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딩크가 살려놓은 한국 축구. 바둑으로 치면 이제 포석이 끝났을 뿐이다.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고 한순간에 더 기세를 떨칠 수도 있다. 중반전과 끝내기가 남아 있다. 쿠엘류 감독에게 이창호 같은 완벽한 끝내기를 기대한다.
이 중에서도 바둑은 멀쩡했던 말들이 어느새 죽기도 하고 다 죽었던 말들이 한순간에 기적처럼 살아나기도 한다. 바둑알은 그저 ‘검은 돌-흰돌’일 뿐이다. 그런데도 바둑판 위에서 이들은 천만조화를 다 일으킨다. 흰 돌 검은 돌로 나누어진 바둑알은 컴퓨터 언어인 ‘0, 1’과 비슷하다. 그저 부호일 뿐이다. 컴퓨터에서 0과 1로 나타내지 못하는 말들이 없듯이 바둑에서도 이 두 가지 색으로 수천만 가지의 ‘전투 상황’을 조합해낸다. 따라서 부호에 불과한 바둑돌의 빛깔은 바둑 두는 사람들이 어떻게 정하든 전혀 관계가 없다.
바둑황제 조훈현은 전신(戰神)이다. 한마디로 싸움귀신이다. 혹자는 ‘화염 방사기’라고도 부른다. 그의 바둑은 바람처럼 빠르지만 풀잎처럼 부드럽다. 조자룡처럼 창 한 자루 들고 조조의 백만군대에 뛰어들어가 순식간에 적진을 뒤흔드는가 하면 어느새 적토마에 몸을 싣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는 단언한다. “바둑은 결국 실수를 안 해야 이기는 게임”이라고.
그래서일까. 조훈현의 제자 ‘돌부처’ 이창호는 끝없이 기다린다. 뭘 기다리는가. 바로 상대가 실수할 때까지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강태공’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선 그를 돌부처의 한자식 표현인 ‘석불(石佛)’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이창호라는 저 석불은 도저히 벨 수 없으며 오직 가장 둔탁하고 묵직한 칼 둔도(鈍刀)만이 벨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세운 게 ‘둔도’ 후야오위(胡耀宇).
과연 후야오위는 이창호와 대적할 만했다. 처음 두 번 만나 석불을 보기좋게 무너뜨렸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의 최정예 기사 5명씩이 나와 붙는 ‘진검승부’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선 그 둔도도 석불의 힘에 여지없이 두동강나버렸다. 그 전까지 후야오위는 5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 한국 바둑엔 천재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들이 만약 바둑이 아닌 장기를 두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장기는 장기알 하나하나마다 역할(Role)이 있다. 장기알은 그 일정한 역할에 따라 움직인다. 축구나 야구 농구 등 단체 경기 선수들에게 일정한 포지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기업 조직에서 사람마다 직책이 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단체경기에서 선수들은 장기판의 장기알 같다고 할 수 있다. 기업에서는 회사원들이 ‘장기알’이다. 이러한 면에서 축구나 농구 감독들 그리고 일반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자기 역할을 못하는 선수나 조직원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탁구 배구와 비슷한 바둑
그러나 장기와 바둑은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르다. 장기는 한마디로 ‘적의 임금 쓰러뜨리기’다. 부하들이 다 살아 있어도 임금(宮)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거꾸로 부하들이 다 죽어도 최후까지 임금이 살아 있으면 승리한다.
장기는 축구나 농구 같은 ‘골 넣는 운동’과 비슷하다. 우선 골을 넣는 것보다 골을 안 먹는 게 중요하다. 장기에서도 임금(宮)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게 최우선이다. 졸(卒)이나 마(馬) 상(象) 포(包)는 보디가드처럼 온몸을 던져 임금을 향해 쏟아지는 창과 화살을 막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적의 임금(宮)을 향해 공격해야 한다. 축구나 농구에서 수비가 강한 팀이 이기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바둑은 다르다. 바둑은 한마디로 ‘땅뺏기’다. 바둑알은 어떤 바둑알이든 하는 일이 다 똑같다. 직책도 평등하다. 바둑알은 우선 자신부터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 산다는 건 불가능해서 반드시 다른 바둑알과 끊어지지 않아야(연대) 한다.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생존 띠’를 만들어야 한다.
