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말로 구렁이가 되었다고 할까. 이민생활이라는 게 팔팔 날뛴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노는 게 가진 돈을 안 까먹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말이 격언이 됐을까. 잘 모르면서 무리하게 서두르다가는 더 큰 손해를 보게 마련이었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좀 여유가 있었다. 흡사 해병대를 제대하고 다시 육군에 입대하는 기분이었다. 남미 교포들은 그곳의 열악한 상황에 빗대어 스스로를 해병대로 자처한다. 그에 비해 캐나다는 군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육군쯤에 해당된다 하여 캐나다살이를 약간 쉬우리라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돈 씀씀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캐나다와 남미의 국민소득이 열 배정도 차이가 나는데 돈의 쓰임새도 그와 비례했다. 처음부터 지출을 줄여야겠다고 안달했건만 한 달이 지나자 파라과이에서라면 일 년은 살 수 있는 돈이 날아갔다. 돈이란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 벌어 낮은 나라에서 써야 한다는 평범한 이치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더 답답한 것은 캐나다에서 사람 사귀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파라과이는 임금이 낮아 직장생활을 하는 교민이 드물고 대개가 의류와 관계된 자영업을 한다. 직접 노동력은 원주민을 이용하고 교민은 흔한 말로 사장님이 되어 시간 여유가 생긴다. 원단 공급에서 그 원단을 자르는 일, 재단된 옷감을 박아 옷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거쳐 옷을 파는 일까지 전과정에 한국 교민이 서로 연결되다 보니 교민 간에 교류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캐나다 교포들은 사회의 하층구조에서 직접 몸으로 뛰다 보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몹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 교포 사이에 직업의 유기적 연대가 없는 탓인지 ‘가족’말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일부러 들락거려 보았지만, 특별 고객으로 대우할 뿐 진한 동포애는 느낄 수 없었다.
‘나도 지렁이는 좀 아는데…’
“여보세요!”
전화 발신음이 계속 이어져도 응답이 없어 끊으려는 참에 수화기 저편에서 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건조한 음성은 자다 깬 것임에 분명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두 시. 벌건 대낮에 낮잠을 즐기는 사람과 예의를 갖추어가며 통화를 한다는 게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 쪽에 사정이 있다 보니 조금 참기로 했다.
“지렁이를 잡는다고 해서 전화를 드렸는데요.”
“네, 그러세요? 어디서 픽업하면 될까요?”
밑도 끝도 없이 단번에 만나자는 얘기부터 나왔다.
“사실은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지렁이를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고요.”
조금의 친절과 배려 같은 것을 바랐는데 전화 속의 인물은 최소한의 사무적 예의도 무시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소가 어딘데요?”
주소를 말하자 사족을 달지도 않고 알겠다며 오후 여섯 시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내 의향은 묻지도 않고 일방적이었다. 간단하게 정보나 얻어보려던 전화가 일사천리로 진전되자 오히려 곤혹스러웠다. 오늘과 내일은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다음날 같은 시간으로 약속을 정했다. 그래도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상대는 장화와 비옷을 준비하라고 마지못해 일러주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렁이는 어디 가서 어떻게 잡는지 따위의 잡다한 궁금증은 물어볼 틈도 없었다. 말하자면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취직이 된 셈인데 정작 내가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은 지렁이를 만지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파라과이로 이민 가서 지렁이를 미끼로 낚시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새로 온 이민자나 서민을 상대로 항상 바겐세일을 하는 할인매장을 뒤져 장화와 비옷을 구했다. 조잡하지만 값이 싼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었다. 하지만 삽이나 곡괭이로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가끔 잡동사니를 사던 교포 편의점에 들러 손님이 뜸할 때를 기다렸다. 어색함을 감추려 내 딴에는 너스레까지 떨다가 슬쩍 화제를 지렁이로 돌렸다.
“지렁이를 잡는 일이요? 경험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지요. 처음에는 다 그러면서 시작하는 거지요. 지금 교포 사회의 터줏대감들 중 뽑새 출신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럼 사장님께서도…?”
“아닙니다, 나는. 우리 집사람이 하루 밤 나갔다가 기겁을 하고 속옷까지 적셨으니 뽑새 출신이랄 것도 없지요.”
편의점 주인은 겉으로 본 느낌과는 달리 솔직한 데가 있었다. 어느 정도 성공하고 보니 이민 초창기에 겪은 고생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 모양이다.
“뽑새라니요, 그건 뭡니까?”
“지렁이를 땅에서 뽑는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죠. 나같이 가게에서 계산기를 찍으면 찍새, 바닥을 닦는 청소 일은 딱새라 하죠. 아마 맨주먹으로 이민 와 밑바닥부터 기었다는 자조 섞인 말일 겝니다.”
남의 가게 점원으로 짐을 나르고 계산기도 찍으면서 시작해 결국 큰 가게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고생이 막연하게나마 짐작됐고 그에 대한 선입견도 어느 정도 가셨다. 그리고 지렁이는 땅을 파서 잡는 게 아니라 밤에 밖으로 기어나온 것을 손으로 잡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색이 취직이라고 출근시간까지 정해졌지만 나를 데리러 온다는 사람의 이름이나 인상착의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서성이는 내 앞에 시간만은 정확하게 낡은 밴 트럭 한 대가 와서 멈췄다. 트럭은 낡기도 했지만 방금 전쟁터를 뚫고 온 군용차량처럼 진흙과 먼지가 덕지덕지 덮여 있었다. 말쑥한 차림의 인파 속을 누더기를 걸친 거렁뱅이가 활보하는 격이었다. 이 트럭처럼 내 인생이 진흙탕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에 오르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큰 비가 지나고 습기가 눅눅히 밴 뒷골목에서 쓰레기통 옆을 지날 때 맡았던 생선 냄새와 비슷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 썩 잘 어울렸다. 예상대로 몸집이 크고 살집이 좋은 게 좀 둔해 보였다.
“타쇼!”
생긴 대로였다. 멋대가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길바닥에서 만났지만 그래도 초면이고 앞으로 인연을 만들어갈 텐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는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나도 똑같을 수는 없었다. 나이를 짚어보니 나와 비슷하거나 두어 살 아래로 보였다. 나 역시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내 넋두리에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가 아주 딴전을 치지는 않았는지, 내 말이 잠시 쉬어갈 무렵 자신을 소개했다.
“나 구사장입니다.”
생기발랄한 미스 차
몇 번인가 커브를 돌아 차는 평범한 가정집 앞에 멈췄다. 나처럼 약속이 있었는지 차가 멎기 무섭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던지며 젊은 여자가 올라왔다. 키는 작은 편이지만 통통하고 생기발랄한 몸놀림이 경쾌했다. 내가 무엇을 하러 가는 신분인지도 잊은 채 옷매무새를 만지려다 머쓱해졌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알을 낳으러 하천으로 올라오는 연어는 생식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이미 퇴화되어 있다. 소화기능도 정지되어 위 속이 말끔히 비어 있다. 그런데도 앞에서 먹이 같은 것이 움직이면 평소 습관대로 달려들어 공격한다. 연어낚시에서 별난 미끼를 다 쓸 수 있는 것도 연어의 이런 습성 때문이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나이를 먹어도 긴장되는 것은 이런 연어의 습성과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타신 아저씬가보다. 안녕하세요, 미스 차예요. 그런데 오늘은 아저씨한테 자리를 뺏겼네.”
