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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고건, 때를 기다리며 바람을 낚다

“나는 아직 나를 해금하지 않았다”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강태공 고건, 때를 기다리며 바람을 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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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건 전 총리는 묵언수행 중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연일 언론에 오르내려도 정치에 대한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게 이유다. 여야 정치권에서는 그의 인기를 ‘거품’이라며 평가절하 하고 있다. 그의 인기는 스치고 지나가는 ‘계절풍’에 불과한 것일까.
강태공 고건, 때를 기다리며 바람을 낚다

고건 전 총리가 2004년 12월11~12일 ‘동숭 포럼’ 회원들과 함께 제주바다에서 낚은 대어(부시리)를 들어보이고 있다.

지난12월14일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뒤편에 위치한 커피숍 ‘모짜르트’. 고건 전 총리가 20여년째 참석하고 있는 ‘동숭 포럼’ 모임 장소다. 고 전 총리가 공직에 있을 때는 매주 일요일에 모였지만, 그가 공직을 떠난 요즘은 거의 매일 모인다. 회원은 대부분 한동네 사람들이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자 모임 회원으로 보이는 노신사 한 분이 들어섰다. 터줏대감들의 자리는 커피숍 중앙에 위치한 원탁형 테이블. 기자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며 자리를 내줬다.

잠시 후 노년의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세중 변호사, 정경균 서울대 명예교수, 정문호 보건대학원장, 전직 사업가 손기정, 신현규씨 등 대부분 환갑을 훌쩍 넘은 사회 인사들이었다. 그 외에도 모 은행 동숭동 지점장이 자리에 함께했다. “회원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인사차 찾아뵙는다”고 했다.

대화 화제는 지난 주말 회원 5명이 제주도로 다녀온 낚시얘기에 모아졌다. 한 회원이 휴대전화에 장착된 카메라로 찍어온 사진을 보여줬다. 고 전 총리가 1m 남짓한 대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고 전 총리의 사진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러자 모임 회장인 이세중 변호사가 “고 총리가 요즘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데 본인에게 한번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조금만 기다려보라”며 양해를 구했다.

고 전 총리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변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 전 총리의 인기가 왜 이렇게 높다고 보시는지.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나 사회를 보면 갈등과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잖아. 그래서 경륜이 있고 화합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욕구가 작용하는 것 같아.”

다른 분이 말을 거들었다. “솔직히 나 개인적으로서는 지금 젊은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불만이야. 하지만 거기(청와대) 몸담았던 사람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는 않아. 괜히 입장 곤란해질까 봐.”

모임은 철저히 회비로 운영된다. 초기에는 한 사람당 매달 10만원씩 회비를 내다가 그 돈이 쌓여 지금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회비를 걷지 않는다고 한다. 한창 대화를 나누는데 고 전 총리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이 변호사가 기자를 대신해 고 전 총리에게 청을 넣었다. “낚시 가서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한 장 받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요.” “그거야 사진 임자 마음이지, 내 마음인가. 한 장은 내가 들고 있는 거고, 한 장은 안고 있는 거지? 고기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고 안고 있는 거니까….” 간접적으로 승낙한 셈이었다.

“장이 섰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시가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본인이 고문으로 있는 한 월간지 신년호가 들려있었다. 김 전 의장은 그 책 겉표지 뒤편에 실린 글을 자신이 직접 썼다며 지점장에게 낭독하게 했다. 그 글에는 김 전 의장이 고 전 총리와 모임 회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는 듯했다.

김 전 의장의 ‘새해 새 아침을 맞으며’라는 제목의 글 중 일부다.

‘정치란 복잡한 연립방정식을 풀어가는 작업이다. 자기 두뇌를 쥐어짜며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런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정치인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를 보면 정치라는 연립방정식의 어려움을 깊이 이해하고, 골똘히 풀어가려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중략) 우리의 정치경제 현실이 심히 걱정스럽다. 혹 우리를 이끌고 있는 이 나라 정권이 연립방정식을 푸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우리네 여야정당이 연립방정식을 푸는 묘미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당의 힘이 없어지면 이 틈바구니에 독재의 마수가 끼어든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체험해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꿈도 있고, 지옥도 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정치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새해 새 아침을 맞으면서 내 나라의 정치를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 이 사람뿐이랴.’

현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정치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고 전 총리에게 대놓고 뭐라 말할 수 없어 글로 대신한 것일까. 대화의 화제는 곧 낚시 이야기로 돌아갔다. 김 전 의장이 “나한테 가져온 것은 누가 잡은 거야”라고 묻자, 고 전 총리가 위트 있게 받았다. “아마 그건 제가 잡은 것쯤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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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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