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山소주식 경영’으로 ‘강성노조’ 다루다 빚은 비극

두산중공업 근로자 배달호씨는 왜 분신자살 택했나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3-02-24 1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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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9일 새벽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 공장에서 분신한 배달호(50)씨의 시신은 사건 발생 한 달을 넘긴 2월16일까지도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배씨가 유서에 남긴 쟁점사안을 해결해야 한다는 노조측 요구와 장례처리 이외에는 수용할 수 없다는 회사측 입장이 팽팽히 맞서기 때문. 월평균 임금 350만원의 중산층 근로자, 조용하고 원만한 성격이었다는 배씨를 분신자살이라는
    •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山소주식 경영’으로 ‘강성노조’ 다루다 빚은 비극
    창원 시내에서 두산중공업 공장을 향해 달리는 20분 남짓의 진입로 곳곳에는 두산그룹을 비난하는 내용이 적힌 검은색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회사 입구에 다다르자 눈에 띄는 것은 창원지방법원 명의의 대형 경고문. ‘누구를 막론하고 이 문을 통한 물건반출을 막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지난해 5월 있었던 47일간의 장기파업(이하 47파업)이 남긴 흔적이었다.

    마산만을 끼고 자리잡은 138만평 공장지대의 분위기는 예상처럼 심상치 않았다. 기계음이 공장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곳곳에 스민 무거움은 어쩔 수 없었다. 공장단지 한복판 네거리, 배달호씨가 분신한 현장에는 한 달째 배씨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냉동탑차와 빈소, 해고자 단식농성단 천막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콘크리트가 까맣게 그을린 분신 현장 옆에는 배씨의 검정색 프린스 자동차가 주인이 세워두었던 그대로 서 있다. 중앙에 마련된 임시무대 높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배씨의 대형 영정사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빈소에 들어서자 사건 이후 한 달째 단식을 하고 있는 배씨의 동료 김건형씨가 파리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쉴새없이 흔들리는 천막 안에서 김씨는 ‘비인간적인 두산의 만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47파업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고된 다섯 명도 함께 단식중이다. 김씨의 목소리 사이로 노조측이 준비해놓은 방송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진혼가가 들려왔다.

    저녁 6시 퇴근시간이 되자 짧은 겨울 해가 저물었다. 배씨의 빈소가 있는 네거리 옆 광장(노조에서는 이곳을 ‘민주광장’이라 부른다)에는 통근버스 수십 대가 늘어섰다. 직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자 촛불을 나눠주는 노조 대의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사람들 앞에 나선 김창근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얼굴도 배씨의 영정사진만큼이나 무표정하다. 조합원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바람에 흔들린다.

    “배씨가 자살할 줄은 몰랐다”



    23년차 근로자인 배달호씨는 1988년부터 노조 대의원으로 일했다. 배씨는 회사와 노조가 모두 인정하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온건파’였다. 김건형씨는 “지난해 내가 시너를 끼얹었을 때 이러면 안 된다고 꾸중하시던 형님이 왜 죽음을 택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회사측 관계자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47파업 이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배달호씨가 자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씨는 죽기 이틀 전 오후부터 회사에 월차휴가를 냈다. 추위에 터진 수도꼭지를 고치고 일 나가 있던 아내를 위해 손수 장을 보고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지난해 파업으로 아직까지 수감중인 동료들도 면회하고 돌아왔다. 결혼한 지 20년 된 배씨의 아내 황길영(42)씨는 “구속과 정직(停職)으로 마음고생시켰던 게 미안해서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고 말한다.

