96년 11월 ‘YS의 청와대는 1996년 4월 월드컵 남북 공동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현대그룹이 제공한 100만달러로 중국에서 밀가루 5000t을 구입해 비밀리에 북한에 제공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다.

    이때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있던 야당인 국민회의는 총력을 다해 정부를 비판했다. 양성철(梁性喆) 의원을 필두로 한 국민회의 의원들은 “밀가루가 지원된 시점은 14대 총선(4·11총선) 직전이었다. 왜 정부는 대북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을 어기고 밀가루를 지원했는가. 밀가루소위를 만들어 진실을 규명하자”며 공격해 국회가 공전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3년 현대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것이 밝혀져 온나라가 시끄럽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통치행위’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완벽한 ‘공수(攻守) 교대’가 아닐 수 없다.

    1996년 밀가루 지원 때 청와대가 직접적으로 현대를 도와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 임동원(林東源)씨가 이끄는 국정원은 현대의 대북송금을 위해 환전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정도로 따지면 2000년 사건이 훨씬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으나, 김대통령은 “남북관계와 국익을 생각해 선처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러니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냐’는 빈정거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한국의 지도자들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대북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정치인의 욕심’에서 찾는다. 이들은 “북한의 대남 전문가들은 수십년 간 같은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을 분석해 한국 정치인들의 속내를 손금 보듯이 꿰뚫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한국 정치지도자가 가장 큰 보따리를 들고 오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북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구 덤비다 본인까지도 다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북 비밀송금에 대해 김대통령과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박지원 비서실장의 해명이 있었지만 이를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민의 궁금증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비열한 대북비밀송금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라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숲을 보는 큰 시각이 있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통시적(通時的)으로 살펴보면서 작금의 문제가 터져나온 원인을 짚어보기로 한다.

    DJ와 왕회장, 서로를 이용한 과욕의 드라마

    1998년 통일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1998년 정치권의 뉴스메이커가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남북문제의 주역은 단연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이었다. ‘독주’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정명예회장은 남북협력에 ‘찬란한 꽃’을 피웠다. 그는 김일성(金日成)이 살아 있던 1989년 1월24일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관광개발 의정서’를 체결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그러나 김일성을 만나지는 못했다).

    정명예회장은 1996년 밀가루 5000t을 북한에 보낸 데 이어 15대 대선 직후에는 경북대 김순권(金順權) 교수의 대북 옥수수 사업을 지원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해인 1998년 6월16일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거쳐 방북하는 대형 이벤트를 창출했다.

    이 방북에서 현대는 북한 아태와 관광객 1인당 300달러의 관광료를 지불하며 금강산 관광사업을 펼친다는 기본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0월27일 정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등 현대수뇌부는 다시 5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10월31일 서울에 돌아온 정몽헌 회장은 “금강산 일대를 독점 개발하는 대가로 9억4200만달러를 아태측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는 처음 6개월간은 매월 2500만달러씩 도합 1억5천만달러를 보내고, 그 다음 9개월간은 매달 800만달러씩 합계 7200만달러를 지불하며, 그 다음 5년간은 매월 1200만달러씩 7억2천만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총 금액은 9억4200만달러).

    11월2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을 대동하고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동원 외교안보수석과 박지원 공보수석을 배석하고 이들을 만났다. 소식통들은 이날 이 여섯 사람에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당시 북한담당 국장)을 더한 일곱 명이 대북비밀송금과 남북정상회담의 관계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고 지적한다.

    불과 2년 전 밀가루 사건으로 다투었던 사이임에도 김대통령과 정명예회장은 빠르게 금강산 관광사업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11월18일 동해항에서 첫 번째 금강산 관광선인 ‘현대금강호’의 출항행사가 거창하게 열리게 되었다.

