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정권의 대북 뒷거래를 민족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당연시하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통치행위론, 평화유지를 위한 불가피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대상은 모든 부문에서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 청렴도의 투명성 여부는 곧 그 나라의 신인도와 삶의 질까지 재는 척도다. 현행법을 어기며 뒷거래를 한 게 사실로 드러난 이상, 그 내막을 밝히라는 요구는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팀을 태운 버스 행렬
새 정권이 들어설 때면, 권력의 힘은 정점에 이르러 천하를 호령하는 목소리는 더욱 우렁차다. 신 권력의 도도한 물길을 막을 자 누구인가. 강안(江岸)의 반대 목소리는 침묵해야 한다. 오로지 찬탄과 박수만 존재할 뿐이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어떤가.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당선자 자신과 그 주변에 포진한 영 파워들의 권력 향유는 과거와 다른 데가 있는가, 없는가. 전임 권력자들과는 생래적으로 다르다는 옹호론이 있는가 하면 ‘권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며 유유상종을 장담하는 주장도 들린다. 정권 인수위원회를 둘러싸고 외부에 전해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적한 말이다.
인류연표로는 21세기를 넘어섰고, 한국 정치사의 시침(時針)도 민주-국민-참여시대로 발전했다지만, 반세기 동안 절대자로 군림해온 권력의 얼굴이 과연 이번에는 어떤 모양을 하고 나타날지 그게 궁금한 요즘이다.
목하 새 권력을 창출한 영 파워의 진영에선 환호와 찬가가 울려퍼지고 있는 반면, 얼굴마다 세상풍파의 흔적이 역력한 올드 제너레이션들의 표정엔 패배와 절망의 빛이 어른거린다. 그런 감정은 곧 분노로 변하지만 이내 체념이 엄습한다. 그리고 긴 침묵 속으로 침잠한다. 이게 요즈음 5060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5년 전, ‘국민의 정부’를 제창한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 ‘헌정사 최초의 민간정부’라느니, ‘지역 갈등을 뛰어넘은 민족화합의 기수’라느니, ‘국난을 극복할 준비된 대통령’이니 하면서 새 집권자를 향한 극찬의 ‘용비어천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해보자.
새 권력 향한 ‘讚歌’의 종말은?
그로부터 2년 뒤,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목에 건 권력자에게 던져진 그 무수한 찬양은 또 어떠했는가. ‘2000년에 활짝 핀 인동초’ ‘자랑스런 평화 대통령!’ 정도의 표현은 약과다.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당신이 계시기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더욱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아부의 극치도 우리는 목격했다.
그런데 2003년 이 시간, 권좌를 곧 떠날 그 권력자에겐 날카로운 철편(鐵鞭)의 말들이 던져지고 있다. ‘로비해서 목에 건 노벨상’ ‘돈으로 산 남북정상회담’ ‘지역분열주의자’ ‘부패한 절대권력’ 등등…. 노심초사로 남북화해와 통일의 터전을 마련하려 애썼던 자신에게 던져진 돌팔매에 DJ는 한편 서운하고 분노마저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태는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 일이 자칫 꼬였다가는 지난날, 군부정권의 절대 권력자 전두환씨가 밟은 길을 DJ 자신이 직접 체험하게 될지도 모를 판이다.
국회 청문회 출석과 사법처리 대상이 돼야 했던 전씨의 그 고난의 퇴임 시절을 DJ도 답습하게 될까? 팔순이 넘은 노(老) 전임 대통령을 그렇듯 혹독하게 다룰 수야 없지 않느냐는 정상론이 있는가 하면, 통치자라도 법을 어겼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강경론도 있다.
게다가 ‘DJ 문제’는 노무현 신임 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과 개혁 의지를 테스트하는 최초의 시험대가 될 듯하다. 노무현 당선자가 DJ의 정치적 후원 하에 대권 장악에 성공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동지론과 ‘뿌리론’에도 불구하고, 새 권력자가 가야 할 길은 따로 있다고들 말한다. 당선자측 인사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로 당면하게 될 ‘DJ문제’를 새 권력자는 어떻게 처리하고 넘어갈 것인가. 국민정서와 개인적 의리 사이의 고뇌에 찬 선택은 사실 새 권력자에겐 지난한 결정이겠지만 세간의 관심은 그것에 모아질 수밖에 없다.
