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금강산이 어드메뇨, 바위들의 축제 속에 설악 삼매경 빠져든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12-28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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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청봉 정상에 올라서니 발 아래 설악이 펼쳐진다. 부드러운 여성의 몸짓을 닮은 내설악, 불쑥 솟아오른 남성의 혈기가 느껴지는 외설악, 고행에 나선 스님의 행렬처럼 엄숙한 남설악.
    • 산 그림자는 동해바다로 스며들고, 저 멀리 한계령은 이제 내려가라 지친 어깨를 떠민다.
    금강산이 어드메뇨, 바위들의 축제 속에 설악 삼매경 빠져든다

    대청봉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설악산국립공원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하여 ‘설악산 전투’다. 1951년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국군 제11사단과 수도사단은 인민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과 밀고 밀리는 사투 끝에 지금의 양양과 간성지역을 탈환했다.

    그 뒤 국군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 때 대관령과 강릉지역으로 후퇴해 설악산을 최후 방어선으로 활용했고, 휴전협정을 앞두고 다시 설악산 지구를 회복했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세 차례의 대접전 끝에 설악산을 지켜내고 산화한 사람 중에는 이름도, 군번도 확인할 수 없는 군인이 유난히도 많다. 하여 설악산 외설악 입구인 소공원에는 이들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비가 남아 있다.

    설악산은 휴전선 남쪽에서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고, 산세가 금강산 못지않게 빼어나 오래 전부터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려왔다. 수많은 무명용사의 죽음을 대가로 남쪽의 수중에 들어온 설악산.

    그러나 남쪽 사람들의 설악산에 대한 애정은 늘 불완전한 것이었다. 마음은 금강산에 가 있으면서 설악산을 통해 대리만족을 즐겼다고나 할까? 설악산 마니아조차 “설악이 이 정도면 금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아쉬움을 내비치곤 한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쪽 사람들은 분단 반세기 만에 금강산을 직접 만나게 됐다. 최근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 중에는 설악산을 한수 아래로 평가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들의 눈에 설악산은 예나 지금이나 금강산보다 한참 밑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현재의 금강산 관광은 일종의 전시용 상품에 불과하다. 시간에 따라 느낌에 따라 각도에 따라 수만 가지 형상으로 변신하는 금강산을, 정해진 시간에 그것도 누군가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봐서야 어찌 제대로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이유로 필자는 금강산을 조급하게 훑기보다 설악산을 여유 있게 감상하는 쪽을 택했다.



    설악산은 크게 남설악 내설악 외설악으로 구분된다. 남설악은 한계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점봉산, 오색약수터 주변의 계곡, 대청봉 남쪽의 등산로 등을 일컫는다. 내설악과 외설악은 대청봉에서 마등령을 지나 미시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의 양편을 지칭한다. 즉 능선의 안쪽 내륙이 내설악이고 동해바다와 맞닿은 바깥쪽이 외설악이다. 백담사에서 오세암이나 수렴동을 지나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내설악이 부드러운 여성의 몸짓이라면, 울산바위와 비선대가 우뚝 솟아 있는 외설악은 뜀박질하는 남성을 연상케 한다.

    설악산 3위 일체의 진수

    남설악과 외설악 그리고 내설악은 서로 이어져 한울타리를 이루면서도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설악산 마니아는 한곳에 머무르기보다 내설악에서 외설악으로, 남설악에서 외설악으로 넘어가는 코스를 즐긴다. 이렇게 걷다 보면 한 번의 산행으로 두 가지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종주코스가 대중화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았다는 설악산이지만, ‘내·외·남 3위 일체’의 진수를 제대로 체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필자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주능선을 먼저 타고 내설악과 외설악을 차례로 둘러보기로 했다. 첫 번째 산행은 한계령을 출발해 대청에 오른 뒤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을 거쳐 미시령으로 빠져나가는 코스다. 이번 산행에는 ‘신동아’ 종주기를 읽고 백두대간 종주계획을 세운 정태웅 선생과 대학후배 2명이 동참했다.

