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339’라는 숫자는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몸담은 터전에 심은 나무의 숫자이기 때문. 공장에, 호텔 뒷산에,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그가 심은 나무들은 꿈으로 자라났다. 그가 일으킨 ‘녹색 바람’은 직원들에게도 신명과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2003년 1월 허태학(許泰鶴·61) 사장이 취임하면서 변모한 서산공장의 풍경이다. 허 사장의 환경 마인드는 회사에 ‘녹색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 12월말 삼성석유화학이 삼성종합화학(현 삼성토탈)으로부터 인수한 서산사업장은 에너지 효율이 턱없이 낮은 침체된 공장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허 사장이 주도한 ‘녹색사업장 만들기 운동’이 이곳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잿빛 건물은 화사한 오렌지색 옷을 입었고, 공장 녹지율은 2003년 2%에서 2005년 40%를 훌쩍 넘어섰다. 적막함이 감돌던 이곳에 지금은 까치가 둥지를 틀고, 맑은 물이 흐른다.
유원지 수준이던 용인자연농원을 세계 5대 테마파크인 에버랜드로 키운 ‘조경 전문가’, 호텔신라를 키워온 ‘서비스 전도사’…. 삼성그룹 서비스 문화의 산실인 호텔신라와 삼성에버랜드에 33년간 몸담았던 허 사장은 이제 제조업체인 삼성석유화학에서 새로운 사풍(社風)을 일궈내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초 매출액 1조원 돌파와 세계 3위 고순도 테레프탈산(PTA) 생산기업 진입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 것. 그러나 그의 경영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모든 사업장을 친환경 녹지공간으로 변모시킨 ‘그린 마케팅’이다.
에너지 프로젝트 3단계
5월11일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석유화학 접견실에서 허태학 사장을 만났다. 전날까지 서산·울산 공장을 시찰하고 돌아온 그이지만, 피곤한 기색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그는 “환경과 우리 국토를 살리는 일은 나의 사명”이라고 했다.
-삼성석유화학이 ‘친환경기업’의 선구자로 꼽힌다고 들었습니다.
“흔히 석유화학업체라고 하면 머리가 아플 정도의 약품 냄새와 폐수부터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업장을 방문해보면 의외로 깨끗한 시설에 놀라실 겁니다. 제가 부임하기 전부터 삼성석유화학은 ‘친환경 경영’의 역사를 갖고 있었죠. 1995년 울산사업장이 국내 최초로 환경친화기업으로 지정됐고, 2003년엔 녹색에너지 우수 기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난해 11월엔 서산사업장이 환경친화기업으로 지정됐고요. 울산과 서산의 사업장이 모두 환경친화기업으로 선정된 것이죠. 지속적으로 환경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장이 자리잡은 울산과 서산지역의 환경 개선에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삼성석유화학이 중점적으로 생산하는 화학섬유 원료인 PTA 생산공정에서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온실가스(이산화탄소, 프레온가스 등)가 배출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울산사업장의 경우 1998년 19만7000t의 온실가스를 배출했지만, 지난해는 18만8000t을 배출해 4.6% 줄어들었습니다. 2010년엔 10% 정도 감축할 수 있도록 기술 개발에 만전을 기할 생각입니다. 우리와 합작하고 있는 영국의 에너지 기업 BP와 정보를 교류해 배출량 절감을 위한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고요.
에너지 효율화정책의 일환으로 에너지 프로젝트도 단계별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전기 에너지 절감을 위한 공정설비 조정, 전용 공기압축기 설치, 공정에서 발생하는 가스 재활용이 바로 연료 사용 절감을 위한 ‘에너지 프로젝트 3단계’입니다.”
-폐수처리는 어떻게 합니까.
“서산사업장에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죠. 미생물로 폐수에 메탄가스를 발생시켜 공정의 연료로 사용하는 설비를 설치했습니다. 이렇듯 연료를 절감하는 환경기술을 적용하는 데 약 80억원을 투자했어요.”
-환경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네요. 그런 비용이 기업운영에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지난해 서산공장을 증축하느라 120억원 가량의 환경투자비용이 발생했죠. 전체 예산 1200억원의 10% 정도 사용한 셈입니다. 초기에 기반 시스템을 갖췄으니 앞으론 비용이 덜 들겠지요. 한 해 환경투자 비용을 50억~1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투자비용이 아깝지 않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맨 처음에 환경설비를 탄탄히 해놓으면 유지·보수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기에 제대로 정비하지 않으면 해마다 환경처리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난 2월16일 발효된 교토의정서를 비롯해 환경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습니다. 한층 강화된 환경규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도 많은데요.