그러고 보니 나는 운전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트럭에서 자리다운 자리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유리창은 앞과 뒤쪽에만 있었다. 뒷자리로 가는 젊은 아가씨를 보며 나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응당 앞자리를 젊은 아가씨에게 양보해야겠지만, 나이로 따져서 선뜻 응할 것 같지 않았다.
자동차는 골목골목을 돌고 돌며 나말고도 다섯 명을 더 태우고 나서야 시내를 빠져나갔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자 도로도 넓어지며 듬성듬성 아파트 군락이 보였다. 토론토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도시 외곽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자 건물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깨끗해져 나 혼자만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자리를 미스 차에게 양보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범생처럼 큰길의 표지가 나올 때마다 그 이름을 기억하느라 온 정신을 쏟았다. 머리 속에 백지를 펼쳐놓고 약도까지 그려나갔다.
미스 차가 차에 오를 땐 예상이 빗나가는 줄 알았다. ‘지렁이잡이’로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후줄근한 노동자풍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녀의 외모가 출중했기 때문이다. 생소한 일을 나가며 처량한 기분에 젖어 있던 나에게 그녀는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저렇게 멋쟁이 아가씨가 하는 일이라면 지렁이잡이도 어엿한 직업일 것이다.’ 그러나 시내를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태울 때마다 처음 예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차는 하이웨이를 한시간 반을 내달린 뒤 갓길로 빠졌다. 도착한 곳은 골프장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골프장은 아무도 없이 적막했다. 넓은 주차장 한 편에 차를 세우고 앞뒤 문을 열자 사람들이 내렸다. 밴 트럭 뒷문과 의자 사이의 공간은 지렁이를 잡을 때 쓰는 도구로 가득했다. 미스 차를 위시해 네댓 명은 주섬주섬 도구를 챙겼지만 서너 명은 나와 같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초행자였다. 구사장은 초보자들을 세워놓고 지시 사항을 설명했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초보자들은 훈련소에 막 끌려온 신병들처럼 고분고분했다.
날씨가 더워지며 본격적인 지렁이철이 되었다. 가까운 골프장에는 여러 대의 차에서 사람을 풀어 북새통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 많으니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 지렁이 도둑이 골칫거리였다. 이곳을 주름잡던 한인교포들은 이미 손을 뗀 상태이고, 대신 동남아에서 밀려온 이들의 판이 되었다.
500마리씩 담은 지렁이자루는 일일이 갖고 다닐 수가 없어 표적이 될 만한 나무 밑에 모아두게 마련이다. 지렁이 잡는 데 정신이 팔려 기다 보면 종종 엉뚱한 곳에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을 아는 도둑들이 고양이처럼 기어와 훔쳐가버리면 어디 대고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광고 내용과는 달리 구사장은 좋은 농장이나 골프장을 다수 확보해 놓고 있지 못했다. 작은 농장들이 있기는 했으나, 농사철이 되어 콩이나 옥수수를 심고 나니 죽으나 사나 골프장밖에 없었다.
농장 지렁이는 잡기 쉬워 모두 환영했지만 농사철이라는 계절적 한계가 있었다. 골프장 지렁이는 잔디 뿌리 때문에 잘 빠져 나오지 않는 대신 발소리에 느린 편이고, 농장 지렁이는 물렁한 흙이라 잘 빠져 나오지만 대신 빨랐다. 그래도 대다수가 농장 지렁이를 선호했다.
지렁이는 토론토에서도 북쪽과 서쪽에서만 잡힌다. 북쪽과 서쪽으로 300km에서만 많이 잡힌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어째서 다 같은 땅인데 토론토에서만, 그것도 북쪽과 서쪽에서만 많이 잡히는 것일까. 구사장은 캐나다에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까지 토론토 지렁이를 내세웠다.
모두가 떠날 준비를 하다
여름이 깊어지자 토론토의 날씨는 한국과 달리 비가 오지 않았다. 오더라도 땅 속까지 적시지 못하고 가랑가랑해 지렁이의 작황이 줄어들었다. 단가는 올랐지만 수입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여름에는 낮의 길이가 훨씬 길어져 지렁이 잡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졌다.
반갑게도 미스터 리에게 영주권이 나와 그는 제대로 된 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놀이삼아 주말이면 때때로 부부가 함께 나와 부수입을 올렸다. 정상궤도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 동안 일을 쉬는 날이면 정형 집을 방문하는 사이가 되었고 술도 가끔 마셨다. 그와는 앞으로 오랫동안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골호인이랄까. 노동 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거친 데가 없었다. 본인 말로도 싸움질이나 쌍소리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신부님으로 만들려던 천주교 가정의 배경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정형네는 조용하고 현명한 부인이 그 대신 주연을 맡아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이미 여러 위니펙 출신 여자들이 정형 부인을 큰언니로 부르며 따랐다.
드디어 정형에게도 영주권이 발급됐다. 이제 그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정형, 이제 영주권도 나왔으니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글쎄요. 나는 해먹던 용접 일이나 계속했음 좋겠는데 친척들이 장사를 하라고 하네요. 경험보다도 영어가 이 모양이니 원….”
사촌들이 정형을 믿고 한 말은 아닐 게다. 믿는다면 정형 쪽이 아니고 그 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형은 출근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육형제 사촌들이지만 밑으로 셋은 동생이어서 정형의 서열은 딱 중간이었다. 그러나 나이상 서열은 따질게 못 되는 게 칼자루를 쥔 쪽이 그 쪽이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때로는 훈계까지 들으며 끌려다니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났던 모양이다. 가시 없는 정형이지만 오래 된 사람의 눈으로 새로 이민 온 사람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는지를 정형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정형이 어느 날 귀가 솔깃한 정보를 갖고 왔다.
“신발수선소가 하나 있는데 사촌들 말로는 괜찮아 보인답디다. 근데 난 영 자신이 없어서요.”
내 영어실력을 두고 권하는 말이었다. 내용을 들어보니 내가 염두에 두었던 조건과 대강 맞아떨어졌다. 일주일에 이틀은 쉬는데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4개월간 일을 배우며 손익을 계산해보고 그때 가서 매입을 결정하는 조건이에서 더 마음에 끌렸다. 게다가 기본급을 조금 더해 봉급도 준다고 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어 보였다. 요모조모 따져봐도 밑지는 데가 없었다. 그래도 손해보는 것은 시간인데 최소한 최저임금은 쳐줄 모양이니 내 입장에서 허송세월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물론 생소한 신발수선의 작업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는 직접 눈으로 보아야 했다. 잠시 고등학교 시절 고목나무 밑에서 신발이나 가방을 꿰매고 앉았던 신기료 할아버지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강형이 이민 선배니까 먼저 자리를 잡으쇼. 나도 뒤따라 갈 테니….”