    2004년 11월7일 새벽 동서울터미널.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시간에 버스는 출발했다. 해뜨기 직전의 한강은 가로등 불빛에 붉게 젖어 있었고, 추수를 끝낸 들녘 너머 농가의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버스는 홍천강가의 휴게소에서 잠시 멈췄다.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했다는 후배는 옛일이 떠오르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나 강원도 산골에서 군복무를 했으니 그 심정을 헤아릴 만도 하다. 버스는 인제와 원통을 지나 한계령으로 향했다. 강원도에서도 인적이 드문 오지여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하나’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군사지역이다.

    대청봉 가는 길

    한계령이다. 남설악의 관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다. 불과 2주 만에 다시 찾았지만 풍광은 사뭇 달랐다. 단풍은 거의 사라지고 산자락엔 낙엽이 수북하다. 휴게소에서 산채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계단으로 붙었다. 멀리 점봉산과 망대암산이 눈에 들어왔다. 2주 전 무척이나 애를 먹였던 봉우리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 있다.

    한계령에서 1시간 정도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힘깨나 써야 한다. 숨소리가 거칠어질 무렵 1310m봉을 지나쳐 고갯마루에 이르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암릉구간이 남설악의 백미로 꼽힌다. 왼편으로는 내설악의 기암괴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으로는 남설악과 외설악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다.

    오랜만에 산행에 나선 후배의 페이스에 맞추다 보니 속도가 떨어졌다. 후배는 쉬었다 가자며 자주 발걸음을 멈추었으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대피소까지 가려면 마냥 쉬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없이 후배의 고통을 모른 척하며 걸음을 내쳤다. 왼편으로 불쑥 솟구친 귀때기청봉(1577.6m)을 지나 3시간쯤 걸어가면 끝청(1604m)이다. 여기서부터 중청(1676m)을 거쳐 대청(1707.9m)으로 가는 길은 밋밋한 고원지대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중청의 정상 부근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접근할 수 없으나 산허리를 끼고 중청대피소 쪽으로 내려서다 보면 설악산의 명물 공룡능선과 동해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 나온다.

    중청대피소 주변에서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발걸음이 무뎌진 후배가 이곳에서 자고 가면 안 되겠냐며 투정을 부렸다. 안 될 거야 없지만 다음날 산행스케줄을 감안하면 좀더 나아가야 했다. 후배를 앞세우고 대청으로 향했다. 중청대피소에서 대청으로 가는 오르막은 아고산대 특유의 식생이 분포하는 지역이어서 등산로 양옆에 가이드라인이 설치돼 있다.

    설악산의 정상 대청봉이다. 지리산 천왕봉(1915m)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천왕봉에 서면 끝없이 이어지는 남도의 산자락을 굽어볼 수 있고 대청봉에 서면 바다로 스며드는 산 그림자를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대청봉은 내·외·남설악이 갈리는 분기점으로 이곳에 올라서야만 비로소 설악산 전체의 윤곽을 살필 수 있다. 대청봉에서 내설악으로 향하려면 소청산장이나 중청대피소를 이용하고, 외설악으로 가거나 주능선을 타려면 희운각대피소에 묵는 것이 좋다. 위급한 경우에는 대청봉 최단코스인 남설악의 오색약수터로 하산할 수도 있다.

    희운각대피소의 저녁식사

    지도에는 대청봉을 조금 지나친 곳에서 희운각대피소로 이어지는 코스가 있다. 하지만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대청봉 조금 못미친 지점에서 죽음의 계곡을 따라 희운각대피소로 내려선다. 필자도 어느 길로 갈까 잠시 고심하다가 대구에서 온 단체 종주자(대구 K-2산악회)들을 따라 죽음의 계곡 코스로 향했다. 이곳은 해가 비치지 않는 응달이어서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아이젠을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일몰이 시작되면서 설악산에서만 볼 수 있는 바위들의 축제가 시작됐다. 왼편의 공룡능선은 일찌감치 어두워졌지만 오른편의 천불동 암릉은 시시각각 미세한 색감의 변화를 보였다. 천변만화(千變萬化)라고 할까. 몇 발짝 걷다가 바라보면 조금 전과 어딘가 다른 느낌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나무들이 빛을 잃은 탓인지 바위만 보이는 천불동은 풍경화보다는 수묵산수화에 가까웠다. 앞서 걷던 후배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연상된다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탓에 늦게까지 태양 빛을 빨아들이는 울산바위는 다른 바위들이 색감을 잃은 뒤에도 계속 반짝거리며 설악의 저녁축제를 빛내주었다.

