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5월 서울지검의 강력부 창설멤버로서 조직폭력배 수사에 참여한 이래 부산지검 강력부 검사, 대구·수원지검 강력부장, 또는 일선의 지청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검찰의 조폭수사에 직접 참여하거나 강력부의 활약을 10여 년간 지켜본 검사로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부 출신 중간관리자로서 검찰 강력부의 탄생배경과 활약상, 조직폭력 현 실태, 강력수사의 문제점, 그리고 강력부의 향후 진로 등에 대해 숙고해보기로 한다.
‘레이건식 경호’ 선보여
우리나라 조직폭력배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멀리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일제시대의 소위 협객스타일 폭력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검찰 강력부 출범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대체로 5공 이후의 조직폭력세계를 조명해보면 될 것이다.
조직폭력배들은 5공 초기 계엄하에서 이른바 삼청교육을 실시하고 폭력사건에 연루된 조직의 몇몇 간부급에 대해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선고하는 등 당국이 강경책을 펴자 한동안 자숙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계엄이 해제되고 정부의 조직폭력 척결의지가 다소 약화된 듯이 보이자 다시 발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대에 들어와 경제규모 확대, 소비향락산업의 발전에 궤를 맞추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나이트클럽 등 대형 유흥업소와 성인오락실, 호텔 파친코 등에 직접 진출, 엄청난 불로소득으로 자금원을 형성했다.
이들 폭력조직은 원래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어 끊임없이 자생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에 정치권뿐만 아니라 일부 기업인도 때로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그들을 이용해왔기 때문에 광범위한 비호세력이 형성됐다. 나중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개혁사정이 본격화되자 검찰, 경찰, 국가안전기획부 등의 고위간부들이 이들과 유착한 사실이 문제가 돼 사법처리된 것이 좋은 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고 지연, 혈연, 학연 등을 내세워 정치인 또는 관계공무원들에게 접근해 설득, 회유, 매수, 협박 등의 방법으로 각종 문제를 해결한다. 또 조직간의 갈등이나 제3자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조직원들로 하여금 상대방을 가해하도록 명령해 끊임없이 잔혹한 칼부림사건을 일으켜왔다.
또한 이들은 저학력, 전과 등 수치스런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검은 돈으로 호화판 해외여행을 하고 고가의 외제물품을 구입하는 등 엄청난 과소비를 주도해왔다. 심지어 일본 야쿠자나 미국 마피아 등 외국 폭력조직의 행동양식까지 본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기곤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까지 조직폭력의 황금기에는 폭력조직의 두목이 경조사에 나타날 경우 소위 ‘레이건식 경호’가 펼쳐졌다. 이것은 두목이 호화 외제차를 타고 가면 깡패 특유의 복장을 한 조직원들이 사방에서 차량의 진행 속도에 맞추어 뛰면서 경호하는 것이다.
1987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이들은 자파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 연합체를 결성해 폭력조직끼리 연대했다. 이로써 소위 전국구급 건달이 많이 탄생하게 됐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호남 출신 주먹계 거물 박종석(일명 번개) 등과 함께 조직한 신우회, 이리 출신 건달 김항락이 군산 출신 건달 형감(일명 형철우),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 등과 연대해 만든 일송회, 전북 조직폭력배의 대부 이승완이 주축이 된 호국청년연합회,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이 주축이 된 화랑신우회 등이다. 위 단체의 간부 대부분이 그후 검찰 강력부의 조직폭력 수사과정에서 사법처리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