정형은 신발수선소를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비슷한 소리를 서너 번이나 했다. 사촌을 따라다니며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은근히 나에게 기대는 눈치였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신발수선소는 청소를 하지 않아서 지저분했으나 열악한 남미에서 눈높이를 한껏 낮춘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자리에서 25년을 했다니 장사가 아니라 직장이었을 게다. 주인은 이탈리아 노인이었는데 의외로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반쯤은 통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수선이라 하여도 모든 걸 기계로 작업했다. 가게의 요구가격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나는 시계를 25년 전으로 되돌려놓고, 그 자리에 나를 세워보았다. 노인은 벽에 빼곡히 붙였던 빛바랜 사진을 모두 떼어간다. 대신 그 자리에 나의 아름다운 사진을 그려본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들, 가정용 미니밴, 잔디밭이 딸린 단독주택…. 하나하나 예쁘게 채워진다.
일단 지렁이잡이를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밤마다 조금씩 망가진 골병이 몸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파편처럼 밀고 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허리가 빠지는 통증과 눈알이 튀어나오는 압박감은 경험이 쌓여도 나아지지 않았다. 후텁지근한 날은 수없이 달려드는 모기떼를 피하려고 겨울 점퍼까지 껴입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에 흠뻑 젖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먹을 게 없어 이 짓을 하는 건 아니다’고 수없이 뇌까렸다.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
지렁이잡이가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차를 타고 내렸던 수많은 얼굴들. 그들은 앞으로 어느 곳에서 만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눌 것이다. 기막힌 사연이 있어 남들 다 자는 밤을 새우며 지렁이를 잡았지만 다시 만날 때는 모두 다른 모습일게다. 골프장에 있는 연못에서 손가락 크기의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술잔을 기울였던 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공친 날이면 일찍 철수하여 차이나타운에서 야식을 먹던 즐거움도 기억할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딸린 공원에서 도둑지렁이를 잡은 추억도 잊지 못할 것이다. 60년 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지렁이를 잡았다는 그리스 할머니들, 지금도 여름이면 날아와 한 밑천씩 잡아가는 여든 살 노구들의 마술사 같은 현란한 손놀림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PS : 미스 차가 지렁이 트럭의 충돌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한 때는 신발수선소에서 한참 기술을 익혀가던 무렵이었다. 손끝에 밴 풀물이 말끔히 벗겨진 대신 손톱 밑에는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그녀는 이 사고로 척추를 다쳐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내 지렁이 체험기 겉장에는 퉁기듯 생기 있게 차에 오르던 스물세 살 미스 차의 모습이 퇴색되지 않고 있다.
“플래시는 각자가 사야 되는데 현금이 없으면 나중에 지렁이 값에서 빼면 되고 건전지도 마찬가집니다. 오픈한 지 2주밖에 안 되고 아직 추워서 많이 잡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울 때를 준비해서 연습게임을 한다 생각하면 편할 겁니다. 처음 며칠만 넘기면 되는데 사람들이 참지를 못해요. 어제도 두 명이 새로 탔는데 오늘 안 나와 플래시 값만 날렸어요.”
말투로 보아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드문 모양이었다. 하루 이틀 나오다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보니 첫 통화에서 일일이 곰살맞게 대할 수 없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밤을 새워야 하니 낮에 잠을 자는 것도 당연했다.
지렁이잡이는 설명만으로는 그야말로 간단했다. 어두워진 땅에 플래시를 비춰 지렁이가 밖으로 나와 있으면 잡는 것이다. 삽이나 다른 연장은 필요 없었다. 그런데 실상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플래시는 이마에 다는 광산용을 사용했다. 한 곳에서만 잡는 게 아니라 자리를 계속 이동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담는 통을 옮기며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오른쪽 발목 위 정강이에 고무밴드로 깡통을 고정시켜 잡은 지렁이를 넣었다. 왼쪽 발에도 똑같은 깡통을 달았는데, 거기에는 톱밥을 넣어 두었다가 지렁이가 미끄러우면 손끝에 조금씩 묻혀 사용했다.
준비를 마친 ‘뽑새’들은 금세 괴상한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그런 복장을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공사판의 노동자나 논밭의 농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건 거렁뱅이 중에도 완전 상거렁뱅이였다. 양쪽 발에 거지의 상징인 깡통을 찼으니…. 미스 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흘 선배라고 완전무장을 하는데 초보자들이 힐끔힐끔 보며 흉내를 낼 만큼 능숙했지만 몰골은 다를 게 없었다. 아리따운 아가씨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등에는 주먹 세 개 크기의 돌출물이 달려 있어 마치 곱추 같아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6볼트 건전지를 하룻밤 내내 쓰면 이내 흐릿해지니 두세 개를 직렬로 연결해 나머지까지 말끔하게 쓰려고 조끼의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이다.
구사장은 지렁이를 잡는 자질구레한 요령까지 일러주지는 않았다. 알아서 해보라는 눈치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한 대씩 붙여 물고 어쩌고 하는 사이에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때서야 누군가 해산명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사람들은 비척이며 흩어졌다. 처음 온 사람들은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발에 단 깡통 두 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렁거려 불편했다. 플래시를 머리에 고정시킨 고무줄 벨트는 너무 팽팽해 양미간이 옥죄어왔다. 한쪽 주머니에 넣은 4각 건전지의 무게 탓인지 옷도 이내 뒤틀렸다.
‘자, 이제 시작이구나…’
나는 멀리서 미스 차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플래시를 땅에 비추며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그러고는 잡은 지렁이를 오른쪽 깡통에 넣었다. 그녀가 먼 곳으로 옮겨간 뒤 나는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공기 때문인지 반짝이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
‘자, 이제 시작이구나….’
마음을 다잡으며 플래시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빛이 직진하여 멀리 서 있는 몇 그루 나무 속으로 박혔다. 플래시 빛은 생각보다 밝았다. 나도 미스 차처럼 허리를 굽혀 빛을 땅에다 비췄다. 의외로 운신할 수 있는 면적이 넓어 보였다. 잔디 사이에 섞인 민들레 꽃대가 선명히 식별되었다. 나는 목의 가늠과 불빛의 움직임을 익히느라 이곳저곳을 비춰보았다. 몇 번 연습하니 불빛의 조절은 어렵지 않았다. 지렁이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고 미스 차가 있던 곳으로 자리를 옮겨 플래시를 켜자 순간적으로 지렁이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불빛을 옆으로 돌리자 역시 비슷한 상황이 계속됐다. 다시 천천히 불빛을 옮겨보았다. 반쯤 나온 지렁이 두 마리가 보였다. 손을 뻗는 사이 구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다음엔 잽싸게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지렁이를 눌렀다. 천천히 검지까지 합세하여 지렁이를 잡았다. 힘을 주어 뽑았으나 땅에 박힌 꼬리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손끝에서 지렁이가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오더니 쭉 빠져나갔다. 미끄러웠다. 빠져나간 지렁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손끝에 지렁이의 미끄러운 점액이 묻었다. ‘아, 톱밥!’ 나는 그제서야 톱밥을 생각했다. 손끝에 톱밥을 묻히니 점액은 사라지고 까끌까끌 톱밥이 묻었다.