    사방이 어두워질 무렵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했다. 이곳은 필자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 함께 설악산을 올랐다가 비 내리는 밤에 길을 잃고 가까스로 찾아든 곳이 바로 희운각대피소였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김치찌개를 끓이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우리도 한쪽 구석에 좌판을 벌였다. 오늘의 메뉴는 삼겹살이다. 고기가 익기도 전에 술잔이 오갔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뚝 떨어진 탓에 소주를 삼킬 때마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열기가 더없이 편안했다. 가져온 소주가 다 떨어진 뒤에는 필자가 직접 담근 복숭아주를 돌렸고, 그 다음엔 발동이 걸린 정 선생과 후배가 대피소에서 소주를 샀다. 술기운이 얼근히 돌 무렵 여자 후배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1980년대 초반 양희은이 불렀던 ‘한계령’이다. 설악산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네.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네.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남자 후배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번엔 필자가 대학시절 어지간히 좋아하던 민중가요 ‘꽃다지’다. 필자는 이따금씩 집회장소나 공연장을 지나치면서 이 노래를 듣는데, 그때마다 소중한 기억들을 너무 빨리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이날 밤도 그랬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연거푸 소주잔을 비웠다.

    금강산이 어드메뇨, 바위들의 축제 속에 설악 삼매경 빠져든다

    봉정암 사리탑.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나 오늘 밤 캄캄한 창살 아래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정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필자가 답가를 부를 차례. 설악산 골짜기에서 달빛을 안주삼아 술잔을 나누는 이 마당에 필자는 뜬금없이 서해바다의 연락선과 갈매기를 떠올렸다.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을 시키면 짬뽕이 먹고 싶고, 짬뽕을 먹으면서 자장면을 그리워하는 격이다. 허나 어쩌랴. 취기가 오를수록 눈앞에 자꾸만 서해바다의 노을이 아른거리는 것을.

    ‘눈물에 옷자락이 젖어도 갈 길은 머나먼데, 고요히 잡아주는 손 있어 서러움을 더해준다. 저 사공이 나를 태우고 노 저어 떠나면, 또 다른 나루에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암릉산행의 압권, 공룡능선

    희운각대피소는 희한한 곳이다. 겉보기에는 30명쯤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악천후 때 보면 200명까지 수용한다. 자다 보면 얼굴에 누군가의 발이 올라오고 생면부지의 이성과 얼굴을 마주하게도 된다. 다행히도 간밤엔 불쑥 찾아든 등산객이 없어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새벽 3시경, 밖으로 나오니 벌써 길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찌감치 대청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서둘러 내려갈 계획이란다.

    저녁에 섞어 마신 술이 탈을 일으켰다. 두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는데도 속이 편치 않았다. 이제 더 눈을 붙이긴 틀렸고 나무식탁에 앉아 배를 주무르는데 별들이 촘촘히 늘어선 밤하늘이 간밤의 여운을 또 한번 자극했다. 별을 보며 대청봉에 올라 해맞이를 하고 싶은 욕심이 꿈틀댔다. 그러나 오늘 가야 할 대간 길은 대청봉과 반대 방향이다.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정 선생과 후배들을 깨웠다. 후배들은 예서 곧장 천불동으로 하산하고 정 선생만 필자와 동행하기로 했다. 산중이별이었다.

