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매출 135조원, 세전 이익 15조원. 삼성이 국내 기업으로선 전인미답의 고지를 넘었다.
- 독주하는 삼성의 추진축은 구조조정본부다. 삼성 구조본은 이건희 회장을 그림자처럼 밀착 보좌하며 그룹의 ‘그랜드 디자인’을 짜고 있다. ‘삼성의 힘’ 구조본을 이끄는 이학수는 누구인가.
이학수 본부장은 1996년 삼성화재 사장에 올랐으니 올해로 8년째 사장이다. 경력으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진작부터 부회장 승진설이 나돈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월13일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이본부장은 승진하지 않았다.
‘승진하지 못했다’가 아니라 ‘승진하지 않았다’고 한 데는 까닭이 있다. 이본부장에겐 직급이 큰 의미가 없다. 위로는 회장·부회장들이 있고, 삼성전자에만도 10여 명의 사장이 있지만, 그를 여느 사장들과 같은 급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삼성의 ‘그랜드 디자인’을 지휘하는 사실상의 2인자다. 계열사 구조조정은 물론, 회장실 업무까지 총괄한다. 사장단 인사를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스스로를 승진자 명단에 끼워넣는 것도 어색하다.
이본부장을 포함한 7명의 삼성전자 등기이사들은 지난해 368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1인당 평균 53억원 꼴이다. 그러니 연봉 몇푼 더 받겠다고 부회장 자리를 탐낼 처지도 아니다.
더욱이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막강한 위상을 감안하면 본부장은 ‘유임이 곧 승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본부장은 올해 다시 유임되면서 ‘본부장 6년차’로 접어들었다. ‘별’을 달아도 숱하게 단 셈이다.
돈줄·인사·정보 장악
삼성 구조본은 국내 대기업 구조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각 계열사에서 선발된 100여 명의 ‘엘리트’들이 재무·인사·경영진단·홍보·비서·법무·기획 등 7개 팀에 소속돼 뛰고 있다. 구조본은 각 계열사의 국내외 지사 등에서 최신 정보를 수집·가공하고, 계열사의 재무·인력구조 분석을 통해 경영상태를 진단, 견실화를 유도한다. 비(非)핵심사업 정리와 계열사 간 중복사업 조정 등도 주요 업무.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해체된 회장 비서실만큼이나 파워풀한 조직이다.
이같은 업무 특성상 구조본은 계열사의 재무와 인사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열사 재무팀은 자사 경영진보다 구조본 재무팀을 더 어려워한다고 한다. 구조본은 사장단 및 임원 인사, 이들에 대한 업적 평가도 주도한다. ‘사장들이 이학수 본부장 앞에 서면 다리를 후들거린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대기업 회장실은 대개 사옥 맨 꼭대기층에 있다.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방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꼭대기층인 28층에 있다. 그런데 이학수 본부장의 집무실이 28층에, 그것도 이회장의 방과 붙어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구조본은 그 아래층인 27층과 26층을 사용한다. 윤종용 부회장, 최도석 사장 등 다른 삼성전자 CEO들의 방은 25층에 있다.
이본부장은 주로 자택에서 업무를 챙기는 이회장을 수시로 독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전화 통화는 거의 매일 이뤄진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회장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더구나 1982년부터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한 이본부장은 1987년 이회장이 취임한 이래 그를 가장 오래 보좌한 현역 임원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회장의 속내를 좀체 읽어내기 어렵다고 했다.
“이병철(李秉喆) 선대 회장은 냉철하고 잣대가 분명하고 엄격한 분이어서 뭣 때문에 야단맞을 것인지, 뭘 물어볼 것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은 워낙 감성의 폭이 넓어 종잡기가 어렵다. 이병철 회장이 ‘도도하게 흐르는 큰 강’이라면 이건희 회장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는 바다’라고나 할까.”
