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전폭기 900대 48시간 맹폭 바그다드에 숨을 곳 없다

이라크전쟁 공습전략 A to Z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2-25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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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이라크전쟁 발발시 초반에 대규모 공습으로 일찌감치 승패를
    • 가를 태세다. 미군의 공습전략 개념은 ‘충격과 두려움’이다.
    • 아프간전쟁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생겨날 전망이다. 현대전에서 공습이 지닌 몰인간적 의미를 가늠해본다.
    전폭기 900대 48시간 맹폭 바그다드에 숨을 곳 없다
    ‘충격과 두려움(shock and awe).’

    이는 미 펜타곤(국방부) 지도부가 세워놓은 이라크전쟁의 기본 작전개념이다. ‘신동아’ 2003년 2월호 ‘이라크전쟁 시나리오’ 기사에서 살펴본 펜타곤 내부의 여러 가지 이라크 침공계획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대규모 공습으로 전쟁의 포문을 연다는 것이다. 수백 대의 전폭기와 페르시아만 정박 군함들로부터 한꺼번에 발사된 미사일들이 이라크 통신시설과 방공망 등 주요 군사시설들을 강타하면서 사담 후세인의 지휘체계를 마비시킨다는 게 단기적 목표다. 그럴 경우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인 이라크 지휘부는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질 것”이란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으로 미 군부는 예측한다.

    펜타곤과 미 중부군사령부는 개전 48시간 안에 800발의 크루즈 미사일을 포함, 3000여 발의 정밀유도 폭탄을 우박처럼 퍼부을 계획이다. ‘충격과 두려움’ 전략에 따라 후세인의 방어의지를 전쟁 초반에 아예 꺾고, 이라크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려 후세인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킨다는 의도다. 주요 과녁을 이라크 방공망과 통신체계, 즉 후세인의 지휘체계 마비에 둔다는 전술이다. 대규모 공습은 미 지상군이 바그다드에 쾌속 진입하기 위한 ‘고속도로 닦기’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작전명 ‘충격과 두려움’

    이라크전쟁은 공습만으로 승리를 거둔 코소보전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지상군 투입 없이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키긴 어렵다. 그러나 ‘충격과 두려움’ 작전에 바탕한, 초반 대규모 공습으로 지휘체계가 마비돼 일단 이라크군의 전투의지가 꺾인다면, 상당수 병력이 투항할 것이고 이는 후세인 체제의 조기 붕괴로 이어지리라는 판단을 미 군부는 내리고 있다.



    이라크전쟁 초기 공습을 맡을 미 항공기들은 쿠웨이트와 카타르를 비롯한 걸프지역 미 군사기지에서 발진할 전폭기 500여 대(터키정부가 양해할 경우, 터키 서부 이라크 국경지대 기지에서 발진하는 전폭기 포함)와 페르시아만 지역에 배치된 5척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할 해군기 400여 대다(항공모함은 통상 80대의 항공기를 탑재한다).

    펜타곤이 세워둔 이라크전쟁 공습전략을 풀이하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라크를 초전(初戰)에 제압한다”는 것이다. 펜타곤의 한 관리는 미 방송 CBS와의 인터뷰에서 “바그다드에 안전한 곳이란 없을 것”이라 말했다. 한마디로 이번 공습은 “전에 들어본 적도 없고 생각도 못해본” 엄청난 규모로 이뤄질 것이라는 얘기다. 후세인은 1991년 걸프전 때나 1998년 유엔무기사찰단이 철수한 뒤 개시된 ‘사막의 여우(Desert Fox)’ 공습작전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번 이라크전쟁 공습은 그 강도가 다를 것이다. 후세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건 바로 이 공습에 따른 사망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런 정보를 흘리는 것이 단지 후세인을 겁먹게 만들어 미국이 목적한 바를 손쉽게 이루려는 의도 아니냐는 분석도 가능하다. 19세기 프러시아의 군사전략가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명저 ‘전쟁론’에서, 전쟁이란 “우리의 의지를 적(敵)에게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곧 정치행위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효한 군사적 수단이 전쟁이라는 것. 전쟁을 벌이지 않고 적에게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미국이 전쟁을 벌이려는 명분은 후세인 체제 전복과 대량학살무기의 제거다. 만일 후세인이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다면, 미국은 굳이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라크 당국은 “이라크 침공을 앞둔 미국의 심리전”이란 반응을 보이며 후세인 망명설을 일축한다. 그러면서 결전의지를 다진다. 1월말 후세인은 이라크 전군 고급지휘관들을 바그다드 대통령궁으로 불러모아 결사항전을 다짐했었다.

