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북핵 사태 해결을 위한 제언

  • 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입력2003-02-25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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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10월, 북미간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다. 그 책임을 둘러싸고 시작된 북미 양측의 극한 대립은 핵전쟁이 우려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스런 것은 북미간 또는 다자간 합의점이 모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 현실적 한계를 분석하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다.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북한의 핵문제 및 미국의 대북 체제안전보장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 갈등이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틀을 모색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개발로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다”며 “(앞으로의)문제는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합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이 중유 제공마저 중단했기 때문에 미국에 의해 제네바 합의가 사문화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새로운 합의틀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북한의 핵개발로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고, 둘째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물질 생산은 막을 수 있었으나 생산 ‘능력’은 그대로 방치돼 왔으며, 셋째 제네바 합의를 유지할 경우 북한의 ‘협박 외교’가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이제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며 기존의 합의틀로 되돌아가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같은 방침을 정한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을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이 올해 1월14일 새로운 합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북한이 나중에 (핵시설)스위치를 올려 핵무기로 전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그 목적이 분명해진다. 부시 행정부가 영변 핵시설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모두 폐기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美, 새로운 합의틀 모색



    특히 이목을 끄는 대목은 제네바 합의의 핵심적인 조항인 경수로 사업까지 중단할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파월 미 국무장관은 같은 날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원자력 외의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경수로 건설계획의 폐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파월의 발언은 제네바 합의 체결 당시부터 미국 내 강경파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경수로의 화력발전소 대체’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결코 그냥 흘려 들을 얘기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는 길게는 출범 직후부터 (특히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대북정책을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 완전 제거’를 추진하기 위해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를 위해 북한의 핵개발 폐기를 전제로 에너지·식량 등 경제지원, 대통령 친서 등 문서 형태의 대(對)북한 체제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제 제네바 합의 체결 당사자인 북한은 물론이고 북핵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남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국인 일본과 EU,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남북한의 입장에 주변국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新 합의는 ‘파레토 최적의 원칙’으로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무효화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합의를 통해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 확보가 ‘확실히’ 보장된다면, 굳이 ‘실 끝에 매달린 제네바 합의’를 부여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미국이 계획하는 것처럼 북한이 모든 핵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것에 합의해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미국의 약속 이행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핵시설 동결이 아닌 폐기를 한다면, 그 이후 미국에 약속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 협상 당시에 핵시설 폐기를 경수로 완공을 비롯한 미국측의 약속 이행 ‘이후’ 시점으로 고집하면서 ‘동결’을 관철시켰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은 경수로의 화력발전소 대체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발한 전력이 있어 미국이 새로운 합의에서 경수로 사업을 취소하려고 할 경우에는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북핵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남한 정부 역시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이제 막 출범한 노무현 정부로서는 북한과 미국을 제네바 합의체제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지, 아니면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새로운 합의를 함께 모색해야 할지 기본원칙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 집을 지을 때까지 헌 집을 헐지 말라’는 말이 있듯, 제네바 합의 무효화를 공식화하는 데는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그렇다고 새로운 합의를 도출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네바 합의 사항들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합의에 연연할 경우 ‘주도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 자체를 불신하는 데다가 “무효화됐다”고 공식화한 마당에 미국을 제네바 합의체제로 복귀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제네바 합의 고수보다는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제네바 합의를 고수하거나 개선을 추진할 경우, 합의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이므로 남한은 계속 제3자의 위치에 머무를 것이라는 점도 고려할 대상이다. 또한 제네바 합의를 핵 비확산 정책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운 클린턴 행정부와는 정반대로 미국 외교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정치적 입장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전제돼야 할 점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기 전까지 제네바 합의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합의는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이를 ‘대체’한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수준에서의 ‘원상복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인 만큼 최악의 상황을 예방할 원상복귀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가능한 수준의 원상복귀란, 북미간 공방의 핵심인 우라늄 농축 시설 의혹 규명, ‘말’보다는 높은 단계의 대북한 불가침 약속, 중유 제공 재개, 북한의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철회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등을 말한다.

