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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천황제’는 극우 기득권 방어벽, 정권교체도 허용 않는 ‘유사종교’

  • 글: 장팔현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 박사(일본사) jan835@hanmail.net

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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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영유권 분쟁, 교과서 왜곡, 군비 강화 등 일본의 우경화, 군국주의화가 심상치 않다. 일본을 ‘극우 강경노선’으로 치닫게 하는 가장 강력한 일본 내 시스템이 바로 일본인들이 ‘천황’이라고 부르는 ‘일왕’이다. 일왕제는 일본의 정치, 사회, 언론, 군부를 극단적 국수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저해하는 국가 시스템이다.
日王, 일본 우경화 시스템의 축(軸)

아키히토 일왕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총리직을 수여하고 있다.

일본은 올해 안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들어가기 위해 미국에 올인하는 일극외교(一極外交)를 펴고 있다. “미국 외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현재 일본 외교에 대한 솔직한 평가일지 모른다.

일본의 국가 시스템 중 가장 특이한 것이 일왕이다. 외국인들은 ‘다테마에(建前·명분, 겉마음)’와 ‘혼네(本音·속내)’를 가진 이중성으로 일본인의 성격을 갈파하는데, 다른 한편에선 ‘상징 일왕제’와 ‘총리’라는 묘한 정치구조를 갖춰놓은 것이 일본의 특성이다. 한국은 헌법에 수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지만 일본은 ‘천황이 있는 곳’을 수도로 규정한다. 금싸라기 같은 도쿄 중심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을 왕이 사는 궁궐이 독차지하고 있다. 간혹 이곳이 개방되면 수많은 국민이 들어와 방탄유리 속 일왕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만세를 부르는 게 오늘날의 일본이다.

일왕은 현 시점에서 정치 주체는 아니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도구의 기능을 하고 있다. 최근의 한일 갈등으로 일본에 분노하는 한국인은 많지만 일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본을 알기 위해선 일본의 권력구조와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간파해야 하는데, 바로 권력구조와 의식구조의 핵심에 일왕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일왕제에 대해 연구한 것이 많지 않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가 어려운 것이다.

일왕은 고대의 대왕시대 때 거대한 묘를 만들 만큼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14세기 전반 남북조 동란기를 맞이하여 무사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일왕은 실권을 잃었다. 이후 정치는 공경(公卿) 귀족이 자신의 신변보호와 영지확장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뽑은 무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왕은 다시 전면에 등장한 것 같지만, 실은 유신의 일등공신인 사쓰마(薩摩)와 쇼슈(長州) 지방 출신 무사들이 실권을 쥐고 일본 근대화를 이룩했다.

‘天皇’과 ‘神道’, 정치의 양대 축



1889년 2월11일(건국기념일)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은 국가원수(제1조)이자, 통치권의 총람자(總攬者)”라고 밝혔다. 고대의 대왕시대를 연상시키지만 권력은 사쇼(사쓰마·쇼슈) 출신 무사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공식적으로 일왕과 신하라는 이중 권력구조로 일본 정치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100년이 훨씬 지난 19세기 말엽에 확립된 이러한 이중 권력구조가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이 2005년 현재의 일본 정치 시스템에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2005년 현재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정권교체가 이뤄진 적이 없는 나라다. 메이지유신 이후 형성된 일본 집권층은 현재 자민당의 뿌리가 됐다.

일본의 근·현대 집권세력은 일왕제를 활용해 국민을 통제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일왕은 실권을 쥔 정치인들에게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을 축적해주고 국론통일을 위해 적절히 활용되는 정치도구의 기능을 담당했다. 일본인에게 일왕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자 실생활은 물론 잠재의식에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그 이유는 일왕제가 일본인이 생활종교철학으로 신봉하는 ‘신도(神道·신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신도는 ‘조상숭배사상’이다. 그 유래는 일본 열도에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이전에 찾을 수 있다. 538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처음 전래됐으나 때마침 일본 열도에 역병이 유행해 포교는 실패했다. 그러자 신도파는 ‘역병 창궐은 외래신인 석가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폈다. 신도를 믿는 모노노베씨 일족에 의해 불교는 철저히 거부되고 탄압받았다. 552년 다시 백제에서 불교가 전래됐으나 이때도 역병 창궐로 표교가 저지됐다.

불교 유입을 거부한 모노노베씨 일족은 ‘하느님(천제)’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규슈(九州)에서 동진해온 천손족이자 태양신을 믿는 집단이었다. 모노노베씨 일족이 무너지고 일본에 불교가 퍼진 때는 587년이다. 성덕태자가 모노노베 모리야(物部守屋)를 멸하고부터다. 이후 일본 열도에서는 불교와 신도가 융합된 싱크러티즘(syncretism·혼교주의)이 널리 퍼져 사찰 안에 조상을 모시는 ‘신사(神社·진자)’가 있거나 신사 안에 사찰이 있는 기묘한 형태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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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팔현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 박사(일본사) jan8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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