    걸프전에서 39일간, 코소보전쟁에서 78일간 공습이 있었던 데 비해, 미 군부는 이라크전쟁의 공습기간을 일주일쯤으로 전망한다. 걸프전에서는 사막의 악천후, 코소보전쟁에서는 악천후와 함께 유고(세르비아)군의 정교한 대공망이 미 전폭기 조종사들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작전 기일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늘어났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에서 한층 개량된 무기와 첨단장비로 ‘충격과 두려움’ 작전개념에 따라 초반 맹폭에 나선다면, 이라크군의 대공망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으로 펜타곤은 내다본다.

    ‘충격과 두려움’ 전술개념은 1990년대 초부터 펜타곤 장성들의 지지를 얻어왔다. 이 작전개념을 다듬는 국방부의 한 태스크포스팀에 참여했던 할란 울만(워싱턴 전략국제문제센터 연구원)에 따르면, 이 개념의 뼈대는 되도록 미 지상군 투입을 줄이면서 대규모 공습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 전술개념은 1999년 코소보전쟁 당시 도널드 럼스펠드를 포함한 4명의 전 미 국방장관들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 바 있다(럼스펠드는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인 1975∼77년 최연소 국방장관을 지냈다). 이 편지에서 럼스펠드는 코소보전쟁에서 공습을 한다면, ‘충격과 두려움’ 작전개념에 바탕해 단기간에 대규모로 압도적 화력을 퍼부어야지, 베트남전쟁 때처럼 조금씩 마지못해 화력을 늘려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코소보전쟁(1999년)은 미국이 지상군 투입 없이 이긴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 군사전문가들은 “공습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지상군을 투입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공습이 적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적군을 점령지로부터 몰아내려면 궁극적으로는 지상군이 투입돼야 한다는 논리가 대세를 이뤘다.

    이를테면, 공중전 전문가 로버트 페이프(미 다트마우스대 교수)도 그의 책 ‘승리를 위한 폭격(Bombing to Win, 1996년판)’에서 공습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코소보전쟁에서 승리한 뒤 페이프는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 “미국 병사들의 인명 손실 없이 우리는 크루즈 미사일로 적군을 제거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미 공군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는 또한 미군이 코소보전쟁에서는 공습에 100%, 걸프전에서는 공습 50% 지상군 50%에 의존했지만 이라크전쟁의 경우 공습 80% 지상군 20%로 치러질 것으로 내다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신념

    ‘충격과 두려움’ 개념의 공습 위주 전략이 미 군부에서 설득력을 얻은 것은 1990년대 초 걸프전 이후부터다. 지상군의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고 아울러 적을 모두 섬멸해야 하는 소모전(attrition warfare)에서 이른바 전격전(blitzkrieg)으로 승패를 빨리 결정하려면, 공습이 유효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 논의를 받쳐주는 논리적 바탕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원폭 투하다. 일본인들은 전폭기 500대가 야간공습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 원폭 투하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은 항복했고,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치러질 경우 필연적인 미군 병력의 희생을 덜었다.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무기로 그같은 충격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할란 울만 같은 미 군사전문가들이나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거둘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럼스펠드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이라크를 손봐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1998년 1월 그는 리처드 아미티지(현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울시(전 CIA 국장) 등 보수 우파 18명이 공동 사인한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미국과 전세계 우방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후세인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의 경제제재를 비롯, 후세인의 이라크를 봉쇄(containment)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논리였다. 그런 럼스펠드가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에 오르면서 이라크전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전폭기 900대 48시간 맹폭 바그다드에 숨을 곳 없다