    사건 당일 급한 연락을 받고 회사로 달려온 황씨는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남편이 사고를 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방학중이라 집에 있던 두 딸(고등학생)은 라디오 뉴스를 듣고 아버지의 죽음을 알았다. 배씨의 마지막 모습에서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부인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배씨가 자살한 시간은 오전 6시20분. 다른 직원들이 아직 출근하기 전 어스름 무렵이었다. 지난해 파업으로 구속되었다가 사건 보름 전 복직해 회사에 나오고 있던 배씨는 이날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회사에 나왔다. 자신의 일터였던 보일러공장으로 향하는 좁은 길 에서 배씨가 라이터를 켜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장을 최초로 목격하고 사내 소방차를 부른 회사 시설관리부 직원은 불에 타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현장 옆에 배씨가 세워둔 자가용 뒷좌석에서 유서가 발견됐다. 배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일회용 라이터도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튿날 민주노총을 비롯한 사회단체들은 유덕상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을 위원장으로 하는 ‘노동열사 고 배달호 동지 분신사망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했고, 회사측도 관련부서에서 인원을 차출받아 일일상황을 체크하고 임원진에 보고하는 상황실을 본관 8층에 마련했다. 취재진이 몰려들고 정치인, 사회단체 인사, 학생 등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곳곳에서 두산그룹과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고 사회단체들은 ‘두산제품 불매운동’을 개시했다.

    시멘트 바닥 위에 누워 있던 시신에 대한 부검과 처리를 두고 경찰과 대책위, 회사측은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결국 사건 발생 일주일 후인 1월16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남부분소 법의학팀은 사상 최초로 사건현장에서 부검을 진행했다. 부검이 끝난 시신은 냉동차에 실려 현장에 남았다.

    배씨의 시신이 아직 현장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 수습방안을 두고 대책위와 회사는 물론 유족들 간에도 팽팽히 입장이 맞서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와 부인 황씨는 배씨가 유서에 쓴 해고자 문제와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 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입장이고, 회사측과 배씨의 어머니 및 동생들은 가능한 한 조속히 장례절차를 마무리한 뒤 협상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대책위와 회사는 서로를 ‘반인륜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타살說, 자살교사說, 개인문제說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죽음을 둘러싸고 회사 안에는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타살설부터 자살교사설, 간암 말기설 등등. 이러한 의심은 경찰수사와 국과수 부검결과가 나오면서 수그러들었다. 사건을 담당한 창원 중부경찰서 김한수 수사과장은 “타살이나 자살교사로 의심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잘라 말했고, 부검을 참관했던 원진병원 양길승 원장은 “내부장기도 확인했지만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고인에게 거액의 빚이 있었다’는 소문은 끝내 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리직 사원은 “이 부분은 회사 측에서도 관심을 갖고 추적해 6700만원 가량의 부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두산중공업 홍보실 관계자는 “설마 회사가 고인의 개인정보를 뒤졌겠느냐”고 말했지만,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기자의 질문에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부인 황길영씨 또한 부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정도 빚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한달 평균 350만원(세전)의 임금을 받던 사람이 2년 연봉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자살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앞의 관리직 사원은 “돈에 쪼들려 자살을 택할 상황이었다면 회사와 타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외국 현장에 나가거나 외주업체로 내려가라는 회사측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성의를 표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의 죽음 이후 중앙 방송을 비롯한 상당수 언론매체에서는 “배씨의 죽음은 회사측이 지난해 파업기간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법원에 요청한 월급 가압류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대책위와 민주노총은 실수령금 5만8000원이 찍힌 배씨의 지난해 8월분 급여지급명세서를 공개하며 “파업 손배소송에 따른 급여 가압류는 신종 노동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 문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거론되는 사회이슈가 되었다. 이는 유서에 들어 있는 ‘이제 이틀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은 없을 것’이라는 구절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같은 보도는 오보에 가깝다. 지난해 법원이 배씨에게 내린 손해배상 분담금은 220만원에 불과했고, 6개월간 받은 임금이 148만원이었던 것은 이 기간동안 배씨가 구속 및 정직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책위 관계자 역시 사견임을 전제로 “가압류 문제가 중대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의 보도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220만원의 가압류가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살을 결심했을까. 그가 분신자살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山소주식 경영’으로 ‘강성노조’ 다루다 빚은 비극

