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장래찬 전 금감원 국장은 왜 죽었나

김진수 기자의 밀착 추적기

  • 글: 김진수 jockey@donga.com

    입력2003-02-24 18: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과수, “장씨 사인은 의심할 여지없는 자살”
    • 처음부터 자살 확신한 검찰의 ‘축소수사’
    • 동방금고 이후 모든 금고사건엔 ‘로비’없다?
    • “야당, 펀드 가입자 명단 보지도 않더라”
    • 무위로 끝난 금감원의 ‘장래찬 체포조’
    • “엉뚱한 차량번호로 장씨 승용차 수배”
    2000년 10월31일 오후3시50분 서울 관악구 봉천4동 한조장. 이 여관 203호실에서 전날 밤 혼자 투숙했던 한 50대 남성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욕실 수건걸이에 나일론끈으로 목을 맨 채 숨진 변사자의 신원은 그가 남긴 신분증을 통해 곧 확인됐다.

    장래찬(張來燦·당시 53세). 금융감독원 비은행검사1국장을 거쳐 분쟁조정국장으로 있다 2000년 9월 보직해임된 뒤 금융연수원에서 연수중이던 그는, 한국디지탈라인(KDL) 정현준 사장이 동방금고와 대신금고에서 637억원을 불법대출받은, 이른바 ‘동방금고 불법대출 및 금감원 로비의혹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던 터였다.

    검찰에 수배중이던 장씨의 혐의는 동방금고 사건과 관련, 정씨가 주가조작을 위해 조성한 사설펀드에 1억원을 투자했다 투자손실 명목으로 3억5900만원을 챙긴 것, 금감원 로비 창구 역할을 하며 동방금고측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 ‘정현준 게이트’의 열쇠를 쥔 핵심 인물로 알려진 그는 10월23일부터 9일째 잠적중이었다.

    그의 죽음은 검찰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듦을 의미했다. 동시에 또 다른 미스터리의 재생산을 뜻했다. 동방금고 사건의 최대 쟁점은 정·관계 고위 인사의 관련 여부에 있었다. 정치인 또는 정부기관 실력자가 정씨의 사설펀드에 투자했거나 로비를 받았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장씨의 죽음으로 무성하게 불거진 각종 의혹들 가운데 명쾌하게 해명된 것은 거의 없다. 현 시점에서도 그의 죽음과 관련해 베일에 가린 부분이 적지 않지만, 사건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지고 있다.



    그로부터 2년3개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관련자들은 장씨의 죽음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사건 당시 가장 무성했던 의혹은 단연 장씨의 사인(死因)에 관한 것이다.

    ‘너무도 명백한’ 자살?

    당시 야당이 제기한 타살 의혹은 장씨가 자신의 키(180cm)보다 낮은 160cm 높이의 수건걸이에 목을 맨 점, 벽을 등진 상태에서 어깨는 축 늘어졌으며, 엉덩이는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채 두 발뒤꿈치만 욕실 바닥에 닿아 있었다는 점 등으로 집약된다. 타살 의혹은 장씨가 죽은 지 1년이 훨씬 지난 2001년 12월 야당에 의해 다시 한번 제기됐다. 당시 야당은 ‘장씨가 목을 맨 끈의 매듭이 전문산악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프루지크 매듭(Prusik knot, 넥타이 매듭처럼 길이 조절이 쉬운 매듭)이란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법의학적으로 볼 때 장씨의 사인이 자살이란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끈을 매단 곳의 높이가 키보다 낮다고 해서 자살하지 못한다는 건 난센스다. 목을 매 죽은 변사, 즉 ‘의사(縊死)’의 99%가 자살로 판명난다. 대개 의사자들은 자기 키보다 낮은 곳에 목을 맨다. 오히려 대롱대롱 매달린 의사자에게서 살해당한 뒤 자살로 위장된 사례가 훨씬 많다. 장씨 사체를 부검한 결과 사인은 의사임이 명확했다. 앉은 자세로 숨진 것에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부검 결과 그의 엉덩이 아래쪽 혈관에 혈액이 몰려 출혈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그 자세 그대로 죽은 게 확실했다. 사체 상태로만 봤을 때 타살 정황이 될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국과수팀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도 ‘터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숨진 장씨가 발견된 바로 다음날 그의 사체를 부검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이한영 법의학과장의 말이다. 그의 부연 설명.

