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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일기

책읽기, 정신의 이행을 상징하는 ‘周遊天下]

  • 글: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책읽기, 정신의 이행을 상징하는 ‘周遊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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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정신의 이행을 상징하는 ‘周遊天下]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과거사를 음미해보니 내게 영향을 미친 최초의 책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주

신 전집소설이었던 것 같다. 서양 동화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었는데, ‘소공자’ ‘소공녀’ ‘인어공주’ 등 기억나는 것들은 대부분 고난과 헌신 끝에 행복이나 이상을 이루는 고결한 아웃사이더에 관한 이야기다. 초등학교 ‘학급문고’에서 만난 책들 중에선 ‘괴도 뤼팽’이 재미있었다. 명탐정 셜록 홈스보다 기이한 도둑 뤼팽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으니, 주류 질서의 수호자보다는 어딘가 멋지게 흠집을 내는 사람을 동경하게 된 최초의 경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뤼팽 시리즈가 최근 추리소설 붐을 타고 재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중·고교 시절은 사실상 독서의 사각지대였지만 그 중에도 선명한 기억들이 몇 가지 있다. 중학교 때 세계사를 가르치던 나승철 선생님은 특이하게도 독후감을 몇 편 써오라는 여름방학 숙제를 내주셨다. 개학 직전 며칠간 장마비가 내렸다. 모든 숙제를 팽개쳤는데 어쩐 일인지 독후감 숙제만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창틀에 걸터앉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비롯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내가 써낸 독후감을 들고 와서 격려해주셨다. 그 후로 비오는 날 창틀에 앉아 책 읽는 버릇은 모든 창문에 방범용 쇠창살이 달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창틀에 앉아 책 읽는 버릇

어마어마하게 단조롭던 고교 시절에도 아주 가끔씩만 있었을 특별한 순간들이 기억난다. 시험이 코앞에 닥치면 유독 독서를 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그럴 때 창틀에 올라가 읽은 책들 중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애간장을 녹였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포화가 자욱한 가운데 파리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의사 라비크와 카페 여가수 조앙 마두가 나누는 황폐한 사랑 이야기는, 내게 처음으로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압도적 영향에 대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주인공이 즐기던 술과 담배는 내 머리가 아닌 혀와 코에 강력한 상상력을 남겼다.



대학 신입생 시절, 라일락 향기와 최루탄 가스가 뒤섞여 날던 어느 봄날. 한 선배가 세미나 커리큘럼에 등장하지 않는 특이한 책을 추천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생동하는 육체와 지혜로운 영혼을 가진 조르바는 이성과 지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을 시원스럽게 압도했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내 잊혀지고 내 책꽂이는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비판적인 책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어느날 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몇 권만 챙겨 들고 남해안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 중 ‘약한 자의 가면’이란 시집에 실린 ‘바퀴 갈아 끼우기’는 내 여행의 동기를 나를 대신해 압축해서 설명해준다.

‘나는 도로 가에 앉아 있고/ 운전사는 바퀴를 갈아 끼운다/ 내가 온 곳도/ 내가 갈 곳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나는 왜 바퀴 갈아 끼우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걸까?’

무언가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됐다.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그때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는데, 지금도 가끔씩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기형도를 그려보곤 한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책꽂이를 늘리지 않았다. 책들이 불어나면 옛 책들을 조금씩 버렸다. 그 시절의 책들은 이제 엄선되고 상징적인 것들만 살아남아 있지만, 여전히 한 켠에 자리를 유지한 채 내 정신의 근간을 상기시킨다.

책들의 교체는 시대 변화와 내 정신의 이행을 아울러 상징한다. 이행의 방향을 일단 문화 쪽으로 정했다. 미술과 관련해서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여러 번 읽었다. 영화계로 들어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미지 독해라는 공통점 때문에 미술 관련서적을 종종 펼친다. 최근 읽은 그림 관련 책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주 귀고리를 단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미술서적이 아니라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동명의 그림을 소재로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지어낸 러브스토리다. 화가 자신과 모델이 된 소녀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애정이 당대 사회상의 지원을 받아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한글 번역본으로도 만나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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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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