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연애? 결혼? 그냥 외로워서 오는 거죠”

‘젊음의 해방구’ 사교클럽 체험기

  • 글: 정 영 시인·자유기고가 jeffbeck@hanmail.net

    입력2003-02-25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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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깨가 시원스레 드러나는 멋진 이브닝 드레스를 걸치고 와인 잔을 왼손에 살짝 든 채로 멋진 유머를 날려 좌중을 사로잡는 스탠딩 파티.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화려한 사교모임이 주말마다 우리 주위에서 펼쳐진다. 젊은이들은 불나방처럼 이 휘발성 짙은 사교모임에서 도심의 외로움을 날려버린다.
    •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파티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연애? 결혼? 그냥 외로워서 오는 거죠”
    토요일 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거리엔 연인도 많고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난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다. ‘텅 빈 집으로 가기는 싫은데, 어디로 갈까? 혼자 뭘 먹을까?’ 하고 외로움에 치를 떨었던 적이 있다. 이런 쓸쓸한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런 날은 갔다. 사교클럽의 화려한 파티와 멋진 젊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최근 사교클럽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것일까. 그곳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

    현재 국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사교클럽 F사의 회원은 4만8000여 명. 매월 늘어나는 신입 정회원만 100여 명에 가깝다. 그리고 F사는 연 70회 이상 열리는 파티 때마다 많게는 400여 명, 적게는 200여 명이 모인다.

    필자는 한 사교클럽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클럽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가입 절차를 밟고 일주일 전 예약을 해두었다. 클럽 F사의 경우 정회원이 되려면 가입비 15만원에 연회비 30만원을 내야 한다. 그러나 450만원을 한꺼번에 입금시키면 연회비와 가입비를 면제받으며, 회원 탈퇴시 전액 돌려받는다.

    외롭던 밤은 화려해지고



    파티에 갈 때마다 또 돈이 들어간다. 비용은 파티 테마에 따라 다르다. 게스트인 필자는 10만5000원을 냈으나 정회원에게는 40%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한번 파티에 참석하는 데 10여 만원이라면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찾는 이들에게 그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F사의 한 관계자는 5년 이상 매주 파티에 참가한 사람도 상당히 많다고 전한다.

    파티는 저녁 7시에 시작된다. 장소는 주로 인터콘티넨탈, 워커힐, 메리어트, 웨스틴조선 등 특급호텔이나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 파티 이름은 보드카파티, 퐁듀파티, 프리미어다이닝파티 등 다양하다.

    화려한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면 섹시한 파티 의상을 차려 입은 오거나이저 혹은 파티매니저들이 파티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디너파티의 테이블 매칭 또한 오거나이저들의 임무. 참석자의 직업과 개성에 맞춰 한 테이블에 같이 앉을 사람들을 정해야 한다. 내 이름이 적혀 있는 디너 테이블엔 이미 세 명의 남녀가 앉아 있다. 화려한 화장과 액세서리로 멋을 낸 여자들과 깔끔한 미소의 남자. 처음엔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지만 식사를 같이하다 보니 금세 친해진다. 입소문과 무수한 광고 메일을 통해 알게 되어 파티에 왔다는 그들은 조금씩 마음의 경계를 풀고 파티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테이블마다 조금씩 웃음소리가 높아만 가는데 무슨 얘기들을 나누는 걸까?

    ‘오픈마인드로 새로운 사교문화를’이라는 모토를 내건 이 클럽이 추구하는 것은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 특유의 폐쇄성이 국가 경쟁력을 뒤지게 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따라서 비즈니스를 위해서든 사교를 위해서든 만날 수 있는 계기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실제로 이 파티에선 기혼, 미혼, 이혼, 남녀에 상관없이 서로 얘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곳에 5년째 오고 있다는 강씨(남·33)는 한번도 파티장 밖에서 그들을 만난 적은 없다며 헛웃음을 친다.

    “파티가 좋아서 올 뿐이지 다른 목적은 없어요. 여기서 춤추며 만나는 사람이 어떻게 일과 연관이 되겠어요. 그리고, 친해진다고 하더라도 밖에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술로 시작해서 2차, 3차, 4차 거쳐 고주망태가 돼야 집에 들어가는 그런 만남은 이제 싫어요.”