회장의 최측근 참모라는 점에서 이본부장은 소병해(蘇秉海·61) 삼성화재 고문, 이수빈(李洙彬·64) 삼성생명 회장, 현명관(玄明官·62) 삼성 일본담당 회장 등 삼성그룹 역대 회장 비서실장들의 맥을 잇는 인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본부장과 소고문, 이회장은 ‘걸어다니는 회계장부’로 불릴 만큼 빈틈없는 재무·경리통으로 잔뼈가 굵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본부장은 비서실 재무팀장으로 일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그룹 전체의 재무 관리와 경영전략 및 사업구도 구상은 물론, 특히 이병철-이건희, 이건희-이재용(李在鎔·35·삼성전자 상무) 승계 과정의 지분 관리에도 깊이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옛 비서실장들이 철저하게 회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관리형 참모’였다면 이본부장은 회장의 ‘큰 그림’을 읽고 계열사 사장들을 직접 컨트롤하는 ‘경영형 참모’에 가깝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계열사에서 제출한 여러 갈래의 기획안을 나열해놓고 회장의 ‘간택’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장들과 머리를 맞대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도출한 방안을 자신의 책임 하에 들고 가서 결재를 얻는다는 것. 그는 비서실 차장 시절에도 계열사들이 올린 사업 계획서를 검토한 후 미흡한 점이 있으면 현장에서 반려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너의 ‘그림자’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최장수 회장 비서실장을 지내며 이병철 회장을 10년, 이건희 회장을 3년 동안 보좌한 소병해 고문의 위세도 대단했다. 그는 그룹의 전산화를 정착시키고 국제금융과 품질관리 개념을 도입해 삼성의 성장에 견인차 노릇을 한 것으로 인정받지만, 계열사 경영과 임원 인사에 입김을 미치면서 자신의 인맥을 형성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1990년 12월 그를 비서실장에서 퇴진시키면서 “소실장은 그룹 최고의 공로자”라고 치하했다. 삼성측은 “소실장은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후부터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이건희 회장이 만류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건희 회장이 “비서실의 과도한 경영간섭 등 월권행위 때문에 소신껏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장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소실장을 물러나게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미 그해 연초부터 소실장 계보의 임원이 소실장도 모르는 사이에 해외 지사로 발령나는 등 예사롭지 않은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학수 본부장과 구조본이 계열사 경영과 인사에 개입한다고 해서 월권 시비가 일지는 않는다. 이본부장의 경우 이건희 회장에게서 상당한 폭의 ‘대리권’을 실질적으로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이본부장에 따르면 “1997년 말 외환위기를 전후해 그룹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도 이회장은 ‘집중과 선택’이라는 원칙만 던져주고 실무는 구조본에 일임했다. ‘회사를 팔아야 한다고 판단되면 회장 눈치 보지 말고 과감하게 정리하라’고 했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기가 무척 수월했다”고 한다.
그 무렵 삼성과 빅딜 협상을 벌인 대기업 임원들은 이본부장이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협상조건을 밀었다 당겼다 하자 놀라움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 협상 때는 그런 이본부장을 보고 대우 김우중 회장이 가슴을 쳤다고 한다. 삼성 구조본이 체계화한 정보와 자료를 바탕으로 치밀한 단계별 협상안을 준비했을 뿐 아니라, 이본부장이 대우측 제안에 대해 그 자리에서 수용하고 거부하고 타협하고 결정하는 데 비해 대우 임원들은 사소한 결정사항도 일일이 김회장의 의견을 묻느라 협상을 주도하지 못했던 것.
당시 이본부장은 이른바 ‘처녀·과부론’을 내세우며 대우측을 몰아붙였다. 삼성차는 실사를 통해 어떤 회사인지 투명하게 드러났지만, 대우전자는 어떤 ‘과거’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회사기 때문에 맞교환은 불가하다는 논리였다.
비서실 차장이던 1996년 12월, 이본부장이 직접 작성한 비서실 개편안과 사장단 인사안을 들고 당시 일본에 머물던 이건희 회장을 찾아 승인을 받아온 것도 그의 파워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그가 차기 비서실장으로 내정됐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현직 비서실장을 제쳐두고 차장이 그런 임무를 수행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가 일본을 다녀온 직후 삼성은 사장단 인사를 단행, 이학수 차장을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현명관 비서실장은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옮겼다.
