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농민의 농협’. 3년 전 농협·축협·인삼협이 손잡고 ‘통합농협’을 출범시키며 천명한 모토다. 하지만 지금도 대다수 농민들은 ‘농민을 위한 농협’이 아닌 ‘농협을 위한 농협’을 목도하고 실망한다. 농협은 수익이 급증하고 있는데, 정작 농협의 주인인 농민들은 빚만 더 늘어간다.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초기부터 협동조합 개혁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정부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협동조합 개혁을 ‘국정 100대 과제’에 포함시켰고, 이후 농림부의 주도로 개혁의 방향과 방안을 설정해나갔다.
개혁의 주요 슬로건은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농민의 협동조합’. 임직원 중심의 비대한 협동조합 조직을 정비해 농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중복 기능 조정과 경제사업의 지역농협 이관 등을 통한 중앙회 조직 슬림화, 각 사업부문별 독립성 보장, 신용사업 중심에서 경제사업 중심 조합으로의 전환, 중앙회의 지도·교육·농정활동 강화, 농·축산물 통합유통체계 구축으로 농산물 제값 받아주기 등이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됐다.
통합농협은 이같은 개혁 의지를 담고 태어났다. 당시 농림부와 통합농협은 “3개 중앙회는 단순한 물리적 통합에 그치지 않고 화학적으로 융합해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을 농민에게 환원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농협의 개혁 청사진은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농협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다.
‘다이어트’ 실패한 중앙회
농협의 주인은 농민이다. 농민들은 지역농협(‘단위농협’이나 ‘회원조합’이라고도 부른다)에 가입해 조합원으로서 출자금을 내며, 농협중앙회는 전국의 1300여 개 지역농협이 출자해 만든 연합체다.
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주식회사의 주주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개념이다. 주주가 단순한 투자자(investor)라면 조합원은 협동조합을 소유하고, 사용하고, 운영하고, 이익을 취하는 이용자(user)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 농협 조합원, 즉 농민들은 “농협이 여전히 ‘농민을 위한 농협’이 아니라 ‘농협을 위한 농협’에 머물러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무엇보다 농협 개혁의 우선 과제였던 중앙회 조직의 슬림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3개 중앙회가 통합되면서 조직과 인원이 다소 줄어들긴 했다. 특히 사실상 농협으로 흡수 통합된 축협중앙회의 시·도지회와 신용사업 점포들이 폐쇄되면서 축협 직원들의 명예퇴직이 많았다. 농협중앙회가 2001년 9월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통합 후 퇴직한 인원은 (구)농협중앙회가 433명(명예퇴직 211명), (구)축협중앙회가 402명(명예퇴직 343명)이었다.
그러나 중앙회의 전체 인원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통합 후 1년6개월이 지난 2001년 말 현재 농협중앙회 직원수는 2만330명으로, 통합 시점인 2000년 7월1일보다 오히려 200여 명 늘었다. 특히 4급 이상 직원수는 종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한 데 비해 5·6급과 생산직 등 하급직 중심으로 인력 구조조정이 일어나 ‘저효율 고비용’ 구조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회는 “2002년 6월 말 현재 직원수가 통합 당시보다 13%(2476명) 감축됐다”고 국회에 보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정규직의 수치이고, 계약직을 포함할 경우 직원수에 별 차이가 없다. 상위 직급은 거의 손대지 않고, 하위 직급을 대거 계약직으로 돌린 것이다( 참조).