    북미 양자 협상 VS 다자간 협상

    다른 하나는 제네바 합의를 새로운 합의로 대체할 경우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의 원칙’, 즉 한 당사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 최소한 다른 당사자의 이익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제네바 합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합의는 제네바 합의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통해 북한은 이전보다 확고하게 체제안전보장 을 받으며 전력 확보 방안이 개선돼야 하고,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폐기를 한층 강화된 형태로 관철시켜야 하며, 남한은 경수로사업 중단 같은 경제적·정치적 손실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합의의 추진 문제와 관계없이 북핵 문제 해법에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북미 양자 해결 구도로 가느냐, 남한, 일본, 중국, 러시아, EU 등 관련 당사국을 포괄한 다자간 해결 구도로 가느냐다. 물론 이를 기계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안과 상황에 따라 양자 협상 및 다자 협상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핵문제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서 발생한 문제로 북-미의 양자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 대 국제사회의 대결구도’라는 관점에서 다자간 해법, 즉 동맹국과 우방국들이 함께하는 대북 압박 전략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 국가들이 ‘공정한 중재자’로 나서 북미 협상 환경을 마련한다면 북한도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피력해왔다. 새로운 합의틀을 모색하고 있는 미국 역시 양자 협상이 아닌 다자 협상을 선호하고 있어 북미 사이에 ‘접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북핵 해결 구도가 다자주의(multilateralism)로 가면 주도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남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EU 등 7개 국가 협상구도로 가면 남한의 위상은 7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다자주의 구도의 ‘도전적인 요소’보다는 ‘기회적인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이 필요하다. 북핵 해법 구도로서의 다자주의는 거부하기 힘든 현실일 뿐더러 노무현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 국가론’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2003년 1월2일 러시아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외무차관이 북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러 정부의 ‘포괄제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우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다자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는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북-미 양자간에 체결돼 북한의 핵 포기를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 카드를 계속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본다. 이 같은 판단하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다자협의 틀에 묶어 더 이상 핵 카드를 이용한 ‘벼랑끝 외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한다. 여기엔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보상을 해줄 경우 경제적 부담을 관련국에 분산시키겠다는 의도도 내포돼 있다. 그러나 이미 제네바 합의 보상틀에서 미국이 부담한 경제적 부담은 한-미-일 가운데 가장 적기 때문에 새로운 합의에 따라 남한이 부담하게 될 비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이 활발한 역할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이미 자체적인 중재안을 만들어 관련 국가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들어갔고 중국 역시 북미 회담을 중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본은 더욱 적극적이어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에 남한과 일본을 포함시킨 ‘5+2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 이러한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제고 및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일본의 경우)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경계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미 한반도에서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제로섬’이 아닌 공동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주변국의 개입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한은 어떤 목표와 방법으로 다자간 협상 구도를 만들어야 할까? 첫째, 그 방식에 있어 미국이 원하는 대북 압박 구조도, 북한이 원하는 대미 압박구조도 아니어야 한다. 또 일본의 이른바 ‘5+2’ 방식도 적당치 않다. 일본 안인 ‘5+2’는 미국이 원하는 대북 압박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을 뿐더러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 이는 남한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다자 협상 구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남한이 추진해야 할 방식은 남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EU 등 관련 당사국이 참여하는 ‘새로운’ 협상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핵심적인 문제인 북한 핵프로그램의 검증 가능한 폐기와 대북한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 지원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사찰 및 검증 방식으로 IAEA는 물론 남북한 핵통제위원회의 재가동을 통한 남북협력 방안, 북한의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사찰 및 검증에의 참여 등을 강구할 수 있다. 또 미국의 대북 체제안전보장을 협상에 참여한 국가들이 보장함으로써 북한의 불안감을 덜고 전력 지원에서 부담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방안 등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노무현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 국가’의 비전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측에서 밝히고 있는 ‘동북아 중심 국가론’은 ‘경제’ 중심적인 사고가 기저에 깔려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기능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경제’(상호의존의 확대)와 ‘안보’(상호 불신 및 군비경쟁의 심화) 측면 모두에서 대단히 불확실한 미래상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차기 정부는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에 있어 경제 못지않게 동북아의 안보 딜레마를 완화할 수 있는 ‘평화 구상’을 구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 과정을 동북아 전체의 공동 안보 증진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의 원칙과 방향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북 전력지원 체계에 김대중 정부 때 약속한 대북전력지원, 남북한 협력 사업인 경의선·동해선 철도 및 도로 사업의 반영, 러시아와 일본이 합의한 ‘원유 파이프라인 건설계획’과의 연계, 사할린 가스의 대북지원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일종의 ‘마스터플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동북아 중심 국가의 중요한 한 축인 ‘물류 및 에너지의 중심지’로서의 한반도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북아 비핵지대화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을 1994년 10월 이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무엇일까.