이본부장의 입지는 언론보도 등과 관련해 그를 배려하는 삼성측의 세심한 ‘의전(儀典)’에서도 감지된다. 한때 삼성은 기자들이 삼성 구조본 기사를 쓸 때 ‘구조본’ 앞에 ‘이학수 사장이 이끄는’이라는 수식어를 넣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학수 본부장은 그룹 내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직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구조본만큼은 회장에게 ‘노(No)’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는 것. 이본부장은 지난해 7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구조본이 호텔신라에 대해 강도 높은 감사를 실시했더니 이회장 장녀인 부진씨가 ‘내가 입사하려는 회사를 어떻게 그처럼 흔들어놓을 수 있느냐’며 내게 불만을 터뜨렸다.”
오너의 딸이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할 일은 한다는 얘기다. 구조본은 이회장이 어쩌다 개인적으로 민원을 받아 추천한 인물도 검증을 거쳐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
2000년 4월19일 이건희 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삼성의 전자 관련사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이학수 본부장
삼성 구조본의 핵심은 재무팀이다. 구조본 인력의 3분의 1이 재무팀에 포진해 있다. 삼성의 재무파트는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이건희 회장이 “현장에서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큰 관리’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기능이 다소 위축되는 듯했으나 외환위기를 계기로 그 중요성이 다시 부각됐다.
현재 구조본 재무팀장은 김인주(金仁宙·45) 부사장. 김팀장은 제일모직에서 구조본까지 줄곧 이본부장을 보좌하며 재무관리 기법을 배웠다. 그에게 재무팀장을 물려준 사람도 이본부장이다. 그래서 ‘이건희의 오른팔은 이학수, 이학수의 오른팔은 김인주’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본부장과 김팀장은 전자를 비롯한 몇몇 핵심사업만 집중 육성하기로 가닥을 잡고, 이회장을 설득해 자동차는 물론, 일부 돈 되는 사업부문까지 미련없이 정리했다. 그룹 최대의 수익원인 삼성전자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인력 감축과 부실사업 철수를 감행했다.
1999년 이회장이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자신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을 출연하기로 한 것도 이본부장의 조언에 따른 결정이었다. 삼성차도 정리하고, 숙원이던 삼성생명 상장(上場)까지 유도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이본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줬다.
“그룹 운영위원회를 연 결과 대부분 법정관리 신청에 우려를 표명했다. 재무팀만 ‘부실덩어리 대우전자와 빅딜하면 계열사들이 피해를 입으니 차라리 법정관리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법정관리로 갈 경우 법적 책임은 없더라도 회장더러 차입금을 갚으라는 얘기가 나올 게 뻔했다. 그런 사정을 보고했더니 회장은 ‘내가 갚을 테니 법정관리로 가자’고 했다. 법적으로는 출자지분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지만, 회장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내놓겠다고 했다. 그렇게 결심하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방안은 이재용 상무에 대한 편법 증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회장이 출연할 삼성생명 주식의 가치가 차입금에 미달될 경우 이회장이 50만주를 추가 출연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계열사들이 후순위채 매입 등의 방법으로 메워주기로 했지만, 삼성생명 상장에 제동이 걸리면서 아직도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이본부장이 주도한 구조조정의 결과 삼성은 1999년 상반기에 이미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떨어뜨려 그룹의 여유 역량을 키웠다. 이를 기반으로 삼성은 지난해 매출 135조원, 세전 이익 15조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계열사 평균 부채비율도 65%로 낮아졌다.
“줄 잘 선 게 출세 비결”
평사원으로 입사해 49세에 CEO(삼성화재)에 오르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이본부장은 주저하지 않고 “줄을 잘 섰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누군가에게 줄을 잘 댔다는 게 아니라,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코스를 선택해 밟아왔다는 의미다.
