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1월20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참석자들이 ‘살생부 파문’과 관련,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살생부 파문’은 당내 신·구주류간 갈등을 촉발시켰다.
핵심은 당권이다. 당의 주도세력 교체를 놓고 민주당에서는 신·구주류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복잡한 ‘4차원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개혁특위(위원장 김원기·金元基 고문)가 현행 최고위원제도 폐지 및 지역대표 청년·여성 대표 66명으로 구성되는 집단지도체제 도입, ‘제왕적’ 지구당위원장제도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당 개혁안을 마련하고 며칠 지난 2월13일 저녁.
한화갑(韓和甲)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최고위원들이 서울 신문로의 한 유명 한정식집에서 오랜만에 만찬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는 김태랑(金太郞) 최고위원이 주선했는데, 참석자들은 발렌타인 21년산을 반주로 곁들이며 2시간여에 걸쳐 회포를 풀었다.
당 개혁안을 놓고 논란이 불거진 상태였고 노당선자 취임 전 한대표 사퇴설까지 나돈 시점이었기에 기자들의 관심을 모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했다. 개혁안이 최고위원회의에 공식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얘기할 게 없다는 이유였다. 다만 한대표는 사퇴 얘기가 나왔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ㅅ자도 안 나왔어요”라고 했고, 김태랑 최고위원은 “기사가 될 만한 얘기는 없었고 화기애애한 자리였다”고만 전했다.
그러나 이날 최고위원 만찬 회동의 의미는 바로 이튿날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정식 최고위원회의에서 드러났다. 한대표는 천정배(千正培) 개혁특위 간사로부터 개혁안을 보고받으며 “이것이 개혁신당안과 같은 것이냐”고 물었고, 천간사가 “유시민당을 말하느냐”고 되묻자 “그렇다. 이 안이 통과되면 우리가 처음 시행하게 된다. 유시민당도 그 같은 안을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쏘아붙인 것.
특히 당 개혁특위가 당무위원회의에서 현 지도부 사퇴를 전제로 임시집행부를 구성,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를 구성할 때까지 6개월간 당을 과도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건의한 데 대해 한대표는 “당무회의에서 지도체제를 바꾼 예가 정당사에 없다. 직선 최고위원들을 당무회의에서 정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한대표는 한 측근을 통해 “당무위원회의에서 과도 지도부를 구성하고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과도 지도부가 6개월간 당무를 집행토록 한다는 것은 쿠데타적 발상이다”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김원기 고문이 만든 당 개혁안이 최고위원회의에서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이는 물론 전날 최고위원 만찬회동에서 걸러진 것으로 전해졌다. 전날 최고위원들은 당 개혁안에 대한 반격을 위한 의견 조율을 한 것이다.
삐걱대는 김원기와 정대철 쌍두체제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대선 이후 김원기 고문과 함께 당내 신주류의 쌍두마차로 떠오른 정대철(鄭大哲) 최고위원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개혁특위가 개혁안을 확정하자 당 안팎에서는 “김원기 고문이 정대철 최고위원에게 물을 먹인 것 아니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정최고위원은 사실 당권에 큰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정최고위원은 대선 이후 공공연히 “총리는 ‘원기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고건(高建) 전 서울시장이 총리에 내정되기 직전인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새 정부 첫 총리는 정치력 있는 인사가 맡아야 한다”며 “노당선자를 만난 자리에서 총리 후보로 김고문을 추천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히기도 했다.
이는 뒤집어 얘기하면 당권은 자신이 맡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신주류측 이상수(李相洙) 사무총장이 “선거가 끝난 후 선대본부장들이 의견을 모아 노당선자에게 김고문을 총리 후보로 천거했다”고 공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