또한 중앙회는 3개에서 1개로 줄었지만, 통합농협중앙회의 자회사는 더 비대해졌다. (구)농협중앙회의 자회사 직원수는 농협개혁이 단행되기 전인 1997년 말 1005명이던 것이 통합 직전인 2000년 6월 말에는 2938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통합을 전후한 시점에 중앙회에서 명예퇴직한 임직원들을 중앙회 산하 금융·비료 자회사 등에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경우가 많았다는 것.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에 따르면 통합 직후인 2000년 8월 현재 중앙회 11개 자회사의 상근 임원 28개 보직 중 (구)농·축협중앙회 출신이 19개를 차지했다고 한다.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장종익 소장은 “중앙회의 비대화는 농협중앙회가 사업체로 남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며 “특히 최근 금융산업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중앙회의 신용사업부문은 국제업무를 확대하기 위해 공동투자회사를 설립하는 등 새로운 부서와 자회사, 인력 확대의 필요성이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앙회 조직이 여전히 비대하다는 지적에 대해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필요성을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정 중앙회 조직을 슬림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슬림화란 불필요한 조직과 인력을 떼내라는 얘긴데, 지금 중앙회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가령 중앙회 신용사업부문의 경우 수신고는 은행보다 많지만 조직은 우리가 더 슬림하다. 위험관리 등을 강화하려면 오히려 조직을 더 키워야 할 상황이다. 통합 당시 중앙회를 슬림화하겠다고 한 것은 3개 중앙회의 중복 업무를 축소하겠다는 뜻이었다.”
물 건너간 사업 이관
농협이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신용사업, 경제사업, 지도(농정)사업이 그것이다. 신용사업은 금융기관 업무다. 농협중앙회는 은행법에 따라 제1금융권(은행) 업무를, 지역농협은 신용협동조합법에 따라 제2금융권(상호금융) 업무를 하고 있다. 경제사업은 농산물 가공·유통, 영농자재 생산·구매·판매 등을 뜻한다. 지도사업에서는 조합원인 농민들에게 생산기술 교육, 생산조직 개선, 작목반 육성 등 영농지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중앙회 통합의 주요 명분 가운데 하나는 중앙회의 경제사업을 지역농협으로 대거 이관하는 것이었다. 통합중앙회가 되면 신용사업에서 이익을 크게 내기 때문에 중앙회의 경제사업은 지역농협에 이관하거나 지역농협과 공동 경영함으로써 일선 조합원들에게 이익을 환원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농림부는 통합을 앞두고 관련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구)농협중앙회 산하 하나로마트 등 13건, (구)축협중앙회 산하 사료공장 등 35건의 사업을 지역농합에 이관하겠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이관이 확정된 경우는 대구·창원 축산물 전문 판매장, 안산사료공장 등 너댓 곳에 불과하다. 지역농협들은 “중앙회가 돈 버는 사업은 제쳐놓고 부실화한 사업만 이관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런가 하면 중앙회는 중앙회대로 “지역농협들이 수익성 높은 사업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해서 결국 자회사로 만들거나 매각한 경우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수익성이 높은 사업은 대개 전국 단위로 거래되는 대규모 사업이기 때문에 지역농협 차원에서 다루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이런 사업을 특정 지역농협에 주면 다른 조합들이 특혜 시비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중앙회가 2000년 9월 작성한 ‘통합농협 3개년 계획서’를 보면 2003년 지역농협 경제사업의 사업액 성장률을 2000년 대비 21.4%로 설정한 데 비해 중앙회 사업액 성장률은 68.5%로 높게 잡고 있다. 중앙회가 애초부터 사업을 이관할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협동조합연구소 장종익 소장은 중앙회 경제사업을 잇따라 자회사로 만들고 있는 데 대해서도 우려한다.
“협동조합 사업부문을 자회사화할 필요성은 있지만, 조합원을 주 대상으로 하는 부문이 아니라 비조합원 위주의 사업을 자회사로 만들어야 한다. 자회사는 주식회사로서 유연하고 신속한 경영을 할 수 있지만, 이윤 추구를 일차적 목표로 하므로 조합원과 거래할 때 조합원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기 어렵다. 농협이 조합원에게 제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서비스는 조합원의 생산물을 보다 높은 가치로 판매해주고 영농자재를 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회사가 필요한 부문은 경제사업이 아니라 신용사업이다.”
그렇다면 “중앙회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조합원에게 환원하겠다”는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농민들은 여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농협중앙회는 통합하던 해인 2000년에 2332억원, 2001년에는 380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 당기순이익의 12배와 19배에 이르는 규모다. 이같은 실적이 전적으로 통합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통합효과를 톡톡히 본 것은 사실이다.