경남 밀양 출신인 이본부장은 부산상고, 고려대 상학과와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공채 12기로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동기들 대부분은 서울에 있는 삼성물산이나 해외 근무를 지원했지만, 그는 공장 근무, 그것도 지방 공장 근무를 원했다. “‘빽’도 없고 영어도 못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원가 계산이나 회계는 곧잘 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실무부터 배워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
이본부장은 아무 연고도 없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를 1지망으로 지원했는데, 지원자가 적어 무경쟁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동료들 대신 숙직과 일직을 도맡아 했다. 숙직을 하면 24시간 돌아가는 공정을 빼놓지 않고 지켜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날 공장 곳곳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쯤 관심을 쏟다보니 실 뽑고 옷감 짜는 공정에 대해 현장의 방적과장이나 제직과장보다 더 많이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국내 모방직업계의 회계 시스템은 극히 낙후되어 있었다. 양복지 생산공정은 10여 단계에 이를 만큼 복잡했다. 솜을 들여와 실을 뽑고 천을 짜고 염색을 해서 옷감을 만들기까지 무려 120일이 걸렸다. 더욱이 원자재인 솜은 무게로 사고, 완성품인 옷감은 길이로 팔다보니 단가를 계산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저 주먹구구로 총 생산량을 총 경비로 나눠 단가를 뽑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조금만 까다로운 조건으로 주문을 해와도 그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입사 2년차 때 이본부장은 회사측에 “현장 부서별로 한 명씩 뽑아 태스크포스를 만들어주면 원가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이 팀을 이끌고 석 달 남짓 야근을 밥 먹듯 한 끝에 원사(原絲)의 일정한 길이에 소요되는 스팀, 전기료 등을 계산, 국내 모방직업계 최초로 원가 분석 시스템을 개발해냈다. 그는 이 공로로 월급의 6배에 해당하는 30만원의 격려금을 받았고 얼마 후 경리과장으로 승진했다.
‘삼성 개혁’ 브레인
대구공장에서 8년간 근무한 이본부장은 1979년, ‘임원 승진 0순위’로 꼽히던 제일모직 본사 관리부장으로 영전했다. 당시 회사 월례회의가 열리면 공장측에선 “본사는 실무를 모른다”고, 본사측에선 “공장은 이론에 어둡다”고 주장하며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무를 두루 꿰는 이본부장이 본사 관리부장으로 간 뒤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병철 회장 시절인 1982년, 회장 비서실에 계열사의 경영 관리를 맡는 운영팀이 만들어지면서 운영1팀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20년 넘게 회장 부자(父子)로부터 ‘선택’을 받았다.
이본부장은 1985년부터 비서실 재무팀 이사·상무·전무를 거치며 그룹 재무통으로 입지를 굳혔다. 1992년 비서실 차장(부사장)에 오른 뒤에는 비서실 재무팀을 총괄한 것은 물론, 이건희 회장의 지시를 받아 계열분리 계획의 실무 작업을 지휘하는 등 ‘삼성 개혁’의 브레인으로 뛰며 그룹 경영을 꿰뚫어 보게 됐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이본부장이 1993년 말, 정확하게 12년 만에 비서실을 떠나 삼성화재 부사장으로 옮기면서 비서실 차장제가 폐지됐다는 점. 그러나 이본부장이 삼성화재 사장을 거쳐 1996년 비서실로 돌아왔을 때는 차장제가 되살아나 다시 그의 자리가 됐다. 차장제가 그의 동선(動線)에 따라 없어졌다, 생겼다를 거듭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차장의 직급도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격상됐다. 그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각별한 배려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사례다.
‘신경영’ 바람이 한창이던 1994년, 삼성은 계열사별로 임원들을 차출해 6개월 과정의 최고경영자 교육을 실시했다. 임원들은 이를 ‘솎아내기’를 위한 준비 단계쯤으로 여겨 극도로 기피했다. 최고경영자 교육을 삼청교육대에 빗대 ‘용인교육대’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이본부장을 교육대상에 포함시켜 “이학수도 보내니 걱정 말라”고 임원들을 안심시켰다.
