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책읽기, 정신의 이행을 상징하는 ‘周遊天下]

  • 글: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입력2003-02-25 18: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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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기, 정신의 이행을 상징하는 ‘周遊天下]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과거사를 음미해보니 내게 영향을 미친 최초의 책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주

    신 전집소설이었던 것 같다. 서양 동화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었는데, ‘소공자’ ‘소공녀’ ‘인어공주’ 등 기억나는 것들은 대부분 고난과 헌신 끝에 행복이나 이상을 이루는 고결한 아웃사이더에 관한 이야기다. 초등학교 ‘학급문고’에서 만난 책들 중에선 ‘괴도 뤼팽’이 재미있었다. 명탐정 셜록 홈스보다 기이한 도둑 뤼팽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으니, 주류 질서의 수호자보다는 어딘가 멋지게 흠집을 내는 사람을 동경하게 된 최초의 경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뤼팽 시리즈가 최근 추리소설 붐을 타고 재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중·고교 시절은 사실상 독서의 사각지대였지만 그 중에도 선명한 기억들이 몇 가지 있다. 중학교 때 세계사를 가르치던 나승철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독후감을 몇 편 써오라는 여름방학 숙제를 내주셨다. 개학 직전 며칠간 장마비가 내렸다. 모든 숙제를 팽개쳤는데 어쩐 일인지 독후감 숙제만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창틀에 걸터앉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비롯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내가 써낸 독후감을 들고 와서 격려해주셨다. 그 후로 비오는 날 창틀에 앉아 책 읽는 버릇은 모든 창문에 방범용 쇠창살이 달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창틀에 앉아 책 읽는 버릇

    어마어마하게 단조롭던 고교 시절에도 아주 가끔씩만 있었을 특별한 순간들이 기억난다.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유독 독서를 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럴 때 창틀에 올라가 읽은 책들 중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애간장을 녹였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포화가 자욱한 가운데 파리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의사 라비크와 카페 여가수 조앙 마두가 나누는 황폐한 사랑 이야기는, 내게 처음으로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압도적 영향에 대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주인공이 즐기던 술과 담배는 내 머리가 아닌 혀와 코에 강력한 상상력을 남겼다.



    대학 신입생 시절, 라일락 향기와 최루탄 가스가 뒤섞여 날던 어느 봄날. 한 선배가 세미나 커리큘럼에 등장하지 않는 특이한 책을 추천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생동하는 육체와 지혜로운 영혼을 가진 조르바는 이성과 지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을 시원스럽게 압도했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내 잊혀지고 내 책꽂이는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비판적인 책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어느날 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몇 권만 챙겨 들고 남해안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 중 ‘약한 자의 가면’이란 시집에 실린 ‘바퀴 갈아 끼우기’는 내 여행의 동기를 나를 대신해 압축해서 설명해준다.

    ‘나는 도로 가에 앉아 있고/ 운전사는 바퀴를 갈아 끼운다/ 내가 온 곳도/ 내가 갈 곳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나는 왜 바퀴 갈아 끼우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걸까?’

    무언가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됐다.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그때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는데, 지금도 가끔씩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기형도를 그려보곤 한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책꽂이를 늘리지 않았다. 책들이 불어나면 옛 책들을 조금씩 버렸다. 그 시절의 책들은 이제 엄선되고 상징적인 것들만 살아남아 있지만, 여전히 한 켠에 자리를 유지한 채 내 정신의 근간을 상기시킨다.