    외화내빈, 현대의 대북사업

    1999년 봄이 되자 현대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2월5일 대북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1999년 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선을 세 척, 2000년에는 네 척으로 늘렸고 그에 따라 관광객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에 비해 수익은 ‘마이너스’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적자폭은 더욱 커져 현대아산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금강산 관광사업이 죽을 쑤는데도 현대아산은 약속한 9억4200만달러를 성실하게 분납했다. 관광사업이 본격화하지 못한 199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에레스테 방크(Ereste Bank)를 통해 두 차례 돈을 보냈다(78만달러와 140만달러). 에레스테 방크는 오스트리아에 나와 있는 북한 대성은행의 자회사인 Golden Bank(북한명은 금성은행)로 중계했는데, 대북전문가들에 따르면 Golden Bank는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하는 곳이라고 한다.

    1999년부터는 마카오에 있는 중국은행(Bank of China)으로 돈을 보냈다. 이때부터는 전년도에 미지급한 금액을 포함해 약속한 금액을 정확히 송금했다(국감자료 근거). 중국은행 마카오 지점의 아태 계좌를 관리한 북한인은 조광무역 총지배인인 ‘박자병(朴紫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속에서 현대그룹은 안으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4월23일 자동차부문을 2001년까지 분리하겠다고 밝힘으로써 표면화된 자금 위기에다 그룹 후계를 둘러싼 몽구(夢九)-몽헌(夢憲) 형제의 갈등도 심화돼 갔다. 밖으로는 금강산 관광사업이 커져가는 것 같아도 안으로는 돈을 까먹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상황에서 현대는 1999년을 보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도 상당히 노력했다. 그러나 북한이 침투시킨 유고급 잠수정과 반잠수정 사건, 그리고 대포동 로켓 발사 사건 등으로 인해 접촉이 여의치 않았다.

    1999년에도 대북 채널을 열기 위한 김대통령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2월10일 정부는 민간단체의 직접적인 대북 지원을 허가했고, 2월25일에는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중인 북한의 남파간첩을 비롯한 공안사범 17명을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하였다.

    6월3일 북한은 “6월21일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차관회담을 갖는다”는 데 합의해 주었다. 그런데 이 발표 나흘 후인 6월7일부터 ‘꽃게잡이’를 이유로 해군 경비정과 어선을 서해 북방한계선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연평해전’이 발발한 것이다.

    연평해전 승리로 남측의 보수파들은 그간의 열패감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북측의 의도된 김대통령 떠보기로 이해한다면, 김대통령은 시험에 탈락한 것이 된다. 남북차관회담은 6월22일 예정대로 열렸으나 아무 성과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차관회담이 진행될 때 금강산에서는 관광객 민영미씨가 억류됐다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끝으로 북한은 정부 차원의 남북접촉은 차단했다.

    새 밀레니엄이 밝은 2000년 현대는 여전히 금강산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된 이래로 현대는 금강산 지역에 호텔과 온천장 등 부대시설을 지으면서 2002년 말까지 총 1억4300만달러 어치의 투자를 했다(9억4200만달러 분납과는 별도). 그러나 안으로의 ‘골병’도 계속되고 있었다. 3월14일 현대그룹에서는 내연(內燃)해오던 몽구(夢九)-몽헌(夢憲) 형제의 경영권 다툼이 터져나왔다. ‘왕자의 난’으로 명명된 이 싸움과 함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경질이 발표됐으나 이회장은 경질되지 않았다.

