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강태공 고건, 때를 기다리며 바람을 낚다

“나는 아직 나를 해금하지 않았다”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12-24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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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건 전 총리는 묵언수행 중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연일 언론에 오르내려도 정치에 대한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게 이유다. 여야 정치권에서는 그의 인기를 ‘거품’이라며 평가절하 하고 있다. 그의 인기는 스치고 지나가는 ‘계절풍’에 불과한 것일까.
    강태공 고건, 때를 기다리며 바람을 낚다

    고건 전 총리가 2004년 12월11~12일 ‘동숭 포럼’ 회원들과 함께 제주바다에서 낚은 대어(부시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12월14일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뒤편에 위치한 커피숍 ‘모짜르트’. 고건 전 총리가 20여년째 참석하고 있는 ‘동숭 포럼’ 모임 장소다. 고 전 총리가 공직에 있을 때는 매주 일요일에 모였지만, 그가 공직을 떠난 요즘은 거의 매일 모인다. 회원은 대부분 한동네 사람들이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자 모임 회원으로 보이는 노신사 한 분이 들어섰다. 터줏대감들의 자리는 커피숍 중앙에 위치한 원탁형 테이블. 기자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며 자리를 내줬다.

    잠시 후 노년의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세중 변호사, 정경균 서울대 명예교수, 정문호 보건대학원장, 전직 사업가 손기정, 신현규씨 등 대부분 환갑을 훌쩍 넘은 사회 인사들이었다. 그 외에도 모 은행 동숭동 지점장이 자리에 함께했다. “회원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인사차 찾아뵙는다”고 했다.

    대화 화제는 지난 주말 회원 5명이 제주도로 다녀온 낚시얘기에 모아졌다. 한 회원이 휴대전화에 장착된 카메라로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고 전 총리가 1m 남짓한 대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고 전 총리의 사진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모임 회장인 이세중 변호사가 “고 총리가 요즘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데 본인에게 한번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조금만 기다려보라”며 양해를 구했다.

    고 전 총리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변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 전 총리의 인기가 왜 이렇게 높다고 보시는지.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나 사회를 보면 갈등과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잖아. 그래서 경륜이 있고 화합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욕구가 작용하는 것 같아.”

    다른 분이 말을 거들었다. “솔직히 나 개인적으로서는 지금 젊은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불만이야. 하지만 거기(청와대) 몸담았던 사람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는 않아. 괜히 입장 곤란해질까 봐.”

    모임은 철저히 회비로 운영된다. 초기에는 한 사람당 매달 10만원씩 회비를 내다가 그 돈이 쌓여 지금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회비를 걷지 않는다고 한다. 한창 대화를 나누는데 고 전 총리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이 변호사가 기자를 대신해 고 전 총리에게 청을 넣었다. “낚시 가서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한 장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요.” “그거야 사진 임자 마음이지, 내 마음인가. 한 장은 내가 들고 있는 거고, 한 장은 안고 있는 거지? 고기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고 안고 있는 거니까….” 간접적으로 승낙한 셈이었다.

    “장이 섰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시가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본인이 고문으로 있는 한 월간지 신년호가 들려있었다. 김 전 의장은 그 책 겉표지 뒤편에 실린 글을 자신이 직접 썼다며 지점장에게 낭독하게 했다. 그 글에는 김 전 의장이 고 전 총리와 모임 회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는 듯했다.

    김 전 의장의 ‘새해 새 아침을 맞으며’라는 제목의 글 중 일부다.

    ‘정치란 복잡한 연립방정식을 풀어가는 작업이다. 자기 두뇌를 쥐어짜며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런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정치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를 보면 정치라는 연립방정식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골똘히 풀어가려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중략) 우리의 정치경제 현실이 심히 걱정스럽다. 혹 우리를 이끌고 있는 이 나라 정권이 연립방정식을 푸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우리네 여야정당이 연립방정식을 푸는 묘미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당의 힘이 없어지면 이 틈바구니에 독재의 마수가 끼어든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체험해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꿈도 있고, 지옥도 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정치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새해 새 아침을 맞으면서 내 나라의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 이 사람뿐이랴.’

    현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정치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고 전 총리에게 대놓고 뭐라 말할 수 없어 글로 대신한 것일까. 대화의 화제는 곧 낚시 이야기로 돌아갔다. 김 전 의장이 “나한테 가져온 것은 누가 잡은 거야”라고 묻자, 고 전 총리가 위트 있게 받았다. “아마 그건 제가 잡은 것쯤 될 겁니다.”

    11시 무렵이 되자 한두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 전 총리도 앞서 나갔다. 기자는 뒤따라 일어서려는 김 전 의장을 잠시 붙잡았다. 오랜 기간 고 전 총리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봐온 김 전 의장이 고 전 총리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 듯싶었다.