    새벽 5시40분. 해가 뜨려면 30여분 더 기다려야 하지만 구간거리가 만만치 않음을 감안해 일찌감치 배낭을 꾸렸다. 희운각대피소에서 공룡능선으로 진입하는 길은 애매하다. 그래서 앞서 달리지 않고 일단 대구 K-2산악회 회원들을 뒤따르기로 했다. 50대 초반의 아주머니와 10대 초반의 중학생까지, 어둠 속에서 가파른 벼랑을 타고 오르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지칠 만하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힘을 돋우는 모습도 더없이 정겨웠다.

    공룡능선. 이 얼마나 짜릿하고 가슴 설레는 구간인가. 설악산을 찾는 사람은 울산바위에서 한 번, 대청봉에서 한 번, 그리고 공룡능선에서 한 번 가슴이 툭 터지는 희열을 맛본다. 그중 압권은 역시 공룡능선으로, 3시간 넘게 이어지는 가파른 암릉에 몸을 맡기다 보면 설악산 특유의 날렵함에 자신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물론 악천후 때는 매우 위험한 코스로 잊을 만하면 한번씩 조난사고가 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공룡능선을 넘다 보면 산꾼의 내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어지간한 산꾼이라도 공룡능선을 통과할 때는 몇 번씩 한숨을 내쉬게 되기 때문이다. 공룡의 등뼈가 워낙 깊고 굵어 되돌아가는 일도 버겁다. 등산객 대다수가 준봉의 구멍 또는 사잇길을 찾아 줄에 매달리고 바위에 납작 엎드리며 난코스를 통과하는 사이, 고수들은 능선의 양편에 우뚝 솟은 봉우리까지 훌쩍 올라선다.

    공룡능선에 관한 무용담은 주로 이런 선수들에 의해 만들어져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부럽다고 무작정 따라할 일이 아니다. 필자가 수차례 경험한 바 공룡능선은 그냥 등산로를 따라가기에도 벅찬 길이다.

    함께 산을 탄다는 것

    공룡능선이 거친 숨을 내쉬다가 조금씩 호흡을 가다듬는 나한봉 부근에서 등산객들은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야 한다. 여기서는 앞 사람이 완전히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자칫 앞사람이 산마루에 도착하기 전에 뒷사람이 줄을 잡아끌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서다. 정 선생과 필자는 뒤편에서 앞사람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절벽 한중간에 매달린 아주머니 한 분이 전진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열심히 찾더니 갑자기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니 내 사랑하나 안 하나? 사랑 안 하믄 밧줄 콱 놔부릴 끼다.” 남자가 웃으면서 받았다. “장난하지 마라. 퍼뜩 올라가라.” 이에 뒤질 여인이 아니었다. “장난 아이다. 내 사랑하나 안 하나? 빨리 말해라.” 이번엔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드라마 고만 찍고 얼른 가라.” 그러자 여인이 몸을 좌우로 흔들며 마지막 위협을 가했다. “니 참말로 사랑 안 한다 그 말이제?” 밧줄이 출렁거리자 여인의 몸도 절벽 양옆으로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결국 남자가 항복을 선언했다. “고만 알았다. 니 사랑한다.” 그제야 여인은 날렵하게 몸을 솟구쳐 산마루에 내려앉았다.

    금강산이 어드메뇨, 바위들의 축제 속에 설악 삼매경 빠져든다

    오세암.

    잠시 후 필자와 정 선생이 산마루에 도착하자, 방금 전 1970년대 스타일의 애정영화를 찍던 중년의 부부는 사과를 입에 물고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3시간의 고행 끝에 공룡능선을 통과해 마등령에 도착했다. 마등령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내설악의 오세암이고 오른편으로 가면 외설악의 금강굴을 지나 비선대에 닿는다. 그래서 마등령은 내설악에서 외설악으로, 외설악에서 내설악으로 넘어가는 등산객이 쉬어가는 고개로 알려져 있다.

    필자보다 앞서간 대구 K-2산악회 선발대가 마등령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필자가 건포도를 나눠주자, 아주머니 한 분이 사과 반쪽을 건넸다. 필자는 반쪽을 다시 반으로 쪼개 정 선생에게 주었다. 이처럼 산속에서는 나눔의 기쁨이 배가 된다.