    지난 1월29일 빈소를 찾은 배씨의 어머니 이영순씨를 배씨의 동료들이 달래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전신 한국중공업은 1962년 설립된 현대양행이 재무구조 악화로 시달리던 1980년 공기업으로 탈바꿈한 회사였다. 배달호씨가 입사한 1981년은 바로 공기업화 직후. 그러나 발전설비 전문업체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겠다는 한중의 비전은 1980년대 내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축적된 노하우가 없는 개발도상국 업체에 일감을 줄 외국기업은 많지 않았다. 한 식구나 다름없던 한국중공업을 키우기 위해 한국전력은 사실상 발전설비 독점권을 보장해주었고 계약마다 적정가의 50%가 넘는 고가로 설비를 주문했다. 이렇게 비축한 힘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한중은 1991년 10년 만에 첫 흑자를 기록했다.

    노조에게도 이 시기는 황금시대였다. 1987년 설립돼 1990년대 초반까지 강성 조직으로 이름을 날린 ‘마창노련’의 핵심이었던 한중 노조는 다른 지역 파업에까지 출장지원을 나갈 정도로 탄탄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이는 줄줄이 낙하산으로 내려온 역대 사장들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

    두산중공업 직원들이 가장 ‘그리워’ 한다는 박운서 전 사장(현 데이콤 회장)은 1996년 3월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노조 사무실로 달려가 협력을 요청했고, 직원이 상을 당하면 사장이 직접 찾아가는 ‘근경(근로자와 경영자를 줄여 박사장이 부르던 용어) 동반자 정책’을 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끝난 후에는 업무방해 혐의로 노조 집행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고소도 조용히 취하했다. 이는 그 때까지의 관행에 가까웠다. 이수영 홍보실 부장의 설명이다.

    “노조는 1987년 설립 후 17년간 9차례, 총 280일간 파업을 강행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죠. 직원들도 파업중에 못 받은 임금은 나중에 야근이나 특근을 통해 보상받게 돼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노조활동이나 파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한 엔지니어는 “그때는 회사가 나서서 직원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켰다”고 말한다.

    “어차피 매출액 규모가 워낙 컸던 터라 노조 요구대로 임금 몇 % 올려준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었거든요. 공기업의 방만한 운영 덕분이기도 했겠죠.

    중공업은 ‘기술장사’입니다. 회사도 기술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폈습니다. 임금도 무척 높았지만, 단순히 월급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회사 본관 유리문에 대통령 휘장인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는 회사에 다닌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IMF 위기가 닥쳐 국내발전소 건설물량 주문이 취소되고 해외물량 수주에도 비상이 걸리자, ‘소 270마리와 청주 1만2600병을 명절 선물로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잔치는 끝이 났다. 한전 설비 공급도 국제경쟁입찰로 바뀌었다. 텃밭이 사라진 셈이었다.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확정했고, ‘적자기업을 누가 사겠느냐’는 논리를 들어 ‘알짜 기업’ 한중을 첫 대상으로 삼았다. 이듬해 노조는 48일간의 파업을 통해 민영화 저지를 시도했지만 정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대신 ‘분할매각, 해외매각, 4대재벌에 매각은 않는다’는 약속만을 받아냈다. 이후 민영화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12월13일 자회사를 포함해 5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중공업은 3057억원을 적어낸 두산 컨소시엄에 낙찰됐다.

    ‘블랙리스트’와 ‘기무사’

    ‘나는 매일같이 고민을 해본다. 두산의 노조 말살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 배달호씨의 유서 중에서

    “아 예, 파업에 참여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그런 증언은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가급적 구체적인 자료가 있었으면 합니다. 문서 같은 것 말입니다.”

    촛불시위를 지켜보고 난 뒤 들어선 노조 사무실에선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핸드폰이 어찌나 많이 걸려오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며 박유호 대책위 상황실장이 불평 아닌 불평을 터뜨렸다. 대책위가 1월27일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공개한 이후 걸려오는 ‘제보전화’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전화가 갑자기 많아진다는 설명이었다.

