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디카족, 뽀샵족의 세상 바꾸기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3-02-25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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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말을 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각 이미지로 얘기를 나눈다’는 건 어떤가. 심지어 공적인 대화의 수단으로도 이미지를 활용한다면?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은이들이 문자언어 대신 시각 이미지를 떡 주무르듯 가공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2003년 대한민국, 디지털카메라 100만대 시대의 새로운 ‘언어진화’를 따라가보자.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그림 1. 임대료가 밀린 ‘불쌍한 은행’<br>그림 2.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터는 모습<br>그림 3. 문제는 돈. 아껴쓰라는 어머니의 충고가 담긴 오천원짜리 지폐<br>그림 4. 손으로 그린 만원짜리 지폐<br>그림 5. 세종대왕 대신 탤런트 신구씨의 얼굴을 합성한 만원짜리 지폐

    ‘이 사진 보시오. 불쌍한 은행이오.’

    1월 말의 어느날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는 강신우(35)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들어가본 대학 동아리 후배들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뜬금 없는 게시물 한 줄을 발견했다.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게시물로 즐거움을 주던 98학번 후배의 글이었다. 무슨 얘기일까. 호기심이 동한 강씨가 클릭을 하자 의 사진이 떠올랐다.

    지나치다 찍은 것이 분명한 사진 한 장. 그러나 효과는 백마디 말보다 강력했다. 눈물이 나도록 웃어제낀 강씨는 사진을 다운 받아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바쁜 오후를 보낸 강씨가 퇴근 무렵 다시 들어가 본 사이트에는 아니나다를까, 다른 후배들의 댓글 서너 개가 올라와 있었다. 말이 댓글이지 ‘글’이라고는 제목 한 줄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갖고 무얼 그러시오? 실제로 은행이 털리는 장면을 보여드리겠소.’

    은행을 터는 장면이라…. 클릭해 들어가본 첫 번째 댓글에는 정말 ‘은행’을 터는 사진(그림 2)이 올라와 있었다. 그 밑에 줄줄이 달린 댓글 역시 하나같이 포복절도할 사진들이었다.



    ‘그 놈의 돈이 원수요. 그러길래 일찍이 우리 어머니께서 돈을 아껴쓰라 하신 것 아니겠소.’ (그림 3)

    ‘조금 더 노력하시오. 아직 력이 부족한 듯하오.’ (그림 4)

    ‘그 세종대왕 역시 완전히 득를 하지 못하였구려. 여기 진짜가 있소.’ (그림 5)

    묘하기 이를 데 없는 ‘하오’체의 글투, ‘도력(道力)’ ‘득도(得道)’를 뜻한다는 ‘력’ ‘득’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몇 달 전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올릴 때면 후배들이 어김없이 사용하는 스타일이어서 영 낯선 것도 아니었다. 한번도 들어가본 일은 없지만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재미있는 사진들을 올리는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라는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문체와 은어라는 것쯤은 신문을 통해서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저렇게 기막힌 사진들을 만들고 찾아내 퍼 나르는지 무척이나 신기해하던 참이었다.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게 많겠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거잖아요. 우리 또래 같으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대도 ‘내가 말야, 어제 어느 은행 앞을 지나가는데…’ 하며 이야기로 풀었겠죠. 그걸 그냥 사진 한방으로 해결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죠. 답도 사진으로 올리는 걸 보면 사진만 갖고도 ‘대화’가 가능한 세상이 됐나봐요.”

    그림이 되겠다 싶은 건 뭐든지

    “솔직히 말하자면 제 사진이라고 하기는 좀 민망해요. ‘표절작’이거든요.”

    ‘불쌍한 은행’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강씨의 후배 민경진(24)씨의 말이다. 누군가가 이 장면을 찍어 ‘디시인사이드’ 사이트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신나게 웃었는데, 며칠 후 길에서 실제장면을 보게 되어 자신도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원래 사진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게 민씨의 생각이다.

    “항상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뭐 재미난 것 없나’ 생각하죠. 길에서든 집에서든 도서관에서든 그림이 되겠다 싶은 건 뭐든지 찍거든요. 만족스러운 사진이 나오면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요. 디시인사이드나 나우누리 사진유머방 같은 데서 조회수가 수천 번을 넘으면 기분이 좋죠. 댓글이 있으면 더 기쁘고요. 내가 보기에 작품이다 싶으면 분명히 반응이 있거든요. 정말 멋진 장면을 봤는데 그날따라 카메라가 없으면 정말 서운하죠. 분해서 한참 동안 그 일만 생각난다니까요.”

