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이후 국제 금 시세 추이
첫째, 정정(政情)이 불안하거나 전운이 감도는 ‘정치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금은 가장 안정적인 투자수단으로 꼽힌다. 이런 경우 투자자들은 돈을 벌겠다기보다는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금을 산다.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사태, 레이건 미 대통령 피격사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태 등 국제적 긴장이 고조된 시기에 금값은 수요 증가로 폭등했다.
둘째, 금리, 환율, 주가 등이 투자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금은 리스크 헤징을 위한 투자 포트폴리오 수단으로 활용된다. 금리 하락기에는 금융상품에 투자하기보다 금을 사서 들고 있는 편이 기회비용 면에서 더 유리하다. 증권시장이 침체하면 기관투자가들은 주식 투자 비중을 낮추는 대신 금 투자 비중을 높여 주가의 추가 하락에 대비한다.
또한 금값은 미국 달러화 가치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가 약세일 때는 일반적으로 유로화나 엔화 가치가 상승하므로, 유럽 국가와 일본 등지에서는 가치가 상승한 자국 통화로 금을 매입하고 달러 보유 자산을 매각한다.
셋째, 금은 특히 일부 부유층에게 ‘사회적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은 보유 및 이동 상황이 사실상 ‘공개’되어 있다. 수사기관이나 세무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재산을 금으로 바꿔놓는 순간 사정은 달라진다. 통화(通貨)에 가까운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소비재와 다를 게 없는 게 금의 속성. 때문에 금은 상속·증여세를 회피하거나 ‘검은 돈’을 세탁할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연말께부터 금 수요 급증을 촉발시킬 만한 요인들이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
‘복합 요인’이 촉발한 금 러시
우선 북핵 문제와 이라크전쟁 가능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국제적 긴장을 야기했다. 한 금은방 주인은 “금괴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50∼70대다. 이들은 전쟁을 체험했거나 전후의 신산한 삶을 몸으로 부대껴본 세대라 험난한 시기에 금이 얼마나 유용한지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제 금 시세는 2000년부터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려왔는데, 올 초 이라크전쟁이 초읽기로 접어들자 급등세를 보였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진 데 대한 일반인들의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지만, 다국적 헤지펀드나 국내 ‘큰손’들이 실제 이상으로 위기의식을 부풀려 금값 상승을 부채질한 측면도 있다. 세계대전도 아닌 데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 확실시됐던 이라크전 때문에 금값이 그 정도로 요동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쟁 발발 직전까지 숨가쁘게 오르던 금값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급락, 단기 차익을 노린 세력들의 ‘장난’ 흔적을 감지하게 했다.
초(超) 저금리와 증시 침체, 미국 달러 약세 등 경제 부문의 변수들도 치솟는 금값을 방치했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예금 금리가 사실상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 오래인 데다 증시는 2년이 넘도록 ‘바닥 다지기’만 해왔고, 주식보다 안전하다는 회사채도 장기 불황 조짐에 선뜻 손이 가지 않으니 물경 300조원 규모라는 부동자금의 일부가 금을 찾아 떠난 것은 당연하다.
미국 달러는 가뜩이나 약세가 지속돼온 마당에 얼마 전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가치의 추가 하락을 용인하겠다고 언급해 앞으로도 금값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는 이같은 정책을 비난하며 “최근 들어 미국 달러화를 팔기 시작했으며, 대신 유로화와 금을 사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선 새 정권 출범 초기에 금 수요가 늘어 금값이 오르는 경향이 있다. 새 정부는 대개 부패 청산, 민생 안정, 공평 과세 같은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인 개혁 바람을 일으키면서 부동산 투기 근절, 상속·증여세 회피 추적, 공직자 및 주변인물 재산 공개 등에 강한 의지를 보인다. 노무현 정부도 예외가 아닌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재산’인 금의 매력이 커지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