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歸農人 장영란의 우리 땅, 우리 맛 ④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2/5
몇 해 산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자연과 함께 큰 고비를 넘겨왔다. 농사 두 해째인 1999년. 고추농사를 제법 벌였다. 남들이 하듯, 2월부터 비닐집을 지어 고추모를 길러내고. 밭에 거름 듬뿍 내 심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도 끄떡없게 말뚝을 박고 끈으로 엮어주었다. 드디어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때 태풍이 몰려왔다. 산에 나무들이 휙휙 넘어가던 그 태풍 ‘올가’가. 비바람이 우리 동네를 휩쓸던 시간 고추밭에 있었다. 비바람에 고추가 넘어가기 시작하는데…. 줄로 엮여 있으니 하나가 넘어가면 줄줄이 넘어간다. 그걸 막으려고 해머로 말뚝을 더 깊이 박는데 비바람에 땅이 물러져 어찌 할 수가 없다. 다만 고추와 함께 비바람을 맞고 있을 뿐.

올가가 지나간 뒤 고추밭은 처참했다. 줄줄이 엮여 넘어간 고추를 일으켜 세우려니. 가지째 꺾이고. 풋고추가 후드득 떨어져 발에 밟히고. 흙탕물에 범벅이 된 잎은 찢기고. 그때는 하늘을 원망했고 떨어진 고추를 아까워했다. 고추를 많이 달리게 하려는 사람 탓이나 스스로 돌아볼 줄 몰랐다. 올가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해 고추를 제법 땄다. 유기재배하면 병에 속수무책이라는데 병이 크게 들지 않았다. 그래 이듬해 자신을 가지고 다시 고추농사를 크게 벌였다.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고 빨갛게 익어갈 무렵 장마가 왔다. 비가 그치나 싶으면 또 오고. 고추가 익으면서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멀쩡한 고추가 익어가며 병이 드는데…. 고추가 아닌 병이 주렁주렁 달린 걸 겪고 나서야, 사람 욕심을 버리고 고추를 고추답게 기르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2000년 3박4일 70시간 쉬지 않고 내리던 비. 이듬해 팔십 난 할머니도 처음 겪는다는 지독한 가뭄. 지난해 사람이 해놓은 짓거리를 모두 부셔버릴 듯 온 큰비. 겨울에도 밤새 눈이 와 비닐집이 휘어지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산에 가보면 뿌리째 뽑혀 누운 큰 나무가 여기저기 있다. 올해는 자연이 어떤 놀라운 일을 벌이실까.

나 역시 자연이 기르는 목숨인데…

비바람 불고 난 뒤 들에 가면 곡식이 넘어지고 땅 모양이 바뀌기도 한다. 참 속상하고 어쩔 때는 어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약하고 웃자란 놈들을 솎아주는 자연의 손길이다. 그러면서 자연은 우수한 유전자를 남겨 진화해왔으리라.



가물어서 걱정. 비가 너무 와서 걱정. 날이 차서 걱정. 자연을 모르면서 농사는 잘하고 싶으니 걱정이 많다. 하나하나 겪으면서 사람이 할 도리를 다 하고 나머지는 자연을 믿고 맡겨야 한다는 걸 배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 자연을 믿고 맡기기보다 나도 모르게 자꾸 나서려 한다. 얄팍한 지식을 무기로 휘두르며…. 하다하다 안 되면 그제야 자연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한다. 언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눈이 뜨일까?

씨 뿌리고 가꾸어 더 좋은 씨를 얻기까지 여러 가지 일이 있다. 곁에서 자라는 풀을 뽑고, 벌레도 잡고. 씨를 서너 개 뿌려 좋은 놈만 살리고 나머지는 솎아내기도 한다. 모두 살려고 태어난 목숨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씨조차 못 건지기도 하고. 튼실한 씨를 가득 얻어 여러 군데 나누어 퍼뜨리기도 한다. 참깨 싹을 솎아주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싹일까? 좋은 땅에 튼실하게 뿌리내려 자라는 싹인가? 메마른 곳에 떨어져 배리배리하게 살아가는 싹인가? 나 역시, 자연이 기르는 목숨이다. 나는 어떤 씨를 퍼뜨릴까? 내 자식들은?

어제 저녁 큰애가 “오늘 하루를 보내며 내가 네 사람이 된 것 같아. 엄마 오른팔, 동생과 엄마 사이 중재자, 나 자신, 일꾼 이렇게 넷”이라고 한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스스로 힘으로 해낸 하루였단다. 큰애 하루는 이랬다. 아침에 동생이 마당에서 축구를 하다 그 공이 텃밭으로 굴러가 토마토를 쳤다. 엄마는 그걸 보고, 텃밭에 그물을 쳐야겠다고 그물을 끌고 오다 도랑에 발이 빠지고. 동생은 공을 높이 차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고 속상해하고.

그걸 보던 큰애가 나섰다. “그럼, 이 누나가 축구장을 새로 만들어줄게.” 사실 아무 계획 없이 말했는데, 집 옆 공터가 떠올랐고. 그 주인에게 달려가 허락을 받고, 무성하게 자란 풀과 아카시아 나무를 베고, 말뚝 박아 그물 씌워 축구 골대 만들 준비하고. 내친김에 도랑을 건너는 다리도 새로 만들고. 그렇게 움직이다 들어오니, 책상에 톨킨 원서. 그동안 읽고팠지만 미루곤 했는데. 생각과 달리 술술 읽히고. 저녁에는 비 오시니 아궁이에 군불 지피면서, 오른팔을 다친 엄마의 오른팔이 되어, 배추 뽑아 절이고 들어왔단다. 공부도 일도 놀이도 맘먹은 대로 한 하루. 자기 안에 있는 힘을 충분히 살린 하루였나 보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자연은 자기 자신이리라. 나를 만든 씨, 그러니까 유전자 속에 얼마나 많은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을까? 내 씨를 받은 우리 아이들. 자라나 어떤 씨를 맺을까?

2/5
글: 장영란 odong174@hanmail.net
목록 닫기

내가 기르는 작물은 내 삶의 거울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