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억지 부린 YS 황당한 김중권 무례한 조세형

중국서 망신당한 한심한 정치인들

  • 글: 김형배 중국동북아연구소 고문·전 주중 무관 sinokim468@dreamwiz.com

    입력2003-02-25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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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 중국 지방대학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같은 시기 노태우씨도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YS가 장쩌민 면담을 요구했다.
    • 고민 끝에 중국 정부는 노태우씨의 장쩌민 면담을 취소하는 방법으로 YS의 요구를 거절했다. 외교적 결례가 빚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억지 부린 YS  황당한 김중권 무례한 조세형

    2001년 6월 대통령 친서를 호텔에 놓아둔 채 장쩌민 중국주석(왼쪽)을 면담한 김중권 민주당 대표

    지난 1997년부터 5년간 필자는 주중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인구 13억의 대국을 이끌어가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에겐 독특한 노하우가 있었고 분명한 국가목표와 철학이 있었으며 능력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국 지도자들의 뛰어난 외교 능력이었다. ‘대국’답게 통 크면서도 정교한 외교술은 타산지석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필자가 5년 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토대로 중국 외교의 강점과 한국 외교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실수연발, 조세형·김중권 대표의 訪中

    1999년 6월 조세형(趙世衡)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방중 하루 전날 한나라당 서상목(徐相穆)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조대표의 방중 계획이 취소되었다. 중국은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직접 조대표를 맞기로 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조대표가 방중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으니 중국 정부로서는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측은 “이제부터 한국 정치인은 장주석을 예방할 수 없다. 한국 정치인들은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었다. 날짜도 맘대로 바꾸고 온다고 했다가 당일에 오지 않는다고 알려오는 등 제멋대로다. 일본인들은 6개월 전에 결정한 약속도 그대로 지킨다”며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권병현(權丙鉉) 주중대사가 나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사태를 수습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적지 않았다. 조대표의 방중 취소는 국내의 정치적 사안을 국가간 약속보다 더 중요시한 우리 외교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2001년 6월에는 민주당의 김중권(金重權) 대표 일행이 중국을 방문했다. 2년 전의 조세형 대표 사건으로 김대표의 장주석 예방은 실현되기 쉽지 않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홍순영 대사가 간신히 성사시켰다.

    당시 김대표가 장주석을 만나야 한다고 내건 명분은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 전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장주석을 만나러 간 김대표는 친서를 숙소에 놓고 오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친서는 나중에 별도로 전달했지만 상당한 창피를 당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귀국한 김대표 일행은 장주석과의 면담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일행 중 그 누구도 장주석과 김대표의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장주석과 사진 찍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국제전화로 주중 한국대사관 직원을 불러 대화내용을 물어보아야 했다. 국제전화는 100% 도청되는데….

    김영삼(金泳三) 전(前) 대통령만큼 한국 정치인의 한계를 ‘학실’히 알려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6일부터 18일까지 하얼빈공대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일개 지방대학의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여튼 그는 중국에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김 전 대통령 측에서 장쩌민 주석을 면담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6월7일 인민외교학회의 초청을 받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중국에 와, 8일 장주석을 만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무리한 요구를 받은 중국측은 고심 끝에 장주석과 노 전 대통령의 면담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김 전대통령의 면담 요구를 거절했다. 장주석은 이때 지키지 못한 노 전 대통령과의 면담 약속을 2002년 11월20일 인민대회당에서 접견함으로써 지켰다.

    지금도 필자는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왜 중국을 방문했는지 궁금하다. 대학의 초청을 받아 방문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지 왜 계획에도 없는 장주석 예방을 고집해 다른 사람의 일정까지 방해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는 남북정상회담을 목전에 두었던 시기였다. 때문에 주중 한국대사관은 장주석이 노 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중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해 못할 행동으로 무산돼버렸다.

    김 전 대통령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 더 거론할 게 있다. 1994년 4월,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방한하던 날, 국내 최고의 핵 전문가 중 한 명이자 역대 최고의 미국통으로 불리는 김재창(金在昌·육사 18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군복을 벗었다. 이유는 하나회 출신이라는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장으로 진급시킨 지 꼭 1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군개혁’이란 명분은 좋지만 모순된 것이 많은 인사였다. YS는 같은 하나회 출신인 이병태 국방장관은 그대로 두고, 하급자인 김재창 장군만 보직해임시킨 것이다. 그는 미군들로부터도 ‘김대장님(General Kim)’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받던 사람이었다. 북한 핵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라 미국의 국방장관이 방한하는데, 카운터파트너 역할을 할 유능한 장군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시급한 일이었을까.