바둑판엔 싸움터가 따로 없다. 바둑알이 놓여지는 곳, 바로 그곳이 싸움터다. 그리고 그 땅이 어느 곳이든 싸워 이겨 ‘두 집’이 나면 바로 그곳이 자기 땅이 된다. 이런 면에서 서비스권이 있는 배드민턴 복식경기 등과 비슷하다. 축구나 농구는 모든 공격과 수비가 골대에 집중되지만 배드민턴이나 탁구 배구는 모든 곳이 싸움터다. 바둑의 ‘4귀’와 ‘4변’이 두 집 내기가 쉽듯이 배드민턴 배구 탁구에서 공격 성공률이 가장 높은 곳은 상대 코트의 모서리와 양변이다. 탁구 배드민턴에서의 서비스권은 바둑에서 흑과 백이 기회 균등하게 서로 번갈아 두는 것과 똑같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바둑 장기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책 ‘천 개의 고원’에서 ‘바둑과 장기’의 본질에 대해 명쾌하게 갈파한다.
“장기의 말들은 모두 코드화되어 있다. 즉 행마나 포석, 그리고 말끼리의 적대관계를 규정하는 내적 본성 또는 내적 특성을 구비하고 있다. 각각의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마(馬)는 마(馬)이고 졸(卒)은 졸(卒)이며 포(包)는 포(包)고 차(車)는 차(車)다. 말 하나하나는 소위 상대적 권력을 부여 받은 언표의 주체와 비슷하며 이러한 권력들은 언표 행위의 주체, 즉 장기를 두는 사람 또는 놀이의 내부성 형식 속에서 조합된다.
이에 비해 바둑은 작은 낟알 아니면 알약이라고 할까, 아무튼 단순한 산술단위에 지나지 않으며 익명 또는 집합적인 또는 3인칭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며 그것이 한 명의 남자나 여자 또는 한 마리의 벼룩이나 코끼리라도 상관이 없다. 바둑알들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서 내적 특성 같은 것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상황적 특성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말끼리의 관계도 장기와 바둑은 완전히 다르다. 장기의 말들은 내부성의 환경 속에서 자기 진영의 말들끼리 또는 상대방 진영의 말들과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는다. 구조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바둑알은 오직 외부성의 환경만을, 즉 일종의 성운이나 성좌를 가진 외부적인 관계만을 구성하며 이들 관계들에 따라 집을 짓거나 포위하거나 깨어버리는 등 투입 또는 배치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둑은 단 한 알로도 공시적으로 하나의 성좌 전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반면 장기의 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또는 통시적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장기는 전쟁이기는 하나 제도화되고 규칙화되어 있는 전쟁으로서 전선과 후방 그리고 다양한 전투를 포함해 코드화되어 있다. 이에 비해 전선 없는 전쟁, 충돌도 후방도 없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 전투마저 없는 전쟁, 바로 이것이 바둑의 본질이다.”
그렇다. 장기는 그 조직이 매우 수직적이다. 그러나 바둑은 수평조직(연대)이다. 장기에서 장기알은 각자 자기 맡은 바 역할에 따라 임금을 위해 장렬히 몸을 던지는 게 최고 미덕이다. 따라서 장기조직은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장기는 임금(宮)이 있는 곳이 최전방이다. 임금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후방이다. 모든 물자와 병사는 모두 최전방에 집중된다. 축구나 농구에서 골대에 공과 선수들이 몰리는 것과 똑같다. 명령도 위에서 아래로 물흐르듯이 흐른다. 결국 전투의 승패는 지휘관의 지휘력이 좌우한다. 지휘관이 아둔하면 그 전투는 하나마나다. 따라서 축구나 농구경기에서 선수들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기 맡은 바 임무다. 농구에서 강동희 김승현 등 포인트가드는 우선 게임 리드에 충실해야 하고 센터는 골밑부터 장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대 공격에 쓰러진 전우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 센터 서장훈이 외곽에 나와서 슛만 해댄다면 골밑은 누가 지킬 것인가. 이런 면에서 히딩크 축구는 각 ‘조직원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대표적인 예다.
제도화·규칙화된 히딩크 축구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 김호곤 감독은 말한다.
“월드컵을 통해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을 정립했다. 히딩크의 축구는 한마디로 ‘자기 위치를 지키면서 힘을 비축했다가 필요할 때 폭발시키는 축구’다. 예전에는 무턱대고 많이 뛰기만 해 후반 들어서는 제 풀에 지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떨어지곤 했는데 지금은 어느 팀과 상대해도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90분 내내 힘 있는 축구를 하고 있다. 그 힘의 원천은 스피드와 개인기다.”