    최우선적 선결과제는 문제의 직접적 발단이 된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둘러싼 의혹 해소다. 미국은 북한이 비밀리에 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위협이 계속되면 핵무기는 물론 이보다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서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공방을 끝내려면 먼저 미국이 IAEA에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출하고, 북한 역시 IAEA에 해명 자료를 제출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IAEA는 양측 주장의 신빙성을 분석하고,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믿을 만한 결론에 도달하면 북한과 협의를 시작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만약 북한의 NPT 탈퇴로 IAEA를 통한 해결 방식이 어렵다면 앞서 언급한 다자간 협상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방안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은 1998년 금창리 핵 시설 의혹이 불거졌을 당시 북미간에 합의한 미국 사찰단의 ‘현장 방문’이다. 미국측에서 농축 우라늄 시설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는 자강도 하갑, 양강도 영저동, 평양시 국가과학원 등 세 곳을 현장 방문해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설이 민감한 군사시설일 가능성이 높아 북한의 수용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이를 감안해 현장 방문단을 미국 정부 ‘관리’가 아닌 핵문제에 정통한 NGO 관계자들로 구성하는 것도 대안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 및 검증 수용 의사를 밝힌 바 있어 북미간에 대화가 재개되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우라늄 농축 관련 의혹 해소를 출발점으로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기에 앞서 풀어야 할 과제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 핵포기 선언시 미국에 ‘문서 형태의 대북 체제안전보장 제공 의사’ 확인 → 북한의 포괄적인 핵포기 선언 → 미국의 대북 체제안전보장 문서 제공 → 북한 NPT 탈퇴 철회, IAEA 사찰단의 복귀 및 봉인·감시카메라 재설치 → KEDO의 중유 제공 재개 및 한·미·일의 대북 인도적 지원 확대 →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 본격 협상.

    北 핵폐기-美 체제보장은 동시에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가 이미 운을 뗀 새로운 합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을 필요가 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파레토 최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북-미 적대관계 청산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및 동북아 평화 증진의 비전이 담겨야 한다. 또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북한의 핵개발 폐기와 대북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지원 방안이 선후(先後)가 아닌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여기서 전제돼야 할 것은 남한으로서는 경수로 사업의 ‘완전’ 취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KEDO가 한국전력을 주사업자로 지정, 북한 금호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경수로 사업은 1000MW 용량의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 것으로 현재 공사 진척도는 27% 정도다. 당초 목표시한인 2003년 말보다 5∼6년 늦은 2008∼09년경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 사업의 공사비는 46억달러로 한국은 전체 사업비의 70%인 32억2천만달러를, 일본은 10억달러를 부담하기로 돼 있는데 지금까지 10억달러 이상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따라서 이 사업을 취소할 경우 우리로서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다. 또한 경수로 사업은 가장 중요한 남북한 협력 사업이고, 사업 중단시 우리의 원전 기술력 축적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무형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다. 일본 역시 이미 3억달러 가량을 지출했기 때문에 경수로 사업의 완전 취소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경수로 사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점차 커지고 있고, 경수로 완공 시점이 여전히 아득할 뿐만 아니라 북한의 송·배선망이 개선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이같은 점을 감안해 1기의 경수로 사업은 계속하되 나머지 1기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북한에 전력 보상을 해주는 방안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2002년 12월31일 북한에서 추방된 IAEA 사찰단원(왼쪽)이 특별이사회가 열린 2003년 1월6일 IAEA 오스트리아 빈 본부에서 북한 영변 핵시설에서 제거된 봉인장치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의 제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기의 경수로를 1기로 줄이고 1기 대신에 러시아 사할린에서 북한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공사를 지원하는 내용을 포함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방안에 따르면, 남한은 경수로 사업의 완전 중단에 따른 경제적·정치적 손실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저렴한 가격으로 확보할 수 있다. 북한은 파이프라인 통과세를 받아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이 라인을 자체 발전소나 공장 등에 연결해 사용함으로써 전력난을 덜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국영 석유회사인 JAPEX가 사할린 가스 개발에서 30%의 지분을 갖고 있고 미국의 액손모빌이 이 회사의 핵심 파트너이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으로서도 관심을 가질 법한 방안이다. 부시 행정부 내 일각에서 경수로 대신 사할린 가스를 지원하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고 러시아와 일본이 원유 파이프라인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해리슨의 제안이 현실화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北, 전력난 해소 5가지 방안