다시 방향을 틀어 불빛을 옮기자 역시 몇 마리의 지렁이가 보였다. 지렁이들은 손가락 두세 마디 길이만 밖으로 나왔고 꼬리 쪽은 하나같이 땅에 박혀 있었다. 그 중 길게 나온 놈을 골라 누르니 톱밥 때문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지만 쉽게 빠져나오지 않고 버티다 끊어져버렸다. 꼬리가 땅 속에서 갈고리에라도 걸려 있는지 당기면 고무줄처럼 늘어나다가 툭툭 끊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한 마리를 온전하게 뽑아낸 것은 대여섯 번의 실수를 반복한 후였다. 처음으로 잡은 지렁이를 들고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놈이었다. 8년의 낚시 경험을 통해 지렁이를 떡 주무르듯 한 나였지만 징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드넓은 골프장에서 하찮은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아들고 이렇게 감상적이 될 줄은 몰랐다. 진취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그런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지렁이와의 인연도 얼마간 계속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렁이 한 마리를 커다란 깡통에 넣으며 허황한 생각도 들었지만 깡통 속에 ‘딸깍’하고 떨어지는 감촉이 신선했다.
지렁이는 땅 밖으로 나와 있다가도 인기척을 내거나 불빛을 들이대면 순식간에 땅 속으로 들어갔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움직이며 머리를 천천히 돌려 불빛을 살그머니 옮기며 미처 들어가지 못한 지렁이를 찍어 눌러야 한다. 먼저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검지로 맞잡아 천천히 당기면 쓰윽하고 빠져나왔다. 물론 손끝에 톱밥 묻히기를 잊어서는 허탕이었다. 조금만 무리하게 당기면 영낙없이 끊어졌다. 그렇다고 무작정 천천히 당길 수만도 없는 일. 말하자면 적당한 힘으로 당겨야 하는데, 그 ‘적당’이라는 정도가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첫날은 새벽 어둠이 걷힐 때가지 기었는데도 채 반 깡통을 채우지 못했다. 온 몸이 뻐근했다. 지렁이를 잡는 자세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앉을 수도, 그렇다고 설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바로 그 자세, 몸으로 취할 수 있는 가장 불편한 자세였다.
군대에서 흔히 기합으로 쓰이는 일명 오리걸음은 차라리 양반이다. 이 걸음으로는 기동성이 둔할 수밖에 없어 자연히 엉덩이를 조금 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발걸음이 편했고 소음도 줄일 수 있었지만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에 무리가 왔다. 상체를 구부려 이마의 플래시로 땅을 비추다 보면 더 불편한 것은 눈이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 화끈거렸고, 눈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압력을 느꼈다. 처음에는 한참을 버티다 허리를 펴 휴식을 취하며 담배 한 대를 붙여 물었지만 버티는 시간이 차츰 짧아졌다. 이미 동트기 전에 담배 한 갑이 완전히 바닥났다.
새가 울기 시작하면 나오라는 구사장의 말이 생각나 되짚어 나가려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지렁이 잡는 일에만 몰두해 기다 보니 엉뚱한 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길을 잃을까 걱정하여 단단히 각인해놓은 지점과는 정반대였고 거리도 상당히 멀었다. 어두울 때 찾아나가려 했다면 한참 헤맸을 것이다.
새들은 어떻게 시간을 아는지 적막을 깨고 이곳저곳에서 울기 시작했다. 곧이어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희한하게도 새 소리가 들리자 지렁이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은 언제 지렁이들이 나왔었나 싶게 고요했다. 구사장은 차 안에서 잠을 잤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트럭 지붕 위에 가득 실려 있는 두부판 같은 나무 상자는 지렁이 담는 그릇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뒤쪽에 있는 상자만으로도 충분했다. 날씨 때문에 지렁이가 많이 잡히지 않기도 했지만 대개가 초보자다 보니 제대로 잡은 사람이 몇 안 되었다. 고참 격인 미스 차가 제일 많은 여섯 깡통을 잡았다. 초보자들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구사장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 정도는 별게 아니라는 듯.
“생각보다 많이 잡았네요.”
구사장이 내 깡통을 들여다보더니 건성은 아닌 듯 말했다. 초보자 중에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가 잡은 지렁이의 마릿수가 궁금했다. 마릿수로 세어서 돈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쉽게 셀 수도 없는 지렁이의 머릿수를 어떻게 계산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계산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깡통 위에서 1인치 정도 비었으면 그게 500마리였다. 나는 내 짐작이 너무 빗나가 놀랐다. 예전 우물에서 물을 풀 때 흔히 두레박으로 쓰던 3.8ℓ짜리 큰 깡통 가득히 담긴 지렁이가 500마리밖에 안 된다니….
아내에 등 떠밀려 또 골프장으로
구사장은 사람마다 잡은 지렁이 숫자를 수첩에 적고 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계산한다 했다. 지렁이를 담았던 깡통은 깨끗하게 비워 물기를 제거했다. 톱밥은 물에 젖어 덩어리진 것들은 골라 버리고 나머지는 한데 모아 큰 자루에 넣었다. 잡은 지렁이는 정성을 들여 꼼꼼히 챙겼다. 잘못 처리하면 다른 것까지 죽어 금방 썩는다고 했다. 먼저 두부 모판 같은 상자에 지렁이 500마리를 쏟아놓은 다음 거기에 톱밥을 0.5ℓ쯤 뿌렸다. 그리고 떡고물을 묻히듯 휘휘 저으니 지렁이는 톱밥을 뒤집어쓰고 대굴대굴 굴러다녔다.
톱밭에 버무려진 지렁이는 몸을 늘여 밑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서로들 밑으로 들어가려고 야단이다 보니 상자 안은 지렁이로 부글부글 끓었다. 지렁이는 그렇게 자리를 잡으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지렁이는 골라내고 두부 모판처럼 차곡차곡 쌓으니 하루 작업이 끝났다. 열 판이면 5000마리, 스무 판이면 만마리…. 계산하기도 쉬웠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차량이 뜸한 길을 올 때와는 반대로 되짚어 달렸다. 밤을 새운 일행은 파김치가 되어 채 하이웨이로 들어서기도 전에 골아 떨어져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올 때와는 반대로 내가 제일 늦게 차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오자 피로가 엄습해왔다. 간혹 밤낚시를 가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지만 그건 신선놀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정작 잠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더욱 말똥해졌다. 꼭 무엇에 홀렸던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골프장을 기며 지렁이를 잡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못해본 일이었다.