“CEO라 불러다오”
이본부장은 아직도 자신에게 ‘재무통’ ‘경리통’ 같은 말이 따라붙는 것을 불만스러워 한다. 이미 CEO가 된 지 오래이고, 더구나 구조조정본부장은 재무뿐 아니라 기획, 인사, 홍보, 법무 등 종합적인 시각에서 계열사들을 조망하는 자리인데도 특정 분야 전문가로만 분류하는 것을 마뜩해하지 않는다는 것. 삼성 관계자는 “이본부장은 삼성화재 대표이사로 부임해 비서실로 복귀할 때까지 1년 8개월 동안 이 회사의 시장점유율을 17%에서 24%로 끌어올렸고 매출액도 두 배나 성장시켜 전문경영인의 자질을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본부장은, 처음 만난 사람들에겐 매우 차가운 사람으로 기억되곤 한다. 금테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매가 여간 날카롭지 않다. 좀처럼 외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 보니 딱딱한 이미지가 굳었다. 이본부장을 처음 대면했던 한 삼성 출입기자는 “그는 웃는 것마저 철저하게 생각해서 결정한 다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웃는 것보다 한 템포 늦게 웃는 것 같았다”고 취재 후기를 쓰기도 했다. 이본부장 자신도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당신 너무 권위적인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본부장을 여러 차례 만나본 사람 중에는 그가 ‘의외로’ 소탈하고 솔직하며 다정다감한 면모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본부장과 비서실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 퇴직 사원은 “업무에 워낙 빈틈이 없어 주변 사람들을 긴장시키긴 하지만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다. 함께 일하면서 그가 냉정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부담없는 자리에선 농담도 잘하고 누구든 격의 없이 대하면서 좌중을 리드해 ‘이(李)탤런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는 것.
이본부장은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솔직한 성미라 가령 기자들과의 모임에서 이재용 상무나 부진씨의 경영승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면 정치적인 해명으로 우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삼성에 1년이면 1000명씩 들어오는데, 그 중에 회장 아들, 딸 한둘 끼여 있다고 뭐 문제 될 게 있냐” “자녀들이 경영에 참여하려 하고 능력들도 있는데, 아버지가 그 정도도 마음대로 못하면 무슨 보람으로 기업을 경영하겠냐”며 대놓고 핏대를 올리는 우직함과 ‘촌스러움’을 드러낸다. 막상 이렇게 나오면 분위기가 더 심각해지기도 어렵다.
노무현과는 부산상고 동문
지난해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노당선자와 이본부장의 친분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가 나돌았다. 이본부장이 노당선자의 부산상고 1년 선배인데다, 이본부장이 삼성화재 대표이사로 있을 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노당선자가 이 회사 고문 변호사를 맡은 적이 있다는 것. 이본부장이 삼성차 문제를 처리하면서 당시 ‘삼성차 살리기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노당선자와 교류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삼성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단지 재경(在京) 지방고 출신 1년 선·후배의 ‘일반적 교분’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라고 한다. 부산상고 출신들은 대개 부산을 비롯한 영남권 금융기관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일이 잦다는 것.
노당선자가 삼성화재 고문 변호사를 맡은 것도 큰 의미는 없다고 한다. 손해보험 회사는 업무 특성상 여러 명의 고문 변호사로부터 조력을 받는데다, 노당선자의 경우 LG그룹 계열사에서도 고문 변호사를 맡은 적이 있다. 실직한 유망 정치인에게 고만고만한 기회를 주며 관리하는 것은 어느 대기업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노당선자가 삼성차 살리기에 나섰던 것도 노동 문제 차원에서 근로자들의 입장을 배려한 것이지, 삼성이라는 기업을 편들어서가 아니라는 시각에 더 무게가 실린다.
노당선자와 이본부장이 가까운 사이로 알려질 경우 새 정부 출범 후 삼성이 특별히 혜택을 볼 것까지는 없다 해도 최소한 외부에서 삼성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삼성측이 이런 소문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말이 자꾸 만들어지면서 살이 붙는 바람에 외려 부담을 느낀 삼성이 서둘러 사태 수습에 나섰다는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와 재벌들 사이에 불붙은 구조본 해체 논란은 양측이 서로 발톱을 숨기고 한 발씩 물러나면서 탐색전으로 1라운드를 마쳤다. 하지만 노당선자의 재벌개혁 의지가 워낙 강한 만큼 이 논란은 새정부 출범 후 어떤 양상으로든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구조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구조본을 앞세운 삼성이 새 정부와 어떤 관계를 설정해갈지, 그 과정에서 이본부장이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