    이와 함께, 새로운 합의에는 북한의 전력난을 해소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도 포괄적인 계획이 포함돼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북한 전력 문제에 정통한 미국의 노틸러스연구소의 제안을 상정해볼 필요가 있다.

    연구소 소장 피터 헤이즈 박사는 ‘당장 실현 가능한’ 북한 전력난 해소 방안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세계은행, 아시아 개발은행, APEC 에너지 워킹 그룹 등을 통해 북한의 에너지 체계를 개선해 가격의 기능이 작동하는 시장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둘째 낡은 송·배선망으로 인한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송·배선망 개선 사업이다. 셋째 북한의 화력발전소를 재활성화하기 위해 석탄 공급 및 석탄 운송 체계를 복구하는 것이다. 넷째 전기 난로 등 전기를 사용하는 가전 제품을 교체하는 것이다. 북한의 난방 시스템은 막대한 전력을 손실시키고 있기 때문에 절전형 난로로 대체할 필요도 있다. 다섯째 주로 농업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규모 전력 생산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헤이즈는 이러한 방안들이 미국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북한의 전력난을 실질적으로 완화시켜나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북 전력지원 방안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북 체제안전보장 방안이다. 미국은 우선 북한의 포괄적인 핵포기 선언시 부시 대통령의 친서나 북한과의 공동성명 등 ‘문서 형태’로 불가침 약속을 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합의서에는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고, 중국, 러시아, 일본, EU는 이를 보장한다. 또한 남북한과 미국은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고, 중국, 러시아, 일본, EU는 이에 협력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문서’ 형태의 불가침 약속 제공 → 새로운 합의서를 통한 미국의 대북 체제안전 보장 및 이에 대한 주변국들의 국제적 보장 → 남-북-미를 중심으로 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협의를 단계적으로 밟아나가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의 동결·폐기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이는 협상의 시작이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근거이자,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남한 정부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를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비전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마련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북한 핵문제는 핵물질 확보 ‘방식상’의 문제와 ‘시간상’의 문제로 나뉜다. 과거 핵활동은 1990년대초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기 전에 북한이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했다는 의혹이고, 현재의 핵활동은 고농축 우라늄 및 사용 후 연료봉의 재처리를 비롯한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 문제다. 미래의 핵활동은 태천과 영변에 건설중이었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중단된 50MWe 및 200MWe 원자로의 재건설 문제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폐기한다’는 것은 핵물질 확보 목적의 우라늄 농축 시설과 무기급 플루토늄 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 핵활동을 통해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를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핵무기 제조에 전용될 수 있는 모든 핵관련 시설 및 물질을 폐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북한 핵 프로그램의 폐기 과정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대북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 보상 문제와 맞물린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복잡한 북한 핵 프로그램의 사찰 및 검증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북한의 핵개발 폐기와 대북 체제안전보장 및 전력 지원을 골자로 한 일괄타결을 모색하되 사안의 우선 순위에 따라 단계적인 접근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북미간 대화는 계속됐지만 매번 서로간 입장차이만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2003년 1월 북미대화에 나섰던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사 한성렬(왼쪽)과 미국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가 심각한 얼굴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안의 성격상 북한 핵 프로그램의 사찰 및 검증에 있어 가장 첨예한 문제는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핵 파문의 시발점이 된 우라늄 농축 시설 의혹 해소이고, 둘째는 이전부터 논란이 돼온 과거 핵활동에 대한 사찰문제이다. 셋째와 넷째는 협상이 시작되면 미국에서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보이는 사용 후 연료봉의 북한 외부로의 이전 문제와 영변 핵시설의 폐기 문제가 될 것이다.