일을 계속하느냐 마느냐를 결정 내리지 못한 채 잠이 들었을 때 구사장에게서 전화가 왔었나보다. 아내는 짧게 픽업시간만 전해주었다.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였다. 나는 등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간 쉰다 해도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운 형편은 아닌데도, 아내는 무작정 논다고 생각해서인지 은근히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두 살, 네 살바기 애들의 어미로 자신은 돈벌이에 나설 형편이 못 되다 보니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심산으로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낡았지만 교통만큼은 편리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 ‘배더스트’역과 ‘크리스티’역의 중간지점이었다. 그러니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양쪽 역을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영어학교에 다니며 데리고 다니던 두 아들 녀석이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왔다.
“엄마는 나빠! 맥도널드 안 사주려고 크리스티에서만 내려.”
아이들은 맥도널드 햄버거가 꽤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햄버거 값을 아끼려고 상점이 있는 배더스트역을 피해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 아내가 김밥을 말고 있었다. 나는 애써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아내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남편에 대한 기대로 김밥을 말고 있는 아내에게 사족을 달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일을 그만두려고 작정했어도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안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트럭에 올라타보니 어제 탔던 사람 중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형 내외와 ‘미세스 리’로 불리는 여인이 새로 동승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억세고 활발한 미세스 리와, 다부지면서도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의 정형 내외가 타자 차 안의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그녀는 귓속말은 결코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든든한 미드필더가 필요한 곳으로 착착 공을 배급해 재미난 축구 경기를 이끌어가듯, 미세스 리는 초면이나 다름없이 어색해하던 사람을 덩달아 친하게 만들었다.
“가마이 있다꼬 누가 상을 줌니꺼.”
미세스 리는 끝에다 ‘상을 줍니꺼’라는 말을 달고 다녔다. 미스 차와 이들은 모두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미스 차를 통해서 새로 타게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그녀는 정형을 형부라 불렀다. 그런데도 정형은 처제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티고 앉아만 있었다. 왕초랄까 건달세계의 형님이라고 할까. 몸으로 세상사와 부딪치며 살아온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들이 대화 중에 언니라는 호칭을 자주 쓰는 것으로 보아 인연이 깊은 사이로 보였다.
작업준비는 전날과 똑같이 반복되었다. 처음 나온 미세스 리의 뒷바라지는 미스 차가 맡았고, 정형은 어색한 듯 곁눈질을 하다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었다. 하루지만 해본 간이 있다고 내가 시범을 보이는 격이 되었고, 정형은 나를 따랐다. 정형부인은 지렁이를 잡으러 온 게 아닌 듯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거지가 따로 없네!”
정형은 모자를 쓰고 오지 않아서 러닝셔츠를 벗어 검도선수처럼 머리에 감았다고. 그 위에 플래시 벨트를 맸다. 맨머리에 그냥 벨트를 매면 땀이 배고 옥죄기 때문이다. 허리띠에는 6볼트짜리 묵직한 사각 건전지를 방망이수류탄 차듯 매어 달고, 발에도 3.8ℓ들이 깡통을 족쇠처럼 찬다. 보통 사람의 아내라면 남편이 우주복도 아니고 이런 괴상한 거지의 몰골로 변해갈 때, 연민의 정이거나 절망으로 슬픈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정형 부인은 냉정하리만치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찌 보면 그런 처신이 가까운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당사자에 대한 현명한 배려일는지도 모른다.
“거지가 따로 없네!”
어색했던지 정형이 한마디 거들었다.
다리에 깡통을 차니 종아리 신경이 저려왔다. 전날 맸던 고무밴드 자리가 손가락 두께로 함몰됐는데 그 자리에 다시 밴드를 매려니 몹시 저렸다. 고무밴드란 게 자동차 속 타이어를 대략 3cm 너비로 조잡하게 잘라놓은 것이라서 제대로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정형이 슬그머니 내 쪽으로 붙어 우리는 자연스레 한 조가 되었다. 온몸의 근육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자주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을 마치고 보니 놀랍게도 네 깡통, 무려 2000마리나 잡았다. 지렁이는 느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좀 과장하면 세상에 지렁이처럼 빠른 것이 없다. 번개 같다거나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이 지렁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고무줄을 늘였다가 한 쪽을 놓으면 순식간에 줄어들 듯 지렁이가 도망가는 모양도 꼭 그랬다. 크기도 보통이 아니어서 갓 뽑아 길어졌을 때가 평균 20cm 정도이고 가끔은 30cm에 달하는 놈들도 있었다. 물론 수축되면 굵어지고 길이는 반으로 줄지만 몸을 전부 밖으로 드러내는 지렁이는 없었다. 반쯤만 밖으로 나왔다가 무슨 기척이 있으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고무줄처럼 퉁겨 사라졌다.
불과 이틀째인데 500마리 깡통을 채워 비닐 봉지에 담아내기를 네 번 했으니 2000마리가 틀림없었다. 혼자서 대견한 마음이 들어 어린아이처럼 누구에게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자동차로 돌아와 상자에 담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비닐봉지에 담아놓은 탓에 밑에 깔려있는 지렁이가 숨을 쉬지 못하여 절반이 질식사해버린 것이다.
구사장이 언질을 주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탈출을 막는다고 입구까지 꽁꽁 묶어놓아 피해가 더욱 심했다.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지만 크나큰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고 보니 미스 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기 망으로 만든 신발주머니 모양의 지렁이자루를 갖고 있었다. 위에는 끈을 길게 달아 주머니 입구를 칭칭 동여매놓으면 지렁이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끈의 일부는 운반할 때 손잡이로 쓰였다.
“아시는 줄 알았죠. 대개 집에서 아주머니들이 만들거든요.”
구사장도 철저히 못박아놓지 못한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내겐 오히려 지렁이 같은 하찮은 미물도 숨을 쉬어야 산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구사장은 날씨가 더워지면 얼굴이나 손에 모기약을 바르는데 잘못해서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지렁이가 전멸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일러주었다.
이런 광경을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바라보던 정형 부인이 미스 차와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정형을 통하여 지렁이자루는 자기가 만들어드릴 테니 걱정 마시라는 뜻을 전해왔다. 천상 내가 만들어야 할 텐데 재봉틀도 없고 또 모기망은 어디서 사야 하는지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의외였다.
“집사람이 미싱 기술자거든요.”
정형의 말을 듣고서야 의아함이 풀렸다. 내가 목례를 하자 그녀도 답례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층계도 오르지 못할 만큼 다리가 아팠다. 다운타운의 오래된 집들이 대개 그렇듯이 층계는 협소하고 가파르다. 잡동사니를 넣은 손가방도 주체하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왼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발을 받쳐 올리며 겨우 층계를 올라갔다. 이런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될수록 조용히 움직였다. 밤새껏 지렁이를 주무른 손은 열 번을 씻어도 비릿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정말 냄새가 가시지 않는 건지, 내 코에 냄새가 밴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변기에 앉을 땐 보조물에 의지해야 할 만큼 허벅지에도 알이 박혔다. 종아리에도 알이 박혔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좋아질텐데 그런 일로 아내 앞에 초라해지기는 싫었다. 층계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욱 힘들다. 무릎관절이 잘 꺾이지 않아 양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뻗정다리로 내려가야 했다.