    “정상적인 반항능력을 지닌 사람을 살해하려면 여러 명이 합세해야 하고 반항과정에서 피살자의 손과 팔 등에 반드시 작은 상처라도 남게 마련이다. 만일 자구(自救)능력이 없는, 즉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목을 매달아 살해했다면 약물투여 흔적 등 피살자를 항거불능케 한 외력(外力)의 흔적이 남아야 한다. 또 만일 목 졸라 살해한 뒤 끈을 목에 매 자살로 위장했다면 피살자의 목 안쪽 근육층에 출혈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장씨의 경우 목을 맨 끈의 흔적 외엔 신체의 어떤 부위에도 손상이 없었고, 약물투여 흔적도 없었다.”

    그는 또 “매듭에 관한 의문은 사인에 대한 보조자료일 뿐, 단정적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프루지크 매듭 그 자체만으로는 타살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 이과장에 따르면 국과수가 내놓은 부검 소견은 ‘타살 가능성이 배제될 수 있다’였다.

    외견상 장씨의 변사 현장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최초 발견자인 여관 종업원 신모씨(33)로부터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울 관악경찰서 봉천4동 파출소 김정주 경장(42·현 봉천8동 파출소 근무)의 기억.

    “현장에 도착해보니 여관 종업원이 변사자가 혹시 살아 있을까 싶어 목을 맨 끈만 잘라놓았을 뿐, 다른 이상한 정황은 발견할 수 없었다. 사체를 확인하면서 통상적인 자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변사자의 신분증을 보고 ‘수배중인 그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경찰서 상황실로 즉시 무전연락했다. 초동조치 이후론 출입자를 통제하느라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고, 서울지방경찰청 감식반과 검찰이 현장수사를 했다. 당시 현장에선 장씨의 유서와 서류가방이 발견됐는데, 자세한 내용은 보지 못했다. 이 유류품들은 그대로 검찰에 인계된 것으로 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사체 발견-현장 보존-검사 지휘-부검에 이르는 과정에 절차상 하자는 없었던 셈이다. 장씨 가족은 처음에 자살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부검 직후 자살 소견에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씨의 죽음이 정치권의 논란거리로 비화한 까닭은 무엇일까.

    ‘금고 수사’ 전형 된 동방금고 사건

    이에 대해 당시의 수사팀은 “그다지 특이한 사건이 아닌데도 야당이 정치공세를 위해 장씨의 죽음을 적극 활용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장씨가 죽기 전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정현준씨가 일종의 ‘자구책’으로 야당에 관련자료를 이미 건넸고, 야당측이 그 자료를 통해 동방금고 사건의 실체를 검찰만큼 꿰뚫고 있던 차에 공교롭게도 수배중인 장씨가 자살함에 따라 야당에 ‘호재’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동방금고 사건 수사를 맡은 곳은 서울지검 특수2부. 이덕선 당시 부장검사(49)는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군산지청장을 끝으로 옷을 벗은 뒤 2002년 10월 변호사로 개업, 현재 서울 서초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그는 “당시 야당이 끊임없이 관련 성명을 쏟아내고 언론도 장씨가 정·관계 로비의혹의 핵심인물인 양 대서특필했지만, 돌이켜 보면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이나 장씨는 고위 인사들과의 교분을 가진 ‘중량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

    “동방금고 사건은 신용금고를 사(私)금고처럼 주무른 전형적인 단순 사기극이지 항간의 억측처럼 권력형 금융비리가 결코 아니다. 설령 장씨가 로비 창구였다 손치더라도 금감원에 대한 수차례의 검찰수사 결과 로비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이상, 동방금고와 금감원간 로비를 매개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동방금고 사건 이후 금고사건이 몇 개 더 터졌는데, 검찰은 더 이상 ‘로비’ 관련 수사를 시도하지 않았다. 동방금고 사건 수사 당시 ‘실체 없는 로비’ 수사로 골치를 썩인 뒤로 ‘금고사건=불법대출사건’이라 판단하고 ‘심플’하게 수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방금고 사건은 다른 금고사건들의 ‘별볼일 없는 실체’를 미리 깨닫게 해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변호사가 말하는 에피소드 하나.