    대북소식통들은 왕자의 난은 이 시기 갑작스럽게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개최와 무관치 않다고 지적한다. 지난 2월14일 기자회견에서 박지원 비서실장은, “(2000년 3월8일 싱가포르에서)북측 특사로 지명된 송호경을 상견례 차원에서 만났을 때 정몽헌 회장이 소개를 시켜주기 위해 동석했다”고 밝혔다. 이는 왕자의 난이 터지기 전에 정몽헌 회장이 남북정상회담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이렇게 몽헌 회장과 DJ정부가 유착돼 있다면 정부측에서는 몽헌 회장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밀려나게 된 몽구 회장은 분풀이 차원에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경질한다고 발표했는데, 이것마저도 몽헌 회장측이 막아버렸다. 이로써 몽헌 회장이 현대의 단독 회장이 되었고, 공동 회장이었던 몽구 회장은 자동차와 정공(현재의 모비스) 등 자신이 관리하던 기업이라도 지켜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현대의 후계자 결정과 유동성 위기 그리고 남북정상회담과 대북송금은 한 덩어리로 굴러가고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1999년 연평해전 이후 꽉 막혔던 남북관계가 어떻게 2000년에는 정상회담으로 수직 도약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최수진 아이디어 수용한 베를린 선언

    그 해답은 조선족 사업가인 최수진(崔秀鎭)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 총사장의 역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동아’ 2월호 ‘권병현-최수진 6·15남북정상회담 베이징 비밀접촉 내막’이라는 기사에서 밝혔듯, 최수진 총사장은 연간 십여 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다. 이러한 최수진씨는 북한 경제를 살리려면 전력(電力)과 도로 철도 등 북한의 SOC를 개선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1999년 10월 ‘끊어진 대북 접촉선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주중한국대사관의 문대근(文大瑾) 통일관이 찾아왔다. 문통일관과의 대화에서 최총사장은 남측이 북측의 SOC를 개선하는 데 협조한다면 (정상회담을 위한) 다리를 놓아보겠다고 제의했다. 이를 권병현(權丙鉉) 주중대사가 받아들이자, 최수진 총사장은 북한으로 날아가 김용순 아태 위원장에게 남측의 SOC 지원을 조건으로 정상회담을 가져보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남측의 청와대(김대중)와 북측의 주석궁(김정일)이 이를 수용하면서 정상회담의 물꼬가 트였다. 한 대북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도 자존심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굶어죽어도 남측에게 ‘이것을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는다. 최수진씨는 누구보다도 북한 사정을 잘 알지만 중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제3자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고나 할까, 체면 때문에 부탁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던 것을 최씨가 대신 해주었다.”

    최수진씨의 아이디어를 북측이 수용하는 낌새를 보이자 임동원씨의 국정원이 아태와의 접촉에 나섰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최수진씨는 “국정원은 무서울 정도로 강한 압력을 가하며 문대근씨를 주저앉히고 권대사에게도 남북접촉에서 손을 떼게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교묘한 방법으로 국정원을 주저앉혔다. 대북 적대세력인 국정원 관계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거부함으로써 김대중 대통령으로 하여금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특사로 지명하게 한 것이다(그러나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국정원 관계자가 하도록 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로 인해 박지원 장관은 3월8일 싱가포르로 날아가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과 상견례를 나눴다. 박지원-송호경이 수인사를 하던 3월9일 베를린을 방문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해 북한의 SOC 개선을 지원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이후 박장관은 3차례 더 송호경과 회담을 갖고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후 16대 총선 사흘 전인 4월10일 이를 발표했다.

    현대에서는 정몽헌씨가 현대그룹의 단일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재무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이에 대해 5월26일 현대건설 채권단은 현대건설에 2000억원을 긴급 지원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위기를 넘겨주었다. 2000억원 긴급 지원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계속돼, 현대는 아랫돌을 빼서 위로 올려 부도를 막는 ‘폭탄 돌리기’에 들어갔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게 4000억원을 대출해준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 대출을 신청한 것은 6월5일인데 돈이 나온 것은 불과 이틀 후인 7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2월14일 기자회견에서 임동원 특보는 “현대는 대출을 신청한 6월5일 국정원에 환전 편의 제공을 요청했다”라고 밝힌 것이 그것이다.