다음날 예상대로 정형 부인은 보이지 않고 정형만 나왔다. 온몸이 매맞은 사람처럼 녹초가 된 나와는 달리 정형은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정형 부인이 만들어 보내온 지렁이자루는 규격을 맞추어 백화점에 납품하는 물품처럼 반듯했다. 함부로 헤집어 지저분한 지렁이를 담기엔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형은 지렁이잡이에 목을 매는 형편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자잘한 신경을 쓰지 않게 해 편했다. 나는 영악해서 맺고 끊기를 잘하는 사람이나,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에게는 늘 긴장해서 주눅이 드는 편이다. 술자리에서도 중간에 자리를 뜰 일이 있으면 슬그머니 없어지는 그런 성격의 사람들에게 호감이 갔다. 정형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정형은 내가 한 깡통을 채우고 ‘담배 한 대 핍시다’ 하면, 자기 깡통은 개의치 않고 ‘그럽시다’ 하고 맞장구를 치는 편이었다. 그저 시간 죽이기나 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중에 보면 나와 비슷하게 지렁이를 잡았는데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모두들 안 아픈 데가 없어 끙끙거리는데 정형은 달랐다. 우린 정식으로 인사를 튼 적은 없지만 가까운 사이가 되어갔다. 바람이 불거나 달 밝은 날은 지렁이가 나오지 않는다더니 그 말대로 보름달이 구름도 없는 하늘에 떠오르자 정말로 지렁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 눈에 띄는 것들도 겨우 손가락 한 마디나 나왔다가 불빛이 닿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정형과 나는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잡았다. 마침 연못이 있어 장식용으로 조립한 돌에 걸쳐 앉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치였다. 연못에서는 도랑으로 물 빠져나가는 소리가 졸졸 들렸다. 골프장의 잔디는 초원의 구릉처럼 물결치며 달빛에 드러났다. 군데군데 무리진 나무숲은 더욱 짙어 보였다.
“한잔 하실라우? 술 좀 있는데.”
마침 위스키 500cc병을 갖고 온 게 있어 가방에서 꺼냈다. 눈만 감으면 지렁이의 환영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어 잔 마셔두려고 갖고 온 위스키였다.
“그럽시다. 그러잖아도 생각나던 참인데.”
정형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한잔을 따르니 사양하는 법도 없이 한입에 털어넣은 다음 답잔을 보내왔다.
“독한데요, 이놈의 위스키는….”
처음 파라과이로 이민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날씨는 연일 40°C를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 모든 게 심난해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다. 소주에 길들여진 나에게 맥주는 너무 싱겁고, 위스키는 너무 독해서 그것마저 심난했다.
정형도 캐나다에 온 지 6개월밖에 안 됐다고 했다. 신상에 관한 얘기를 하다보니 술잔이 매끄러웠다. 얼음도 없는 위스키가 미지근해 더 독했지만 김밥 안주가 제격이었다.
“이깐 게 무슨 일이나 되나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줄에 매달려 일을 할 때도 있었는데…”
정형은 한국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나는 학교와 다방 이야기, 정형은 공사판과 대폿집 얘기밖에 몰라 공통점이 없었지만 시간을 죽이는 데는 그게 오히려 흥미로웠다. 정형은 여섯 살 때 부모형제를 모두 잃어 고아가 되었다. 조실부모한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 내 짐작과는 달리 육친의 정을 그리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남 얘기하듯 차분히 이어갔다. 늘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에 의탁하게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큰아버지는 정형을 신부로 만들려 했는데 팔자가 아니었던지 그해에 마침 학생모집이 없었다.
“자리잡는 대로 초청할 테니 군대부터 다녀오거라”
큰아버지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면서 정형에게 한 약속이었다. 슬하에 떡대 같은 아들 여섯을 두었다 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정씨네 육형제’로 잘 알려진 어른이 바로 정형의 큰아버지였다. 거기에서 자리를 잡자 이번에는 아들들이 하나씩 캐나다로 재이민을 떠났다. 식구가 많다 보니 그 시간이 여러 해 걸려 정형의 이민도 뒤로 미루어졌다. 안 갈 수도 있는 군대를 마친 정형은 무작정 이민만을 기다리고 있기도 따분해서 용접일을 배웠는데 일류 기술자가 될 때까지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캐나다 이민 문이 자꾸 좁아졌기 때문이다.
“생전 떠돌다 들어앉으려니 가정이라는 게 미치게 답답합디다. 마누라는 낯선 여자 같아 어색하기만 하고, 이렇게 지렁이를 잡는답시고 나오니 살 것 같습니다.”
정형이 지렁이 잡기에 유유자적 나선 이유였다. 정형 내외는 늦게 결혼해 이제 4개월째인 신혼부부였다. 정형은 내 집이라고 어디다 거처를 정해놓고 석 달 이상 살아본 적이 없다 했다.
술이 바닥나자 우리는 어느새 오래된 친구가 되었다. 하루쯤 공치기로 하고 일찍 복귀했다. 다른 사람들도 사정이 우리와 비슷했던지 거의가 나와서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같이 완전히 공을 친 사람은 없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길을 떠나니 마치 오전 수업만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처럼 마음이 들떴다.
“내일은 날씨가 좋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에 돌아와 저녁에 나가니 같은 날인데도 구사장은 꼭 내일이라고 말했다. 구사장은 돌아오는 동안 “내일은 날씨가 좋다”는 말을 서너 번 반복했다.
구사장의 말과는 달리 오후가 되면서 날씨가 꾸물거리더니 간혹 빗발까지 보였다. 그 동안 쉬지 않았고 날씨도 안 좋아 하루쯤 젖혀볼까 하다가, 일주일치 지렁이 값을 받는 날임이 떠올랐다. 돈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나 얼마나 벌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날씨와는 달리 지렁이가 꽤 많이 나와 있었다. 어렵지 않게 세 깡통 1500마리를 잡자 드디어 비가 굵어졌다. 정형은 비옷을 준비하지 않아 이내 온몸이 비에 젖었다. 정형을 배려하여 장비를 거뒀다. 주차장으로 나가보니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구사장마저 차를 몰아 어디론가 가버려 비를 피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구사장은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몰고 갔다가, 작업이 끝날 때쯤 돌아올 때가 많았다. 기다려도 그는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까지 추워져 몸이 덜덜 떨렸다.
“갑시다.”
정형이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몇 번 소리를 질렀지만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구사장은 그렇다 치고 원, 사람들이 참!”
그대로 턱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가까운 곳에서 지렁이를 잡으며 기다리는 편이 덜 무료할 것 같았다. 그런데 땅에 플래시를 들이대자 아연실색할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디가 온통 지렁이판이었다. 마치 여기저기 라면을 토해낸 것처럼 지렁이들이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자루에 잡아 넣은 지렁이가 쏟아져나온 걸로 착각할 정도였다.
