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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학번 심재명’

  • 심재명|명필름 대표

‘82학번 심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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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자대학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만의 기억에서 다른 여자들도 겪었을 ‘우리들의 기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어지려고 말을 꺼냈다가 사귀던 남자로부터 뺨을 세게 맞거나, 성희롱인 줄 본인도 모른 채 아무 말이나 건네던 중년의 직장 상사들이나,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골목길에서 ‘다다다다’ 쫓아오던 어떤 구둣발 소리에 숨이 막힐 듯 놀라 도망치던 기억.

더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루에도 여러 번 밥상을 차리고…. 봉투 붙이기 부업까지 하며 악착같이 살았던 나의 엄마는 이제 회사에 나가는 딸을 위해 딸이 낳은 딸아이를 돌보며 산다.

여기까지가 82학번 심재명의 지난 시절 이야기다. 이 사적인 이야기를 읊은 것은 마침 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었기 때문이다. 무심코 읽다가 그야말로 ‘헐’ 하며 놀란 건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82학번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마치 내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 같은, 기시감 넘치는, 82학번과 82년생, 그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도 메우지 못한 ‘대한민국 여자의 인생 보고서’라니. 보고서 같은 짧은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가슴이 삶은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다.

신자유주의를 양껏 받아들인 지금의 대한민국은 되레 신분과 계층이 세습되고 소득의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고, ‘개천에서 용 났다’는 실화는 신화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많은 남자가 그러하고, 많은 여자는 더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여자로서 기억은 수십만 부가 팔린 소설 속 주인공인 82년생이나, 그보다 스무 살 많은 82학번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 앞에서 분노하지 못하고 상처만 받았던 나를 돌아보니 안쓰럽고 안타깝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얼마 전, 휴일에 몰아 하는 빨래와 청소에 지쳐 스무 살 넘은 딸에게 ‘엄마 좀 도와주라’고 한마디 했다. 딸이 하는 말, ‘엄마 그럴 땐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자거나 하라고 말해야 해. 엄마만 해야 할 집안일은 없어.’ ‘그래 너 말 한번 잘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네 방은 돼지우리처럼 늘어놓고 지내 엄마 복장 터지게 하니?’ 아니, 돼지우리처럼 더럽게 살든 말든 그건 딸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그건 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앞에 놓인 생을 한결 잘 살아내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정답일 것이다.



‘82학번 심재명’

심재명
● 1963년 서울 출생
●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명필름 대표, 명필름 문화재단 이사장,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 영화 ‘접속’ ‘공동경비구역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당을 나온 암탉’ ‘건축학개론’ 등 제작





신동아 201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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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명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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