    “2000년 11월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 당시 야당측이 ‘여권 실세가 정현준씨의 사설펀드에 가입했으며, 펀드를 통해 조성한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며 펀드 가입자 명단을 공개하라고 박순용 검찰총장을 다그쳤다. 그러나 내가 막상 갖다주니 야당의원들은 ‘볼 필요 없다’며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그럴 만큼 야당은 동방금고 사건의 진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 명단은 ‘수사중인 사건 관련기록은 내줄 수 없다’고 버티던 끝에 검찰총장이 3당 간사가 모인 자리에서 비공개로 제출한 자료였다.”

    이변호사는 “사설펀드는 ‘별것’ 아니었다. 공무원과 언론인 등이 가입자 명단에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월급쟁이들이 재테크 차원에서 지인(知人)들을 통해 알음알음 가입한 일종의 계(契) 성격이 짙었다”며 “명단에 거명된 가입자 중 상당수에 대해 계좌추적을 했지만, 사기라든가 하는 이렇다할 범죄혐의는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설명에 대한 진실성은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펀드 가입자 명단엔 실명과 가명이 뒤섞여 있었는데다, 이 명단이 언론 등 검찰 외부로 공개 혹은 유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장래찬 전 금감원 국장은 왜 죽었나

    2000년 11월5일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가운데)이 기자회견을 갖고 장래찬씨 자살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동방금고 사건 수사가 종결된 뒤 해당사건과 관련한 야당의 적극적 ‘공세’가 오랜기간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야당이 의혹을 부풀렸다는 검찰의 주장에 전혀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검찰이 수사에 매우 소홀했다는 비난을 면키는 힘들다. 일단 검찰은 장씨 사건에 대한 수사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잡았다.

    “(검찰은) 자살 정황이 너무도 명확해 처음부터 사건을 타살 가능성이 없는 ‘단순자살’로 확신했다. 따라서 국과수 부검 소견이 나온 후 사인을 자살로 결론짓고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다”(이변호사). 그 ‘확신’은 옳았을까. 결과적으로 ‘확신’은 ‘자살’이란 사인에 대한 확신이었을 뿐, ‘자살동기와 배경’에 대한 확신은 아니었다. 검찰이 수사에 등한했음을 드러내는 몇 가지 사례.

    우선 검찰은 장씨의 도피기간(10월23∼31일) 중 그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기본이랄 수 있는 통신감청이나 통화명세 조회를 전혀 하지 않았다. 때문에 장씨가 잠적 당시 자신의 형인 래형(66)씨와 금감원 김중회 비은행검사1국장(54·현 부원장보)과 수차례 전화통화를 했는데도 그의 소재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장씨 유서에 대한 필체 감정도 건너뛰었다. 유서는 같은날 작성됐다고 보기 힘들 만큼 정자체와 흘림체가 뒤섞여 있었다. 군데군데 가필 흔적마저 있었다. “유서에 대한 필체 감정을 했느냐”는 물음에 이변호사는 “솔직히 내용에 일관성이 없는 유서의 해석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자살 정황이 명백해 감정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를 당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장씨 사건을 수사중이던 검찰의 수사의지라고 보기는 힘들다.

    논란이 된 유서는 A4용지 8장 분량. 이중 ‘자살입니다’로 시작하는 6장은 장씨 사체가 발견된 당일 밤, 빗발치는 기자들의 요구로 언론에 공개됐다. 유서엔 금감원 직원들에 누를 끼쳐 죄송하다는 내용과 함께 평창정보통신 및 KDL 주식 매입 경위가 실려 있었지만, 이는 검찰로부터 참고인 조사를 받은 이윤진씨(58·장씨가 옛 재무부 재직시절 함께 근무했던 상사인 고 이신우 중앙투자금융 감사의 미망인)의 진술과 상이해 또 다른 의혹을 낳았다.