    그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 파티에는 일찍 간다고 억지로 붙잡고 술 먹일 사람도 없고 길고 지루한 얘기를 들어줘야 할 상사도 없다. 간섭이 싫은 사람에게 이곳은 분명 천국이다. 역시 주고받는 얘기의 대부분이 가볍고 유쾌하다. 오히려 클럽의 모토로 ‘열심히 일한 당신, 토요일 밤엔 잊어라! 화려하게 즐겨라!’가 더 잘 어울릴 듯하다.

    디너파티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스탠딩파티로 이어진다. 와인 혹은 맥주잔을 들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낯선 이들과 얘기를 나눈다. 스탠딩파티의 룰은 절대 앉으면 안 된다는 것. 조금만 앉아 있어도 촌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니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다. 아주 짧은 대화 몇 마디로 사람들을 알 수는 없는 노릇. 같은 디너테이블에 앉았던 강씨가 다가와 처음 온 내게 귀띔을 해준다.

    “아마 대개 남자들이 파티에 온 이유를 물어볼 거예요. 애인을 만들고 싶어서 오는 이들도 있지만, 하룻밤 상대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죠.”

    담당 클럽매니저가 다가와 내게 한 여자를 소개시켜준다. 피아니스트인 전씨(여·34)가 이 클럽의 정회원이 된 것은 겨우 두 달, 그 사이 파티에 참석한 것은 오늘로 세 번째란다.

    “토요일 밤을 혼자 보내긴 싫어요.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나가서 한잔 더 하면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죠.” 그녀는 현재 혼자 살고 있다. 애인과 헤어진 지는 오래다. 나이가 들고 보니 친구들은 모두 결혼해서 만날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사람을 만날 기회도 없어지고 얘기를 나눌 친구도, 애인도 없어 외롭기만 하다. 그러다가 알게 된 곳이 사교클럽. 용기 내어 찾아 온 이곳이 지금 그녀에겐 해방구가 되었다.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그녀와 나 사이에 끼어 인사를 건넨다.

    “처음 오셨나요? 저는 매주 파티에 와요.”

    대기업 H사에 근무한다는 그는 쾌활하고 솔직함이 매력인 쿨한 남자였다.

    “여기서 다양한 여자들을 만났어요. 난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친구처럼 부담없이 얘기하다 보면 여러 분야의 일을 들을 수 있어 좋죠. 몇 번 더 만나게 되는 여자도 있고 어떤 여자는 친구처럼 계속 알고 지내기도해요. 또 파티에 계속 나오다 보면 자주 마주치기도 하고 그래요.”

    결혼 상대자를 만나기 위해 사교클럽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 애인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하룻밤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사교클럽을 찾는다. 그런 이들에게 ‘결혼’은 삶을 너무 무겁게, 혹은 자신을 몹시 귀찮게 만드는 단어일 뿐이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30대 초중반, 나홀로족이 많다. 클럽 S사 안에는 ‘싱글 즐기는 법’을 공유하는 모임이 있는데 회원 수가 다른 모임에 비해 많은 편이다.

    결혼이 목적이 아니다

    이쯤에서 보면 사교클럽의 개념을 ‘짝찾기’만으로 파악할 것은 아니다.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갈망보다는 외롭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되 구속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공통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만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이곳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도 많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클럽들은 가지각색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남녀 사교클럽임을 명시하고 애인 만들기, 또는 여러 사람 만나기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클럽들이 가장 많지만, 성인 사교클럽도 있다. 그들은 온라인상의 활동이 더 많긴 하지만 가끔 파티에서도 만난다. 그곳엔 부부도 있고 싱글도 있다. 그들은 파티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약속이라도 한 듯 팀을 이뤄 사라지기도 한다. 게시판에 도배된 글들이 대부분 스와핑에 관련된 것들이다. 한 부부가 다른 부부와 스와핑을 원하는 글, 스와핑 경험담, 부부와 스와핑을 하고 싶다는 싱글 남자의 글 등 천태만상이다.

    클럽에서 만난 두 쌍의 부부가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모텔에 방을 두 개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방에 모여 스와핑을 즐겼다. 그러고 나서 그날의 정황을 자랑스럽다는 듯 세세하게 게시판에 올렸다.

    사교든, 사랑이든, 유흥이든 모든 클럽은 화려한 불빛 아래 놓여 있다. 그리고 당신을 벨벳카펫 위에 올려놓고 향긋한 냄새로 자극한다. 은밀한 속삭임과 열정적인 몸짓으로. 누가 그 유혹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을까?