    “한국에 전략가가 있는가?”

    2000년 4월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었을 때 한국인 출신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최고위직에 오른 조남기(趙南起) 장군이 ‘북한을 상대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필자에게 물어본 말이다.

    “한국 정치인 중에는 과연 외교 전략가가 있는가.”

    필자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중국대사관 오폭사건과 반미시위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최근 전개되는 현실은,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은 노대통령의 의중과 관계없이 계속 노무현 정부를 흔들며 시험할 것이다. 북한 핵문제와 함께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대미관계도 노대통령 앞에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최근의 반미시위는 3년 반 전 코소보 전쟁 때 미국 공군기가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국인의 반미시위와 비교해볼 만하다. 이 폭격으로 중국대사관 직원 두 사람이 죽고 건물이 파괴되었다. 중국 전역은 곧바로 반미시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장쩌민 주석은 클린턴 대통령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시민들은 미 대사관으로 몰려가 반미구호를 외쳤다. 일부 ‘용감한’ 시민들은 돌과 페인트를 던져 미 대사관 시설 일부를 파손시켰다. 어떤 경우(전쟁시라도)에도 보호받아야 하는 외국공관이 위험에 노출되자 미국은 물론이고 베이징의 외교가가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중국은 아직 멀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과 실망을 표출하였다.

    이 사건은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수습되었지만, 미국대사관을 지켜주지 못한 중국은 나중에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위대가 성조기를 태우고 대사관을 향해 돌과 페인트를 던지는 광경은 이를 애써 외면하는 중국 공안(경찰)의 표정과 함께 CNN 등을 통해 세계 전역에 방영되었다. 이 화면을 본 미국 국민들이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당연지사.

    미 공화당은 이를 감지하고 곧 시작된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클린턴 정부의 대(對)중국 유화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공약대로 중국에 대해 강경책을 유지했다. 지금 중국과 미국의 군사관계는 아예 단절된 상태다. 미 군부가 대중 강경책을 선두에서 이끌었기 때문이다.

    아쉬워진 쪽은 중국이었다. 경제면에서 중국은 미국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장쩌민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미국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갖은 명목으로 만나, 중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기대하는 것만큼 받아주지 않고 있다.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피폭사건에 이은 반미시위가 부시 행정부로 하여금 중국에 강경책을 구사하게 한 전적인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시민들의 ‘용감한’ 행위와 이를 ‘방관한’ 중국정부의 태도가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여중생 사망으로 촉발된 반미시위 때 ‘간(肝) 큰’ 우리의 젊은이들은 미군부대에 들어가 반미구호를 외쳤다. 일부 시민들은 성조기를 태우고 미 대사관을 둘러싸는 인간띠를 형성했다.

    이러한 광경이 TV를 통해 우리 정부가 ‘방치’하는 것으로 비쳐진다면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이 한국을 중국처럼 ‘길들여야 할 대상’으로 삼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구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국가적인 문제는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노대통령은 중국 외교를 배울 필요가 있다.

    억지 부린 YS  황당한 김중권 무례한 조세형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사건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대의 투척으로 어지러워진 주중 미국 대사관. 중국은 이 반미시위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중국은 대외관계를 중시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미국이 힘을 바탕으로 자국의 전략을 구현한다면, 중국은 순수한 외교로 세계대국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세기 중엽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아 ‘수치의 100년’을 지낸 경험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중국 관료들은 외국과 문제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때문에 외교부나 외국공관의 문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한다. 외국공관이 요구하면 사형수까지도 풀어주는 경우가 있다. 길거리의 경찰도 외국인이라면 대우를 달리한다.

    초대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중국 외교의 틀을 세운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대외관계에는 사소한 일이 없다(外事沒有小事)”고 말했다. 또한 그는 “외교란 사람을 사귀는 것”이라며 외교는 외교부 직원들만의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저우언라이는 외교 모임에 가기 전에 미리 국수를 먹었다. 외교 모임에서 참석자들과 더 많은 대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저우언라이는 “대외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평소 주량의 3분의 1만 마셔야 한다”며 외국인 앞에서는 술 취한 중국인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의 외교는 고도의 국가정책과 전략에 따라 이뤄진다. 중국의 외교정책과 전략은 수많은 전문연구기관의 자문을 받아 당과 정부를 거친 다음, 최종적으로는 장쩌민 주석을 조장으로 하는 외교영도소조(外交領導小組)의 주도로 결정된다.