    위성 유도 폭탄(JDAM)을 격납고에서 갑판으로 옮기고 있는 미 항공모함 승조원들

    따지고 보면, 1991년의 걸프전도 전례 없는 강한 공습으로 미군 전쟁사를 새로 쓴 전쟁이었다. 당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개전 이틀 동안 325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퍼부어댔고, 첫 사흘 동안 이라크 바드다드의 지휘부를 비롯한 254개의 전략목표물을 공습했다. 초기 공습작전 이름도 ‘충격과 두려움’을 이끌어내려는 듯, ‘순간의 천둥(Instant Thunder)’으로 정했다. 걸프전에서 지상군이 투입된 것은 개전 39일 후였다. 이는 미 중부군사령부가 처음 작전을 짤 때 세운 21일보다 두 배 가까이 공습이 진행된 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미 공군의 기술은 매우 진보돼, 이라크 공습기간은 단축될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침공에서 미군은 스마트(smart)폭탄 사용률을 높이고, 무인비행기로 이라크 내 스커드 미사일 기지를 강타하는 전술을 택할 것으로 알려진다. 걸프전 때에 비해 미 공군의 전투력이 거의 10배나 증강됐다는 분석도 있다(예비역 공군 중장 토머스 매키너리). 반면 걸프전 당시에 비해 이라크의 전투력은 3분의 1 규모다. 미국의 군사전문 연구기관인 글로벌 시큐리티(glo balsecurity.com)의 존 파이크 소장은 “미국의 기술적 우위로 미뤄 이라크전쟁이 일주일 정도면 끝날 것”으로 전망한다.

    걸프전에서 공습 뒤 쿠웨이트 진공을 위한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은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 점령군을 몰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이라크군이 공격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내건 목표는 후세인 체제 전복과 대량학살무기 제거다(물론 궁극적 목표는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워 석유자원의 안정적 공급과 미국의 걸프지역 패권 확보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공격목표는 당연히 이라크군보다는 바그다드에 진치고 있는 후세인을 비롯한 이라크군 지휘부가 된다. 미군의 공습은 바로 이 지휘부를 마비시키는 쪽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라크전쟁에서 일선에 배치된 이라크군은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 ‘충격과 두려움’ 개념에 바탕해 바그다드에 대한 대규모 공습으로 적 지휘부의 저항의지를 꺾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의 일선 ‘소총수’는 지상군이 아니다. 전폭기 조종사들이다. 이번 전쟁에는 F-14, F-15, F-16, F-18 등 미 공군 및 해군의 전폭기들과 더불어 B-2 스텔스 폭격기와 B-1 폭격기들도 동원될 것이다. B-2는 1개 무게가 거의 1t에 이르는 위성(satellite) 유도 폭탄을 16개, B-1은 24개씩 실어날라 떨어뜨리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다. 미군은 1월말 현재 이미 6700개의 위성 유도 폭탄과 3000개의 레이저(laser) 유도 폭탄을 걸프지역으로 운반해놓았다. 걸프전에서는 투하된 폭탄 가운데 단지 9%만이 정밀 유도 폭탄이었다. 그러나 이번 이라크전쟁에서는 전체 투하량의 75∼90%가 정밀 유도 폭탄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공습에서 미국은 최신예 무기와 장비들을 동원할 것이다. 정밀도와 파괴력에서 1991년의 걸프전 때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훨씬 뛰어난 것들이다. 이를테면, 걸프전 당시 선보였던 합동집속탄(JDAM)은 위성의 도움으로 목표지점을 겨냥하지만, 기상조건이 나쁘면 목표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선보일 JDAM 개량형은 어떤 악천후에서도 쓰일 수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GBU-28 벙커파괴탄을 개량한 BLU-31은 폭발하기 전에 몇 층을 더 뚫고 들어가야 할지를 정밀 계산해내는 폭탄으로 이라크전쟁에서 무서운 위력을 보일 것이란 전망들이 전해진다.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로 저항할 경우 핵무기로 보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비(非)핵국가를 향해 핵무기를 발사하겠다는 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소형이든 대형이든 핵무기를 쓴다면, 그것도 공군 전폭기를 통해서일 것이다(걸프전 때도 미국은 이라크를 향해 “생화학무기가 사용될 경우 핵 보복이 있을 것”이라 경고했었다). 핵무기의 전략적 개념은 억제력(deterrence)이다. 제프 훈 영국 국방장관은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면 억제력으로도 작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 논란을 빚었었다.