    유서에 따르면 동방금고 유조웅 사장의 제의로 평창정보통신 주식을 샀다 비싸게 팔아 6억3000여 만원의 차익을 올렸고, 그 돈을 다시 KDL 주식에 투자했다 손실을 입어 유씨로부터 7억원을 손실보전받았으며, 이윤진씨가 5억원의 손실보상을 요구해 동방금고에 협조를 요청했다는 게 장씨의 주장이다. 하지만 장씨가 숨진 여관방 욕실 변기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유서’에서 ‘유씨로부터 받은 7억원을 작은형님의 친구가 관리하는 계좌로 송금했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장씨의 유서 내용은 결국 허위로 입증됐고, “손실보상을 요구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는 이씨의 주장을 뒷받침한 바 있다.

    당시 언론은 “11월6일 또 하나의 유서가 뒤늦게 발견됐다”고 보도했지만, 장씨 변사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 특수2부 변찬우 검사(43·현 서울고검 검사)는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다시 짜맞춰 내용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지, ‘또 하나의 유서’ 역시 사건 당일 현장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언론에 공개된 6장을 뺀 나머지 2장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걸까. 당시 언론은 장씨가 가족 앞으로 남긴 이 유서 2장에 정·관계 인사들의 명단도 일부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대해 이변호사는 “가족에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정도만 언급돼 있었을 뿐, 금전문제와 관련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답했다. 이는 장씨 사체에 대한 부검이 있은 직후 그의 장남(28)이 기자들에게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한 말과 일치한다. 현재 유서 원본은 장씨 가족이 보관중이다.

    “자살동기 규명은 불필요”

    “사실상 검찰은, 야당이 정현준씨가 건넨 자료를 근거로 의혹을 하나씩 터뜨려 언론에 보도되면 이를 따라가며 수사하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장씨의 유서 역시 사생활 보호와 명예훼손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공개 안해도 됐지만, 워낙 의혹이 증폭돼 할 수 없이 공개를 결정한 것이다. 애초부터 검찰 수사의 초점은 장씨의 사인이지 자살동기를 규명하는 일은 아니었다”(이변호사).

    이는 검찰이 처음부터 수사범위를 틀 지워놓고 가능한 한 소극적 수사로 일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다. 피의자가 자살했으므로 어차피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야 할 게 분명한 만큼 추가 수사가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수사결과를 ‘예단’한 것이다.

    검찰과 마찬가지로, 동방금고 사건 당시 로비의혹에 휘말렸던 금감원 역시 장씨의 죽음을 철저한 ‘개인적 결단의 산물’로 본다.

    김중회 부원장보(당시 비은행검사1국장)가 전하는 당시 상황.

    “금감원은 동방금고 불법대출 건을 시중에서 전해듣고 2000년 10월14일 동방금고에 대한 검사에 착수했다. 이때 출입기자들에게 엠바고(보도자제 요청)를 걸었다. 3∼4일쯤 뒤 정현준씨가 투자자로 참여한 적이 있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데일리’의 기자가 ‘동방금고 검사 착수 건을 보도하겠다’며 찾아와 관련자료를 요청하길래 거절했다. 그러자 10월21일쯤 ‘파이낸셜 데일리’와 ‘부산일보’가 동방금고 검사 착수 사실을 먼저 보도했고, 엠바고는 자동파기됐다. 금감원도 10월22일 정현준씨와 이경자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던 바로 그때 장씨가 잠적해버린 것이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동방금고가 대주주인 자신에게 불법대출한 혐의를 잡은 금감원이 조사에 착수하자 상당한 압박을 느낀 정씨가 그 반작용으로 이경자씨의 금감원 로비설과 정·관계 연루설을 언론에 터뜨렸고, 장씨를 금감원 로비 창구로 지목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있다. 결국 장씨의 죽음으로 진실이 묻히면서 그 악영향에 고스란히 노출된 곳은 자연히 금감원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감원 내에는 조직과 동료들의 부담만 가중시켰다며 장씨를 원망하는 분위기마저 조성됐다.