    배낭을 풀고 다리를 주무르는 산악회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백두대간을 타세요?” 그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새겨들을 만했다. “그냥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필자도 그렇다. 백두대간을 출발할 때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지만, 막바지에 다다르면 어느 한순간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게 산의 매력이고, 자연의 교훈이다.

    마등령에서 저항령으로 가자면 1249.5m봉을 지나야 하는데, 마루금이 험난해 등산객들은 대부분 이곳을 왼편으로 우회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도 긴 너덜지대(돌이 많이 깔린 비탈)라서 만만치 않다. 지도상으로는 마등령-저항령 구간이 2시간 거리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걷다 보면 더 걸리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이 구간에서 또다시 배탈이 나 애를 먹었다. 속이 편치 않은 상태에서 새벽부터 무리하게 달린 것이 원인이었다. 할 수 없이 정 선생을 앞서 가게 하고, 고개를 넘어설 때마다 수풀에 거름을 뿌리며 속을 가라앉혔다.

    1249m봉을 지나 긴 오르막을 넘어서면 아래쪽으로 저항령이 보인다. 여기서 내려가는 구간도 너덜지대라서 조심해야 한다. 특히 여기쯤 오면 다리에 힘이 풀리기 때문에 발을 옮길 때 관절을 다치기 쉽다. 저항령은 희운각-미시령 당일 종주자들이 쉬면서 점심을 먹는 장소다. 정 선생과 필자는 오이와 소시지로 간단히 요기하고 황철봉(1381.m)으로 향했다. 그러나 속이 불편한 상태에서 먹은 음식이 또다시 탈을 일으켰다. 이번엔 상태가 심해서 구토 증세까지 나타났다. 어쩔 수 없이 정 선생께 양해를 구하고 뒤로 처졌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 한마디로 악전고투다. 필자는 황철봉 정상 부근에서 아예 배낭을 풀어놓고 10분 이상 아랫배를 문질렀다. 그랬더니 조금씩 회복되는 기미가 느껴졌다.

    악전고투, 미시령 가는 길

    페이스를 만회하고자 속도를 높였다. 1318.8m봉에 이르자 정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 선생은 물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필자는 정 선생께 물을 나눠주고 잠시 쉬다가 함께 일어섰다. 여기서부터가 백두대간에서 가장 긴 너덜지대로 알려진 구간이다. 어찌나 바위가 많은지 화산지대를 연상케 한다. 필자는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방귀가 나왔다. 설사기운이 가라앉으면서 몸속의 가스가 배출되는 모양이었다. 정 선생도 다리가 아픈지 내려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우리는 멀리 미시령휴게소가 보이는 산 중턱에서 퍼질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 선생은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산을 탄 것은 최근이지만, 그의 발걸음을 보면 초보 수준은 아니다. 정 선생은 필자의 종주에 두 차례 동참한 강원도 동해시의 박 선생 덕에 용기를 내어 백두대간 종주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혼자서 종주하려니 부담스럽던 차에 박 선생이 종주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얘기를 읽고, 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던 것이다. 베테랑 산꾼 박 선생과 나이 들어 산의 묘미를 발견한 정 선생이 함께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다면, 뜻 깊은 여정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침내 미시령이다. 이 고개 위로는 강원도 인제 원통과 속초 간성을 연결하는 56번 도로가 지난다. 먼저 도착한 대구 산악회 회원들이 맥주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정 선생은 정말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며 속초의 대포항으로 가서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자리를 마다할 필자가 아니지만 이날따라 뱃속이 산해진미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다. 정 선생께 또 한번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고 서둘러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필자는 버스 안에서 캔맥주와 김밥으로 무사완주를 자축했다. 젊은 나이에 경제적 성공을 거두고 40대부터 인생을 즐기는 정 선생의 여유와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11월13일 저녁 동서울터미널에서 원통행 막차를 타고 원통에서 택시로 갈아타 내설악 입구인 용대리에 도착했다. 이번 산행엔 어머니가 따라나섰다. 필자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라서 유명한 절이 있는 산들을 자주 다니는데, 그중 설악산 내설악을 가장 많이 찾았다. 이곳에 백담사-오세암-봉정암으로 이어지는 고찰들이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어머니가 내설악을 잊지 못하는 사연이 하나 더 있다. 젊은 시절 사람 머리 두개 만한 수박을 두 통이나 지고 내설악 코스로 대청봉에 오른 일이 있으시다는 거다. 대청봉의 수박파티라, 생각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다가온다.