중앙회는 통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을 뿐 아니라 정부로부터 (구)축협중앙회 손실분을 전액 지원받았고, 통합비용까지 받았다. 게다가 정부가 손실을 보전해주면서 ‘농협중앙회는 정부가 보증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2001년 농협중앙회의 예수금은 32%나 증가, 사상 최고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통합 이후 2001년 말까지 2800억원어치의 불요불급한 고정자산을 매각해 자산을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농가 소득은 오히려 감소하거나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농가 부채도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농협의 통합 이익이 농민에게 제대로 환원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참조).
농협중앙회의 한 전직 고위 간부는 “농협이 조합원의 생산력 증대나 생산비용 절감에는 무관심하고 돈벌이에만 급급하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농협 임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쓰인다. 농민들의 출자기관인 농협이 막상 농민들에게는 배당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2001년 7월 농협중앙회는 (구)농협 직원들에 대한 11개월치 호봉 승급, 특별상여금 100% 지급, 의료비 지급한도 상향 조정(500만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협약을 체결, 조합원들로부터 “통합의 이익을 임직원들이 독식한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지역농협 노동조합 연합체인 전국농협노조 민경신 사무처장은 “중앙회는 지역농협의 출자분에 대해서만 배당할 뿐, 농민이 예금·공제 등을 이용해 발생한 수익분에 대한 이용고 배당은 하지 않는다. 출자 배당도 서류상으로만 지역농협에 주는 것이지, 실제로는 중앙회에 바로 재출자(회전출자)되기 때문에 농민에겐 배당될 것이 없다. 결국 중앙회가 돈을 많이 벌어본들 중앙회 직원들만 배불리게 된다”고 했다.
불신받는 경제사업
농협중앙회의 시각은 이와 다르다. 중앙회 관계자의 말.
“조합원에게 수익을 나눠주는 것은 중앙회가 아니라 지역농협이 할 일이다. 더구나 조합원에게 진정 절실한 것은 몇푼의 배당금이 아니라 영농 편의를 지원하는 서비스다. 예컨대 농협이 서울 양재동에 대규모 농산물 유통센터를 만든 결과 상장 수수료가 하락하고 도매시장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다. 농민들도 판로를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작물 재배를 시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런 ‘간접 서비스’를 통해 농민이 얻는 이익은 당장 실감할 만큼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농협이 조합원에게 해주는 게 뭐냐’는 불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농민들이 농협에 대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영농 서비스다. 농협이 비교적 손쉽게 수익을 낼 수 있는 일부 사업부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제사업 영역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사업의 핵심축은 농산물 판매사업과 영농자재 구매사업. 농민의 생계와 직결된 이들 두 부문에서 상당수 농협들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조합에서 미곡종합처리장 사업을 제외한 판매사업은 단순 수탁판매 위주로, 공동 운송 수준에 그치고 있다. 공동 마케팅, 공동 계산을 추진하고 있는 조합은 5% 미만이라고 한다.
또한 효율적인 공동 판매가 가능하려면 같은 품목을 취급하는 조합원들의 작목반이나 축산계 조직이 필수적인데, 농협 작목반과 축산계에 대한 조합원들의 참여율은 30%가 채 되지 않는다. 이는 작목반 활동에 대한 농협의 지원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
“농협이 재배방법 개선 지도, 영농자재 사전예약, 농산물 포장 디자인 개발, 품질검사, 출하처 개발 등 우수한 농산물 생산과 판로 개척을 통해 작목반을 뒷받침하는 데 소홀하다”는 게 한농연의 시각이다. 이 때문에 작목반원들이 생산한 농산물의 절반 정도만이 농협 차량을 통해 판매되고 있으며, 농협은 도매시장으로부터 입금된 판매대금의 정산 기능 정도만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2002년 7월1일 통합농협 창립대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치사를 하고 있다.