과연 방법은 없을까? 그 해답을 5공화국과 6공화국의 권력사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노태우 권력이 등장하면서 선택한 ‘단절의 결별’을 주목하라는 주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양인의 관계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전씨가 노씨의 강력한 후견인이요 킹 메이커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물러만 보이던’ 노씨가 전씨의 통치기간 중에 있었던 범법행위가 정치적으로 부각되자, 그 끈끈한 연을 단절한 것이다. 세간에선 이 일을 흔히 전씨의 ‘백담사 귀양’이라고들 했다. 노씨의 신 권력은 전씨를 국회 청문회로도 끌어냈다. 노씨로선 ‘모진 결심’을 한 셈이다. 하지만 그게 권력의 속성이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후원자나 친구의 정은 끊을 수밖에 없다.
DJ와 노무현,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런 고뇌의 시간이 올지는 미지수다. 문제의 사안이 다르고 당사자들의 성품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새 집권자인 ‘또 다른 노씨’도 어차피 선택의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며, 그 선택 여하에 따라 개혁과 정의의 척도를 가늠해보는 국민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DJ정권의 대북 뒷거래를 둘러싸고 이견은 분명 존재한다. 당사자인 DJ는 통치행위론과 평화유지를 위한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야당은 북한에 건넨 돈의 조성과 전달에 명백한 범법행위가 있다면서 DJ와 관련자들의 사법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특별검사제를 통한 철저한 수사를 전제로 한 공세다.
노무현 당선자의 입장은 강경에서 타협 쪽으로 후퇴를 거듭해왔다. ‘법대로 조사’에서 ‘국회 논의 후 결정’으로 말을 바꿨다. 노무현 캠프에선 ‘DJ의 직접 해명’에서 ‘특검제 검토’라는 말도 들리고는 있다. 딱히 종잡기 힘든 혼선이다.
이런 와중에서 2월14일 오전 DJ는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을 통해 현대상선의 대북송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큰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대북송금 파문에 대해 직접 사과했다. 또 정부는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대북송금을 수용했고, 이것이 공개적으로 문제가 된 이상 모든 진상을 밝혀야 하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자신이 지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비밀 뒷거래에 분노하면서 엄정한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여론은 되레 높아지고 있다. 물론 민족지상주의의 관점에서 DJ정권의 대북 현금 지원을 당연시하는 주장도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처럼 문제를 확대시킨 장본인으로 일부 언론을 지목하면서 그 책임을 따지는 논고도 한창이다.
한 언론의 여론조사는 ‘DJ문제’를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라고 보도했다. 국민들로선 우선 대북 뒷거래의 내막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북한 김정일 앞으로 얼마의 현금(달러) 다발이 어떻게 건네졌으며, 그 돈이 과연 핵 개발에 사용됐는지 여부를 알고 넘어가야겠다는 뜻이다.
반면 대북 현금 지원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경비로 그것을 미주알고주알 밝혀내는 것은 현존의 남북화해와 장차의 민족적 대동단결을 해치는 짓이라는 반대의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서독의 동독 지원 사례를 근거로 제시한다. 서독의 경우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동독에 지불해왔다는 것이다. ‘덮고 지나가라’는 소리는 꼭 정부여당 쪽에서만 들리는 것은 아니다. 제법 이름이 알려진 지식인들의 입에서도 민족주의 우선론과 대북지원의 당위론이 강조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한 일간지에 입사한, 이름이 잘 알려진 한 대학교수의 경우다. 도올 김용옥이다. 그는 호칭이나 존칭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그 아호와 이름 석자면 충분한, 말하자면 명칭이 필요 없는 독보적 인물이다. 철학박사, 대학교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한의사가 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젠 신문기자로 변신을 했다. ‘기자 김용옥’, 이것이 요즘 그의 직업이요 신분이다.
그가 언론보도라는 생소한 장르에 발을 들여놓은 뒤 지면에 발표한 르포 기사나 논평들이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폭 넓은 스펙트럼과 인맥을 동원한 그의 기사엔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도 많고, 또 어떤 때는 ‘특종거리’도 발견되곤 했다.
그리고 지난 2월10일, 도올은 자신이 소속한 일간지에 요즘 한참 세간의 관심과 시비의 핵심으로 떠오른 김대중 정권의 대북 비밀 뒷거래 논란 문제에 관해 장문의 논평기사를 썼다.