    14일 새벽 4시. 용대리를 떠나 백담사로 향했다. 이 코스는 마이크로버스가 드나들 만큼 길이 좋다. 새벽에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걷자니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어제부터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걱정스러웠지만 30분 정도 지나자 목덜미에서 훈훈한 기운이 올라왔다.

    백담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1년(647년)에 지은 사찰인데, 일제시대 당시 만해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을 탈고한 장소로 더 유명하다. 한용운의 항일정신과 불교개혁운동으로 대변되던 백담사. 그 역사적 현장은 1988년 5공 비리 파문에 휩싸인 전두환씨가 이곳에 칩거하면서 전국 각지의 불자들이 찾아와 전씨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묘한 장소로 바뀌었다.

    백담사와 오세암의 전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7년여 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를 가로막았던 독재자. 그는 자신의 쿠데타 동료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이 나라 국정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재벌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세월이 흘러 역사의 재판정에 선 그는 전 재산이 채 30만원도 안 된다고 항변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진심으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비록 전씨가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대규모 불사에 힘을 보탠 것은 사실이지만, 전두환 시대가 남긴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자들은 넓은 마음으로 그를 뜨겁게 환영한다. 불교신자인 필자가 보기에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백담사에서 영시암으로 가는 동안 해가 떠올랐다. 날이 밝으면서 백담사 계곡의 아기자기한 자태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영시암은 오세암 코스와 수렴동 코스로 갈리는 분기점으로,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본격적으로 내설악에 파묻힌다. 봉정암까지 빨리 가려면 오른쪽의 수렴동 코스로 가는 것이 좋지만 오세암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을 좇아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시암부터는 몸에 조금씩 땀이 흘렀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잘 따라오셨다.

    오세암은 백담사의 부속사찰로 신라 자장스님이 선덕여왕 13년(647년)에 지은 사찰이다. 조선시대에는 세조반정에 항거한 매월당 김시습이 여기서 출가했고, 해인사에 보관돼 있던 고려대장경 1부가 이곳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세암의 본래 건물은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암자를 떠받치던 주춧돌뿐이다.

    한편 불가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오세암의 ‘오세’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설정조사의 조카 오세동자가 한 해 겨울동안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어 성불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오세암 법당에 들어가면 다섯 살에 성불한 동자부처를 볼 수 있다.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오세암까지 거뜬하게 따라붙던 어머니도 이 구간에서는 발걸음이 무뎌졌다. 우리는 자주 쉬면서 주먹밥과 비상식량으로 원기를 보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머니는 마침내 봉정암 가기 직전의 칼날처럼 솟은 암릉에서 주저앉았다. 눈이 녹지 않아 빙판을 이룬 이 고개는 필자가 오르기에도 힘겨웠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짐을 받아 먼저 봉정암으로 넘어갔다. 어머니는 쉬엄쉬엄 가겠다며 해가 다르게 무거워지는 몸을 아쉬워했다.