    미혼자뿐 아니라 점점 기혼자와 이혼자의 가입이 늘어나고 있는 이 사교클럽들의 생명은 어디까지일까. 급히 불타올랐다가 곧 잿더미처럼 사그라지고 말 것인가. 활활 타오르는 불 속의 다이아몬드로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연애? 결혼? 그냥 외로워서 오는 거죠”

    사교모임은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넓힌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해 여름 F사가 주최한 스탠딩 파티 모습.

    오픈마인드의 소유자, 클럽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 사교성과 친절함을 지닌 자, 학문적 깊이와 지성을 갖춘 자, 예술적 재능과 개성이 있는 자, 학문적 직업을 통해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자만이 클럽 회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언론노출을 꺼리는 자는 탈락된다. 위의 조건은 정회원을 가리는 어느 클럽의 심사 기준이다. 클럽 F사에서 정회원이 되려면 클럽 직원들과의 인터뷰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 클럽의 회원들은 다른 클럽에 비해 좀더 고급문화를 즐기려는 듯해 보인다. 호텔리어, 승무원, 공연기획자, 모델, 의사, 피아니스트, 통역가, 대기업 사원 등 직업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그들은 모두 클럽에게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클럽 직원은 말한다.

    “우리는 아무나 뽑지 않습니다. 저희와 맞지 않는 분은 여기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나는 기혼 남녀들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며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 이른바, 불륜 그리고 거짓. 채팅을 통한 만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로가 속고 속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이는 것은 젊은 남녀간에 당연시되는 본능 같은 것.

    그러나 이제 채팅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상대의 조건과 외모를 중시하는 요즘 세대의 구미에 맞을 리 없다. 그래서 클럽은 회원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목적과 고급문화를 지향한다는 의식으로 ‘회원검증’ 제도를 만들었다. 여러 단계의 절차를 거쳐야 회원 자격을 준다.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고객입장에서는 오히려 신뢰감을 갖게 되니, 회사측에는 일석이조의 이미지 상승 효과를 가져다준다.

    전문대 졸업 이상, 세일즈를 위한 가입이 아닌 자 등의 요구조건을 통과하면 자기소개서와 에세이를 작성해야 한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 패션 스타일,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선호하는 패션 브랜드, 차와 아파트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거짓 없이 적어야 한다. 그것으로 1차 심의를 거치고 나면, 인터뷰를 거쳐 2차 심의와 판정이 이루어진다. 그게 통과되면 졸업증명서, 재직증명서, 호적등본 등의 서류를 제출한다. 이 모든 조건에 문제가 없다면 가입비와 연회비가 결제되고 진짜 자격증이 발급된다.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나 파티에 가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믿음이 사라진 이 무서운 세상에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의 안전성은 보장된 셈이다.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여성은 이같은 조건이 마음에 들어 가입했다고 한다.

    “괜찮은 호텔나이트라고 해도 부킹 하면서 괜히 질 나쁜 사람들한테 잘못 걸려들까봐 불안할 때가 있는데, 여기선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요. 남자들 대할 때 다른 장소에서보다는 편하게 대할 수 있죠. 인터넷상에서 그 사람의 신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점도 좋고요.”

    조건 맞아야 친구도 가능

    여자들은 자신이 이같은 절차를 다 거친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의 수준에 맞는 이들과 어울린다는 자체에 우월감을 갖고 콧대를 높인다. 클럽은 그렇게 회원들의 신상명세를 예쁘게 포장해서 내놓은 후 뚜쟁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세대 뚜쟁이의 모습이랄까…. 클럽은 강조한다.

    “한 분께 1년에 평균 100명을 소개해드립니다!”

    지금은 사랑에 눈먼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옷의 치수를 재듯 타인의 인생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확인한 후에야 만나기를 원한다. 애인이든 친구든 말이다. ‘결혼조건’이라는 말부터가 참 의아한 말이지만, 요즘은 연애를 하거나 친구를 사귀는 데도 먼저 조건을 따지는 세상이다.

    한 클럽에서는 회원절차를 거치고도 파티에 참석하기 전에 워크숍을 갖는다. 파티에 처음 오는 이들에게 파티 매너를 가르치는데, 파티에서 해야 할 일과 절대 해선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 회사가 추구하는 생각을 위주로 말하는데 그 생각에 동참하라는 명령으로 들리기도 한다. 파티 한번 가기 정말 힘들다.

    어렵게 정회원 가입 절차를 끝내고 워크숍까지 마쳤다면 드디어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된다.