    대책위가 제시했던 이 블랙리스트에는 ‘근태현황’ ‘주간선무활동계획보고’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우선 ‘근태현황’에는 조합원 개인에 대한 전담 관리자 이름, 노조경력, 참여도 등과 함께 ‘관찰’ ‘주기관리’ ‘지속관리’ 등 등급별 해결책이 기록돼 있고, 2002년 9월 날짜로 돼 있는 ‘주간선무활동계획보고’에는 ‘선무자’가 ‘피선무자’를 만난 일시 및 장소, ‘회사방침전달’ 등의 활동내용과 ‘파업엔 가담치 않겠다’ 등의 결과가 정리돼 있다. 회사의 노조활동 통제를 입증하는 자료라는 것이 대책위 측 주장이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노조측이 출처불명의 자료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회사를 비방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런 식의 현장통제는 한 적 없다는 단언이었다. 그러나 보름 뒤인 2월12일 대책위가 새로운 문서를 공개하자 그에 대한 회사측 해명은 달라졌다. “불법폭력파업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각 BG(Business Group·두산중공업에는 사업부문별로 7개의 BG가 있다), 부서별 노무관리는 당연한 일이며, 실무자의 개개인 성향 파악은 노무활동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미 부당노동행위 여부에 대한 노동부 특별조사가 진행중인 시점이었다.

    2월12일 대책위가 공개한 문서는 지난해 4월 작성된 회사측의 ‘신노사 문화 정책 실행방안’이라는 대외비 문건. 문서에는 2004년까지 3단계 전략을 수립해 ‘Opinion Leader 밀착관리’ ‘의식 개혁활동’ ‘계파활동 차단’ 등 8가지 세부계획을 세워 노조를 ‘건전세력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조합원은 잔업과 특근, 진급 차별과 함께 ‘방치’로 분류한다는 실행방안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2월14일 회사측은 “노조측이 설 연휴기간 터빈공장 등에 침입해 방대한 양의 서류를 절취했다”며 대책위측을 특수절도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창원지검에 고소했다. 역으로 이를 통해 이 문서들이 회사측에서 작성한 것임은 입증된 셈이다.

    ‘시신 탈취를 경계하기 위해’ 불침번을 서는 대의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노조 사무실 한구석에서 언뜻 잠이 든 새벽, 기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만나고 싶다는 한 관리직 직원의 전화였다. 본관 옆으로 가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남들의 눈이 있으니 회사 밖으로 나가자”고 제의했다. 마산만을 끼고 뻗은 한적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던 이 직원은 인적이 없는 음식점 앞에 차를 세운 후 두산중공업의 노무관리 시스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중앙에는 노무팀과 노사문화팀이 있고, 현장근로자가 많은 4개 BG에는 BG별 노무팀이 따로 있습니다. BG노무팀은 지난해 47파업 기간 중에 노사문화팀과 함께 생겼죠. 현장 엔지니어 출신들인 이들 BG노무팀은 직접 현장 사람들을 관리합니다.

    공식적으로 노조의 카운터파트는 노무팀입니다. 그러나 집행부 개개인에 대한 밀착마크나 정보수집 등 은밀한 업무는 노사문화팀이 담당합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회사 안의 기무사인 셈이죠. 노무팀(17명)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 이뤄진 노사문화팀(8명)은 노무팀과는 아예 라인도 다릅니다. 노무팀은 관리본부 소속이지만 노사문화팀은 부사장 및 담당 상무보 직속입니다. 노사문화팀장은 2000년 1월 관리자 명예퇴직 당시 인수도 끝나기 전에 그룹에서 건너와 인사팀장을 맡았던 홍모 부장입니다.”

    노무팀과 노사문화팀은 각 BG노무팀의 보고도 별도로 받으며 최고경영진이나 그룹에 대한 보고도 별도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경쟁을 통해 더 치밀한 노무관리가 이뤄지도록 유도하는 구조였다.