    흔히 우리가 공습이라 부르는 것은 미 군부의 용어로는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이다. 미 공군의 고급 지휘관들은 전략폭격이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라 여겨왔다. 미 공군이 한국전쟁 휴전협정 직후인 1954년에 만든 ‘공군교범 1-8’은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략폭격은 적국의 저항의지와 능력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공습의 정의(定義)에 따라 미 국방부는 공습이 전쟁의 승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신념처럼 여겨왔다. 그 40년 뒤인 1995년 미 국방부가 작성한 ‘합동비전 2010(Joint Vision 2010)’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자료엔 “적군을 무력으로 제압할 때 (미 공군의) 정확한 교전능력은 (다른 나라 군대와 비교해볼 때) 큰 차별성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공습이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해왔다. 베트남전쟁이 좋은 본보기다. 당시 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융단폭격(carpet bombing)을 퍼부었지만 끝내 북베트남 무장세력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공군장교 출신의 마크 클로드펠터(미 국립전쟁대학 교수)는 그의 책 ‘공군력의 한계’(1989년)에서 베트남전쟁을 분석하면서 다른 여러 정치적·지리적 요인 때문에 베트남전쟁에서 공습이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고 결론지었다.

    클로드펠터에 따르면,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려는 방침을 굳혔다. 이런 루스벨트의 결정은 미 군부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적국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이뤄진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군수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습은 물론 일반 시민 주거지에 대한 공습도 단행됐다. 적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심리전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미 공군은 전쟁 중 공습을 전반적으로 평가하고, ‘미 전략폭격 개관(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이란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의 결론은 “어떠한 나라도 적국의 공군이 자유롭게 공습하도록 허용한다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바탕을 두고, 미 공군은 2차대전 뒤 신참내기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그들이 바로 현대전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이를테면, 한국전쟁의 경우도 미군의 공습이 공산군으로 하여금 휴전협정에 나서도록 이끌었다는 게 미 공군 지휘부의 일반적 인식이다. 앞에서 언급한 ‘공군력의 한계’의 저자 클로드펠터에 따르면,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이 펜타곤으로 하여금 적국에 더욱 공격적인 공습 독트린을 확립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개입했던 베트남전쟁에서는 공습 독트린이 빛을 보지 못했다. 1965년 3월 ‘천둥 울림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란 이름 아래 북베트남에 제한적 공습을 시작하면서 미 공군 지휘부는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불과 몇 개월 뒤에는 북베트남이 (한국전쟁 때 공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휴전협상을 벌이려들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천둥 울림 작전’은 거의 3년을 끌었고 그 동안에도 미 공군 지휘부는 “공습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공습의 환상은 1968년 초 공산군이 벌인 이른바 구정 대공세에서 깨졌다. 클로드펠터는 그의 책에서 “만약 미 군부가 공습으로 게릴라 세력을 무찌를 수 없다는 판단을 일찍이 내렸다면, 존슨 행정부는 다른 베트남정책을 추진했을지 모른다”고 적었다. 비록 군사적으론 성공하지 못했지만, 미군의 폭격은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트남전쟁과 더불어 78일간 공습이 이어졌던 코소보전쟁도 공습의 한계를 지적하는 한 본보기로 거론된다. 당시 영·미군이 주축이 된 나토(NATO)군은 ‘연합세력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이란 이름 아래 세르비아와 코소보를 공습했으나,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록 세르비아 지도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나토의 요구를 받아들여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군 병력을 물리기로 동의했지만, 철수 당시 세르비아군은 거의 손상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세르비아 방공망과 궂은 날씨 탓이었다(나토는 공습 결과 2만명의 세르비아 병력을 죽였다고 주장했으나, 세르비아 쪽 주장은 단지 600명이었다). 초조해진 나토 사령부는 1999년 초가을에 지상군을 투입해야 할 것인가를 고려했을 정도였다.