    중국 외교가 조급하지 않고 일관성 있게 대응하는 것은 이처럼 풍부한 연구인력과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상황을 가정한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예상문제를 많이 풀어본 학생이 시험관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 국무원 외교부(우리의 외교통상부)는 순수하게 현행업무만 수행한다. 우리 외교통상부의 정책실 같은 정책결정 부서 없이 순수한 집행부서만 편성돼 있는 것이다.

    중국은 외교부에서만 외교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의 대외업무 종사자들은 ‘외교는 관(官)에서 반(半), 민에서 반을 한다”고 말한다.

    중국 외교는 국가외교목표에 따라 당·정(黨政)이 펼치는 관방(官方)외교, 군쪽에서 하는 군사외교, 그리고 겉으로는 민간단체지만 실제로는 관변단체들이 펼치는 민간외교가 조화를 이뤄 진행된다. 중국은 민간외교를 중국과 인연을 맺은 사람 중에서 현직에 있거나 현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펼친다.

    2002년 5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장쩌민 주석은 상하이까지 내려가 부시 전 대통령 부부를 접대했다. 그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불과 3개월 전에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갔는데 말이다.

    이와 같이 중국은 친구관계를 명분으로 한 반관반민 외교를 적극 전개하고 있다. 민간외교를 전개하는 기관은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중국국제우호연락회·중국인민외교학회·중국국제교류협회·중국국제전략학회 등등이다. 이들 기관에는 그 기관의 특성에 따라 전현직 외교관·관료·장성·무관·학자 등이 포진해 있다. 이 기관들은 외교부에 준하는 힘을 부여받고 있어, 당정의 관련기관은 이 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적극 지원한다.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인 슝광카이(熊光楷) 상장(한국군의 대장)은 중국군의 대외관계와 정보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인데 그는 중국국제전략학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국방부 정책실장이 국방연구원(KIDA) 원장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1999년 초 미국을 방문한 그는 미 국방장관과 상하의원은 물론이고 전략국제연구소장 등 유력 연구기관 책임자를 만났다. 군인들은 부총참모장 자격으로 만나고 정치인과 민간의 전문가는 중국국제전략학회 회장으로 만난 것이다.

    중국의 외교는 외교부와 군의 유기적인 조화 속에 이뤄진다. 중국은 군사외교를 국가외교의 한 축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먼저 민간 및 경제교류를 시작하고, 이어 정부와 정당 간부의 교류에 들어가며, 그 뒤에 양쪽의 국가지도자가 방문하는 정상외교를 펼친다.

    그 다음에 양측의 국방장관이 만나거나 군함이 방문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즉 장쩌민 주석이 어느 나라를 방문하면 곧 이어 츠하오톈(遲浩田) 국방부장이 가는 식이다.

    중국은 목표를 확고히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외교를 펼친다. 우리는 그 반대다. 우리의 외교는 ‘일부 똑똑한 사람들’에 의한 외교이며 외교부의 전유물이다. 정책은 외교부에서 수립해 그들만이 수행한다. 그런데 사람이 자주 바뀌어 그 정책마저도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

    한국은 외교부는 외교부대로, 군은 군대로, 기타 부처는 부처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정당은 정당대로 각기 따로 외교를 펼친다. 그러니 북한에 질질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북한 핵이 큰 이슈가 되면 부처를 막론하고 외국에 나간 공무원들은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정부의 주요 공직자는 해외에 나갈 때는 총리나 대통령의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형식적인 허락을 받은 것이라 해외에 나온 공직자들이 우리 정부의 확고한 입장을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베이징에 5년 동안 있으면서 정치인·장관·장성·고위관료·정부기관 책임자 등 수많은 대표단을 접해 보았지만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김대중 정부는 미·일·중·러를 상대로 ‘총력외교’를 펼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에 보도된 정부의 ‘총력외교’의 실체는 한·미·일 국장급 관료들이 참석하는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회의를 개최하고 미·중·러에 특사를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특사로는 이태식 외교부 차관보와 김항경 차관, 그리고 임성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임명되었다. 언뜻 보면 총력외교를 펼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잘못된 점이 적지 않다.