    임동원씨의 해명대로라면 현대는 산업은행의 대출을 신청한 6월5일 국정원에 환전 편의를 요청했는데 이는 4000억원 대출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금융계 인사들은 “산업은행 대출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기업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민간은행의 대출도 받기 쉬워진다. 따라서 기업들은 산업은행 대출을 따내기 위해 로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가 대출금 신청과 동시에 환전 편의 제공까지 요청했다면 이는 사전 조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금융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이 4000억원을 은행 내 ‘신용위원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 일반운영자금이 아니라 이사 전결이 가능한 일시당좌대월로 현대상선에 빌려주었다. 신용위원회에는 산업은행의 주요 임원이 참석하는데 위원 중 한 명이라도 기업의 신용도나 대출금액·기간 등에 이의를 제기하면 대출이 부결된다. 금융 전문가들은 현대그룹 및 현대상선의 재무제표와 사업전망 등을 감안할 때 현대상선이 운영자금 용도로 대출을 신청했으면 신용위원회에서 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편법으로 일시당좌대월로 신청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시당좌대월은 사업성은 있는데 사업에 필요한 자재를 구입할 자금이 떨어진 기업이 신청하는 1개월 만기의 ‘급전(急錢)’이다. 현대상선의 당좌대월신청에 대해 전결권을 행사한 사람은 현 산업은행 부총재인 박상배(朴相培) 이사였다. 급전인 만큼 이 돈을 빌려간 사람은 자금이 해결되면 서둘러 갚아야 한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2000년 말 1700여 억원은 갚았으나 2300여 억원은 현재까지도 변제하지 못한 상태이다(산업은행은 정확한 금액을 밝히지 않았다).

    急錢인 일시당좌대월로 신청

    박이사는 매달 일시당좌대월의 만기를 연장해주다가, 현대상선 지원에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던 엄낙용(嚴洛鎔) 총재가 산업은행을 떠난 후인 2001년 7월 2300억원을 신용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일반운영자금으로 전환해주었다(엄낙용씨는 현대상선 4000억원 대출이 이뤄진 다음인 2000년 8월 산업은행 총재에 부임해 2001년 4월 물러났다).

    4000억원 대출을 신청해 받아낼 당시의 현대상선 사장인 김충식(金忠植)씨가 돌연 사표를 제출한 것은 산업은행이 2700여 억원을 일반운영자금으로 전환해준 다음인 10월4일이었다. 그런데 김사장의 사표 제출에 대해 산업은행이 강하게 반발했다. 산업은행측은 정몽헌 회장에게 “김사장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대출금을 회수하겠다”고까지 위협해, 현대상선은 한 달여 동안 임시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김충식씨는 끝내 사장 복귀를 거부했다.

    지난해 10월 한나라당 엄호성(嚴虎聲) 의원에 의해 4000억원 대북지원 문제가 터져나왔을 때 산업은행의 박상배 이사는 “현대상선의 유동성 위기를 감안해 직접 일시당좌대월을 결정했고, 이근영(李瑾榮) 당시 산업은행 총재에게는 사후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근영씨 후임 총재인 엄낙용씨는 국정감사에서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한광옥(韓光玉)씨가 이근영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을 부탁한 것으로 안다”며 다른 증언을 했다.

    엄씨는 또 “2000년 8월 산은 총재에 취임한 후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으로부터 ‘대출금은 정부가 썼다. 우리가 갚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 김보현 국정원 3차장에게 알렸다. 김차장은 ‘알았다. 걱정 말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김충식 사장이 사퇴한 것이나 산업은행이 김사장의 사퇴를 만류했던 속사정은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감사원에 제출된 현대상선의 일시당좌대월 신청서(정식 명칭은 당좌대월약정서)에는 김충식 사장의 자필 서명이 없었고 현대상선의 주소도 명기돼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업은행에서 현대상선에 대한 일시당좌대월 업무를 맡았던 담당자의 이름도 기재돼 있지 않았다. 하자가 있는 서류임이 분명한데도 산업은행은 불과 이틀 만에 4000억원을 대출해준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김충식 사장의 서명이 없기 때문에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게 2700억원 변제 소송을 내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산업은행은 김충식 사장이 사퇴하자 대출금을 회수하겠다며 반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출금날짜 다른 감사원과 임동원