    며칠 후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취업이 안 돼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고 있는 민씨가 디지털카메라를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건 2001년 봄부터.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오빠가 1999년 ‘거금’을 주고 마련한 카메라를 쓰고 있지만, 곧 오빠가 전역하면 도로 뺏길 것 같아 새로 사려 마음먹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보고 있는 제품의 가격이 ‘취업준비생’에게는 만만찮아서 공동구매나 할인이벤트를 통해 싸게 사보겠다고 인터넷을 뒤지는 중이다.

    “폰카(핸드폰에 장착된 카메라)가 늘어나면서부터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어요. 요즘 나오는 건 내장형 33만 화소(화소는 한 화면 안에 들어가는 입자 수. 숫자가 높을수록 화질이 좋음)에 플래시까지 있다니까 굉장하죠. 그래도 아직은 디지털카메라가 나아요.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화질은 경쟁이 안 되거든요.”

    시각 이미지가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 대화를 하고 즐거움을 나누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불특정 다수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느는가 하면, 관련 전문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들이 자유자재로 이미지를 합성하고 편집해 마치 일기를 쓰듯 이야기를 담는다. 바야흐로 ‘이미지 언어의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한 해 팔려나간 디지털카메라의 수는 대략 40만대 내외. 2001년 판매된 25만대에 비해 거의 두배에 가까운 숫자다. 200만 화소 제품이 대부분이던 2002년과 달리 올해는 300만 화소대 제품이 주력으로 등장했고, 가격 또한 50만~60만원까지 떨어지면서 디지털카메라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업계는 올 상반기 내에 디지털카메라 보급 대수가 100만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한다.

    2001년 9월 SK텔레텍이 일본에서 유행하던 ‘착탈식 카메라 장착 핸드폰’을 내놓으며 형성된 폰카 시장의 성장세는 이미 디지털카메라를 넘어섰다. 2002년 한해 동안 팔린 폰카 숫자만 150만대. 지난해 팔린 폰카는 대개 11만 화소 수준이지만 지난 연말 팬텍&큐리텔이 출시한 33만 화소 내장형 폰카를 필두로 올해 상반기 65만 화소, 하반기 130만 화소급의 폰카가 시장에 나오리라는 전망이다. 이 정도 수준이면 명함 크기 사진에서는 아날로그 카메라와 비교해도 거의 화질차이가 없다. 더욱이 올해부터는 20분 가량의 동영상과 오디오를 녹화할 수 있어 폰카의 다음 세대로 불리는 ‘캠코더폰’ 경쟁도 거셀 전망이다. 따라잡기 힘든 변화속도다.

    상반기 내에 300만대가 보급될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카메라와 폰카 사용자들 중 상당수는 앞에서 설명한 민경진씨처럼 언제 어디서나 사진을 찍어 인터넷을 통해 공유하는 이른바 ‘디카족’. 이들이 디지털카메라에 열광하는 것은 찍은 사진을 얼마든지 복사, 편집하고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재미를 느끼는 일은 이들에게 마치 수다떨기나 다름없는 일상생활이다.

    누구나 이미지를 만드는 시대

    디카족의 수를 정확하게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디지털 사진 공개게시판 역할을 맡은 첫 사이트로 명성을 떨친 디시인사이드나 최근 ‘뜨고 있다’는 ‘웃긴 대학(www.humoruniv.com)’ 사이트의 경우 조회수 1만회를 넘는 게시물이 드물지 않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프리챌 커뮤니티 ‘사진을 올려라(www.free- chal.com/pkpj)’ 동호회, 다음 카페 ‘디지털매니아(cafe.daum.net /DIGITALMANIA)의 회원은 각각 1만5000명과 2만2000명 내외. 최소한 2만~3만명의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이미지로 말하기’라는 새로운 습관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사건을 설명하는데 이미지와 문자 언어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당연히 이미지죠. 젊은 세대가 이미지 언어에 친근함을 느낀다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인터넷과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을 통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죠. 생산자와 수용자의 구분이 무너진 겁니다.”

    젊은 세대가 사진으로 ‘대화’를 한다는 것, 이미지가 ‘언어’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흐름이라는 게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교수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이미지가 화가나 그래픽디자이너 같은 전문가들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과 기술이 급격히 줄어듦에 따라 이미지가 새로운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이메일’이라는 전달수단이 바탕이 되었다.