    우라늄 농축 시설 의혹은 미국의 증거 자료 제출 및 북한의 해명 자료 제출 이후에 이를 IAEA나 새로운 협상틀에 참여하는 다른 국가들, 즉 남한, 중국, 러시아, 일본, EU의 분석이 이뤄진 다음에 사찰 및 검증 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핵활동, 즉 북한이 제네바 합의 체결 이전에 무기급 플루토늄을 얼마만큼 추출했는지에 대해서는 북한이 사찰 수용 시기를 명확히 밝히는 것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제네바 합의문에서는 북한의 핵 사찰 수용 시점을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어 경수로 사업이 지연되면서 북미간 갈등의 주요한 요인이 돼왔다. 더구나 사찰 기간에 대해 IAEA와 북한이 천양지차의 주장(IAEA는 3년 이상, 북한은 3~4개월 주장)을 하고 있어 경수로 사업의 원활한 이행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북한이 핵사찰을 받는 기간에는 경수로 사업이 사실상 중단되게 돼 있다. 미국 및 IAEA의 주장대로 3년 정도가 걸리면 북한은 또 다시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막대한 전력 손실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3~4개월에 핵사찰이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이 부분과 관련된 내용 역시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 방향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해 핵개발 의혹을 완전 해소하면 그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을 ‘보상’이 아닌 ‘지원’하는 방식으로 맞교환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경수로 사업이 지연된 것은 북한의 책임이라며 전력 손실을 보상할 의무가 없다고 버티고 있어 이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과거 북한에 약속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는 전력 지원을 경수로 사업 지연에 따른 전력 손실 보상의 ‘한 방안’으로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과 관련해 새로운 합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바람직해 보인다. 첫째 KEDO(혹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기구)는 경수로 1기 공사와 중유 제공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과 함께 나머지 경수로 1기를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전력 제공 방안을 강구한다. 둘째 한국 주도의 대북한 전력지원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며, 셋째 북한은 경수로 1기 대체 사업과 한국 주도의 전력 지원 방안이 수립되는 즉시 IAEA의 핵사찰을 수용한다.

    이것은 경수로 사업의 완공 시점을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고 관련 당사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8000개에 달하는 사용 후 연료봉 처리 및 영변 핵시설 해체 문제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잠재력까지 완전히 제거한다는 목적 아래 조속한 연료봉 처분과 영변 핵시설의 폐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약속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미국측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면 북미가 첨예하게 충돌할 것이 확실하다.

    ‘多者主義’로 제네바 합의 대체안 만들라

    1998년 8월31일 시험발사되고 있는 북한 대포동 2호 미사일.