“농협이 농산물 판매를 촉진하겠다면서 전국 각지에 농산물 집하장을 만든 적이 있다. 벽촌 오지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 집하장들이 배낭여행 대학생들의 숙박시설이나 빨래 건조 시설로 쓰이고 있다. 요즘엔 웬만한 농산물은 죄다 산지에서 바로 출하하는데, 집하장에 들렀다 갈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치 앞을 못 내다본 주먹구구식 사업 추진으로 엄청난 예산만 낭비했다.”
영농자재 구매사업에서는 농협의 ‘밥그릇 챙기기’와 제조업체의 농간이 맞물려 파행을 빚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정 농약이나 비료 등에 대해 대량 수요가 발생하면 농협이 계통구매에 나선다. 농협중앙회가 업체와 가격협상을 벌여 구매계약을 맺는 것.
중앙회는 사들인 물품을 지역농협으로 내려보내면서 수수료를 취한다. 지역농협도 조합원들에게 물품을 넘기면서 마진을 남긴다.
그런데 이렇게 수수료와 마진을 떼다보니 농협 판매가가 제조업체의 대리점 판매가보다 비싸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독·과점 업체들은 담합, 덤핑판매, 대리점 리베이트 지급 등의 변칙 거래로 ‘농협 흔들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피해는 농민이 보게 되어 있다. 농협이 업체들과 길항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런 ‘장난’을 견제하지 못하면 경쟁력이 낮은 업체들도 도태되지 않고 시장에 머물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신용사업에 사활 건 농협
농협 경제사업이 이렇듯 열성과 전문성을 의심받을 만큼 입지가 무색해진 것은 농협이 중앙회와 지역농협을 불문하고 신용사업에 역량을 집중해온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농협은 인력과 예산의 80% 이상을 신용사업에 투입한다. 농협의 최대 수익원이 신용사업이기 때문이다. 중앙회와 지역농협의 수신고를 합치면 200조원에 육박한다. 수신고 국내 1위 은행인 국민은행보다 50조원이나 많다.
농협 신용사업은 한마디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은 전국의 대도시에서 군 단위에 이르기까지 지점을 두고 은행 업무 전반을 취급한다. 여·수신사업은 물론, 신용카드사업, 보험 성격의 공제사업까지 취급하므로 이미 방카슈랑스 체제를 완비한 셈이다. 정부의 정책기금과 광역·기초자치단체의 공공예금까지 유치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이 들어온다.
게다가 농협의 신용사업부문이 경제사업부문으로 돈을 빌려줄 때는 높은 금리의 일반대출금 이자율을 적용하고, 경제사업 여유자금을 신용사업에 예치할 때는 낮은 금리의 요구불예금 이자율을 적용한다. ‘집안’에서도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역농협의 신용사업은 높은 예대(預貸)마진을 기반으로 영위된다( 참조). 조합원인 농민들에게 시중 대출 금리보다 높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물론, 조달금리도 시중보다 다소 높다.
수신 고객은 대부분 금리 차이를 좇아 모여든 도시민, 다시 말해 비조합원들이다. 이 때문에 지역농협은 ‘농민들의 주머니를 털어 도시 사람들을 배불린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농민들의 딜레마
농민들은 대개 담보로 잡힐 자산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은행에서는 좀처럼 대출을 받기 어렵다. 이에 비해 상호금융인 지역농협은 은행에서 담보로 인정하지 않는 농산물이나 축사, 비닐하우스 등도 담보로 잡아준다. 농협은 담보가 부족한 농민의 신용을 보증해주는 ‘농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을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위험부담도 줄일 수 있다.
지역농협은 조달금리가 높을 뿐 아니라 신용사업부문의 인건비와 관리비, 경제사업부문에서 발생하는 적자까지 신용사업부문의 수익으로 메우기 위해 이래저래 대출금에 높은 금리를 적용한다. 그렇다 해도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농민들은 농협에서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확고한 수익원이 있기 때문에 중앙회와 대다수 지역농협들이 경제사업은 뒷전으로 미룬다는 게 농민단체들의 주장이다.