    “음성언어가 갖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인류는 문자언어를 발명했습니다. 이제 문자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이미지 언어가 등장한 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문자언어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미지언어의 쓰임새가 계속 커질 거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더욱이 요즘 젊은 세대는 마치 숨쉬는 법에 익숙한 것처럼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에도 익숙합니다. 굳이 훈련하지 않아도 처음 보는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들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이를 가공하고 편집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획기적인 일이죠.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만화전문출판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차효라(25)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차씨 또한 항상 디지털카메라를 지니고 다니지만, 찍은 사진을 그냥 올리기보다는 PC로 ‘뽀샵’해 남들한테 보여주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다. 뽀샵이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Photo- shop)’을 통해 사진을 ‘뽀사시하게(예쁘장하게)’ 다듬는 일을 일컫는 은어. 여러 개의 그림을 오리고 잘라 붙여 합성하거나, 색깔이나 배경을 바꾸는 등 모든 종류의 이미지 조작이 가능하다. 차씨는 간혹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 프로그램으로 사진 위에 직접 덧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들 ‘뽀샵족’은 대부분 보통 와레즈 사이트(불법복제 프로그램을 모아놓은 사이트)에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쓴다. 100만원에 육박하는 정품을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크기 때문. 차씨의 경우 처음에는 ‘버벅대던’ 포토샵 기술이 이제는 제법 능숙해져서 이미지 하나를 꾸미는 데 30분 남짓이면 족하다.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그림 6. 2002 월드컵 기간 사이버 공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임자텐 엔터테인먼트 월드컵 시리즈 중 ‘국가대표 이야기’편

    차씨가 맨처음 했던 뽀샵은 동아리 친구들과 찍은 사진의 ‘밝기’ 조절. 그러나 지금은 실력이 일취월장해 지난해 10월에는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무명연극배우의 인형에 갖가지 의상을 입혀 수십 장의 브로마이드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친구는 물론이고 일본배우 본인도 뛸 듯이 기뻐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이 차씨에게는 최고의 기억이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동료의 사진을 ‘매만져’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해 생일선물로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차씨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사용법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다. 그냥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재미삼아 작업하는 사람 가운데 전문가는 많지 않을 거라는 게 차씨의 추측이다.

    “누가 워드프로그램을 배워서 쓰나요? 그거랑 마찬가지예요. 물론 전문가들 눈에는 수준이 낮겠지만 상관없죠, 어차피 재미로 하는 일인걸요. 처음에는 펜 마우스를 많이 사용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냥 마우스가 더 편해요. 지금은 연필보다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쉬우니까요. 언제부터 실력에 만족했냐고요? 글쎄요, 그건 ‘언제부터 영어를 잘했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갖가지 사이트를 통해 이들 ‘디카족’ ‘뽀샵족’이 내뿜는 메시지의 주제는 다양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연예인이 고양이에게 물리는 장면을 익살스럽게 합성해 놀리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정몽준 의원과 가수 싸이의 공연모습을 합쳐 지난 대선 이후 정의원의 처지를 풍자한 ‘나 몽준이 새 됐어’라는 사진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있다.

    형식도 다양하다. 한 장짜리 사진이 많지만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나 애니GIF 파일, 캠코더로 촬영한 동영상도 있다.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는 별개의 사진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는 방식. 인터넷에서 다운받거나 직접 찍은 사진에 ‘말풍선’을 집어넣어 연결한 이들 작품은 대개 만화의 형식틀을 빌리고 있다. 지난해 월드컵 기간에 관련 사이트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임자텐 엔터테인먼트’의 ‘월드컵 시리즈’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만든 이가 확인되지 않는 이 시리즈물은 히딩크 감독이나 월드컵 대표선수들의 사진을 포토샵 작업으로 다듬어 매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그림 6).

    이미지로 강의를 한다?

    이처럼 젊은 세대에게도 이미지를 다루는 일은 아직까지 취미생활이나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일고 있는 변화의 조짐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이미지언어가 문자언어를 대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서버 구축을 전문으로 하는 벤처업체 새눈테크의 박성률(30) 사장은 지난 연말 단합대회를 겸한 직원들과의 워크숍 에서 사진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2003년 사업목표’를 발제했다. 매출액이나 수익 같은 수치는 어쩔 수 없이 글자로 들어갔지만, 시장상황 묘사나 향후 비전 등은 합성사진으로 만들어 표현했다. 영업팀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영업담당자의 얼굴과 경쟁업체 담당자의 얼굴사진을 따서 복싱장면에 붙이는 식이었다.

