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 행정부가 새로운 합의틀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북한의 핵개발로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고, 둘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물질 생산은 막을 수 있었으나 생산 ‘능력’은 그대로 방치돼 왔으며, 셋째 제네바 합의를 유지할 경우 북한의 ‘협박 외교’가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이제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며 기존의 합의틀로 되돌아가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같은 방침을 정한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이 올해 1월14일 새로운 합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나중에 (핵시설)스위치를 올려 핵무기로 전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그 목적이 분명해진다. 부시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모두 폐기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美, 새로운 합의틀 모색
특히 이목을 끄는 대목은 제네바 합의의 핵심적인 조항인 경수로 사업까지 중단할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파월 미 국무장관은 같은 날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원자력 외의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경수로 건설계획의 폐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파월의 발언은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부터 미국 내 강경파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경수로의 화력발전소 대체’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결코 그냥 흘려 들을 얘기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는 길게는 출범 직후부터 (특히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대북정책을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 완전 제거’를 추진하기 위해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를 위해 북한의 핵개발 폐기를 전제로 에너지·식량 등 경제지원, 대통령 친서 등 문서 형태의 대(對)북한 체제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제 제네바 합의 체결 당사자인 북한은 물론이고 북핵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남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국인 일본과 EU,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남북한의 입장에 주변국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新 합의는 ‘파레토 최적의 원칙’으로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무효화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합의를 통해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 확보가 ‘확실히’ 보장된다면, 굳이 ‘실 끝에 매달린 제네바 합의’를 부여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미국이 계획하는 것처럼 북한이 모든 핵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것에 합의해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미국의 약속 이행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핵시설 동결이 아닌 폐기를 한다면, 그 이후 미국에 약속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 협상 당시에 핵시설 폐기를 경수로 완공을 비롯한 미국측의 약속 이행 ‘이후’ 시점으로 고집하면서 ‘동결’을 관철시켰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은 경수로의 화력발전소 대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발한 전력이 있어 미국이 새로운 합의에서 경수로 사업을 취소하려고 할 경우에는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