히딩크 축구는 한마디로 ‘제도화’되고 ‘규칙화’된 축구다. 선수들은 자기 포지션에 따라 일정하게 ‘코드화’되어 있다. 장기판의 장기알처럼 일정한 임무가 부여돼 있다. 독일 같은 촘촘한 조직력 축구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땐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공격을 하다가 볼을 뺏겨 순간적으로 역습을 당할 때 조직력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이다. 상(象)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마(馬)가 있게 됐을 때 그 마(馬)는 잽싸게 변신해 상(象)의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걸 할 줄 모른다. 히딩크는 그 원인을 선수간의 ‘상의 하달식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보았다. 즉 나이 많은 고참 선수가 일방적으로 나이 어린 후배 선수에게 지시를 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나이 어린 선수라 할지라도 그의 포지션에 따라 나이 많은 고참 선수에게도 지시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히딩크는 경기장 안에서 선수들끼리 이름을 부를 때 ‘님’자나 ‘형’자를 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히딩크축구는 어디까지나 코드화된 장기조직과 비슷하다. 멀티플레이어를 운용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히딩크는 이영표 박지성 유상철 등 멀티플레이어를 중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들을 다용도로 쓸 수 있다는 차원이었다. 중앙 수비수 홍명보가 부상으로 더 이상 뛰지 못할 경우 그 빈자리를 미드필드에 있던 유상철로 메우는 식 말이다. 장기에서 임금(宮) 곁을 지키던 포(包)가 죽었을 때 차(車)로 그 빈자리를 맡게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진정한 멀티플레이어란 토털축구에서 나온 개념이다. 토털축구란 골키퍼를 제외한 10명 전원이 어느 포지션이든 구애받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식 축구를 말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중앙 수비수가 최전방 공격수가 될 수도 있고 최전방 공격수도 최종 수비수가 되는 축구다. 당연히 모든 선수는 공격도 잘해야 되고 수비도 잘해야 한다. 진정한 멀티플레이어인 셈이다. 이래서 크루이프는 “토털축구를 하려면 세계적 수준의 선수가 한 팀에 최소한 6, 7명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토털축구는 바둑의 수평조직 축구다. 모든 선수가 역할은 있지만 그 역할은 상황에 따라 수백, 수천번도 변할 수 있다. 장기에서 포(包)는 포(包) 역할밖에 못하지만 바둑에서 바둑알은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털농구’의 한계
한국 프로농구에서도 한때 ‘토털농구’가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지난 시즌 KCC 신선우 감독이 도입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전술이다. 신감독은 지난시즌 이 토털농구로 한때 꼴찌였던 팀을 시즌 막판 연승행진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신감독이 추구한 토털농구란 간단히 말해 선수 5명 모두가 포지션에 상관없이 신장 우위를 이용해 골밑을 공략하는 것이다. 문경은 조성원 김병철 우지원 등 슛도사들만 슛을 쏘는 게 아니라 누구든 자기를 맡고 있는 상대가 자기보다 키가 작으면 그걸 이용해 슛을 날리는 것이다. 포인트가드 이상민도 상대 가드가 작을 경우 포스트에서 1대1 공격을 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 더블팀이 붙게 되면 외곽으로 공을 내줘 3점슛을 노린다.
하지만 올시즌 KCC의 토털농구는 실패한 듯싶다. 우선 올 시즌 용병 농사가 시원찮다. 지난 시즌 재키 존스는 골밑은 물론 외곽슛도 정확해 토털농구에 적합했다. 올시즌 KCC는 여러 차례 용병을 바꿨으나 여전히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양희승과 트레이드 된 전희철도 적응에 실패한 듯 보인다. 양희승 역시 재키 존스처럼 내외곽이 다 가능한 선수지만 전희철은 슈터라고 보기 어려울 뿐더러 추승균과 포지션이 겹친다. 여기에 포인트가드 이상민의 체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일부에선 이상민의 지나친 개인플레이가 팀워크를 깨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농구전문가들은 토털농구는 경기 도중 잠깐 써먹는다면 모르지만 시즌 내내 쓸 경우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공을 가진 1명 외에 나머지 4명이 우두커니 서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설픈 토털농구는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최희암 감독이 연세대 감독 시절 즐겨 썼던 철저한 분업농구가 낫다는 것.
2월3일 내한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움베르토 쿠엘류 한국 축구대표팀 신임 감독
배드민턴 복식 경기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두 선수 사이다. 상대는 그 지역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곳을 찔러오는 셔틀콕은 두 선수가 서로 치려다 보면 라켓이 엉키기 쉽고 또 서로 미루다 보면 아무도 쳐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복식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호흡이다. 그 호흡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바둑판의 바둑알 정신과 같다.
“축구는 발레와 같다”
히딩크의 축구전술은 각 선수들의 역할을 중시하는 장기판 논리다. 그러나 그는 일단 운동장을 떠나면 23명 모두를 대등하게 대하는 바둑판 논리를 따랐다. 후보선수일지라도 인격을 존중했다. 한마디로 축구전술은 장기논리, 축구팀관리는 바둑논리를 따랐다.
새로 온 쿠엘류 감독은 어떨까. 그의 축구스타일과 축구철학은 뭘까. 아직까지는 2월 3일 한국에 왔다가 나흘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그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다.