도올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한국의 최고 지성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더러 학자적 양심과 중도적 철학사상을 스스로 자랑해왔고 또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그의 글이나 말을 경청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올 김용옥이란 필명 아래 쓰인 글은 일단 객관적 진실을 담고 있으리라는 선입견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학문적 논란에 관한 것이라면 논란의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문제의 기사에서 다룬 내용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세속의 핫 이슈다. 그런 만큼 그 글의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이미 도올의 글을 놓고 정치권 일각에선 격찬의 인용을, 또 다른 쪽에선 학자적 양심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대북 뒷거래 시비에 관한 이야기를 애써 도올의 글과 연결지은 것도 그의 주장이 한쪽의 논리를 대변한 듯한 인상을 풍겼고, 그럼에도 그의 지성적 호소력이 자칫 국가적 문제에 대한 여론의 오판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서다.
도올의 글은 명시적 외침으로 시작된다. ‘언론은 ‘민족자결’ 눈떠라’, 이것이 그 글의 큰 제목이다. 글을 관통하고 있는 논리와 주장은 대북지원의 불가피성과 옹호에 있다. ‘열강의 세계화 전략 속에서 북녘의 경제주권은 지켜야 한다’는 전제 아래 대북 비밀 송금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이 문제를 비판한 언론보도에 대한 신랄한 질타로 이어진다.
‘북 송금에 담긴 역사적 진실’이란 작은 제목까지 붙은 도올의 기사는 예의 그 도도한 글의 흐름과 그 나름의 논리 전개로 독자를 압도한다. 또한 철학을 전공한 학자답지 않게, 어찌 보면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는 남북문제, 국제정치, 국내정치, 경제분야 등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각종 예시와 데이터까지 도입하는 완벽미도 과시했다.
도올이 정치권의 뜨거운 문제를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과감한 터치와 비판적 언어를 동원하면서 써내려간 데는 어떤 필연적 사유가 있을 것이다. 짐작건대 그 글을 쓴 심경은 대북 송금지원을 까발리려는 야당이 미운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놓고 북치고 장구치는 일부 언론, 아마도 그의 눈엔 보수로 비친 언론을 향한 분노의 분출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단서는 관련기사의 큰 제목에서 발견된다. ‘언론은 ‘민족자결’ 눈떠라’.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현존 한국의 언론들이 강대국의 이해와 논리에 휘둘려 민족자결이라는 숭고한 뜻을 저버린 채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점을 일갈하려 했던 것 같다. 도올은 결코 특정 언론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글의 행간을 보면 보수 논조의 일부 언론을 지목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한데 이번 ‘북 송금에 담긴 역사적 진실’이란 글을 대하면서 언뜻 눈에 거슬린 대목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라는 독선적 표현이다. 그가 ‘현학적 수사에 능한 달변가’라는 일부의 평은 차치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이라는 자찬은 좀 심했다. 그 ‘역사적 진실’을 관통한 주제는 한국 언론에 대한 분노와 강대국에 대한 반감이다. 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과 거래를 해온 DJ정권과 현대그룹에 대해선 일말의 애정 어린 연민의 정을 감추지 않았음도 분명해 보인다. 그야 대학교수이기도 한 도올 개인이 사견으로 쓴 글임을 전제했다면 굳이 논쟁거리가 안 되겠지만 사회의 공기인 신문에, 그것도 그 신문에 소속된 ‘기자’ 신분으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을 발표했다는 데 대해서는 신문의 공신력은 물론, 그 글의 타당성과 책임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도올의 그 유려한 문장을 타고 종횡무진 넘나든 대하 논평엔 어떤 오류가 있는가 짚어보자.
민족자결론의 이중성
도올은 해방 전후 우리 민족이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겪어야 했던 민족 수난사를 일별한 뒤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정치외교적 방법론을 이끌어냈다.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태는 결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만의 논리로써 종결될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미·중·일·러·유럽을 포섭하는 국제적 역학 속에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생경한 논리가 아닌, 모든 국제정치학의 서장에 나오는 일반론이다. 한데 필자 도올의 글을 관통하는 요체는 ‘민족자결’이다. 언론을 향해서도 외세(외신)에 놀아나지 말 것과 ‘민족자결’을 깨달으라는 식으로 나무랐다. 그는 민족자결론과 강대국의 국제적 역학론이 대립관계인지, 아니면 상호보완관계인지를 언급하지 않은 채 건너뛰었다. 다시 말해 통일을 포함한 제반 한반도 문제를 푸는 데 있어 ‘민족자결’이 우선인지, 아니면 국제적 역학관계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민족자결론이란 말은 좋은 표현이긴 하지만 21세기 세계화시대엔 맞지 않는 과거회귀라는 비판도 있음을 부연하고 싶다. 민족주의를 내세웠다가는 국제사회에서 낙오자가 된다는 경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묻고 싶다.
