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한 말로 구렁이가 되었다고 할까. 이민생활이라는 게 팔팔 날뛴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노는 게 가진 돈을 안 까먹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말이 격언이 됐을까. 잘 모르면서 무리하게 서두르다가는 더 큰 손해를 보게 마련이었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좀 여유가 있었다. 흡사 해병대를 제대하고 다시 육군에 입대하는 기분이었다. 남미 교포들은 그곳의 열악한 상황에 빗대어 스스로를 해병대로 자처한다. 그에 비해 캐나다는 군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육군쯤에 해당된다 하여 캐나다살이를 약간 쉬우리라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돈 씀씀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캐나다와 남미의 국민소득이 열 배정도 차이가 나는데 돈의 쓰임새도 그와 비례했다. 처음부터 지출을 줄여야겠다고 안달했건만 한 달이 지나자 파라과이에서라면 일 년은 살 수 있는 돈이 날아갔다. 돈이란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 벌어 낮은 나라에서 써야 한다는 평범한 이치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더 답답한 것은 캐나다에서 사람 사귀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파라과이는 임금이 낮아 직장생활을 하는 교민이 드물고 대개가 의류와 관계된 자영업을 한다. 직접 노동력은 원주민을 이용하고 교민은 흔한 말로 사장님이 되어 시간 여유가 생긴다. 원단 공급에서 그 원단을 자르는 일, 재단된 옷감을 박아 옷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거쳐 옷을 파는 일까지 전과정에 한국 교민이 서로 연결되다 보니 교민 간에 교류가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캐나다 교포들은 사회의 하층구조에서 직접 몸으로 뛰다 보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몹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 교포 사이에 직업의 유기적 연대가 없는 탓인지 ‘가족’말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일부러 들락거려 보았지만, 특별 고객으로 대우할 뿐 진한 동포애는 느낄 수 없었다.
‘나도 지렁이는 좀 아는데…’
“여보세요!”
전화 발신음이 계속 이어져도 응답이 없어 끊으려는 참에 수화기 저편에서 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은 귀찮다는 듯한 건조한 음성은 자다 깬 것임에 분명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두 시. 벌건 대낮에 낮잠을 즐기는 사람과 예의를 갖추어가며 통화를 한다는 게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 쪽에 사정이 있다 보니 조금 참기로 했다.
“지렁이를 잡는다고 해서 전화를 드렸는데요.”
“네, 그러세요? 어디서 픽업하면 될까요?”
밑도 끝도 없이 단번에 만나자는 얘기부터 나왔다.
“사실은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지렁이를 어떻게 잡는지도 모르고요.”
조금의 친절과 배려 같은 것을 바랐는데 전화 속의 인물은 최소한의 사무적 예의도 무시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소가 어딘데요?”
주소를 말하자 사족을 달지도 않고 알겠다며 오후 여섯 시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내 의향은 묻지도 않고 일방적이었다. 간단하게 정보나 얻어보려던 전화가 일사천리로 진전되자 오히려 곤혹스러웠다. 오늘과 내일은 볼일이 있다는 핑계로 다음날 같은 시간으로 약속을 정했다. 그래도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상대는 장화와 비옷을 준비하라고 마지못해 일러주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지렁이는 어디 가서 어떻게 잡는지 따위의 잡다한 궁금증은 물어볼 틈도 없었다. 말하자면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취직이 된 셈인데 정작 내가 할 일이 어떤 것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구석은 지렁이를 만지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파라과이로 이민 가서 지렁이를 미끼로 낚시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