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사상’이란 단어는 이중의 의미에서 종종 ‘이상하게’ 쓰인다. ‘사상범’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불온한 것, 혹은 현실과는 유리된 대단히 관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해온 것이다.
‘강도범’이나 ‘강간범’의 강도나 강간처럼 사상이 범죄의 하나로 불리는 나라가 20~21세기에 우리말고 또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더 일반적인 문제는 관념벽으로서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몇 년 전 어느 출판사에서 낸 ‘103인의 현대사상’이란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103인이 아니라, 10인을 꼽는다 해도 나로서는 당연히 포함시킬 사람들이 대다수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간디, 타고르, 쑨원, 레닌, 트로츠키, 제임스 듀이, 다윈,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밀, 파농, 오웰, 러셀, 밀스, 프롬 등이다. 내가 좋아하는 모리스나 톰슨이나 사이드도 물론 없다. 그 출판사나 편집진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위 몇 명은 ‘객관적으로도’ 현대사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반면 위 책은 103명 중 반 이상을 철학자에 할애했다. 문학자는 6명, 역사학자는 3명에 불과했다. 그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 중 상당수를 나는 모른다. 예컨대 괴델, 김재권, 노이만, 메츠, 악셀로드, 야콥슨, 오덤, 정화열, 튜링 등은 ‘무식하게도’ 처음 듣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각 분야에서는 대가들이리라. 그러나 사상가라고 하면 어떤 전문 분야의 대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을 뛰어넘어 학문이나 예술, 나아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위 책에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람시, 루쉰, 니체, 들뢰즈, 마르크스, 마오쩌둥, 베버, 사르트르, 일리치, 촘스키, 푸코 등 열 명 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내가 ‘20인의 현대사상’이란 책을 편집한다면 이들과 위에서 언급한 103명에서 제외된 몇몇 사람들을 그 주인공으로 삼을 것이다.
최근 프랑스 현대사상이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이 역시 철학이나 문학, 역사학 분야에 한정돼 있다. 프리드만이나 낭시처럼 그 사상의 범위가 대단히 넓고 영향력도 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제외되어 있다. 이는 ‘현대사상’뿐 아니라 모든 사상의 이해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예컨대 여기서 다룰 루소는 ‘근현대사상’에서 그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지대한 사람 중 하나다. 그가 다루지 않은 분야, 그가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그 어떤 전문분야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다. 루소가 사상가로서 의미가 있다면 우리 시대의 모든 생각을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상가로서의 루소를 검토하는 경우 그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극단적 찬양도 있고 비판도 있다. 공동체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되는가 하면,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선구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위클러의 책에서는 루소를 ‘제한 없는 자유의 조건 속에서의 다양한 자아 실현을 제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 글에서 그런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즉 모더니즘의 상징인 중앙집권적 전체주의의 창시자로서 루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모더니즘의 기원으로 계몽주의를 바라보는 경우 나는 루소에 대해 비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시 그 근본에 있어 루소로부터 비롯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와 대한민국 헌법
최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창녀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다. 민주공화국이란 말은 민(民)이 주인으로서 함께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 민에 창녀가 포함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대단히 복잡하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그 출발이 되는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역사를 보면 대단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 부르는 1789년의 혁명이, 기본적으로 중세까지의 삶의 터전이었던 촌락공동체와 같은 중간집단을 철저히 배제하고, 개인과 국가만을 양 축으로 두는 정치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