“축구는 발레와 같다. 발레는 여러 움직임이 모여 작품이 된다. 격렬한 축구경기도 슬로모션으로 돌려보면 발레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이 동작이 잘 어우러지면 좋은 작품(경기)이 된다.”
“볼이 있으면 빼앗아야 하고 볼을 잡으면 잃지 않는 축구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빠른 축구가 주류이기 때문에 기술 등도 여기에 부응해야 한다.”
“세대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펠레도 마라도나도 은퇴했다. 그래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홍명보가 은퇴했다고 한국 수비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한국팀은 정신력은 물론 빠른 공격시 조직력이 좋다. 또한 선수들이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줄 알고 두 선수끼리의 패스도 탁월하다. 그러나 상대가 갑자기 밀어붙일 땐 수비수들이 눈에 띄게 흔들린다.”
“여러분이 상당 기간 나를 히딩크와 비교하면서 미안해할 텐데 괜찮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이룩한 4강신화에 더 이상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젠 깨어나야 된다.”
“내가 추구하는 축구는 한마디로 압박(compact)축구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선수가 체력과 스피드를 갖춰야 하며 빈 공간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수비가 탄탄해야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표현방법은 다르지만 이미 귀에 익은 말들이다. 쿠엘류의 축구라고 해서 히딩크의 축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쿠엘류의 말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쿠엘류의 말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히딩크 저리가라다. 그러나 축구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당장 무엇부터 최우선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다행히 쿠엘류는 한국 수비진의 세대교체의 시급성을 언급했다. 그렇다. 지금 한국팀의 최대 문제는 수비라인이다. 수비수는 하루 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등 노장 수비수는 이번 월드컵으로 임무를 다했다. 새로운 젊은 피를 수혈해야 한다. 마침 쿠엘류는 명수비수 출신이다. 그의 높은 안목을 기대한다.
또 한 가지 히딩크의 역할 중시 축구를 한 차원 높여야 한다. 토털축구의 ‘바둑알 정신’을 가미해야 한다. 선수들간의 협력공격-협력수비로 틈새를 없애야 한다. 역할을 수시로 바꿔가며 한순간 조직이 흐트러졌을 때 허둥대지 말아야 한다.
들뢰즈는 말한다. “장기가 기호론이라면 바둑은 순수한 전략이다. 장기는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해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장소를 차지해야 된다. 그러나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이다.…… 장기가 공간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는 데 반해 바둑은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한다(외부를 공간 내의 하나의 영토로 만드는 것. 이 영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인접한 제2의 영토를 건설하는 것. 적을 탈영토화하기 위해 적의 영토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것. 자기 영토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를 향해 스스로 탈영토화하는 것).”
기대되는 쿠엘류의 끝내기 솜씨
스포츠는 생물이다. 그저 살아 끊임없이 꿈틀댄다. 그 출발점이나 도착점도 없다. 그러나 이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선수들의 코드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선수들의 코드화가 지나치면 팀이 굳어져 활기를 잃는다. 이럴 땐 선수들을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임무도 역할도 다 똑같은 바둑알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다시 선수들에게 그들의 역할과 의무를 강조하면 그 팀은 한 차원 높은 ‘장기+바둑조직의 팀’이 된다.
맨 처음 볼 땐 그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따름이다. 그러나 의심하고 분석하고 따져보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러다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아 물끄러미 바라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나 이미 맨 마지막에 본 산과 물은 맨 처음에 본 그 산과 그 물이 아니다. 한 차원 높아진 것이다.
쿠엘류가 할 일은 명확하다. 이제까지 ‘히딩크 축구는 한국 축구’였다. 그러나 쿠엘류가 온 이후부턴 ‘히딩크 축구는 한국 축구가 아니다.’ 그리하여 쿠엘류가 언젠가 떠날 때 ‘한국 축구는 히딩크+쿠엘류 축구’가 돼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엔 ‘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바둑, 한국 정치인 그리고 남자의 ‘그것’이 그렇다. 이 중에서도 바둑은 멀쩡했던 말들이 어느새 죽기도 하고 다 죽었던 말들이 한 순간에 기적처럼 살아나기도 한다. 바둑판에서 바둑알이 다 죽었다 살아나는 건 순전히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등 천재 기사들이 놓기 때문에 가능하다.
히딩크가 살려놓은 한국축구. 바둑으로 치면 이제 포석이 끝났을 뿐이다.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고 한순간에 더 기세를 떨칠 수도 있다. 중반전과 끝내기가 남아 있다. 쿠엘류 감독에게 이창호 같은 완벽한 끝내기를 기대한다. 바둑에서 한 집은 하늘이고 반 집은 땅이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