언론을 향한 그의 일갈은 매섭다. “어두운 무대 위에 우뚝 서 있는 나 도올은…관객을 향해 포효한다. 그대들이여, 더 이상 언론에 기만당하지 말라! 그대들은 참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다.” 이 얼마나 가열찬(?) 언론 성토인가. 한국 언론은 독자를 기만하는 사기꾼이라는 논조다. 도올이 그처럼 ‘포효’한 이유는 그 다음 문장에 나타난 ‘일반론적 예시들’ 때문인 듯하다.
“민주? 좋다! 그러나 그것이 우매한 다수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분명 항거돼야 할 위선이다. 언론의 자유? 좋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유를 독점하는 소수의 전횡이라면 그처럼 무서운 마약은 없다.” 그의 분노는 계속된다. 그리고 묻는다. “도대체 이 나라의 언론은 몇 놈이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도올의 공세는 ‘투명성 요구’와 ‘정보공개 주장’을 펴는 언론의 돼먹지 않은(?) 논조를 문제삼는다. 전후 문맥을 보면 ‘언론의 몇 놈들’이 그 가당치도 않은 주장들을 내뱉고 있는 데 대한 혐오를 솔직하게 드러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도올의 언론관은 출발이 잘못됐다. 언론은 진리를 전달하고 사안의 법적 판단을 내리는 심판자가 아니다. 대학 강단에서 진리의 학문과 과학을 강의하는 학자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상, 사건, 말을 사실대로 전달하는 메신저다. 그렇다고 온갖 말과 일들을 다 전달할 수는 없다. 취사선택하고 앞뒤를 연결해 사태를 가장 사실에 맞게 전달하는 기술은 전적으로 기자와 언론의 몫이다. 물론 특정사안에 대한 언론의 논평도 그들 고유의 권리다. 그러므로 같은 사안이나 사태를 놓고 A와 B, C 매체의 보도나 논평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이를 문제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론의 기능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 오류다. 언론이 ‘진리의 전달자’ ‘항상 옳은 심판자’이길 기대하는 데서 오류는 발생한다.
도올이 지금까지 그런 기대 속에서 언론을 보아왔다면, 그리고 목하 그런 잣대로 현직 기자에 임하고 있다면 그건 보통일이 아니다. 독자들은 자기네 성향에 따라 특정 언론을 선택한다. 비록 “몇 놈이 만들어 간다” 한들 역정 낼 일이 아니다. 읽지도 보지도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언론은 자연히 도태되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이다. 이른바 권력이, 그리고 좌파들이 이 나라 보수 언론에 대한 비난과 재 뿌리기를 하고 있지만, 바로 그 언론들을 구독하는 독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도올은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보수언론에 대한 감상적 격정
언론 성토의 각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언론 자유를 일부의 독점이라고 신랄히 비난한 것은 설득력이 없다. 아마도 일부 ‘몇 놈’의 언론인들이 언론 자유라는 보호망을 쓰고 큰소리치고 있다는 비난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문제다. 마치 이 나라 언론들이 다 그런 양 일반론으로 욕을 해댄 것은 학자로서, 아니 기자로선 더더욱 바른 생각이 아니다.
투명성과 정보공개를 요구한 언론을 나무란 것도 잘못이다. 현재의 시대상은 모든 부문에서 투명성을 요구한다. 국가 청렴도의 투명성 여부는 곧 그 나라의 신인도와 삶의 질을 재는 척도가 된 지 오래다. 특히 선진국일수록 정부 당국의 정책 투명도와 공직자의 정직성이 강조된다.
도올은 대북 송금 문제와 관련, DJ정권이 북한과 꿍꿍이속으로 돈을 건넨 내막을 밝히라는 언론의 사설과 논평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현행법을 어겨가며 뒷돈 거래를 한 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이상, 그 내막을 밝히라고 하는 것은 언론의 권한이며, 국민요구를 전한 올바른 보도다.