    2000년 6월7일 산업은행에서 나온 대출금 수표 중 26장이 6월8일에서 10일 사이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 등으로 들어왔다. 이 수표에는 여섯 명이 배서했는데, 이 배서자에 대해서는 국정원 직원이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임동원 특보는 국정원이 현대의 환전을 도와주었다고 밝혔는데, 환전을 도와준 것이 수표 배서를 뜻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외환은행 역시 금융실명제 위반이라며 배서한 사람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꼼꼼히 살펴볼 대목이 있다. 감사원은 현대상선이 2235억원(2억달러)을 외환은행 본점에서 출금한 날짜가 6월10일이라고 밝혔는데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외국 은행은 주 5일제 근무를 하기 때문에 토요일에는 영업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가 6월10일 외환은행으로부터 2235억원을 받았다면 외국 은행(마카오의 중국은행으로 추정)으로 송금할 수 없다(지금은 한국의 은행들도 토요일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2월14일 회견에서 임특보는 “현대가 돈을 보낸 것은 (금요일인) 9일이었다. 그리고 북측이 기술상의 문제로 정상회담 날짜를 하루 늦추자고 한 것은 10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임특보는 대북송금이 늦어져 정상회담이 하루 늦어졌다는 의혹은 해소시켰는지 몰라도, 6월10일에 나온 돈을 어떻게 9일에 송금할 수 있느냐는 새로운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몇몇 소식통은 이러한 추정을 한다.

    “감사원의 설명대로 현대가 6월10일 외환은행에서 돈을 받은 것과 임동원씨 주장대로 6월9일 송금이 이뤄진 것은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6월9일 북한 계좌로 보낸 2억달러(2235억원)는 국정원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 2000년 여름 검찰은 YS 시절인 1995년과 96년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에게 안기부 돈 1200억원을 보낸 것을 찾아내 두 사람을 기소한 바 있다(이른바 ‘안풍’ 사건). 이로써 안기부에는 정부 예산 외에 별도의 블랙머니가 숨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이 블랙머니는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와 퇴계로 지점·대치동 지점 등에 개설된 세기문화사(안기부의 위장명칭) 명의의 계좌에 숨어 있었다. 이 계좌는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금융실명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쓰고 남은 나라사랑운동본부의 돈 70억원을 이 계좌에 숨겨놨었다. 북한에 돈을 보내야 하는데 외환은행 사정상 외국 은행이 쉬는 토요일에 출금이 이뤄졌다면, 국정원은 현대상선이 대출받은 산업은행 수표나 어음을 담보로 자체 내에 보유하고 있던 블랙머니를 출금해 6월9일 송금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산업은행 수표를 하루 늦게 입금한 것이다. 이때는 국정원 직원이 국정원 계좌로 입금하는 것이니 떳떳이 수표에 배서했을 것이다. 김경림(金璟林) 당시 은행장 등 외환은행 관계자가 ‘수표 배서에는 이상이 없다. 금융실명제 위반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자세한 사정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

    2000년 안풍 사건 때 드러난 바에 따르면 안기부는 돈을 거래할 때는 5163부대라는 위장 명칭을 쓰는 경우가 있다. 금융기관에서 거래자의 신원을 확인할 때는 안기부가 아닌 다른 중앙부처 공무원의 신분증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소식통들은 대북송금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이러한 비밀사항도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선처해 달라”고 읍소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어쨌든 김대통령은 국가를 운영한 사람이다. 따라서 대북송금 비밀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국정원 계좌가 드러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자신들의 과욕으로 애궂은 국정원 직원이 처벌받는 것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가 국익을 운운할 때는 대북송금이라는 작은 혐의를 피하기보다는 국정원 계좌가 드러날 때의 국가적 부담을 염두에 두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계좌를 이용, 대북송금에 협조한 것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임동원씨의 국정원은 해서는 안 될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된다”고 말했다.