    사용 후 연료봉 처리와 관련해 제네바 합의문에는 ‘사용 후 연료봉을 경수로 건설기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한 후 북한 내에서 재처리하지 않고 (다른) 안전한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고 돼 있다. 또 경수로 공급협정 부속문서에서는 ‘경수로 1호기의 핵심부품이 인도되기 시작하면 사용 후 연료봉의 영구처분을 위해 북한으로부터의 이전이 시작되며, 이러한 작업은 경수로 1호기의 완공시까지 완료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경수로 핵심 부품의 인도 예정 시점이 빨라야 2005년 하반기 정도이고 경수로 완공 시점은 2010년 전후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사용 후 연료봉의 처리 문제 또한 첨예한 논란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흑연감속로를 비롯한 영변 핵시설의 폐기 시점도 문제다. 제네바 합의문에서는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해체는 경수로 사업이 완료될 때’라고 규정하고 있다. 경수로 공급협정에서는 ‘경수로 1호기가 완료되면 북한은 동결된 흑연감속로 및 관련 시설의 해체를 시작해 경수로 2호기 완료시까지 이러한 해체작업을 완료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경수로 1호기 완공 시점도 요원하고 2호기는 다른 전력 지원 방안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새로운 합의에서는 사용 후 연료봉을 북한 외부로 이전 개시하는 시점을 경수로 사업을 완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북미 원자력 협정 체결과 함께 시작해 조속히 완료하고, 그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로 바꿀 필요가 있다. 북미 원자력 협정이 체결되지 않으면 경수로 핵심부품의 인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조속히 체결함으로써 경수로 사업 지속 여부에 대한 북한의 불신과 사용 후 연료봉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흑연감속로와 관련 시설의 폐기 개시 시점은 경수로 1호기 완공 이후에서 경수로의 핵심부품이 인도된 이후로 바꾸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핵시설의 해체 작업은 향후 유망한 원자력 산업 분야 기술을 축적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핵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미사일 문제다. 이 문제는 그 자체로도 북미간은 물론 동북아의 최대 안보 현안이고 부시 행정부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MD)와도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또한 미사일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모색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사 핵문제를 풀더라도 이후에 다시 북미관계 정상화를 비롯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노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더 높은 비전을 향해

    북한의 경제 재건을 비롯한 개혁·개방 노력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가 선결돼야 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미사일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합의에서는 미사일 문제를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의 미사일 문제는 크게 외화벌이 수단으로서의 수출, 장거리 미사일 개발, 기존 중·단거리 미사일의 폐기, 그리고 검증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새로운 합의에서는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간 협상 내용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방안이 강구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적인 내용으로는 ▲미사일 수출 중단에 대한 보상 방안으로 현금이 아닌 식량, 석탄 등 현물 보상안을 미국 주도로 마련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 조건으로 인공 위성 대리 발사, 사정거리 480km 이상 미사일의 생산 중단 및 폐기 ▲미국의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 등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기회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중심 국가의 비전을 새로운 합의에 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가능하고 또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차원이란 앞서 언급한 동북아 비핵지대화 추진, 북한의 에너지난 해결과 동북아의 에너지 협력을 위한 ‘동북아 에너지 협력기구’ 창설 제안,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유라시안 철도 건설의 제안 등을 의미한다. 특히 이와 관련된 국제기구를 한국에 유치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핵문제 해결과정에서 한반도를 ‘냉전의 섬’에서 동북아 평화의 ‘허브’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의 반영이기도 하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EU의 대표단은 2003년 0월0일부터 0월0일까지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한반도 핵문제를 비롯한 중요 현안과 동북아의 평화 증진 방안을 놓고 협상을 가졌다.

    참석 국가들은 핵무기 및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994년 10월21일 북미간 기본합의의 기본 정신을 유지하되 일부 내용을 개선할 필요성에 동의했다. 또한 2000년 10월의 북미공동코뮤니케를 구체화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전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이면서 포괄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했다. 참석 국가들은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조속히 이행하기로 합의했다.

    Ⅰ 서명 국가들은 북한의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하기로 한 1994년 북미기본 합의의 내용을 일부 수정·보완하기로 했다.

    ① 미국 주도로 2003년을 목표 시한으로 완공하기로 한 경수로 2기 가운데 1호기 공사는 계속하되, 나머지 1기는 다른 전력 제공 방식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 경수로 사업의 책임 주체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계속 운영하기로 하고, KEDO는 경수로 1호기 사업 및 중유 제공을 전담한다. KEDO는 경수로가 조속히 완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미국은 매년 중유 50만t을 계속 제공한다. 북한은 제공받은 중유를 난방과 전력 생산에 사용한다.

