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남한 정부 역시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이제 막 출범한 노무현 정부로서는 북한과 미국을 제네바 합의체제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지, 아니면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새로운 합의를 함께 모색해야 할지 기본원칙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 집을 지을 때까지 헌 집을 헐지 말라’는 말이 있듯, 제네바 합의 무효화를 공식화하는 데는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그렇다고 새로운 합의를 도출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네바 합의 사항들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합의에 연연할 경우 ‘주도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 자체를 불신하는 데다가 “무효화됐다”고 공식화한 마당에 미국을 제네바 합의체제로 복귀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제네바 합의 고수보다는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제네바 합의를 고수하거나 개선을 추진할 경우, 합의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이므로 남한은 계속 제3자의 위치에 머무를 것이라는 점도 고려할 대상이다. 또한 제네바 합의를 핵 비확산 정책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운 클린턴 행정부와는 정반대로 미국 외교의 치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정치적 입장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전제돼야 할 점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기 전까지 제네바 합의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합의는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이를 ‘대체’한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능한 수준에서의 ‘원상복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합의를 추진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인 만큼 최악의 상황을 예방할 원상복귀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가능한 수준의 원상복귀란, 북미간 공방의 핵심인 우라늄 농축 시설 의혹 규명, ‘말’보다는 높은 단계의 대북한 불가침 약속, 중유 제공 재개, 북한의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철회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등을 말한다.
북미 양자 협상 VS 다자간 협상
다른 하나는 제네바 합의를 새로운 합의로 대체할 경우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의 원칙’, 즉 한 당사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 최소한 다른 당사자의 이익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제네바 합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합의는 제네바 합의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합의를 통해 북한은 이전보다 확고하게 체제안전보장 을 받으며 전력 확보 방안이 개선돼야 하고,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폐기를 한층 강화된 형태로 관철시켜야 하며, 남한은 경수로사업 중단 같은 경제적·정치적 손실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합의의 추진 문제와 관계없이 북핵 문제 해법에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북미 양자 해결 구도로 가느냐, 남한, 일본, 중국, 러시아, EU 등 관련 당사국을 포괄한 다자간 해결 구도로 가느냐다. 물론 이를 기계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안과 상황에 따라 양자 협상 및 다자 협상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핵문제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서 발생한 문제로 북-미의 양자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 대 국제사회의 대결구도’라는 관점에서 다자간 해법, 즉 동맹국과 우방국들이 함께하는 대북 압박 전략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 국가들이 ‘공정한 중재자’로 나서 북미 협상 환경을 마련한다면 북한도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피력해왔다. 새로운 합의틀을 모색하고 있는 미국 역시 양자 협상이 아닌 다자 협상을 선호하고 있어 북미 사이에 ‘접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북핵 해결 구도가 다자주의(multilateralism)로 가면 주도적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남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EU 등 7개 국가 협상구도로 가면 남한의 위상은 7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다자주의 구도의 ‘도전적인 요소’보다는 ‘기회적인 요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이 필요하다. 북핵 해법 구도로서의 다자주의는 거부하기 힘든 현실일 뿐더러 노무현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동북아 중심 국가론’의 토대를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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