    세 특사는 현지 대사보다도 직급이 낮다. 현지 대사보다도 낮은 직급의 사람이 특사로 오면, 대사의 처지는 매우 이상해진다. 의전상 상대국 대표를 만날 때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태식 차관보(특사)가 중국에서 만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차관)은 주중대사가 수시로 만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낮은 직급의 특사가 간다고 해서 무슨 새로운 합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도 대통령이 참여한 가운데 외교정책팀을 강화해야 한다. 외교는 외교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여러 부처가 공조해야 한다. 외교의 핵심은 안보다. 미 국무부에는 200여 명의 장교들이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다. 한국 외교도 이러한 중국과 미국을 참고해 환골탈태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 놀리는 한국

    중국 국방부는 매년 초 외국 무관 등을 초청해 신년행사를 한다. 1999년 행사에서 중국군 총장비부장 차오강촨(曹剛川) 상장이 갑자기 필자에게 조성태(趙成台) 장군의 안부를 물으며 그에게 마오타이주를 선물하고 싶으니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성태 장군이 중국에 왔을 때 잠시 만난 적이 있는데 참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 즉시 예편해 집에서 쉬고 있는 조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이 말을 전해주었다. 조장군은 차오강촨 상장이 누구인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그해 5월 국방장관이 된 조성태 장군이 8월에 중국을 방문해 차오강촨 상장과 부부동반으로 조찬을 함께했다.

    차오강촨 장군은 그 뒤로도 매년 조장관에게 마오타이주 2병씩을 보내주었다. 그러한 차오강촨 장군은 지난번 당대회에서 국방부장(장관)으로 내정되었다.

    조성태 장군은 또 현재의 중국 국방부장 츠하오톈 상장과 더없이 가깝다. 2002년 6월2일부터 6일 사이 조성태 전 장관은 예비역 장성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는데, 츠부장 부부는 조장군 일행이 도착하는 날 저녁 만찬을 주최하였다. 츠부장은 다음 날 아침 장쩌민 주석과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5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해야 되는 상황인데도, 조성태 장군 일행을 위해 바쁜 시간을 내준 것이다. 한 달여 전 일본의 전 방위청장관 일행이 방문했을 때는 츠부장보다 2단계 낮은 탕톈퍄오(唐天標) 총정치부 부주임이 접대했었다.

    조장관이 알고 지내던 중국군 친구 중에 세 명이 최근 대군구사령원(우리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조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에서 안내한 주치(朱啓) 베이징군구사령원, 난징(南京)에서 안내한 주원취안(朱文泉) 난징군구사령원, 츠부장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조장관이 각별히 관심을 가졌던 왕졔민(王建民) 성도군구사령원이 바로 그들이다. 중국의 7대군구사령원 중에서 세 명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인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통인 조장군은 장관에서 물러난 후 집에서 쉬고 있다. 중국이라면 이러한 인맥을 가진 사람을 절대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2000년 4월 조남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배고픔과 일제의 압제를 피해 고향을 떠난 그가 62년 만에 중국의 국가지도자가 되어 고향을 찾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한국방문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우선 방문목적에 따른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우리 대사관 직원(재경관·통일관)까지 초청해 설명을 듣고, 해당분야 전문가를 대표단에 포함시켜 보고서 작성을 준비시켰다. 중국의 대표단은 외국을 방문한 다음에는 두 부의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하나는 대외용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용이다. 내부용은 솔직하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이들의 방한 목적은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방법 조사였다. 조장군은 방문일정을 준비하는 나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안 만나도 되지만 이헌재(李憲宰) 당시 재경부장관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신신당부할 정도로 방문목적에 철저했다.

    조남기 장군은 곳곳에서 연설을 했는데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칭찬할 때는 196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얼마였는데 1999년에는 얼마로 몇 배가 늘었다는 등 구체적인 수치를 인용했다.

    각방 요구한 중국 국방부장 부인

    2000년 1월 츠하오톈 중국 국방부장이 조성태 국방장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중국 국방부장으론 역사상 첫 방한이었다. 영국과 러시아를 거쳐 한국에 도착한 그는 신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츠부장의 부인이 별도로 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측은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물었다. 부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남편이 새벽까지 문서를 보며 일을 하는데, 남편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츠부장 부부는 공식일정이 끝난 후 한 방을 썼다.

    중국의 국가지도자들은 바쁘지만 여유가 있다. 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도출할 줄 알고 이에 필요한 조직을 구성해 일을 추진할 줄 안다.



    지난해 가을 중국의 새 지도자로 선출된 후진타오 총서기는 오랫동안 충실히 지도자 수업을 받은 사람이다. 명문 칭화(靑華)대학을 졸업하고, 간쑤(甘肅)·시짱(티벳)·구이저우(貴州)와 같이 빈한한 곳에서 근무하며 중국의 낙후한 현실을 목도했다. 41세 때 부부장급으로 발탁돼 20년 동안 다양한 국정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10년 전부터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본격적인 최고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한 국정경험을 하지 못했다.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지만 후진타오만큼 제대로 된 코스를 밟지는 않았다.

    이러한 노대통령이 후진타오를 이기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중국의 외교술을 비롯해 미국도 참고하고 일본도 연구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후진타오를 앞서는 노대통령의 어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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