    -고 전 총리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데요, ‘고건 신드롬’ ‘고건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정권이 너무 왼편으로 가서 중도 쪽으로 오려는 분위기에서 나온 이야기 아닌가. 나는 그렇게 봐. 너무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제자리에 옮겨놓으려는 민심의 방향이라고. 국민이 고 총리를 거기에 가장 적임자로 보는 것 같아. 너무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니까.”

    -여러 면에서 선배신데, 고 전 총리께 조언을 한다면.

    “가만히 있어라. 잠자코 있어라.”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까.

    “그 말도 되지만, 미리 두각을 나타내는 게 좋은 일이 아니거든. 우리나라 정치가 작은 배처럼 너무 호들갑을 떠니까, 거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지.”

    -나라가 어려운데 언제까지 침묵만 지키는 건 조금 무책임한 것 아닐까요.

    “힘쓸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지. 공자 말씀에 그 자리에 없으면 뭐라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

    -고 전 총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최고 수준의 관리지. 청렴하고, 인간이 됐지.”

    -행정과 정치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많이 다르지. 정치는 떼거리가 있어야 돼. 말하자면 세(勢)가 있어야지, 그게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어.”

    -그렇다면 고 전 총리는 정치하기 어렵겠네요. 세가 없으니까.

    “또 모르지. 바람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바람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나는 모르겠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최근 고 전 총리는 확실히 국민적 신망과 더불어 ‘바람’을 잡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연일 고 전 총리와 관련된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고 전 총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기사거리다. 어디에서 뭘 먹고 마시며 어떤 책을 읽는지, 하루 일상은 어떤지 등. 본인도 굳이 이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동숭 포럼 회원들과 다녀온 낚시 사진을 선뜻 허락한 것만 봐도 그렇다.

    2002년 12월 대선이 치러진지 2년 남짓 지났다. 다음 대선까지는 지나온 날보다 남은 날이 더 많다. ‘고건 신드롬’ 또는 ‘고건 현상’으로 불리는 이 바람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정치권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야 모두 마찬가지다.

    “고건은 개싸움 하기 싫어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고 전 총리와 함께 참여정부를 이끌던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은 고 전 총리의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국민이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권위주의와 제왕적 대통령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노 정부는 탈권위에는 성공했는데 뭔가 불안하고 효율성도 떨어지는 것처럼 비치고 있거든.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에 대한 반발심리가 안정감과 행정적 효율성을 찾게 만드는데, 그 두 가지를 보완하는 상(像)으로 고 전 총리만한 인물이 없죠. 고 전 총리는 도덕성을 겸비한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이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으니 노 정권과 적이 아니면서 불안하지 않다는 게 장점이죠.

    하지만 다음 대선에서 후보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요. 그의 성격 때문이죠.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개싸움 하기 싫어하는 거죠. 이제 시대가 변했어요. 아무리 뛰어난 고 전 총리라 해도 경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돼요. 민주적 리더십은 경쟁이 필요한데, 문제는 고 전 총리가 그런 것에 결정적으로 약하다는 겁니다. 약점치고는 너무나 결정적이죠. 정계가 요동을 쳐서 아주 혁명적 변수가 생겨나 어떤 정치집단에서 추대한다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은 고건 현상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고 전 총리에 대한 인기가 높은 것은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그러면서도 고 전 총리에 대한 국민적 인기를 ‘거품’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한나라당 김형오 사무총장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에는 이미 대선 주자군이 있기 때문에 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노무현 정부의 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한다는 것도 상정하기 어려운 경우의 수”라며 “조금 먼 이야기지만 현 정치구도에서 고 전 총리가 특정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지금은 인기가 높을지 모르지만 막상 대선 정국에 돌입하면 ‘거품’이 빠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건 ‘추대’ 카페 12개 활동

    민주당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한화갑 대표 등 당 지도부는 어떤 식으로든 고 전 총리를 영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밑 접촉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한 핵심 관계자는 “고 전 총리가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느냐”며 “열린우리당에 입당할 경우에는 ‘원 오브 뎀(one of them)’, 즉 여러 대선주자군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이 뻔해 득보다는 실이 많은 반면, 민주당에 입당하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상대가 없어 득이 많다”고 분석했다. 고 전 총리의 결단을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든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고건 대통령 만들기 희망 운동본부’ ‘고건 대통령 만들기’ ‘고사모(고건을 사랑하는 모임)’ ‘고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고건 사랑’ ‘고사모 화이팅’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 고건 사랑방’ 등 사이트마다 6~7개로 현재 확인된 것만 모두 12개의 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 회원수 5~6명에 불과하고, 회원수가 가장 많은 카페도 200명이 채 안 된다. 정치권의 해석처럼 한순간 스치고 지나갈 바람일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이 카페들은 모두 자생적이다.

    고 전 총리는 오해를 살 여지를 없애기 위해 공식적인 자신의 홈페이지를 폐쇄한 상태다. 그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깃발을 올릴 경우에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때를 고 전 총리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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