    “연애? 결혼? 그냥 외로워서 오는 거죠”

    흥겹게 춤을 추는 한쌍의 남녀, 파티장은 늘 고조된 분위기다.

    비주얼아티스트인 김씨(여·30)는 7년간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더니 한국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래서 그녀가 자주 찾아가는 곳은 파티일 수밖에 없다. 파티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미국에서 맛본 자유분방한 파티 느낌은 전혀 안나요.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더군요.”

    그녀 역시 한국에 돌아와서 외로움이 컸던 탓에 이곳을 찾았다. 그녀말고도 유학파들이 정말 많다.

    영어강사인 이씨(여·28)는 토요일 밤마다 조금쯤 섹시해 보이는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화장으로 변신한다. 평소엔 전혀 하지 않는 큰 귀고리도 단다. 일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나면 그녀는 마음도 한층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꾸미는 것이 파티에 가는 예의라고 그녀는 말한다.

    요즘 한창 클럽이나 파티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클럽룩’ ‘파티패션’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전문 매장까지 생겨났다. 얌전한 의상을 차려 입고 갔다가는 왠지 주눅이 들고 만다. 온갖 화려한 의상을 입고 온 매끈한 몸들이 어깨를 드러내며 일제히 ‘날 좀 봐줘요’하고 소리치니 말이다.

    그녀가 가입한 클럽은 두 군데. 주말의 기분에 맞는 파티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녀는 꼭 혼자 간다. 클럽에서 혼자 오라고 제의를 하기도 하지만, 역시 혼자 가야 여러 사람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파티에선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걸고 얘기를 나누는 게 룰처럼 되어 있어 혼자인 것이 훨씬 편하다. 그렇다면 여기는 다른 곳에선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오는 곳? 그래서 모두 혼자라는 뜻인지 모른다.

    영화에서처럼 약간은 도발적으로 술잔을 들고 거닐며 가볍게 목례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은 뒤 서로를 살피고 얘기를 나눈다. 그녀의 말에는 영어가 꽤 많이 섞여 있다. 상대방 남자가 영어를 쓸 경우엔 영어만 쓴다. 그녀가 대화를 나누던 증권회사 직원 백씨(남·34)와 얘기를 나눠보니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나도 이런 게 싫지만 영어를 쓰면 여자들이 좋아해요. 하긴, 나도 영어에 젬병인 여자보다 잘하는 여자가 좋아요.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여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예쁘게 봐주기를 바라고 남자들은 멋진 웃음을 보이려 애쓴다. 그것은 공작이 날개를 활짝 펴고 구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씨는 이곳에 오면 연예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단다.

    “남자들이 나를 쳐다보고 다가와서 말을 걸면 기분이 좋죠. 사실 전 그 맛에 파티에 와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행복해지거든요. 한 주 내내 다음 파티엔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갈까 생각해요.”

    클럽 S사에서는 파티에 이벤트를 준비한다. 마치 한창 인기리에 방송됐던 ‘사랑의 스튜디오’를 보는 듯하다. 보기엔 유치해 보이지만 젊은 남녀가 게임을 하고 춤과 노래를 즐기다 보면 금세 친해지게 마련이다. 역시 그날의 가장 멋진 여자에게 수많은 화살이 꽂힌다. 그렇게 그날의 가장 섹시한 여자, 멋진 남자가 되어 황홀한 토요일 밤을 보낸다.

    파티라는 게 100% 외국문화다 보니 모든 게 어색하다. 파티 내내 서 있어야 하는 괴로움도 크다. 스탠딩 파티가 좌식문화인 우리와 맞을 리가 없다. 외국에서의 파티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서 만나게 되거나, 행사가 있어 초대되거나, 친한 이들이 어울려 어느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이 파티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지금 파티를 위한 파티를 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파티가 대부분 보드카파티, 댄싱퀸파티, 할로윈파티 등의 외국식이다. 궁중연회, 한복과 우리 술이 함께하는 잔치는 언제나 가능할까.

    드디어 고대하던 댄스타임! 지금까지의 대화가 지루했다면 이젠 몸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 겉옷을 벗고 화려한 조명 아래 댄스홀로 모여든다. 마음의 경계를 지우고 음악에, 그리고 느낌에 몸을 맡긴다. 적당한 술기운과 음악과 밤에 취하고 서로에게 취하는 날이면 정말 기분 좋은 밤, 그리고 운 좋은 날!