    연결재무제표의 위력

    임특보는 현대가 북한에 보낸 돈은 총 5억달러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나머지 3억달러는 어디에서 마련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기업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대단히 기여했다. 그는 연결재무제표 제도를 도입해, 재벌그룹의 기업이 상호 지불보증을 함으로써 금융권에서 거액을 빌려 ‘우리를 죽이면 금융권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도 함께 위태로워진다’며 ‘대마불사(大馬不死)’식으로 사업하는 것을 차단했다. 이 연결재무제표 제도가 3억달러의 단서를 찾는데 크게 일조했다.

    삼일회계법인이 연결재무제표 원칙에 따라 작성한 현대전자의 회계보고서에 의하면 현대전자는 1995년 7월5일 영국 현대전자(HEU)라는 판매법인을 설립하고, 1996년 10월에는 현대건설에 의뢰해 스코틀랜드에 반도체 공장을 건립하였다.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가 심해지고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에 닥친 2000년 5월 현대전자는, 이 공장을 부가세를 제외한 1억6200만달러에 모토롤라에 매각했다.

    그 중 4400만달러는 그때까지 현대건설에게 주지 못한 공장 건설 대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1억여 달러(1259억원)는 현대건설이 49%의 지분을 갖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의 페이퍼 컴퍼니(실체가 없는 서류상의 회사)인 ‘현대 알카파치(HAKC, 자본금은 1억원)’로 대여했다.

    이 시기 현대전자는 무려 5조6000여억원(약 45억달러)이 부족해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도 몽헌 회장은 해외공장을 팔아서 생긴 1억 달러를 ‘페이퍼 컴퍼니로 대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황순영 영국지사장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송금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몽헌 회장이 황지사장 밑에 있는 경리직원에게 직접 지시해 송금하게 했다.

    적법하지 않은 회계업무 처리 지시에 대한 황지사장의 서명 거부는 산업은행에 제출된 4000억원의 당좌대월약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의 행동과 일맥상통한다. 서명했다면 두 사람은 업무상 배임 및 횡령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회사에서 당하게 될 불이익을 감수하며 ‘소신 있게’ 거부함으로써 지금은 면책(免責)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영국 현대전자와 아랍에미리트의 현대 알카파치는 사라져버리고, 현대 알카파치에 대여된 1억여 달러는 손실로 처리되고 말았다. 회계전문가들은 손실처리된 1억달러는 북한으로 송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나머지 1억5천여 달러는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를 통해 5월 북한 계좌로 송금되고, 현대건설이 4800만달러에 캐나다 회사에 판매한 대한알루미늄 매각 대금도 북한측 계좌로 송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정이 어려운 기업체가 5억달러를 거저 줄 리는 없다. 현대는 어떤 생각으로 5억달러를 보낸 것일까. 현대아산의 김윤규 사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사업을 하기 위한 합의서를 작성하기 이전에 선급금으로 준 것이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으로 2005년 초까지 9억4200만달러를 줄 것이 있었기에 잘못되면 여기서 깐다는 생각도 하고 미리 보내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합의서가 작성되기 이전에 준 선급금은 뇌물로 볼 여지가 있다.