    “딱딱해지기 쉬운 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어요. 앞으로의 전망을 얘기하는 자리이니 만큼 유쾌하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은 많이 들었지만 효과는 좋았어요. 목표수익을 제시하는 화면에서 돈방석 위에 제가 앉아 있는 사진을 만들어 붙였더니 직원들이 다들 환호성을 지르던데요. 단순히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공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 또한 ‘디시폐인(디시인사이드 사이트에 자주 드나드는 마니아를 일컫는 은어)’ 중 하나라는 박사장의 말이다.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일인지 취미활동인지 모를 만큼 즐거웠기 때문에 더 좋았다는 것. 박사장은 앞으로도 종종 이런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대학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는 지난 학기 ‘현대사회와 청소년 심리’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과정 대부분을 이미지로 이루어진 파워포인트로 진행했다. 칠판에 판서를 하거나 인쇄물을 나눠주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강의마다 빔 프로젝터를 사용해 준비해둔 이미지를 보여주며 설명했다(그림 7). 자아정체성 변화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개의 얼굴이 끊임없이 변해 다른 얼굴이 되는 연속 이미지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53명의 수강생들에게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와 동영상을 주축으로 리포트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때문에 학생들은 종이가 아닌 CD-ROM에 리포트를 담아 제출했다. 처음에는 버거워하던 수강생들도 통통 튀는 생각이 담긴 그럴 듯한 리포트를 금세 만들더라는 게 황교수의 경험담이다.

    언어는 가고 그림이 뜬다

    그림 7. 연세대 황상민 교수가 지난 학기 강의에서 사용한 이미지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법하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불과한 이미지를 진지한 언어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까. 이미지로 강의를 진행했던 황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기성세대로서는 그런 의문이 드는 게 자연스럽죠. 우리 세대는 흔히 ‘텍스트는 진실이고 이미지는 껍데기’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지가 곧 실체거든요.

    어른들은 ‘나는 누구일까’를 고민했지만 지금 아이들은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합니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철학적이고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단지 기성세대가 지나온 시대에 적합했던 것뿐일 수 있습니다. 흔히 젊은 친구들은 과거는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 못 한다고 말하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욕망을 구현하는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겁니다.”

    이미지언어가 확대되면 혹시 합리적인 사고나 분석력 대신 미술실력이나 색채감각이 더 중요해지는 부작용도 생기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황교수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분명히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에 차이가 있습니다. 문장력이 사람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죠. 지금까지는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앞으로는 이미지를 다루는 능력이 인재 평가의 주요 항목이 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고요.

    그러나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과 이미지를 조합하는 능력은 별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념조작이라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죠. 쉽게 말하면 글을 잘 쓰는 친구가 이미지를 잘 조작할 가능성도 높은 겁니다.”

    앞에서 만난 차효라씨의 의견도 비슷하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합성사진도 많이 만든다”는 것이다. 차씨는 그래서 제목에 맞춤법이 틀린 게시물은 잘 클릭하지 않는다. 일부러 틀리게 쓴 경우를 제외하면 맞춤법이 틀린 게시물은 대개 재미가 없다는 것이 그의 경험칙인 셈. 사진을 연결해 스토리를 만드는 일도 플롯을 어떻게 짜느냐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감각뿐 아니라 창의력이 중요하다는 게 차씨의 생각이다.

    “어차피 우리가 주류니까요”

    황교수는 “오히려 염려스러운 것은 기성세대의 당혹감”이라고 말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몇몇 대학원 수업에서 대개 30대 중반 이후의 박사 과정 학생들이 심각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문자언어 대신 이미지언어가 쓰이는 것을 일종의 ‘진화’라고 한다면, 시각 이미지 언어 이후 어떤 언어가 등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촉각언어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촉각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도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가상현실처럼 쇼킹한 일일 겁니다. 미래는 언제나 그렇게 낯선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언어가 점점 확대되면서 기성세대가 느낄 당혹감도 더 커질 겁니다. ‘이미지는 가벼운 것’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 ‘아이들이 TV만 보고 컴퓨터 게임만 해서 문제’라는 걱정도 늘어갈 거고요. 그렇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그게 그대로 삶인 겁니다.”

    반대로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가 느끼는 이러한 당혹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텍스트로 대화하는 것과 이미지로 대화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앞서 만났던 민경진씨는 “이게 왜 신기한 일이고 기사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거푸 말했다. 기자가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그 충격이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이 주는 느낌이나 다름없을 것”이라고 설명하자 민씨는 그제서야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민씨에게서 무섭도록 당당한 ‘이미지언어’ 세대의 자신감이 읽혔다.

    “그 정도라고요? 글쎄요, 그렇다면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실감은 안 나지만. 그래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네요. (웃음) 어차피 이미지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점점 많아질 테고, 앞으로 세상의 주류는 우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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