    오늘밤 친구를 찾은 이들은 하나 둘 짝을 이뤄 홀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면 파티도 점점 시들어가고 주말도 줄어만 간다.

    현재 14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클럽 S사 안에는 수백 개의 동호회가 있다. 클럽에서 운영하는 파티보다 동호회에서 운영진들이 모여 여는 파티가 더 많다. 그 중엔 와인동호회, 독서동호회, 댄스동호회 등의 공개동호회도 있지만 비공개 동호회도 많다. 쭉 빠진 각선미와 멋진 얼굴을 가진 미혼 남녀들만의 클럽, 30대 남자들만의 클럽, 이혼자들만의 클럽, 레즈비언클럽 등등.

    어느 날, 공개 게시판에 ‘강간미수범’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클럽의 파티에서 만났는데 그날 밤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는 글이었다. 남자의 실명이 거론되었다. 사실이야 당사자들만이 알 테지만, 결국 우스워진 두 사람 모두 회원에서 제명되었다. 성인 남녀들이 모여 술과 춤에 빠져 보내는 밤이니 별별 일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사교클럽이기에 생겨나는 문제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모였기에 서로가 잘 알지 못하는데도 쉽게 친해진다. 마음의 경계를 풀기 시작하면 타오르는 불꽃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곳에선 머뭇거리거나 삐죽거리고 있으면 오히려 촌스럽게 여겨진다. 클럽에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것은 그들의 운영방침일 수밖에 없다. 파티가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파티장은 늘 고조된 분위기다. 게다가 요즘의 젊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욕망을 분출시킨다.

    남모씨(남·31)는 어느 날 공개 게시판에 자신의 경험을 공개했다. 이 클럽에서 스무 명이 넘는 여자와 관계를 나누었다는 게 글의 요지. 쉽게 만나고 쉽게 친해지고 쉽게 헤어지기도 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외로운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보니 그런 상대를 찾기는 더욱 쉽다. 혹은 오로지 그런 이유로 클럽을 찾는 독신자도 많다. 특히 레즈비언들은 여러 종류의 파티를 돌아다니며 상대를 찾는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보다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찾아나선 인력시장인 셈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상관없이 가입할 수 있는 클럽에서는 아무리 검증 절차를 거친다 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파티 내내 아무리 봐도 저 남자가 미혼인지 기혼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굴에 써 있는 것도 아니고 선뜻 물어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와서 ‘전 유부남입니다’라고 선언할 바보도 없다. 실제로 어울려 즐기다보니 당연히 미혼이라고 생각하고 호감을 가졌는데, 알고 보니 유부남인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감정이라는 게 쉽게 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 상대를 만나고 싶어 클럽을 찾은 문씨(남·35)는 결국 이 문화를 즐기게 됐을 뿐 소기의 목적은 이루지 못 했다.

    “눈만 높아져요. 오늘밤엔 이 여자를 만났지만 다음 파티엔 더 멋진 여자를 만날 것 같고, 또 다른 클럽의 파티에선 더 멋진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요.”

    불타오르는 밤은 늘 짧기만 하다.

    “우리는 갈수록 외로워진다”

    “고기 굽는 연기가 매캐하게 가득찬 선술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다 첫사랑을 만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며 우정을 다지기도 했어요. 겨우 10년 전만 해도 그랬어요.”

    한 클럽 게시판에 있는 비판적인 시선이다. 끝끝내 버릴 수 없는 질긴 사랑과 우정을 품던 시대, 3년 전 크게 흥행한 영화 ‘친구’는 바로 그런 우정을 보여주며 당신에게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진짜 사랑을 해봤냐는 질문에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에 영화는 그런 기적적인 흥행에 성공했는지 모른다. 그런 우정과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돈을 내고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어쩌면 화려한 파티에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극대화되었을 뿐, 서글픈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는 외로움이 그렇게 달래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파티에서 만난 한 30대 중반의 근사한 신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재산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에는 주변에 친구가 많으면 내가 어려울 때 힘이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말의 기저에는 사람관계는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는 거죠. 깊이 마음을 나누며 오래도록 만나온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입니다. 기억도 못하는 명함을 많이 받았지만 단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갈수록 우리는 더 외로워지는 거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가끔 우리는 몇 시간 전에 만난 이의 얼굴을 잊기도 한다. 게다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북적대는 도시의 밤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인연들이 바람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때 우리의 꿈마저 도망가기 전에 꽉 붙잡아두는 것만은 잊지 말자. 그런데, 오늘 밤 우리는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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