    “노조측이 자료를 공개하고 나서 각 노무관련 팀에는 비상이 걸린 모양입니다. 노동부 특별조사를 앞두고 관련자료를 대부분 폐기했다고 하더군요. 특별조사가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할 겁니다. 어쩌면 면죄부를 주는 수순으로 악용될 수도 있고요.”

    말을 마친 이 직원은 공장 내 한적한 길목에 기자를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멀리 출근하는 근로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산별노조’의 실책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

    - 배달호씨의 유서 중에서

    공장의 아침은 분주하다. 오전 7시, 배달호씨가 일했던 보일러공장 한 켠에 마련돼 있는 탈의실에서 근로자들이 작업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김창근 금속노조 위원장이 방에 들어섰다. 분신사건 이후 아침마다 열고 있는 조회를 갖기 위해서다.

    “형님, 시간 좀 내 주세요. XX야 많이 바쁘냐? 잠깐이면 된다.”

    “죄송합니다. 내 급히 좀 가볼 데가 있어서요.”

    옷을 갈아입은 근로자들이 어렵사리 바닥에 앉았지만 김위원장과는 선뜻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회사와의 협상 진행상황을 설명하는 김위원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는다.

    두산중공업 노조의 정식명칭은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경남1지부 두산중공업 지회’다. 김창근 위원장은 한국중공업 시절부터 다섯 번에 걸쳐 회사 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2001년 2월 금속노조 결성은 사실상 두산중공업 노조가 주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두산중공업 지회의 대표는 박방주 지회장이다. 회사측은 배달호씨의 자살 이후 금속노조와 김위원장이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외부세력 개입’이라고 비난한다.

    ‘山소주식 경영’으로 ‘강성노조’ 다루다 빚은 비극

    퇴근시간마다 통근버스가 대기하는 ‘민주광장’에서 열리는 배달호씨 추모 촛불집회

    그러나 금속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두산중공업 노조가 잃은 것도 많다는 것이 중론이다. 가장 큰 손실은 역시 조합원들의 실망. 집행부는 “산별노조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두산중공업 지회가 금속노조를 지키는 형국이었다. 대책위가 배달호씨의 죽음 이후에도 4시간, 8시간의 짧은 파업 이외에는 단체행동을 시도하지 못했던 것, 그나마 조합원들의 호응이 기대 만큼 높지 않았던 것도 일정부분 그 때문이었다.

    대책위측은 “호응이 적었던 것은 파업 때 휴가를 내고 쉬면 유급으로 처리하지만 불법 파업에 참여하면 무단 결근으로 간주해 급료가 없는 것은 물론 각종 불이익을 주는 근무태도 코드 등 회사측의 현장통제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한 조합원의 이야기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물론 회사 눈치가 보이죠.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아무리 회사가 무서워도 노조가 정말 좋다면 왜 안 나가겠어요. 금속노조에 소속된 회사 노조들은 공동으로 임단협에 나섭니다. 다른 노조들과 같은 조건을 걸고 같은 결과를 얻죠. 그러나 금속노조에는 우리를 제외하고는 대단위 사업장이 없어요. 우리 임금을 협상하는 자리에 중소기업 여성 근로자가 교섭위원으로 참가하고, 조합비의 50%는 금속노조로 올라갑니다. 이렇다 보니 조합원들이 금속노조를 주도했던 김창근 위원장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기주의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어요. 회사 또한 이러한 조합원 정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격타깃을 김위원장에게 맞추고 있는 겁니다.”