정형도 나처럼 섬뜩한 생각이 드는지 말을 잊고 잠시 서 있었다. 도대체 땅 속에 얼마나 많은 지렁이가 있기에 온 잔디밭을 벌겋게 뒤덮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구사장의 말이 생각났다. 지렁이 잡는 사람들에게는 날씨가 좋다는 말이 반대로 비가 온다는 뜻이었음을….
하루에 4500마리를 잡다
아침에 작업을 끝내고 보니 무려 아홉 자루, 4500마리나 되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새벽이 되자 비는 그쳤다. 마침 지게 작대기같이 알맞은 막대기가 있어 양쪽에 다섯 자루, 네 자루를 나누어 매달고 보니 막대가 휠 정도로 무거웠다. 어림잡아도 30kg이 넘는 무게였다.
정형과 나는 우리만 감쪽같이 많이 잡은 듯한 우쭐한 마음이었는데, 나오는 사람마다 그 이상이었다. 미스 차는 무려 만마리를 넘겨 정형이 운반을 도와줘야 했다. 미세스 리도 잡은 지렁이가 무거워 두 번에 걸쳐 운반해 왔다. 여자는 오줌을 눌 때 앉아서 누어 지렁이를 잘 잡는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더니 정말로 지렁이에 관한 한 여자가 단연 우세했다.
남자들은 한 깡통을 잡아 놓고 허리부터 펴서 담배 한 대를 붙이며 군대식으로 10분간 휴식하는 데 비해, 여자들은 쉴 때에도 앉아서 쉬었다.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다는 김씨가 김을 매도 여자가 훨씬 잘 맨다고 덧붙였다. 남자들은 일어설 때 한 번에 벌떡 못 일어나고 손을 받쳐 조금씩 허리를 펴나갔다. 그런데 여자들은 달랐다. 허리를 툭툭 쥐어박으면 그만이었다.
지렁이에 톱밥을 섞어 상자에 매다는 뒷일을 모두 도왔는데도 시간이 곱절이나 걸렸다.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골프장은 언제 그랬냐 싶게 파란 잔디가 펼쳐졌다. 간밤에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비옷을 걸쳤다지만 젖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에 젖었는지 땀에 젖었는지 속옷까지 완전히 젖은 빨래였다. 차 안은 남자 냄새와 여자 냄새와 비릿한 지렁이 냄새가 뒤섞여 역겨웠다. 하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냄새에는 이골이 났고 오늘은 기다리던 봉급날이기 때문이다.
구사장이 이름이 적힌 봉투를 돌렸다. 일주일 치였다. 캐나다에서 처음 벌어보는 돈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8(천마리)x 24($)=$192.00’
겉봉에 계산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렁이는 1000마리당 24달러이고 내가 그 동안 잡은 지렁이가 모두 8000마리였다. 지렁이 값은 정해져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하는 데 대략 4달러쯤 한다. 캐나다 최저 임금이 시간당 6달러를 조금 넘겼으니 30시간 정도 일한 금액이었다. 처음이라 그렇지 직장생활보다 못할 것 같지 않았다. 당장 미스 차나 미세스 리는 오늘 하루 벌이만으로도 직장생활 주급만큼 번 셈이었다.
‘밥이 없어 이 짓을 한다면 참으로 서글프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지렁이잡이를 당분간 계속하리라고 작정했다. 가진 돈 덜 축내고, 낮 시간에 일도 볼 수 있고, 또 쉬고 싶으면 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간섭할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렁이에 맛들이면 아무 일도 못한다더니, 아주 허튼 소리만도 아닐 성싶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인의 직업은 크게 ‘그로서리(Grocery)’라 불리는 미니슈퍼와 직장생활 두가지다. 나는 영어를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그로서리는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파라과이에서 휴일없이 하루 열다섯 시간 일하는 구멍가게에 학을 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이들 나이가 어려 노동력이 문제였다. 아이들이 좀 컸으면 노동력이 ‘하나 반’이라도 되겠지만 나는 완전히 ‘하나’에 불과했다. 물론 직장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최저임금 근처의 불안정한 잡일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설사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 어느 직장이든 마련해줄 테니 마음대로 골라보라는 행운이 찾아온대도, 내 영어실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직업은 10만달러 정도 투자해서 ‘밥걱정’이나 면할 수 있는 ‘소규모 사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단 험하고 힘든 일은 괜찮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면 그것도 제외된다. 문제는 이런 사업을 어떻게 찾느냐였다.
지렁이잡이도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 낮에 자야 하는 두더지생활이 고통스러웠다. 피곤하고 졸려도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수면상태와 깨어 있는 사이의 꼭 중간에서 맴돌았다. 집안의 움직임이 또렷이 감지되어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하면서 희한하게, 사방에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꿈이 계속되었다.
잔디밭이 아니라 머리 속에 굴을 뚫어놓고 고속도로에 차량이 왕래하듯 벌건 지렁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마디마디 지렁이의 수축과 이완이 크게 확대되어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떤 때는 지렁이들이 등을 떠받치고 올라와 괴로워하다 깨어보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트럭의 덜컥거림이 자장가가 되어 단잠에 빠지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렁이를 주로 골프장에서 잡지만 가끔은 농장에서도 잡았다. 토론토에선 잔디가 있는 곳에 지렁이가 있었다. 어떤 유경험 아주머니는 비가 오면 자기 집 정원이나 가까운 공원에서 대여섯 깡통씩 잡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먼 곳으로 갈 때는 세 시간도 걸리지만 보통은 두 시간 이내의 거리였다. 처음에는 서너 시간을 화물 칸 같은 차 안에서 보내는 게 그렇게도 무료하더니 차의 율동이 자장가가 되면서 깨어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와 있곤 했다.
달리는 노래방 스타 ‘강춘이’
그래도 가끔은 차안에서 흥겨운 파티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특히 아줌마들이 타는 날이 그랬다. 아줌마들이라고 하지만 환갑을 넘긴 사람들도 많은데, 우습게 보았다간 큰코다친다. 바로 뽑새의 원조 격인 백전 노장들이다. 이들은 심심풀이로 가끔씩 나오는데 이들이 타면 우선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떡도 인절미나 빈대떡 등 다양하고 참기름을 듬뿍 바른 참나물도 곁들인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자, 참기름들 목구멍에 발랐음 노래부터 한 곡조씩 돌려!”
왕년에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라 쿵짝’에서 용케 버티던 사람도 어르신 아줌마들 앞에서는 용쓸 재주가 없다. 하지만 한국 사람 둘 이상이 모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하나는 있게 마련. 강춘이가 그런 사람이었다. 노래는 못하는 사람도 고역이겠지만 들어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춘이가 나타나면서 그런 고역이 말끔히 가셨다. 노래를 어찌 그렇게 구성지게 뽑는지, 또 무슨 노래를 그리 많이 알고 있는지. 그의 노래는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구성지게 꺾어 넘기기는 나훈아도 저리가라할 정도였다.