    김중회 부원장보는 장씨가 잠적한 후 그와 3차례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당시 금감원이 장씨를 비호한다는 의혹이 일었다. 지금에야 밝히지만, 사실 금감원은 장씨의 잠적 이후 일부 직원들로 ‘체포조’를 꾸려 그의 고향 조치원으로 급파하기까지 했다. 완력을 써서라도 그를 검찰에 출두시키려 했을 만큼 금감원도 절박한 상황이었다. 금감원이 살 길은 장씨를 출두시켜 누명을 벗는 길밖에 없었다. 당시 국회에선 ‘금감원은 펜스만 둘러치면 바로 교도소’란 야유마저 나돌았다. 잠적 당일인 10월23일 장씨가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왔는데, 만나겠다고 했다. 장소를 잠실종합운동장 인근 모호텔 지하주차장으로 약속하고 직원 3명을 보냈으나 장씨는 나오지 않았다. 이튿날 다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정리되면 모든 것을 밝히겠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정한 상태라는 감은 들었지만, 솔직히 참 무책임한 사람이란 느낌이 더 강했다.”

    금감원, ‘장래찬 체포조’ 동원

    장씨의 성격은 다소 내향적이지만, 일면 자상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금감원 비은행검사국 김상규 검사역은 “신용관리기금 근무 시절 장국장(장씨)을 상사로 모신 적이 있는데 잔정이 있었다. 직원들을 야단친 후엔 항상 먼저 미안해하며 다독거려주곤 했다. 건강도 무척 좋았던 편이다”고 했다.

    하지만 장씨와 금감원의 관계는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다. 금감원측은 2000년 9월 인사 때 이뤄진 장씨의 보직해임건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비위사실이 포착된 게 아니라 당시 상향식 인사평가에서 하위등급을 받아 직무수행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금감원측은 “사자(死者)의 명예와 관련한 문제인 데다 금감원 내부자료여서 공개할 수 없지만, 관련 인사기록은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장씨는 강한 불만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부원장보는 “2000년 10월25일 장씨로부터 ‘나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0년 8월 현 이근영 금감원장 취임 이후 계속된 조직개편으로 보직해임된 국장급 간부는 장씨만이 아니다. 2000∼2003년 현재까지 49명에 이르던 국장급 직원은 28명으로 대폭 줄었다.

    물론 이런 부분들이 자살을 부추긴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장씨가 ‘금감원 조직을 보호하려’ 목숨을 버렸다는 추론과는 거리가 멀다.

    “동방금고 사건과 관련해서 나와 실무팀장·팀원 등 3명이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다. 한 수사관이 ‘김국장(김중회 비은행검사1국장) 것도 전부 다 조사했다’고 귀띔하더라. 계좌추적했다는 말로 들었다. 당시 검찰은 스캔을 떠 화상 형태로 보관해둔 금감원 전산자료까지 모조리 수사했다. 그런데도 금감원 업무처리에 문제가 없고 로비에 연루된 직원도 없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는가”(김중회 부원장보).

    서울 대신고와 중앙대를 졸업한 장씨는 1986년 재경부 주사로 금융권에 발을 내디딘 후 금고·종금사의 감독·검사기관인 신용관리기금으로 자리를 옮겨 총무국장과 관리국장을 거치는 등 금고업무만 20년간 맡은 ‘금고통’이다. 그는 금감원 출범 이후 금고업무 전담인 비은행검사1국장을 맡아 50여 개의 부실금고를 퇴출시켰다. 그러나 금감원 내 ‘재력가’로 통했던 그가 불과 수억원대의 뇌물수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튼 동방금고 사건은 ‘부도덕한 벤처기업인과 사채업자가 주도한 대출 사기극’이란 결론만 낸 채 2000년 11월14일 종결됐다. 수사결과대로라면 ‘불법대출은 있었지만, 로비는 없었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장씨의 죽음엔 석연찮은 점이 여전하다.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심리적 압박을 못 이긴 그가 ‘극단적 선택’을 했을 여지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장씨가 숨지기 전인 2000년 10월13일 해외도피한 유조웅 전 동방금고 사장,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에 대한 검찰수사가 시작된 10월26일 괌으로 출국한 오기준 전 신양팩토링 사장은 은신처가 미국이라고만 전해진 채 신병 인도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건 진상의 밑그림을 아는 증인인 이들에 대한 수사 없이 장씨의 자살동기를 명확히 밝히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장씨 사건 당시 제기됐던 몇 가지 의문들 가운데 현 시점에서 새롭게 드러난 것도 없지는 않다. 당시 사건현장에선 장씨의 포텐샤 승용차가 발견되지 않았다. 10월23일 잠적 당시 타고 나간 이 승용차가 장씨의 죽음과 함께 증발해버린 것이다. 장씨가 동방금고 사건과 관련한 어떤 단서들을 남겨뒀을지 모른다는 가정 때문에 이 승용차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당초 차량번호를 근거로 포텐샤를 수배했다. 하지만 수사 당시는 찾을 수 없었다. 수사가 종결된 후 발견됐는데, 이미 장씨의 잠적기간중 소유권이 그의 친인척 명의로 바뀌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당연히 차량번호도 그 시점부터 변경돼 있었다. 때문에 승용차에 대한 수색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결과론적으로, 엉뚱한 차량번호를 수배했던 셈이다”(변찬우 검사). 장씨가 사망 이전 이미 승용차를 처분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이 ‘계획된 자살’이란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방증일 수 있다.

