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사진첩 소장자 유성철 유컬렉션 대표

“제작자 후손인 일본인 수집가로부터 삼고초려 입수”

  • 입력2004-12-29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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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첩 소장자 유성철 유컬렉션 대표
    ‘신동아’가 이번에 공개한 사진첩은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곳곳의 사람들과 풍경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총 80여 페이지로 이루어진 이 사진첩은 당대에 제작된 듯한 사진첩에 180여장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붙인 것. 원본을 그대로 붙인 덕분에 인쇄되어 전해오는 사진첩에 비해 보존상태가 매우 뛰어나 색채가 선명하고 파손된 것이 거의 없어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렇듯 개인이 제작한 까닭에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사진첩은 이후 100년의 세월 동안 제작자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소장해온 듯하다. 이를 한국에 들여와 ‘신동아’에 제공한 이는 대구에서 유물을 수집하고 있는 유성철(45·유컬렉션 대표)씨. 유씨는 할아버지대부터 가업을 이어 받아 대구 경북지방의 유물을 수집해오고 있는 아마추어 고미술 전문가로,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 도쿄의 한 수집가로부터 2003년 10월 이 사진첩을 입수했다고 한다.

    대구와 경북지방은 일찍이 가야와 신라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겨진 지역이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수집가들을 비롯해 적지않은 전문가들이 이 지역에서 활약해 한때는 서울 못지않은 전문가층이 형성되기도 했다. 상당수 유물이 세상의 빛을 본 서울과는 달리 아직도 많은 유물이 민간에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유씨는 사진첩 이외에도 5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강점기부터 유물을 수집했던 할아버지 유억석씨로부터 물려받은 것.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수집가와 교우하며 고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유억석씨의 소장품은 이후 건축업을 하던 아들 유천명씨에게 이어졌고, 유천명씨가 세상을 떠난 1988년 이후에는 손자인 유성철씨가 관리하고 있다.

    “솔직히 유물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과수원 한쪽에 있던 창고를 열어보았지요. 전에는 거기 유물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도둑을 염려한 아버지가 입구를 사과상자로 가려놓곤 하셨거든요.



    창고에 들어가보니 여러 가지 물건이 있길래, 조그만 물건 몇 개를 골라 내다 팔기도 했어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 얼마나 소중한 물건들인지 알지 못했던 거죠. 나중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뜻을 모르고 한 짓에 대해 크게 후회했습니다.”

    이후 고미술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유씨는 닥치는 대로 관련서적을 구해 읽으며 식견을 넓혀갔다. 10여년 동안 공부하면서 섭렵한 책만 대략 1000권. 아마추어 전문가로서의 관록이 붙으면서 단순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을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 고르고 골라 모은 유물이 어느새 30여점이다. 취미나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이 그의 본업이 된 셈이다.

    그 과정에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고구려 관련 유물을 찾아 중국에 건너간 1998년 늦여름 무렵에는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렵사리 물건을 건네받아 나오는 길에 중국 공안이 길을 막아선 것이다. 밤 10시, 주위는 온통 어두컴컴한 암흑이었다.

    “신분증을 꺼내려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니까 갑자기 ‘빵’ 소리가 나는 거예요. 총을 꺼내려는 걸로 착각한 공안 경비병이 자동소총으로 경고사격을 한 거죠. 그러더니 바로 제 관자놀이를 겨누더라고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중에도 ‘침착하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결국 천천히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고 손짓발짓 해가며 상황을 설명해 겨우 통과했습니다.”

    “3대 걸쳐 수집한 유물, 기회 닿으면 기증할 터”

    수 년 전부터는 고미술을 연구하는 동호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금도 그에게 큰 도움을 주는 ‘참우회(참역사를 세우는 사람들의 모임·회장 정종태)’가 바로 그것. 사업가와 직장인들로 구성된 참우회는 자료수집과 연구는 물론 경제적인 지원까지 아까지 않는 고맙고도 든든한 후원자들이라고 유씨는 말한다. ‘신동아’가 공개한 사진첩 또한 참우회 멤버의 도움을 받아 소장자의 소재를 파악해 일본으로 건너가 소장자와 차근차근 친분을 쌓으며 구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일본인 소장자 이야기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20세기 초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을 따라 건너와 기록 및 자료수집 차원에서 찍은 사진 위주라고 하더군요. 집안에 전해오는 물건인 만큼 처음엔 선뜻 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몇 차례 일본에 건너가 설득하고 또 그 분이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나 계속 졸랐지요. 다행히 그 분은 한국에 있는 일본 그림에 관심이 있어 얘기가 통했습니다.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하다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가량은 한국에 들어오는데, 그 때마다 제가 그분을 만나 한국관련 유물이 없는지 물어봅니다. 하나라도 더 내오기 위해서지요. 저나 참우회 멤버들이 개인 재산을 써가며 유물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음지에서 잠들어 있는 유물을 양지로 끌어내자는 겁니다.”

    젊은 날의 자신이 그러했듯,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유물의 상당수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개인의 창고나 장롱 깊숙이 잠들어 있다는 것이 유씨의 설명이다. 사람들이 그 유물을 눈으로 보고 이를 통해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그 유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유씨는 박물관을 준비하는 뜻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전체를 무상으로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씨는 유물 수집이 “어지간한 열성이 아니면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고미술’ 하면 가짜나 사기를 먼저 떠올리는 사회 분위기가 반갑지 않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가족, 특히 배우자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유씨는 잘라 말한다. 고정수입은 고사하고 생활마저 불규칙하기 때문. 이런 이유로 늘 아내 권판연(34)씨와 아들 지민(13), 딸 혜리(10)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며 웃어보였다.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할아버지·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거든요. 만약 아들애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하겠어요. 지금도 유물을 볼 때면 항상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곤 하지요. 그 덕분인지 벌써 웬만한 어른보다 보는 눈이 한결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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