“수동적으로 환경규제 법 기준에 맞추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당연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환경은 기업의 ‘코스트 센터(Cost Center)’가 아니라 ‘프로피트 센터(Profit Center)’인 만큼, 적극적인 태도로 환경규제에 임할 생각입니다. 과감한 환경투자를 통한 기술 개발만이 점차 강화되는 환경규제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이라 보기 때문이지요.
지난 5월6일, 우리 회사는 산업자원부가 시행하는 에너지 절약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자발적 협약서에 서명했습니다. 1999년에 이어 두 번째지요. 이 협약은 온실가스 배출 감소 목표를 자발적으로 정해 실천하는 제도입니다. 환경관리에 있어 삼성석유화학의 목표는 법 기준을 따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으니까요.”
삼성석유화학의 친환경 행보는 ‘녹색경영’이란 모토로 집약된다. 허태학 사장은 삼성석유화학 홈페이지의 인사말을 통해 “환경, 안전, 위생에 역점을 두고 ‘녹색경영’을 실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녹색경영을 “깨끗한 환경과 기분 좋은 근무처를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서울 태평로 삼성석유화학 사무실 입구에는 화원을 방불케 하는 미니 정원이 조성돼 있다. 사원들의 책상에는 각자의 생일에 따른 ‘탄생화’가 놓여 있다. 여기엔 쾌적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직원들의 작업 능률을 높일 수 있다는 허 사장의 신념이 녹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해 새롭게 증축한 서산공장은 호텔인가 싶을 정도다. 주변의 녹지 조성은 기본. 공장건물 1층에는 직원 휴게실과 호텔급 피트니스 클럽까지 갖췄다. 내부 인테리어는 그린과 베이지 톤으로 꾸며 직원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배려했다. 식당은 식욕을 높이는 노란색을 사용했다. 직원들은 사업장 곳곳에 스며든 허 사장의 섬세한 안목에 놀라워한다.
‘Catch Up SPC’
‘녹색경영’의 실천은 친환경 기업문화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건강안전환경시스템(HSE)을 통해 화학공장의 위험요인을 철저히 지수화·계량화했다. 환경유해 요인이 발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다. 또 전 사원이 친환경 마인드를 공유하도록 건강안전환경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전산화했다. 삼성의 ‘시스템 경영’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최근 삼성석유화학은 영국의 BP사와 합작한 지 31년 만에 기술을 역수출하며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3월24일 서울 태평로 사무소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합작사인 BP사와 기술 컨설팅 계약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것. 이에 따라 삼성석유화학은 우수 기술과 인력을 BP에 유상으로 제공하고 기술과 인력 교류를 확대하게 된다. 전세계 BP PTA 공장에 ‘Catch Up SPC(삼성석유화학을 따라잡자)’라는 구호가 걸릴 정도에 이른 것.
‘한국의 달가스’를 꿈꾸다
-BP에 대한 기술 역수출이 화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을 수출합니까.
“사실 삼성석유화학은 PTA 제조 원천기술을 보유한 회사는 아닙니다. 31년 전에 아모코(1998년 BP와 합병)라는 회사와 합작하며 원천기술을 전수받았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 공장을 운영하면서 경험하고 터득한 운전기술과 설비관리기술을 최근 6시그마 혁신경영과 지식경영을 통해 체계화해 원천기술을 보유한 BP에 역수출하게 된 것입니다.
BP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환경·안전 노하우와 공장의 설비효율입니다. 3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PTA에 관련된 BP 전체 계열사와 삼성석유화학 같은 합작사의 임원급이 모이는 회의가 있었는데, 그때 환경안전을 통합관리하는 우리 회사의 건강안전환경시스템이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로 선정됐죠. 이후 여러 회사에서 우리의 환경안전관리 노하우를 전수해달라고 요청해왔어요.
충남 서산시 삼성석유화학 사업장의 진입로는 과거 삭막한 벌판(왼쪽)이었지만, 조경사업 후 은행나무가 촘촘히 들어선 정겨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회사가 설립된 1974년부터 우리는 BP에서 원천기술을 받는 대신 한 해 수백억원을 지급했어요. 지금도 해마다 3억~4억원을 지불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외국 기업에 우리 기술을 전파하고, ‘컨설팅 피(fee)’를 받아 외화벌이에 나설 겁니다.”