    금속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두산중공업 노조의 능력이나 조합원들의 인식을 과대평가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은 금속노조 관계자도 사견임을 전제로 인정하는 바였다. 김위원장의 개인야심 때문에 금속노조를 만들었다는 회사측 이야기는 흑색 선전일 뿐이지만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대의에 조합원들이 전적으로 따라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무력화된 강성노조

    조합원들이 노조에 실망했던 또 한 가지 문제는 노조 집행부 안에 존재하는 계파였다. 두산중공업 안에는 한맥, 새탑, 미래라는 세 개의 주요 계파가 있다. 이들 계파는 일종의 정당 구실을 한다.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인맥을 관리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여 함께 위원장 선거를 준비하는 것이다. 죽은 배씨는 김창근 위원장과 함께 새탑 소속이었다. 문제는 이들 계파 간의 갈등이 조합원들의 눈에 안 좋게 비쳤다는 사실이다. 선거과정에서 서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 계파가 새 집행부 사업에 힘을 모으지 못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지난해 47파업이 실패한 데에는 이러한 조합원들의 실망도 한 요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당초 ‘금속노조를 교섭파트너로 인정하라’는 요구조건을 걸고 시작한 파업에서 조합원들의 호응이 저조했거든요. 강성인 금속노조 입장에서는 물러설 수 없어서 계속 파업을 연장했죠. 그러자 갑자기 회사가 단협 일방해지라는 초강수를 던졌습니다. 상승작용이 시작된 거죠. 당황한 노조는 제품이 드나드는 정문을 막아섰고, 회사는 경비용역 직원들과 관리직 사원들을 동원해 정문을 열려고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고요.”

    회사는 ‘준법 처리’라는 원칙을 엄격하게 유지했고, 한국중공업 시절의 파업을 생각했던 노조원들 상당수는 시대가 달라졌음을 실감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결국 노조 집행부 대부분이 구속·수배·해고되고 총 65억원의 손배 가압류를 당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노조측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11월 체결된 임단협은 노조 전임자를 두 명 축소하고 임금은 동결되는 등 ‘항복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무력감이 노조 집행부 전체를 휘감았고, 일부 대의원은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나섰다. 배달호씨는 바로 그 시점에 죽음을 택했다.

    이 무렵 배씨의 심경에 대해 부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남편은 11월 임단협의 교섭위원이었습니다. 그 무렵 거의 잠을 못 잤어요. 함께 싸우다 해고당한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지금의 노조 모양이 너무 안타깝다는 거였죠. 그 모양이 안돼 보여서 제가 ‘그럴 거면 차라리 외국 현장에라도 나가라’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유서를 보니 자신이 죽음으로써 해고자 문제가 해결되거나 노조가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아요.”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 … 무슨 재미로 생산에 열심히 하겠는가.’

    - 배달호씨의 유서 중에서

    두산 인수 이후 한중 시절과 달라진 것은 치밀한 현장 노무관리와 파업에 대한 단호한 대응만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마찰을 빚으며 생채기를 남긴 것은 노조와 회사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인수 이후 새 경영진이 추진한 일련의 경영합리화 방안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공기업을 민영화한 후 새 주인이 경영합리화를 추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산중공업의 경우에도 새 경영진의 원가절감 노력이나 과감한 사업분야 정리 등을 높게 평가하는 직원들의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가절감 비율에 따라 부서장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들은 공기업 시절의 방만한 구매관련 지출을 50% 가까이 줄이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새 경영진은 강교, 시멘트, 제철 등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부를 상당수 정리하거나 자회사인 두산메카텍(한국중공업의 자회사였던 한중DCM이 민영화 후 두산그룹 계열사였던 두산기계를 인수하여 이름을 변경한 회사)에 이관했다. 화공사업 부문의 경우 얼마 전까지 메카텍 이관을 추진하다 인원감축을 경계한 노조의 반발에 부딪쳐 아예 사업정리를 검토하고 있다. 영업실적이 거의 없거나 전망이 불투명한 4개 해외지사도 철수시켰다. 구조조정을 위해 2001년부터 매킨지의 경영 컨설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단기수익과 자금 흐름을 중시하는 두산식 경영방침은 중공업의 특성과 맞지 않는다’는 반발이 적지 않았다. 매킨지 실사 과정에서도 사내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몇몇 한국중공업 시절의 간부들이 회사를 떠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야기다.