    소식통들은 “정주영 회장은 현대가 한창 뻗어나가던 1970, 80년대 스타일로 대북사업을 하려고 한 것 같다. 그 방법이 북한에서는 통했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임동원 국정원장에게도 통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는 맞지 않았다. 김충식 사장이나 황순영 지사장이 서명을 거부한 것이나, 금융실명제와 연결재무제표 제도가 살아 있었다는 것은 1970, 80년대의 한국과 2000년의 한국은 전혀 다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명예회장이 시대를 잘못 본 것이 패착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한바탕 송금 소동이 있은 후인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과거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 때는 백화원초대소로 불렸던 백화원영빈관에서 김정일과 첫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 정상회담 개최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5월18일부터 6월26일 사이 남측은 비료 20만t을 지원했는데,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북 비료지원이 완료된 후인 6월28일부터 30일 사이 정주영 명예회장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왔다(3차 면담). 그 직후 현대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남측이나 제3국의 자금 또는 민간 자금 등을 조달해 시행되는 북측의 SOC 사업에 대해, 현대는 직접 사업을 시행하거나 건설자로 참여한다는 데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현대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와 제3국 정부 그리고 외국 민간기업의 투자로 건설되는 북측의 SOC 사업으로 △시내외 전화망을 설치하는 통신사업 △남북연결 철도와 유럽-아시아 횡단 철도 연결사업 △발전소 등 북한의 기존 전력(電力) 시설을 개선하고 남측의 송전에 의한 전력 공급사업 △임진강댐 건설 사업 △통천비행장 건설 사업 등을 거론하며, 이 사업을 할 때는 현대가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8월22일 현대는 베이징에서 아태의 강종훈 서기장·민족경제총련합의 정운업 회장과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 등을 체결했다. 이로써 현대는 개성공단 개발에 필요한 SOC 건설 사업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나진·선봉 특구에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닌 북한의 김정우(金正宇)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장과 비슷한 처지가된 것이다.

    현대는 섬유사업가연합회·전자공업협동조합 등과 공단조성합의서를 체결했으나 개성공단 사업은 생각보다 진척이 느렸다. 이러한 현대를 돕기 위기 공기업인 토지공사가 개성공단 사업에 참여했으나 아직까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상태다.

    남북정상회담의 열기도 식고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관한 관심도 사그라들던 2001년 3월21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타계했다. 3월24일 북한은 송호경 아태 부위원장을 보내 정명예회장의 빈소를 조문했다. 그런데 그해 6월2일부터 17일 사이 북한은 또 다른 방법으로 김대중 정부를 실험했다. 북한 상선으로 하여금 한국 영해를 무단 통과케 하고 서해의 북방한계선을 무단으로 월선케 한 것.

    이러한 행동은 경제협력은 협력대로 얻고, 서해에서는 북방한계선 대신 그들이 주장하는 통항질서를 적용시키며, 한편으로는 한국 군부를 길들이기 위한 다목적 전략인 게 분명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북한의 이러한 행동은 남측의 대북협력 의지를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경쟁 유발한 김정일

    2002년 남북은 철도 연결과 임진강 댐 건설 등을 놓고 북한과 당국간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담은 북측의 도도한 자세로 인해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인 6월29일 서해에서는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사격으로 포격전이 벌어져 남측 고속정 한 척이 침몰하고 남북 해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10월 엄호성 의원에 의해 4000억원 대북 지원 의혹이 제기되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던 김대중 대통령은 지친 모습으로 국민 앞에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정주영 명예회장 가슴 속에는 분명 남북통일의 초석을 쌓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를 이뤄야 한다는 과욕을 부렸다. 밀가루 사건 때는 맞섰던 사이임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대를 이용했다. 정상회담 전에 돈을 보냄으로써 현대는 북한의 SOC 사업을 독식하려고 했고, 김대중 정부는 현대에게 환전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북측에 비료 20만t 외에 또 다른 선물을 준다는 생색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꼭지점에 있던 김정일은 두 사람을 교묘히 경쟁시키며 이익을 극대화했다. 서해도발로 김대통령을 실험하고 애를 태우며 점점 더 큰 보따리를 내놓게 했다. 큰 보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대북송금이라는 불법조치를 초래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6년의 밀가루 사건을 의식했다면 지금과 같은 참담한 낭패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동원·김보현씨를 비롯한 국정원 관계자들이 금융실명제와 연결재무제표 등을 의식한 김충식·황순영씨처럼 개정된 국정원법과 국정원직원법을 의식했다면 국익 운운하며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는 처지는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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