    - 북한과 미국은 경수로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보장하고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분야에 있어 협력을 위한 양자간의 원자력 협정을 조속히 체결한다.

    - 참석 국가들은 나머지 경수로 사업을 대체하고 북한의 전력난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 사할린에 매장된 가스를 북한에 공급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북한의 낡은 송·배선망 개선 등 종합적인 전력난 해소 방안을 마련한다. 이를 위해 참석 국가들이 참여하고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이 지원하는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②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제공에 대한 방안이 강구되는 것과 함께, 북한은 모든 핵시설 및 관련 시설의 동결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해체한다.

    - 북한의 흑연감속로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의 동결 상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IAEA가 이를 감시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북한은 이를 위해 IAEA에 전적으로 협력한다.

    -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한 검증 및 사찰 필요성은 IAEA가 북한과 미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검토한 이후에 결정한다. 사찰 및 검증 여부의 결정 주체는 본 합의문에 서명한 국가들이다. 또한 서명국가들이 사찰의 필요성에 합의하면, IAEA와 이들 국가로 사찰팀을 구성한다.

    - 사용 후 연료봉은 북한 외부로 이전될 때까지 IAEA의 감시하에 안전하게 보관한다. 또한 사용 후 연료봉의 조속하고 안전한 폐기를 위해 북미 원자력 협정이 체결되는 즉시 해외 이전을 시작하고, 그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

    - 흑연감속로와 관련 시설의 폐기는 경수로 1호기 완공 이후에서, 북미 원자력 협정이 체결되고 경수로의 핵심부품이 인도된 직후부터 시작한다. 이와 관련된 비용은 참석 국가들이 공평하게 분담한다.

    Ⅱ 서명 국가들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적대관계 종식과 남북관계 발전,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①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약하고, 기타 서명 국가들은 국제적으로 이를 보장한다.

    ② 북한은 모든 종류의 미사일 수출을 영구히 중단하고,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수출 중단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보상 방안으로는 현금이 아닌 식량, 석탄 등 현물로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③ 북한은 사정거리 300마일(480km) 이상의 탄도미사일 개발, 생산, 배치를 포기하고, 미국은 대북한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를 해제한다. 또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및 생산 포기에 따라 미국은 인공위성 대리 발사를 주선할 책임을 갖는다.

    ④ 남북한과 미국은 남북한의 군축과 주한미군 규모 및 성격 조정을 위해 협의에 들어가고, 중국, 러시아, 일본, EU는 이에 협력한다. 북한은 생물무기금지협약(BWC) 가입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남-북-미 군축의 성과에 따라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도 가입한다.

    ⑤ 남북한과 미국은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고, 중국, 러시아, 일본, EU는 이에 협력한다.

    ⑥ 북한과 미국은 조속히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국교 수립을 추진한다.

    Ⅲ 서명 국가들은 핵무기비확산체제 강화 및 동북아 평화 증진에 함께 노력한다.

    ① 북한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정식 복귀하고 동 조약상의 안전조치 협정 이행을 허용한다.

    ② 경수로 1기를 대체할 사업 및 남한의 전력지원 방안이 확정된 직후에, 북한은 북한 내 모든 핵물질에 관한 최초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해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협정(INFCIRC/403)을 완전히 이행한다.



    ③ 동북아 비핵지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남북한과 일본 3개국은 한반도 비핵화 및 비핵 3원칙에 따라 비핵지대화 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대해 미국, 중국, 러시아, EU는 3개국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 핵무기 반입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다. 또한 이를 실행하고 동북아에서 궁극적인 비핵지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동북아 비핵지대 추진기구’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한다.

    ④ 북한과 일본은 조속히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

    ⑤ 서명 국가들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 유라시안 철도망을 건설하는 것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신뢰구축과 번영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유라시안 철도기구(Eurasian Railway Organization : EARO) 창설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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