    “두산은 소비재 중심이지 중공업이나 기술산업에서 역량 있는 기업은 아니었죠. 투자에 대한 재무적 이익 정도만 기대하면 좋았을 ‘아마추어’였습니다. 그러나 새 경영진은 자신이 산업 전체를 훤히 꿰뚫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매킨지를 믿었던 것 같은데, 중공업은 기본적으로 기술을 모르면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맥주나 콜라와는 수익 사이클부터 다르니까요. 이런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기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한 관리직 직원의 보충 설명이다.

    “원래 플랜트 산업이라는 게 각 사업분야마다 2~3년씩 돌아가며 경기를 타게 마련입니다. 한국중공업 시절에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분야를 폐기하지 않은 것은 분명 낙하산 임원진의 무사안일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 그 분야가 다시 효자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섣불리 사업분야를 줄이면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이 생길 수도 있는 겁니다. 일종의 포트폴리오죠.

    더 깊이 살펴보면 사람 문제가 남습니다. 인건비 중심의 경영효율화가 시작된 후 많은 고급 인력들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사업부가 정리되면 그 부서 직원들이 모두 떠나야 하니까요. 잘못하다가는 철판 두드려서 ‘깡통’ 만드는 기술밖에 안 남을 겁니다.”

    그렇다고 민영화 이후 새로운 사업분야를 개척한 것도 아니다. 두산 인수 이래 최신 생산설비를 구매한다거나 선진기술연수를 보내는 등의 적극적인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엔지니어들은 입을 모았다. 최근 들어 회사측은 미래사업 태스크포스 구성, 핵심인재 선발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가시적인 조치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비판이었다. 앞서 말한 관리직 직원의 말이다.

    “결국 문제는 불신입니다. 회사측의 경영합리화 정책이 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기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 두산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국중공업 직원 위에 새 경영진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본관 유리문 봉황 휘장 위에는 이제 두산그룹의 마크가 붙어 있습니다. 배달호씨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자긍심에 취한 채 20여 년을 지낸 사람이지만, 더 이상 그런 긍지를 가질 수는 없었겠죠. 우리는 그저 ‘주주를 위해 수익을 내고 거기서 일부를 가져다 생활하는 존재(2002년 8월 박용성 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 발언)’가 됐으니까요. 배씨의 유서 첫머리가 뭔지 아십니까. ‘출근을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 구절을 보고 뭉클했던 직원들 많았을 겁니다.”

    “일하는 사람에겐 슬픈 일이죠”

    늦은 저녁 회사측 관계자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민영화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모두들 당시 상황에서 민영화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자가 “필요성은 인정한다 해도 그게 꼭 두산이어야 했느냐”고 물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던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말머리를 돌렸다.

    밤이 깊은 후 새벽에 만났던 관리직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기자를 만나 그런 얘기를 해주었는지 묻고 싶었다. 기자가 만난 두산중공업 직원들은 모두 하고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그 이유가 뭘까.

    “누군들 생각이 없겠습니까. 오죽하면 사내전산망 자유게시판이 실명으로만 글을 올릴 수 있게 돼 있을까요. 실명으로 바뀐 뒤로는 홍보실에서 올린 글만 가득합니다.

    솔직히 저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당분간은 노조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겁니다. 이미 예정돼 있던 추가 구조조정도 유보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결국 두산은 노조를 ‘건전세력화’시키는 데 성공할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벌써 거의 성공 단계나 다름없었을 테니까요. 배달호씨의 분신은 결국 노조에 시간을 벌어준 것뿐이라고 봅니다.

    그러고 나면 회사는 조용해지겠죠. 그러나 더욱더 ‘출근해도 재미가 없는’ 직장이 될 테고,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중기계 산업의 기수’라는 긍지 어린 기억도 사라질 겁니다. 주주에게는 분명 이익이 되겠지만 일하는 사람에겐 슬픈 일이죠.”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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