도올은 ‘민족’과 ‘남북화해’를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지나친 것 같다. DJ정권이 북한에 거액을 건넨 행위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불가피한 필요경비라는 당국의 주장을 인정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현대그룹이 당국의 도움 아래 국책 은행에서 막대한 금융융자를 받아 북한에 보냄으로써 기업 재무구조는 뒤틀리고 여기에 투자한 소액 주주와 채권단이 물경 16조원의 손해를 보았다면, 도올은 무어라 말할 것인가? 민족을 위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그만한 개인적 손해는 감수하라고 다독거릴 텐가? 현대전자 한 주당 3만여 원에 산 주주들 손엔 지금 230원짜리 주식 한 장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것도 곧 감자(減資)를 한다니 100주면 10주가 될 판이다. 해외 자회사를 판 돈이 증발해버린 것도 그 한 이유로 드러났다.
평화유지와 통일비용론에도 함정은 숨어 있다. 국제사회가 ‘후세인보다 더 위험한 인물’로 지목한 김정일 앞으로 달러 뭉치를 보낸 것은 그를 다독거려 대남 도발과 전쟁 모험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핵심 논리다. 또 이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서독간의 거래가 곧잘 인용되곤 한다. 과연 그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가.
2월14일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송금 관련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동·서독의 예도 그렇다. 서독은 한두 차례를 빼고는 동독에 전적으로 물자 지원만 했다. 동독 내 정치범(서독 내통자 등)을 빼내 올 때나, 베를린 장벽에 설치된 동독의 중무장 장비를 철거하는 대가로 현금을 지급한 예는 있다. 하지만 그것도 반드시 의회에 보고하고 추인을 받았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절차와 방법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경우는 어떤가. 북한 내 정치범을 빼내 왔는가, 아니면 휴전선에 배치된 북한측 군사력을 후방으로 후퇴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대남 군사도발과 핵무기 제조가 돌아온 대가다. 북측이 양보한 것은 아주 제한적인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허가, 남북 철도 연결공사 정도다. 아마도 남북정상회담 대가도 포함됐을 것이다. 과연 효과적이고 올바른 투자인가? 돈의 성격, 전달 과정, 투자 효과 등 모든 면에서 우리 경우는 서독과 전적으로 달랐다.
현대의 反기업적 행위가 문제
대북 현금 지원의 내막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우리는 아주 소박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 기업은 왜 있는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부는 존재한다. 민족통일이라는 거창한 꿈에 앞서 편안한 현재의 삶이라는 작은 행복이 민초들에겐 더 소중하다. 정부는 그 소중한 소시민의 꿈을 충족시켜줄 책무를 진다.
기업은 자신의 이익과 함께 그 일부를 투자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바로 이 소박하고 기초적인 존재 이유가 상실됐는데도, 그것도 불법적이고 음험한 내막이 숨어 있음이 들통났는데도, 그 문제를 따지지 말고 덮으란 말인가. 도올은 그렇게 하는 게 민족을 위한 각자의 책임인 양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 민족에게 호소한다. 대아(大我)를 위하여 소아를,…대체(大體)를 위하여 소체를…버릴 것을 촉구한다.”
그렇다면 묻는다. 도올 당신의 촉구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현대그룹에 투자한 소액 주주들과 정부 압력으로 막대한 돈을 꿔준 은행들을 향한 간곡한 호소인가. 결국 그 정도 손해는 국익을 위해 감수하라는 주장인가. 아마도 세속 일에 무심한 도올이 주식에 투자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했다 하더라도 민족 장래를 그처럼 걱정하는 도올이라면 개인적 손해쯤 감수할 준비가 돼 있을 터이다. 하지만 범인(凡人)들은 그렇지 못함을 알기 바란다. 피 땀 흘려 번 월급과 퇴직금을 주식에 쓸어넣은 소시민들에게 ‘대아 운운’하는 것은 시체말로 약 올리는 망발일 뿐이다.
현대와 대북사업에 관한 도올의 이해에도 허점은 발견된다. 그는 현대가 북한으로부터 따냈다는 여러 사업들을 열거하면서 열변을 토한다. “이 모든 사업에 대한 30년의 사업권을 현대가 따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협약을 위하여 몇 억달러를 송금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사업의 제도적 보장과 관련하여 남북정상회담 등 정치적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어떻게 반민족적인 행위가 되며, 반민주적인 뒷거래가 되며, 정계와 언론계의 지탄을 받아야만 하는 음모가 되어야 하며…한국 언론들이 노상 무비판적으로 주장하는 바 일방적 퍼주기로 간주되어야만 할 정당성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현대가 30년의 독점 사업권을 따냈다는 것은 사실인가, 아닌가? 설령 북한이 그런 약속을 문서로 했다 한들 과연 그 약속 이행은 얼마나 신뢰할 만한가? 북한 경제의 실상과 향후정책에 밝은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 등의 자본이 북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투자 안전도가 제로라는 현실 때문이라는데, 이런 질문들에 대한 도올의 답변이 궁금하다.
