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만을 끼고 자리잡은 138만평 공장지대의 분위기는 예상처럼 심상치 않았다. 기계음이 공장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곳곳에 스민 무거움은 어쩔 수 없었다. 공장단지 한복판 네거리, 배달호씨가 분신한 현장에는 한 달째 배씨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냉동탑차와 빈소, 해고자 단식농성단 천막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콘크리트가 까맣게 그을린 분신 현장 옆에는 배씨의 검정색 프린스 자동차가 주인이 세워두었던 그대로 서 있다. 중앙에 마련된 임시무대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배씨의 대형 영정사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빈소에 들어서자 사건 이후 한 달째 단식을 하고 있는 배씨의 동료 김건형씨가 파리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쉴새없이 흔들리는 천막 안에서 김씨는 ‘비인간적인 두산의 만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47파업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고된 다섯 명도 함께 단식중이다. 김씨의 목소리 사이로 노조측이 준비해놓은 방송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진혼가가 들려왔다.
저녁 6시 퇴근시간이 되자 짧은 겨울 해가 저물었다. 배씨의 빈소가 있는 네거리 옆 광장(노조에서는 이곳을 ‘민주광장’이라 부른다)에는 통근버스 수십 대가 늘어섰다. 직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자 촛불을 나눠주는 노조 대의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사람들 앞에 나선 김창근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얼굴도 배씨의 영정사진만큼이나 무표정하다. 조합원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바람에 흔들린다.
“배씨가 자살할 줄은 몰랐다”
23년차 근로자인 배달호씨는 1988년부터 노조 대의원으로 일했다. 배씨는 회사와 노조가 모두 인정하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온건파’였다. 김건형씨는 “지난해 내가 시너를 끼얹었을 때 이러면 안 된다고 꾸중하시던 형님이 왜 죽음을 택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회사측 관계자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47파업 이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배달호씨가 자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씨는 죽기 이틀 전 오후부터 회사에 월차휴가를 냈다. 추위에 터진 수도꼭지를 고치고 일 나가 있던 아내를 위해 손수 장을 보고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지난해 파업으로 아직까지 수감중인 동료들도 면회하고 돌아왔다. 결혼한 지 20년 된 배씨의 아내 황길영(42)씨는 “구속과 정직(停職)으로 마음고생시켰던 게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건 당일 급한 연락을 받고 회사로 달려온 황씨는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이 사고를 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방학중이라 집에 있던 두 딸(고등학생)은 라디오 뉴스를 듣고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다. 배씨의 마지막 모습에서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부인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