    코소보 공습을 비판적으로 보는 다른 논의는 나토 공습(1999년 3월24일) 직후 세르비아 세력의 코소보 인종청소가 더욱 잔인해지고 본격화했다는 점이다. 1993년 소말리아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자국 군대의 인명 피해가 가져올 정치적 부담을 지나치게 의식해 지상군 투입 없이 공습으로 일관한 결과, 코소보 안에서 세르비아 세력의 인종청소를 막을 현실적인 물리력 (소수의 코소보해방군말고는)이 없었다. 오폭도 문제였다.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오폭이 대표적 사례다.

    공습에 따른 민간인 피해가 특히 문제가 된 것이 아프간전쟁이다. 78일간 공습이 계속된 코소보전쟁에서 민간인 피해자는 약 500명. 아프간전쟁의 경우, 2001년 10월7일 ‘불굴의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이란 이름으로 공습을 개시한 이래 65일 동안(10월7일∼12월10일) 약 1000∼1300명의 민간인이 공습에 희생됐다.

    문제는 공습 횟수 대비 피해자가 아프간전쟁에서 훨씬 많다는 점이다. 코소보전쟁의 경우 1만3000회 출격에 2만3000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아프간전쟁에선 4700회 출격에 1만2000개의 폭탄이 떨어졌다. 출격 횟수와 폭탄 투하에서 아프간전쟁이 코소보전쟁 때보다 훨씬 적었는데도,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자는 두 배가 넘었다. 폭탄의 파괴력에 차이가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아프간전쟁에서 공습이 정밀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민간인 피해자 통계는 전쟁 당사국 사이에 선전전의 좋은 재료다. 아프간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탈레반정권은 10·7 공습 직후인 2001년 10월말 “3주 동안의 공습에서 1600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1주 평균 533명이 희생됐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영국 정보기관의 주장에 따르면, 같은 기간에 생긴 희생자 규모는 모두 합쳐 300명이었다(1주일 평균 90명).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검증하기 어렵다. 미국인인 마크 해럴드(뉴햄프셔대 교수·경제학)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0·7 공습 뒤 그해 말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에 민간인 희생자 숫자는 약 4000명. 미군 공습이 11월 들어 격화되고 토라 보라 공방전에서 많은 공습이 있었던 점을 떠올리면, 그같은 희생자 숫자는 설득력을 갖는다.

    국제적 인권감시단체인 ‘휴먼 라이트 워치(Human Rights Watch)’는 폭 500m 내의 모든 것들을 불바다로 만드는 데이지 커터(Daisy Cutter) 폭탄을 아프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전쟁의 일반적 규범을 벗어난 무차별 살상행위”라 비난했다.

    “이라크는 21세기의 게르니카?”

    이라크전쟁에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될 것으로 우려된다. 아무리 미군이 정밀 유도 폭격을 편다지만, 희생을 피하긴 어려운 일이다. 펜타곤의 한 군사전문가는 미 방송 CBS에 출연, “인구 500만명의 바그다드는 전쟁기간 중 안전한 도시가 되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코소보전쟁 때, 또는 아프간전쟁 때의 오폭사건들을 떠올리면, 이라크전쟁에서 미군 공습(오폭)으로 희생될 사람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라크 지휘부가 바그다드 시민들을 볼모로 삼고 도시 게릴라전 전술을 편다면, 시가전은 불가피하다. 그럴 경우 시민 희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을 제거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이라크 국민들이 당할 고통은 크나클 것이다.