‘반민족 운운한다’는 비난도 적중한 지적이 아니다. 특정 기업이 북한과 사업 거래를 하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것은 좋다. 문제는 관련규정을 어겨가며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 융자를 내주도록 한 권력 남용과, 자회사를 처분해 조달한 돈을 주주 몰래 빼돌리는 그 파렴치하고 반(反)기업적인 행위를 문제삼고 그 실상을 밝히라는 것일 뿐이다. 언제 어느 언론이 현재 문제가 된 대북 비밀 송금을 반민족적으로 몰았는지 알 길이 없다.
도올은 쌍방간 협상에서 상호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차피 거래라면 딱 절반씩이라는 짜여진 공식은 아니더라도 ‘주고받는’ 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적·사적 거래에서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남으로부터 수억 달러의 현찰과 기타 경제 지원을 받고 북한이 보답한 것은 무엇인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철도 연결(예정) 정도일 것이다. 반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옛 말이 적중한 경우를 도올도 목격했을 것이다. 서해교전 도발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핵무기 개발 포기 대가로 경수로 건설을 해주고 있음에도 핵 개발을 해왔노라고 자인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한의 핵 개발을 가장 먼저 안 쪽은 미국이 아닌 한국 정보기관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DJ정권은 김정일 개인의 통치자금에 쓰였을 것이 확실한 현금을 보냈다.
도올은 또 미 CIA와 FBI 등 정보기관이 암살·체제 전복 등 못된 짓을 해왔음에도 언론이 언제 이를 까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해박한 지식과 동서양 철학에 밝은 도올에게도 정보의 사각지대는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렇다. 미 CIA가 벌여온 음험한 공작들은 대부분 ‘언론’에 의해 그 추한 모습이 까발려지고 의회 청문회에서 단죄됐다. 남미 아옌데 정부 전복, 이란 반군 지원 등을 둘러싼 불법행위가 언론의 조사보도로 낱낱이 공개돼 심판받았다.
성한 살에 고름 차면 빨리 도려내야
도올은 대북 송금설의 첫 발설자가 미 의회측이란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 언론이 남북 화해를 시기하는 미국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나무랐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도올이 이렇게 언론을 힐난했다면 흔쾌히 동의하겠다. “우리 언론은 대북 송금에 대해 철저한 조사 보도를 외면한 채 외국 언론 보도나 베껴대는 게 잘한 짓인가. 정신들 차려라!” 나도 이 점에선 우리 언론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요즘 몇몇 지면에 보도되는 관련기사는 나름대로 ‘조사 보도’에 충실한 내용이 제법 있다. 도올이 도하 수십 개의 신문과 방송을 읽고 듣지 못한 소이가 아닌가 여겨진다. 좀더 철저한 조사 보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또 오보가 있다면 당연히 제재를 받고 있다. 이런 언론을 향해 ‘언론 자유 좋아하네’ 하는 식으로 매도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철학적 예지와 심미안으로 사물과 사상을 멋지게 꿰뚫어보는 도올이 어째서 대북 비밀거래라는 세속의 사안을 무리하게 해석하고, 이와 관련하여 보수언론을 향해 적의를 노골화했는지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도올의 글은 늘 힘이 넘치고 그래서 독자를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대목마다 해박한 지식의 산물인 인용구는 글을 빛낸다. 이번에도 그는 원오스님의 깊은 가르침을 소개하는 것으로써 대하 논평의 끝을 장식했다. “마음가짐 한 꼬타리,…마치 멀쩡한 피부에 생채기를 내서, 그 곳에 둥지를 틀고 썩은 굴을 짓는 것과도 같다.”
‘성한 살에 생채기’를 내는 자들은 누구일까? 보수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소체’에 얽매인 소인배들인가? 문제는 성한 살이 아니라 썩고 있는 병소라면 생채기가 아니라 수술을 해서라도 몸체를 살려야 한다는 점이다.
학문의 대가인 도올의 글을 평하면서 문득 정조 때 사람 연암 박지원의 말이 머리를 때린다. “글은 사람이다.” 짧지만 글 쓰는 사람에겐 엄중한 경고다. 이 말을 상기할 때마다 글 쓰기가 사실 두렵다. 혹여 이 논평이 도올의 참뜻을 오해하고 혹여 생채기나 내지 않았을까 심히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