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호

명사에세이

‘82학번 심재명’

  • 심재명|명필름 대표

    입력2017-09-0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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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해가 뜨기 전 추운 겨울 아침, 베갯머리 너머로 들리는 고등학생 오빠의 ‘후루룩 찹찹’ 아침밥 먹는 소리에 잠이 깬다. 뜨거운 흰 쌀밥에 갓 구운 김을 싸서 씹는 소리, 멸치볶음을 오드득 씹는 소리가 나 중학생 때 기억나는 아침 풍경 속 소리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려준 아침밥상을 물리고 오빠가 책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서면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던 나는 그제야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 엄마가 두 번째 차린 아침상엔 들기름 발라 구운 까만 김도 고소한 멸치볶음도 없다. 가난했던 우리 집에서 김과 장조림과 멸치볶음은 주로 아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평생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 시절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신경질을 내다가 엄마의 욕을 뒤로한 채 학교를 갔던 것 같다. 참고서 살 돈을 못 받아서, 달걀 프라이를 못 먹어서, 우산살 하나가 부러진 우산을 쓰기 싫어서….

    엄마는 어쩌다 내가 문지방 위에 올라설 때면 어김없이 “계집애가 재수 없이 문지방을 밟고 올라서냐”고 야단을 쳤다. 내가 덮던 이불과 요를 개어 이불장 안에 넣을 때 아버지나 오빠의 이불 위에 올려놓으면 어김없이 잔소리를 들었다. 계집애의 이불은 남자들 것 아래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 지척에 사셨던 외할아버지는 유독 손자들만 예뻐하셨다. 귀한 바나나도 값나가는 과자도 우선 손자들에게 주셨다. 우리 집안 사정상 초등학교 6년을 외가댁에서 지낸 오빠와는 그래서 좀 서먹서먹했다. 외가에 놀러 가면 오빠 방엔 외할아버지가 사준 ‘어깨동무’나 ‘소년중앙’ 같은 잡지가 즐비했다. 마루 밑 검은 장화 속에 오빠의 반짝이는 구슬과 딱지가 가득했다. 나는 부러운 눈으로 그 잡지들을 펼쳐 보며 만화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차고도 넘치는 시절이었지만 어리석은 미신과 남아선호는 나 같은 ‘계집애’에겐 많이 섭섭한 것이었다. 서운하고 무엇보다 억울했다.



    여자들만의 풍경

    엄마는 평생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빈둥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긴 외출을 하거나 하는 따위. 사실 그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사남매의 도시락을 싸고 하루 세 번 밥상을 차리고 늦게 오는 오빠나 아버지의 밥그릇을 따뜻한 아랫목에 데우고, 여섯 식구의 빨래를 하고 좁아터진 집이지만 매일 청소를 하느라 남아도는 시간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 시간을 또 쪼개 부업을 했다. 봉투 붙이기, 병풍 수놓기, 인형 눈 붙이기 같은 것을 쉬지 않고 했다. 박카스 비닐 뚜껑 부업 땐 항상 손이 퉁퉁 불었다. 나무 모형 틀에 펼쳐진 비닐을 감싸고 뜨거운 물에 넣어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뜨거운 물에 넣었다 빼는 일을 몇 시간씩 하다 보면 손가락이 쭈글쭈글 붇기 마련이었다. 엄마가 부업을 할 때면 옆에서 거드는 일은 나나 내 밑 여동생의 몫이었다. 종이봉투의 잘려나간 파지를 모아 버리고 엄마에게 배워 병풍 수놓기의 쉬운 부분들을 담당하고, 박카스 비닐 뚜껑의 개수를 세고,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아빠나 오빠는 없는 여자들만의 풍경.

    중고생 시절 남자 선생들의 체벌은 무시무시했다. 책상 위로 올라가 손을 들고 한 시간씩 벌을 서거나, 커다란 출석부의 모서리로 손바닥을 맞는 것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키 작은 중년 남자 선생은 체벌 시간이면 손목시계를 풀고 흰 반팔 셔츠의 앞섶을 풀고는 불러 세운 아이들의 뺨이며 머리통을 사정없이 갈겨댔다. 우리들은 교탁에 부딪혀 쓰러지거나, 심지어 교실 앞문으로 튕겨져 나가기도 했다. 우리는 그토록 체벌을 빙자한 폭력 앞에서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도심의 변두리에 위치해 학교 주변에 야산이 있고 나무가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엔 대한민국 모든 여성이 알고 있는 그 ‘학교 앞 바바리맨’이 그야말로 문정성시를 이뤘다. 교실 창밖, 교문 앞, 학교 옆 야산을 지나칠 때면 그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개미들 흩어지듯이 도망치기에 바빴지 그들에게 욕을 하며 대들거나 쫓아내지 못했다. 그 시절 그들을 경찰에 신고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남자 성기의 실물을 태어나서 처음 바바리맨을 통해 보았다. 불현듯 나타나 그것을 보여준 뒤 후다닥 사라지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가 꺼내 보여준 것은 아직도 기억한다.

    등굣길 버스 안에서 교복 치마를 입은 엉덩이를 슬쩍 만지거나 하는 일을 당할 때면 소리를 크게 지르는 대신 그 자리를 피하고 마는 것으로 화를 면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자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만의 기억에서 다른 여자들도 겪었을 ‘우리들의 기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어지려고 말을 꺼냈다가 사귀던 남자로부터 뺨을 세게 맞거나, 성희롱인 줄 본인도 모른 채 아무 말이나 건네던 중년의 직장 상사들이나,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골목길에서 ‘다다다다’ 쫓아오던 어떤 구둣발 소리에 숨이 막힐 듯 놀라 도망치던 기억.

    더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루에도 여러 번 밥상을 차리고…. 봉투 붙이기 부업까지 하며 악착같이 살았던 나의 엄마는 이제 회사에 나가는 딸을 위해 딸이 낳은 딸아이를 돌보며 산다.

    여기까지가 82학번 심재명의 지난 시절 이야기다. 이 사적인 이야기를 읊은 것은 마침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심코 읽다가 그야말로 ‘헐’ 하며 놀란 건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82학번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치 내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은, 기시감 넘치는, 82학번과 82년생, 그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도 메우지 못한 ‘대한민국 여자의 인생 보고서’라니. 보고서 같은 짧은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가슴이 삶은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다.

    신자유주의를 양껏 받아들인 지금의 대한민국은 되레 신분과 계층이 세습되고 소득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고, ‘개천에서 용 났다’는 실화는 신화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많은 남자가 그러하고, 많은 여자는 더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여자로서 기억은 수십만 부가 팔린 소설 속 주인공인 82년생이나, 그보다 스무 살 많은 82학번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 앞에서 분노하지 못하고 상처만 받았던 나를 돌아보니 안쓰럽고 안타깝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얼마 전, 휴일에 몰아 하는 빨래와 청소에 지쳐 스무 살 넘은 딸에게 ‘엄마 좀 도와주라’고 한마디 했다. 딸이 하는 말, ‘엄마 그럴 땐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자거나 하라고 말해야 해. 엄마만 해야 할 집안일은 없어.’ ‘그래 너 말 한번 잘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네 방은 돼지우리처럼 늘어놓고 지내 엄마 복장 터지게 하니?’ 아니, 돼지우리처럼 더럽게 살든 말든 그건 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그건 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앞에 놓인 생을 한결 잘 살아내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정답일 것이다.




    심재명
    ● 1963년 서울 출생
    ●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명필름 대표, 명필름 문화재단 이사장,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 영화 ‘접속’ ‘공동경비구역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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