    책들의 교체는 시대 변화와 내 정신의 이행을 아울러 상징한다. 이행의 방향을 일단 문화 쪽으로 정했다. 미술과 관련해서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여러 번 읽었다. 영화계로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미지 독해라는 공통점 때문에 미술 관련서적을 종종 펼친다. 최근 읽은 그림 관련 책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주 귀고리를 단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미술서적이 아니라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동명의 그림을 소재로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지어낸 러브스토리다. 화가 자신과 모델이 된 소녀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애정이 당대 사회상의 지원을 받아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한글 번역본으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인생의 전환기에 읽은 소설 중에서는 박경리의 ‘토지’가 기억에 남는데 나는 이 책을 내리 두 번 읽었다. 카뮈의 ‘이방인’ 역시 살인의 이유를 강한 햇빛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 뫼르소 때문에 잊을 수 없다. 부피감 있는 문학작품에 도전하는 일은 요즘 들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근년에는 ‘삼국지’를 읽은 게 그나마 기록적인 분량이다. 중·고교 시절 축약판으로 때운 나로서는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과는 세상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회생활에 대한 콤플렉스가 마치 ‘삼국지’를 통해 치유되기라도 할 것처럼 벼르곤 했다. 이문열 평역본을 택해 그 소원을 풀었다.

    영화계에 종사하면서부터 나를 사로잡은 것은 유럽 예술영화 감독들이었다. 이때 김소영의 ‘시네마, 테크노문화의 푸른 꽃’은 내 관심을 한국영화사 쪽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흑백영화들을 대상으로 세련되고 진지한 사고를 전개하는 이 책에 매혹돼 한동안 글을 쓸 때마다 모방·인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화 외에도 내가 책방 서가에서 자주 고르는 분야의 책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심리치료용 실용서들이다. 살면서 견디기 힘든 순간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자신의 내부에서 거듭 반복되는 어떤 종류의 징후에 직면했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름다운 상처’는 하버드대 교수이자 상담치료사인 애니 로저스가 인턴 시절에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심리장애와 맞닥뜨렸던 경험과 상호 치유과정을 기록한 경험담이다.

    속도보다 느림을, 전선(前線)이 아닌 이면을 보고 느끼라고 말하는 에세이가 유행하는 추세를 나 역시 따라다니고 있다.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읽은 직후엔 한동안 느리고 고요한 느낌으로 살았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미셸 투르니에가 글을 붙인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은 사람들의 다양한 뒷모습에서 어쩌면 그렇게 부드럽지만 촌철살인 하는 글과 이미지를 길어올릴 수 있는가 감탄하게 만들었다.

    여성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 멜로 드라마와 로맨틱 소설이 담당하는 역할은 의외로 크다. 특히 최근엔 불륜과 이혼·재혼이 남녀불문하고 큰 관심사가 됐는데, 안나 가발다의 소설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는 갑작스런 이혼으로 상심한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들려주는 옛 사랑 이야기로 감정 변화를 수용하자는 쪽으로 부드럽게 설득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여자, 너 스스로 멘토가 되라’(쉘라 웰링턴 & 캐털리스트 지음)는 조직생활에 취약한 경향이 있는 여성들에게 실용적인 용기를 주는 책이다.

    흥미로운 ‘과학과 영성의 세계’

    최근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부문은 과학과 영성(靈性)의 만남이다. 개인적으로 과학분야는 어려워서 책읽기가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대중적으로 쓰여진 과학사나 이론물리학 책들은 간혹 결정적인 독서체험을 제공한다. 브라이언 그린이 쓴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시간과 공간은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시공간으로 통합돼 있으며 그 시공간은 휘어져 있다는 등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엔 까다롭기 짝이 없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주요한 물리학 지식들을 쉬운 말로 풀어나간다. 이 책이 우리를 끌고 가려는 궁극적인 지점은 가장 미세한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가장 거대한 세계를 다루는 우주물리학이 초끈 이론을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이론이 광범위하게 입증된다면 형이상학과 신학도 환골탈태시키고 급기야 20세기 내내 서로 등을 돌린 채 달려왔던 과학과 종교, 철학이 조화롭게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과학과 영성이 대통일을 이루는 것은 아직은 현실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철학적 결단에 속한다. 물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는 에모토 마사루의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이 같은 결단을 지지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우화라고 할 만하다. 닐 도널드 월쉬가 신과의 대화를 기록했다는 ‘신과 나눈 이야기’ 3부작은 이 같은 믿음이 낳은 극단적 우화이거나 아니면 궁극적 진실인지도 모른다. 지난 설 연휴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꺼내 읽었다. 17세기 서양철학의 이단자에게서 위와 같은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철학체계가 발견된다는 게 그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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