한 농민단체 관계자는 “농협 직원들의 임금체계는 종사하는 사업분야와 상관없이 동일하다”며 “‘돈장사’나 ‘배추장사’나 입사 연수가 같으면 같은 봉급을 받는데,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든 말든, 영농자재를 싼 값에 사든 말든 대수롭게 여기겠냐”고 반문했다.
농협 직원이 농산물 판매나 농자재 공급에서 농민에게 이익을 주지 못해도 월급 걱정과 고용 불안이 없고, 조합이 수익 증대를 위해 안정적인 신용사업 마진 구조에만 의존하는 한 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기환 정책위원장은 “농협은 ‘경제사업은 마진이 적고 인건비가 많이 들어 신용사업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농업을 사양산업으로 보고 지레 위축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비록 농업 종사자수는 줄었지만, 이제 우리 농업도 대규모화·전문화·기계화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첨단 농자재나 새로운 마케팅 기법에 대한 수요는 더 커지리라는 것.
전위원장은 “전농에서 직영하는 13개 ‘우리영농조합법인’은 경제사업만 하는데도 모두 흑자를 보고 있다. 쌀, 농자재 판매 등 농협과의 경합 품목을 경합 지역에서 다루고 있는데, 농협은 경쟁상대가 안 된다. 인건비와 관리비용을 줄이고, 조합원이 생산·판매·홍보 등 1인 다역을 맡아 열심히 뛴 결과”라고 덧붙였다.
信·經 분리로 활로 찾아야
이런 배경에서 제시된 해결책이 신용사업부문과 경제사업부문의 분리(신·경분리)다. 별도의 사업체로 분리해 인사·급여·직제·교육 시스템을 달리함으로써 전문성을 기하고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농협 조합원과 농민단체들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고, 농림부와 농협 또한 이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거론되고 있다.
협동조합연구소 장종익 소장은 “농협중앙회를 운동체 기능 전담조직과 사업체 기능 전담조직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업체 기능 조직은 신용사업조합연합과 경제사업조합연합으로 분리하고, 중앙회는 사업을 수행하지 않는 운동체적 기능 조직으로서 연구·교육·지도·농정활동 등을 수행하게 한다는 것.
지역농협도 신용사업조합과 경제사업조합으로 분리, 각각 중앙의 신용사업조합과 경제사업조합에 가입토록 하되, 다만 경제사업조합은 자금 조달 등을 할 수 있도록 신용사업조합에도 동시에 가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농협중앙회 전직 고위 간부도 “신용사업은 ‘농협은행’으로 떼내 뱅커로서의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하고, 유통부문도 독립법인화해야 하며, 중앙회는 농정기관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비해 농협중앙회측은 ‘단계별 분리’ 방안을 내놓았다. 우선은 농협중앙회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나눠 실험적으로 운용해보다가 여건이 충분히 성숙됐을 때 완전한 신·경분리를 검토해보자는 것. 중앙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업체를 나눠 각각의 대표이사에게 서로 다른 수익목표를 주고 인사권, 급여체계, 자금 흐름 차단 등을 자기 권한과 책임 하에 두되, 당장은 협동조합 체제 안에서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완전 분리를 하면 수익이 신통찮은 경제사업부문으로의 자금 차입이 어려워질 게 뻔하다. 과거 농업은행과 농협중앙회가 따로 있었을 때 농협중앙회는 돈을 못 빌려서 농민들을 위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농협 경제사업에는 당분간은 수익이 날 전망이 없어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분야가 적지 않다. 농산물 수입 증가에 대비, 품질 차별화와 시장 세분화를 통해 우리 농산물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전국농협노조 민경신 사무처장은 “신·경분리는 중앙회에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역농협의 경우 경제사업 대부분에서 적자를 보고 있으므로 신용사업을 떼내면 지역농협 전체가 흔들리게 되리라는 것. 그는 “개혁에는 순서가 있다”며 “비대한 중앙회에 먼저 칼을 대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