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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인생에 엄살떨지 마라, 비명도 교성도 지르지 말라”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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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게 모친은 참 특별한 존재였지요.

“어머니는 대단히 자존심 강한 분이었어요. 총명하고 호기심도 많았지요. 사실 어린 시절 전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게 싫었어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아마 그대로 눌러 있었다면 소학교조차 나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과수댁이, 그것도 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자식 공부시키겠다고 서울행을 택하다니요. 그것도 아들만이 아닌 딸까지 끌고서요. 그건 아주 특별한,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밤낮 제게 숙명·진명 얘기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외사촌들이 숙명여고와 진명여고를 다녔나봐요. 자주저고리에 검정 치마, 치마 밑단에는 하얀 줄이 세 개…, 그렇게 교복 모양까지 설명해가며 그 학교들을 동경하셨죠.”

학살당한 ‘자홀의 시간’

-모친의 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전 그냥 너무너무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과보호는 싫었죠. 비가 온다 하면 전 당연히 어머니가 우산을 가져오는 걸로 알았어요. 하교했을 때 어머니가 집에 없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집올 때 필사본 이야기책을 한 짐이나 가져올 만큼 ‘문학애호가’였다. 구전 설화부터 중국 고전까지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를 갖고 있었고, 그를 풀어내는 솜씨 또한 남달리 훌륭했다. 박완서가 “소설은 이야기”라는 정의를 갖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다 하겠다.

1950년 6월 박완서는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빛나는 자홀(自惚)의 시간’도 잠시, 곧 6·25 전쟁이 터졌고 그의 가족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참절의 고통을 경험했다. 혼란의 와중에 숙부와 오빠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한 것이다. 특히 그의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의 비참한 죽음은 그에게 불치의 상처를 남겼다.

‘오빠는 서서히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정신과 육체가 따로따로. 오빠가 완전히 죽기까지는 장장 일 년이 걸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느 쪽이 오빠를 죽였는지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한쪽에선 오빠를 반동으로 몰아 갖은 악랄한 수단으로 어르고 공갈치고 협박함으로써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던 그를 마침내 폐인으로 만들어놓고 말았고, 다른 한쪽에선 폐인을 데려다 빨갱이라고 족치기가 맥이 빠졌는지 슬슬 가지고 놀고 장난치다 당장 죽지 않을만큼의 총상을 입혀서 내팽개치고 후퇴했다.’ 그가 한 글에서 오빠의 죽음에 대해 묘사한 대목이다.

-오빠와 우애가 참 좋았던가 봅니다.

“어제 우연히 ‘남매’라는 제목의 TV 단막극을 보게 됐어요.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오빠가 희생하는 내용인데, 그걸 보며 저도 몰래 눈물을 뚝 떨궜지요. 우리 오빠도 저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저와 오빠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오빠 덕이었어요. 처음 제게 세계문학전집을 갖춰준 이도 바로 오빠였고요.”

-선생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지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팜플렛 빨갱이’였습니다. 하지만 서울이 북쪽 손에 넘어간 후 한동안 학교에 계속 나가면서 그만 (사회주의에) 완전히 질려버렸지요. 전시이긴 하지만 대학이란 데서 고작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당사(黨史)며 ‘김일성 교시’뿐이라니요. 아, 이건 정말 안 되겠다, 염증이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부의 분배에 대한 이상,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아직도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부의 편중이란 아무래도 지식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죠. 이제 생각하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나누게 하는 건 종교뿐인 듯도 합니다.”

복학 대신 결혼을 택하다

오빠의 죽음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그는, ‘산송장’과 다름없는 올케, 어머니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천우신조로 미8군 PX 초상화부에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은 그의 데뷔작 ‘나목’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뒷날 남편이 된 호영진(작고) 씨를 만난 곳도 PX였다. 호씨는 PX가 들어있는 동화백화점 소속 측량기사였다. 고학으로 겨우 공업학교를 나와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1953년 초, 그의 올케가 드디어 광장시장에 포목점을 내게 됐다. 한시름 놓은 박완서는 어머니에게 PX를 그만두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딸이 복학 대신 결혼을 택하자 어머니는 몹시 실망했다. 무엇보다 그 결혼상대가 양반도 아닌 중인 계급에,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신평 호씨’라는 사실에 역정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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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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