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는 예로부터 한방약재로 쓰였다. 피를 맑게 해줘 비만이나 고혈압, 성인병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허약체질이나 수술한 사람이 보양식으로 애용할 만큼 영양분이 풍부해 ‘날개 달린
- 작은 소’로도 불렸다. 일부 지방에선 ‘오리발 자식’을 낳는다 하여 임산부에게는 금기했다는 ‘풍문’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 같은 우스개를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국내 대표적인 조류학자 윤무부(尹茂夫·62·경희대 생물학과)교수가 어느 방송에 출연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오리요리를 꼽자 주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되물었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리도 새다. 윤교수의 ‘새 사랑’은 남다르다. 부인 김정애씨가 “나 먹을 것은 안 사와도 새 먹이는 사온다”고 푸념할 정도. 그런 그가 오리요리를 좋아한다니 뜻밖이었을 법하다.
2월6일 오후 한방오리백숙을 준비하던 윤교수 집을 찾은 국제청소년환경단체 ‘그린넷(GreenNet)’ 임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들은 올해 초 그린넷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된 윤교수와 한해 주요사업계획에 대해 논의하고자 찾아온 길이었다. 이들의 반응을 본 윤교수는 오리집에서 ‘누드’ 상태로 배달된 생오리를 들더니 즉석 강연을 시작했다.
“오리는 겨울철새로 조류 중 생명력이 가장 강합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위에서 지내면서도 동상에 걸리지 않아요. 이건 집오리인데 조상은 청둥오리랍니다. 한 500년 전부터 집에서 길러지면서 퇴화돼 날지 못하다 보니까 살도 찌고, 그래서 뒤뚱뒤뚱 걷게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양은 그대로지요. 기름에 콜레스테롤도 없고, 각종 약초와 함께 푹 익혀 먹으면 원기회복에 아주 좋아요.”
윤교수는 이처럼 좋은 음식을 ‘새 박사’라고 먹지 말라는 법 있느냐는 투다. 어쩌면 이런 논리도 가능하겠다. ‘새에게서 힘을 얻어 새를 위해 일한다(?)’.
윤교수의 연구실은 한반도 전역이다. 그리고 새의 삶터인 자연이 바로 연구대상이다. 윤교수는 1주일에 강의시간 9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거의 산과 들, 바다에서 보낸다. 방학 때도 예외는 아니다.
겨울에는 철새들이 자주 찾는 휴전선과 철원, 천수만, 낙동강 하구, 전남 해남 등지. 봄에는 오대산이나 한라산과 설악산. 여름에는 백령도, 울릉도, 흑산도, 거제도, 홍도 등 섬 지방과 남해 도서연안. 그리고 가을에는 남해안과 서해안, 영종도, 태안반도, 금강하구 등 갯벌지역을 휘돌아 다닌다.
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상관없다. 전국을 돌며 새를 관찰하면서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소리를 담는다. 그가 30여 년 동안 모은 자료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새 사진만 약 50만 컷, 비디오 테이프 800여 개. 여기에 직접 채록한 오디오 자료는 흥미를 더한다. 새 소리뿐만이 아니다.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거제도 학동 파도 소리, 동해안 모래밭 파도 소리, 강물 소리, 시냇물 소리, 논물 소리….
국제청소년환경단체 ‘그린넷’ 임원들에게 오리에 대해 설명하 고 있는 윤무부 교수. 왼쪽부터 황재서 정책위원장(공진중 교사), 최한수 지구 환경연구원장(경희대 강사), 최경호 홍보위 원장(근명여자정보고 교사), 윤교수, 전용훈 지도교사회장(성보중 교사), 김창신 사무 총장.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땀흘리며 한 마리 먹은 후 한숨 편안하게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합니다. 나처럼 힘들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권할 만합니다.”
한방오리백숙에 들어가는 약초는 황기와 인삼, 당귀, 오미자, 감초 등이다. 황기(黃햯)는 강장과 지한, 이뇨, 소종 등의 효능이 있어 신체허약이나 피로, 권태 등을 처방할 때 쓰이고, 당귀(當歸)는 피를 생성하거나 맑게 해주는 효능을 가진 약재다. 여기에 밤과 은행, 대추 그리고 마늘과 대파도 함께 들어간다.
먼저 찹쌀을 잘 씻어 불려둔다. 오리는 털을 뽑고 내장을 다 빼낸 다음 기름을 적당히 제거한다. 콜레스테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이 제거할 필요는 없다. 그 다음 함께 들어갈 약초 등을 다듬는다.
끓이는 용기는 압력솥이 적당하다. 비어 있는 오리 속에 먼저 대파와 인삼 황기 당귀 감초 등을 넣고 찹쌀을 채운 후 밤과 마늘 등 나머지 재료를 함께 담는다. 그 다음 솥 안에 삼발이를 넣고 물을 삼발이 높이의 3분의 2 정도 붓는다. 그 위에 오리를 얹고 내용물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가제(헝겊)로 잘 싼 뒤 1시간 정도 푹 삶는다.
향긋한 약초 향과 구수한 맛이 어우러진 오리고기는 쫄깃하면서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꿩이나 닭고기처럼 퍽퍽하지가 않다. 우러난 국물로 끓여먹는 죽도 별미다.
노무현 정권 초대내각 구성을 앞두고 윤교수는 환경부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장관직 제의가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윤교수는 “솔직히 맘에 있다”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외국의 경우 환경부장관에 일반 생물학을 전공하고 실제 생태계나 수질보호 등 환경문제에 관여하는 전문가들이 대부분 임명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비전문가들이 장관에 오르고, 환경단체의 전문성도 떨어져 환경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윤교수는 날로 훼손되는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환경부장관에 대한 바람을 대신했다.
최근 20~30년 사이 한반도를 지나는 철새는 물론 국내 텃새들도 크게 줄어들었다. 희귀종인 따오기, 크낙새, 뜸부기 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흔하던 참새도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새는 환경의 상징입니다. 깨끗한 물만 먹지요. 새가 살지 못하는 곳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새들이 먹고 쉬고 자고 비상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심각할 정도입니다. 남아 있는 새들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정부와 민간단체 그리고 학자들이 단합해야 합니다.”
윤교수는 여생을 새 연구와 보호에 바칠 생각이다. 그리고 오는 4월 그 뒤를 이을 아들 종민씨가 미(美) 미시건대 조류학과 대학원에서 부화(孵化)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