    장씨의 죽음을 둘러싼 개운찮은 의문점들은 앞으로도 남을 게 분명하다. 자살동기만은 여전히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수수께끼의 핵심은 과연 장씨가 사망 직전 접촉해 상담했던 변호사가 누구인지, 그와 장씨 사이에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에 있다. 장씨는 사망 하루 전날 밤 자신의 형 래형씨와 한 전화통화에서 “검찰에 출두하겠다”며 이튿날 아침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래형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씨는 불과 몇시간 만에 자수에서 자살로 급격한 심경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현재로선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 만한 인물이라곤 래형씨와 ‘서초동 변호사’뿐이다. 그런데도 당시 검찰은 문제의 변호사에 대한 참고인 조사조차 완전히 생략한 것으로 취재 결과 밝혀졌다. 이덕선 변호사는 “당시 장래형씨가 (변호사 관련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정식으로 변호인으로 선임되지 않은 상태여서 별도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열쇠 쥔 ‘서초동 변호사’

    ‘신동아’는 수소문 끝에 2월4일 밤9시 장씨 가족을 어렵게 접촉할 수 있었다. 장씨의 장남은 찾아간 기자에게 “이사온 지 한 달밖에 안됐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아버지 문상을 온 뒤로) 단 한 번도 금감원에서 우리 가족을 찾아본 적이 없다. 솔직히 (금감원에) 배신감을 느낀다”며 적잖은 적의를 드러냈다. 가장의 예견치 못한 죽음으로 상심에 빠졌던 장씨 가족은 이후 두 차례 이사를 해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 L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사건의 여파로 대학을 2년간 휴학했던 장남은 최근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말해줄 게 없다. 큰아버지(장래형씨)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사건을) 모두 잊고 싶다…부탁이다.”

    그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장씨가 사후에나마 ‘불명예’를 씻으려면 그를 둘러싼 의혹들을 재조명해야 하고, 이건 산 사람들의 몫이다.

    검찰은 장씨 사건 당시 그가 동방금고 유조웅 사장으로부터 주식투자 손실보전금 명목으로 받은 7억원 중 5억원이 ‘작은형님의 친구’가 관리하는 계좌로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돈의 행방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작은형님의 친구’는 바로 장래찬씨의 형 래형씨의 친인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계좌추적을 해보니 그 돈은 분명 그 계좌로 들어가 있었다. 아마도 사건 종결 이후 그 돈은 장씨 가족측이 수령했을 것이다. 검찰은 그 돈의 성격을 뇌물로 보고 몰수나 추징을 검토했지만, 장씨가 이미 사망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다 법원의 확정판결 없이는 집행이 불가능해 결국 국고로 귀속시킬 수 없었다”(변찬우 검사).

    장래찬 전 금감원 국장은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과 관련한 의혹들만은 철저히 덮어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아직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장씨가 실제로 ‘로비 창구’였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주식투자 손실보전 명목으로 받은 돈뿐이다.

    만에 하나, 장씨가 지극히 개인적인 비리를 덮으려는 일종의 현실도피 목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면, 그는 과연 ‘목적’을 이룬 것일까. 그는 말이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