    펜타곤의 ‘충격과 두려움’ 전략 가운데 충격적인 것은 공습 대상에 이라크군만 아니라 바그다드의 전력과 수도(물) 공급시설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최종 과녁이 후세인 지휘부라 해도 바그다드 시민들이 당할 고통을 떠올린다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발상이다. 국제적인 반전 여론도 후세인 체제 보호라기보다는 이라크 국민의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미군의 무시무시한 공습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날 것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라크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시가전이 장기화할 경우 바그다드 전 시가지가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폐허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라크전쟁 반대론자들은 “이라크가 21세기의 게르니카”가 될 것이라며 미군 공습의 몰인간적 성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게르니카 학살은 1937년 4월 25대의 나치 독일 폭격기가 스페인의 소수민족인 바스크족이 살고 있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1500명의 주민(마을인구의 3분의 1)을 죽인 사건이다. 당시 아무런 군사전략적 가치가 없던 게르니카 폭격으로 나치가 노린 것은 바로 공포감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영·미 연합군은 독일에 대한 무차별 공습으로 많은 비전투원을 죽였다. 특히 1945년 2월, 독일의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진행된 드레스덴 폭격으로 13만명의 시민이 사망한 사건은 ‘전쟁범죄’에 준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이유로, 지금껏 수많은 민간인들이 폭격으로 죽었다. 한국에도 번역출간된 ‘미국 민중의 역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의 저자 하워드 진(보스턴대·사학)은 노암 촘스키(MIT대·언어학)와 더불어 부시행정부의 이라크전쟁 움직임을 비판해온 인물. 2차대전 때 미 공군조종사로서 독일 폭격에 나섰던 전력을 지닌 그는 지난 1월 중순 미 공영방송 PBS ‘지금(Now)’ 프로그램에 출연, 공습의 몰인간성을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공중폭격에 나선다면, 9000m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린다. 당신은 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별다른 거리낌없이 다음날 또 폭격에 나선다. 나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독일 드레스덴에 대한 영·미 공군기의 무차별 공습으로 죽은 수많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하워드 진의 고백에서 보듯, 공습은 행위 당사자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속성을 지녔다.

    얼마나 많은 희생자 나올까

    군사력 측면에서 미국은 21세기 최강국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논하는 기본 개념의 하나인 힘(power)을 지닌 유일 패권 국가다. 군사적으로도 맞설 상대가 없다. 정치학자들의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미국은 소련 해체 뒤 지구상에서 유일한 패권국가다. 거시적 관점에서 패권국가를 연구한 정치학자 조지 모델스키는 세계적 강대국(global power)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세계적 지배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동맹을 구성·유지하는 단위”라는 것이다(‘국제정치학의 장주기들’ 1987년판). 그는 세계적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장주기(long cycle) 이론으로 설명하면서, 강대국의 필수요건으로 ‘해군력’을 꼽았다. 근대 서양 역사에서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미국이 모두 해군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넓힌 나라들이다.

    그러나 21세기 세계적 강대국을 재는 잣대는 해군력보다는 공군력이라 여겨진다. 미국은 공군력에 관한 한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도 맞설 수 없는 초강대국이다. 1990년대 후반부 들어 미국은 어느 전쟁에서건 공습으로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보스니아전쟁(1995년) 코소보전쟁(1999년) 아프간전쟁(2001년∼현재)이 그랬고, 이제 이라크전쟁에서도 공습이 펼쳐질 참이다.

    ‘2월말 공습설’ 또는 ‘3월 공습설’이 나도는 가운데 바그다드 시민들은 떨고 있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공습의 희생자가 될 것인가. 그런 희생을 딛고 누가 가장 큰 덕을 볼 것인가. 전쟁 특수를 누리는 미 군수산업체인가, 아니면 전쟁 뒤 확보할 석유이권을 챙길 미 석유산업체인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주장대로 후세인의 독재에서 해방될 이라크 민중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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