유행가 가사라는 게 누구에게나 한때는 자기의 실연얘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 같아 가슴 저리지만, 강춘이야말로 그렇게 보였다. ‘…술에 타서 마시고…’ 라든가 ‘야윈 두 뺨에 흘러내릴 때’ 같은 구절을 뽑을 때는 그대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스물일곱의 펄펄한 청년이 무슨 한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실제로 그랬다. 강춘이는 실연중이었다. 그 대상이 놀랍게도 미스 차였다. 장끼와 까투리가 한 쌍일 것 같지 않은 외모를 가진 것처럼, 미스 차와 강춘이가 풍기는 분위기도 많이 달랐다. 둘 사이에는 세련된 여자와 성실한 남자의 불협화음 같은 게 한눈에 보였다.
구사장도 아줌마들 앞에서는 맥을 못추었다. 지렁이잡이에서 구사장은 새까만 후배에 불과했다. 아줌마들이 타면 그 날은 호황이었다. 그만큼 아줌마들은 하늘 한 번만 쳐다보면 제갈량처럼 그 날의 작황을 기막히게 알아내는 도사들이었다. 즐거운 관광여행을 떠나는 부녀회원처럼 먹고 마시며 시끄럽던 아줌마들이지만 아침에 돌아와보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돈에 연연하지는 않아 고생스레 빗속에서 잡아야 하는 날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 한 십년 하니까 지렁이 냄새가 맡아지데. 놀고 있는 소리도 들리고….”
우스갯소리겠지만 그런 감각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바꾸어 땅바닥을 기었을까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1960년대 후반 해외 인력시장을 개척하며 많은 젊은이가 서독으로 외화벌이를 떠났다. 남자는 광부로, 여자는 간호원이나 간호보조원으로 나섰다. 그들은 계약이 만료되자 고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제3국으로 시선을 돌려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캐나다로 흘러왔는데 그들이 캐나다 이민의 개척자이다. 초창기 이민자의 고생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낯선 나라에서 영주자격 없이, 때로는 숨어다니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밑바닥 일뿐이었다. 용케 직장을 잡은 사람도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지렁이를 안 잡아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쉬는 날은 물론이고 낮에는 직장, 밤에는 지렁이잡기의 두 직업을 동시에 뛰다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나 지렁이나 하여튼 밝히는 놈부터 작살난단 말야.”
짓궂은 남자 하나가 은근히 여자 들으라고 음흉을 떤다. 처음엔 그 많은 지렁이가 왜 밤마다 밖으로 나오는지 의아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교미를 하러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루살이나 굼벵이 지렁이 같은 하등생물을 하찮게 보지만, 지렁이의 교미만큼은 그게 아니다. 정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 본다면 군침을 흘릴 것이다. 급한 놈은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벌써 기어나온다. 게으른 놈까지 나올 놈이 다 나오면 주둥이를 뾰족하게 뽑아서 입질을 시작한다.
분명 지렁이는 자웅동체라고 생물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있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암수가 따로 있든 한 몸이든 두 마리가 교미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지렁이가 인물 보고 궁합을 맞추지는 않겠지만 블루스 한 곡에 녹아 흐물거리는 꽃뱀이나 제비보다 오히려 뜸을 더 들인다. 그렇게 사랑에 성공하면 날 새는 것도 모르고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새들에게 쪼아 먹히는 녀석도 부지기수다. 교미중인 지렁이는 플래시를 비추어도 세상 모르고 붙어 있다. 여자들은 흉하다고 내숭을 떨지만 일거양득이란 말이 바로 교미중인 지렁이를 잡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렁이 주제에 매일 붙으며 약올리네.”
강춘이가 투덜거렸다. 자기 처지를 빗대어 하는 말 같았다. 강춘이가 차에 타자 미스 차는 거북했던지 다른 차로 옮겨탔다.
미세스 리도 들쭉날쭉이었다. 좋은 파트타임 직업을 잡았기 때문이다. 대신 남편인 미스터 리가 합류했다. 알고 보니 정형 부인이나 미스 차, 미세스 리는 모두 캐나다 남부 위니펙 출신으로 남편들은 영주권이 없었다. 전부들 고만고만한 신혼으로 영주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강춘이와 미스 차의 이상한 관계
캐나다 남부에 위니펙이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는데 몇 년 전 미싱기술자로 한국 미혼여성 수백 명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부가 채용되지는 않았다. 한국 교민이라고는 수십 세대에 불과한 지방도시에 수백 명의 젊은 아가씨들을 쏟아놨으니 위니펙은 그야말로 꽃밭이 되어버렸다. 마침 위니펙에 미스터 장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대로 자리 잡은 가족들 덕에 학교를 마치고 차까지 굴리며 빈둥대던 미스터 장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채용이 되었던 사람도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연고가 있는 사람부터 차츰 토론토로 밀려들었다. 직장보다도 북극 백곰까지 내려올 정도의 추위가 더 문제였다. 영어도 잘하고 자동차도 있고 더구나 하는 일도 없는 미스터 장의 차에는 언제나 아가씨들이 가득 타고 다녔는데, 미스 차도 그 중의 하나였다. 연고가 없는 아가씨들은 토론토에서 달려간 총각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정형도 미스터 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강춘이도 그런 코스를 밟았지만 미스 차에게 장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게 문제였다. 관광비자로 입국하여 결혼을 하였어도 아직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고, 노동허가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정상적인 취업은 불가능했다.
독신인 경우는 결혼을 통해 합법적으로 영주권을 얻을 수 있지만 여러 이유로 영주권을 얻지 못한 사람이 토론토에는 더러 있는 것 같았다. 지렁이잡이야말로 이런 사람들이 돈을 만질 수 있는 제일 손쉬운 일 중의 하나였다. 다들 쉬쉬해서 그렇지 지렁이잡이의 반 이상이 이런 불안정한 신분이었다.
강춘이에게 미스 차는 엄연히 서류상 가족인데도, 그녀에게는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하는 미스터 장이 있었다. 삼각관계만으로도 환장할 노릇인데 영주권을 받자니 강춘이는 끽소리 못하고 아파트 세의 일부를 대야 했다. 미스 차가 원하지 않더라도 영주권 심사에는 그런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강춘이는 우물거리지만 미스 차 얘기로는 잠 한번 자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강춘이 쪽에서 보면 ‘잠이라도 한번 자봤으면 덜 억울하겠다’였다.
미스 차 쪽에도 이유가 있었다. 큰돈을 지불하고 위장결혼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강춘이에게 그냥 영주권 하나를 선물하기로 했다. 단 여기에 강춘이의 역할이 있었다. 미스터 장과의 사랑 싸움에 막강한 도전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밀고 당기는 사랑싸움에 기둥서방을 등장시켜 질투심도 유발시키고 사랑의 묘미도 살리자는 계산이었다. 우선 남의 사랑싸움에 끼여든 강춘이가 안됐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강춘이가 미스 차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