    어머니와 함께 걷는 길

    봉정암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엔 유명한 사리탑이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와 설악산 봉정암과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정선의 정암사,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경남 양산의 통도사 등에 나누어 봉안했는데, 불교계에서는 이 다섯 개의 사찰을 가리켜 ‘오대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봉정암 사리탑은 오대 적멸보궁 가운데 가장 높은 해발 1500m 지대에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수도자가 반드시 거쳐가는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사리탑 앞에 서면 일단 봉정암과 그 뒤편의 암릉 그리고 암릉을 덮어쓴 소청봉과 대청봉을 굽어볼 만하다. 설악산 내설악에 수많은 절경이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 봉정암에 도착해서 쉬는 동안 어머니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경내로 들어오셨다. 모처럼의 장거리 산행으로 다리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무슨 일이든 불심이면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도 이 순간만은 “더 이상 못 가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봉정암에 모셔두고 산행을 재촉했다. 더 지체하면 야간산행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산중의 이별이다. 다행히 어머니가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셔서 필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봉정암에서 소청 중청을 거쳐 대청봉으로 오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숨을 고르지 않았다. 가파른 산길이었지만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쉴새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청에 이르자 1주일 전 굽어본 공룡능선과 동해바다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1주일만 지나도 이렇게 달라지는 풍광이 설악산의 진면목이다. 고개를 내설악으로 돌리니 석양에 물드는 바위들이 또 한번 축제를 벌일 태세다. 여기에 취하다 보면 하산길이 어려워진다. 언제나 다소 모자랄 때 끊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애써 눈길을 거두고 오색약수터를 향해 달렸다. 정말 숨 가쁜 레이스다. 내가 이렇게 빨리 대청봉을 내려온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내달았다. 봉정암을 출발한 지 2시간30분 만에 오색매표소에 골인. 산악마라톤 선수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오색 관광단지를 빠져나와 서울행 버스에 오를 무렵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12월4일 밤 11시30분.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심야 우등고속을 타고 속초에 도착했다. 서울 하늘에 촉촉이 내리던 겨울비가 속초에 이르자 그쳤다. 터미널 근처의 찜질방에서 잠시 쉬다가 새벽같이 시내버스를 타고 설악동으로 향했다. 설악산 3부작의 대미를 외설악에서 장식하기 위해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0여 차례 찾았던 외설악이기에 주변의 모든 경관이 눈에 익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날도 밝기 전에 설악동에 들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울산바위, 비선대, 금강굴

    졸린 눈을 비비며 표를 팔던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지금이 통제기간이라고 알려줬다. 통제기간에는 대청봉을 비롯한 정상 부근에 접근할 수가 없다. 필자도 가볍게 트래킹한다는 기분으로 산을 탈 생각이었다. 먼저 찾은 곳은 흔들바위-울산바위 코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외설악의 명소다. 특히 석굴암자인 계조암 앞에 있는 흔들바위는 지나는 길손들이 한번씩 밀어보면서 진짜 흔들리는지 확인하는 설악산의 오랜 명물이다. 또한 계조암은 신라의 고승 자장, 동산, 봉정, 원효, 의상스님이 차례로 수도했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울산바위는 예로부터 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울산바위에 올라가려면 철계단을 808개나 지나야 하는데 이 때문에 겨울철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울산바위는 지명에 얽힌 전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먼 옛날 조물주가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산(금강산)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명산과 바위들을 모집했는데, 울산을 대표하는 바위도 참가했다가 거대한 몸집으로 인해 그 시기를 놓쳐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중 설악의 경치에 반해 그대로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전설처럼 울산바위는 거대한 바위덩어리다. 얼른 보면 작은 바위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나름의 질서와 균형이 있다.

    외설악의 비경을 간직한 비선대로 가려면 울산바위에서 신흥사까지 3.2km 거리를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신흥사는 설악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부근의 수많은 절은 대부분 신흥사의 말사에 해당한다. 비선대는 신흥사에서 3km 정도 올라서야 하는데 길이 산책로처럼 편안해서 소풍가는 기분으로 걸을 수 있다.

    비선대에서는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각종 문구를 새겨보는 맛과 겨울철 눈으로 뒤덮인 절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외설악의 마지막 포인트는 금강굴. 비선대에서 20여분쯤 가파르게 올라서야 한다. 금강굴에서 비선대를 내려보는 풍경과 멀리 대청봉을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가을철이면 대청봉 쪽으로 붉게 물든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 금강굴 안쪽에는 조그만 법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1400여년 전 원효스님이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금강굴이라는 이름도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에서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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