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당시 서울대 의대 해부학 교수로 있던 이명복 박사의 연구실이었다. 교수님은 내 외모를 관찰하고는 맥을 짚더니 태양인 체질이라면서 손과 발 몇 군데에 침을 놓았다. 침을 맞으면서 ‘나를 두들겨 팬 수사관은 데모 체질이라면서 병을 주더니, 이 의사는 나를 태양 체질이라면서 약을 주는구나. 그놈의 체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교수님의 체질침 치료를 한 달 넘게 받으면서 내 허리는 정상이 되었다. 또 기존 한의학이나 서양의학에서 고치지 못한 난치병들을 치료해나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환자가 ‘사상체질’로 나뉘고 음양오행에 맞춰 손발에 몇 개의 침을 맞는 것만으로 치유된다는 것이 너무도 신비로웠다. 이는 대학에서 배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나 열역학의 엔트로피 법칙보다도 훨씬 더 재미있고 실감나는 진리였다.
그 후 나는 이 교수의 특별한 배려로 체질침을 배울 수 있었는데, 마치 내가 전생에서 하고자 했던 일처럼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다. 결국 데모하다가 다친 허리를 고치려고 명의를 찾던 중 이명복 교수님을 만나서 침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코리안 침술도사’, 의대 들어가다
-공대를 졸업하면 회사에 취직해서 월급쟁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남미의 브라질까지 가게 되었는가. 그곳에서 의과대학에 들어간 까닭도 궁금하다.
“졸업 후 대학 동창들이 취직을 하거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유학을 떠날 무렵, 나는 무면허의 돌팔이 침쟁이가 되어버렸다. 돈화문 비원 앞에 6평짜리 사무실을 얻어서 침술원을 차린 것이다. 무면허였지만 환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치료를 곧잘 하면서 체질침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을 내가 고칠 수 있다는 데 희열을 맛보았고 인체의 오묘한 신비에 전율을 느꼈다. 내겐 아주 즐거운 일이었지만 가족이나 친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명문대학을 나와서 돌팔이 침쟁이가 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결혼적령기였지만 무면허 침쟁이에게 딸을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급기야 식구들이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한의학과가 최고 인기학과이고 사회적인 인식도 좋지만 1970년대 초반만 해도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그리 높지 못했다. 그 무렵 경희대에 한의학과가 생겨 학사편입을 시도했지만 온 가족이 반대하는 데다 학사편입이 쉽지 않았다.
때마침 브라질 상파울루 공대에 계시던 선배 교수로부터 화공과 졸업생 한 명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 문득 인생길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1976년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막상 브라질에 도착하니 지도교수가 부인의 건강 문제로 한국에 돌아가고 없었다. 그 바람에 대책 없이 홀로 브라질에 남게 됐다. 지도교수도, 장학금도 없었기에 대학원에 휴학계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는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상파울루 시내 한복판에 셋집을 얻어 침술원을 차렸다. 비원 앞 상황으로 돌아간 셈이다. 셋집을 얻고 남은 돈으로 상파울루 일간지에 지하철 승차권 크기만한 광고를 냈다. ‘코리아에서 침술도사가 오셨으니 요통, 관절염, 신경통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신비한 동양의 침술로 구제를 받을지어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조상님 덕분인지 하느님 은총인지 몰라도 하나 둘씩 브라질 사람들이 찾아왔고, 효과를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다른 손님을 데려왔다.
상파울루는 세계 3대 도시로 인종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여러 인종이 섞여 산다. 환자들 중에는 이탈리아계, 독일계, 포르투갈계, 유대인, 아랍인, 흑인 그리고 동양인이 두루 섞여 있었지만, 그들을 사상체질에 따라 분류 치료하면 반드시 일정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언어와 종족은 다르지만 ‘사상체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만난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개업하고 6개월이 지날 무렵 월수입이 수천 달러를 웃돌았다. 1977년 당시 한국의 기술자 월급이 200달러가 못되던 시절이었다. 월수 수천달러면 브라질에서도 고소득층에 속했다. 남자가 몸 건강하고 돈 많으면 뭘 하겠는가. 뻔하지 않은가. 밤거리의 나이트클럽을 유람하는, 말하자면 상파울루의 오렌지족 생활을 했던 것이다.”
-산토스 의과대학에는 쉽게 입학할 수 있었나?”
“1년 넘게 오렌지족처럼 지냈지만, 밤 생활의 즐거움보다는 체질의 신비가 진정 더 매력적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래, 체질을 연구해 보자. 그러러면 인체를, 아니 의학을 알아야 한다. 서양의학이 체질 연구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한번 공부나 해보자.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그 달부터 입시 참고서와 1년 동안 씨름했다. 마침 산토스 의과대학에서 시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습 삼아서 응시했다. 경쟁률이 60대1이나 되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며칠 후 집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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