삼성석유화학의 친환경 시스템을 논하면서 허태학 사장의 특별한 ‘환경 리더십’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환경 사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인터뷰 도중, 그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를 기자에게 건네줬다. 그간 심어온 꽃과 나무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심어온 나무는 무려 6만4399그루.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쉼없이 자신이 몸담은 사업장을 초록빛으로 수놓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지요. 전 국토의 70%인 임야를 가꿔나가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후손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가는 터전마다 나무와 잔디, 꽃을 심어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식물을 보면, 우리도 함께 성숙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듣던 중 문득 그의 개인 홈페이지(www.hertaehak.pe.kr)에 실린 ‘나의 삶, 나의 인생’이란 글이 떠올랐다. 그의 성장과정과 나무 심기에 대한 열정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경남 고성에서 김해 허씨 종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딸만 셋을 낳은 뒤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는 땅도 제법 있고 대쪽 같은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한번도 한복을 벗은 적 없이 상투를 틀고 살아온 분이었다. 6대 종손인 허 사장에게 거는 할아버지의 기대는 남달랐다.
“고향에서 농사만 지어도 충분히 잘살 수 있다. 내 밑에서 배워도 충분하다”는 할아버지의 철학 덕택에 그는 어렵게 공부를 이어가야 했다. 동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어려웠고, 서울로 유학 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기나긴 설득 끝에 그는 진주에 있는 경상대 농학과에 진학했다.
젊은 시절, 농촌에서 자라 농학을 전공한 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서적은 농촌 계몽가인 류달영 선생이 쓴,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었다. 그는 특히 오늘날의 덴마크를 있게 한 농촌 계몽가 달가스를 닮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꿈을 좇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다른 방면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고(長考) 끝에 떠오른 생각이 바로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자연과 교감하고 후세에 기여할 수 있는 일. 그래서 10년이 넘게 나무를 심고 또 심었다.
잿빛 공단 속의 정원
-처음 나무를 심던 때가 기억납니까.
“20여 년 전 호텔신라 총무과장 시절 처음으로 나무를 심었어요. 호텔신라 영빈관 부근의 산인데 위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1991년 제주신라 근무 당시에는 마라도에 해송 30그루를 심었는데 현재 20그루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답디다.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어요. 이후 에버랜드에 재직하면서 매년 1000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2003년 삼성석유화학 사장 부임 당시 서산사업장의 공장 녹지율은 2%대였죠. 업계 평균 11%에도 못 미치는 허허벌판 수준이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는 임직원의 창의성이나 업무 효율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지난해부터 꾸준히 녹지·조경 사업을 추진했어요. 올해 말이 되면 녹지율이 55%까지 올라갈 겁니다.”
-삼성석유화학 울산사업장을 ‘잿빛 공단 속의 정원’으로 부르던데요?
“지난해 울산사업장에 환경지표수(樹)인 왕골대나무를 심었습니다. 일부러 공해에 약한 나무를 심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자는 의도였죠. 지난해에만 2억8000여 만원을 들여 1만4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어요. 부지 5만평의 울산공장은 3만여 본의 초화류와 8000여 평의 잔디밭이 수십여 종의 수목과 어우러집니다. 올해도 ‘2005 녹색사업장 가꾸기 식목 행사’를 통해 광나무 550그루를 심었죠.
그러다 보니 ‘울산공단 단지협의회에서 걷은 환경부담금을 모아 삼성석유화학에 전달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옵니다. 울산시의 역점 사업인 에코폴리스 사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죠.”
허태학 삼성석유화학사장은 “깨끗한 환경과 기분 좋은 근무처를 만드는 것이 ‘녹색 경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울산사업장은 삼성석유화학의 탄생과 함께 커왔습니다. 그만큼 지역 환경 개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죠. 15년 동안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 가꾸기 활동’에 동참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였고요.
최근엔 지역 청소년에게 환경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공장 견학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장 실험실에서 환경실험 과정을 체험하고, 폐수처리장을 둘러봄으로써 폐수처리과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인근 지역인 죽전마을과 자매결연을 해 컴퓨터를 무상 설치해주고 정보화교육을 해오고 있어요. 농산물 구매 및 소비촉진 운동도 전개했습니다.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과 환원 없이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이 제 굳은 신념입니다.”
‘3.2차 산업론’
-환경경영 측면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는 일류 기업이 있나요.
“업종을 뛰어넘어 우수한 환경경영 시스템을 가진 기업이라면 어디든 롤 모델로 삼고자 합니다. 일본의 소니와 도요타, 유럽의 BP 환경경영이 모두 우리의 참고가 됩니다. 임직원이 해외 출장을 갈 때, 벤치마킹할 업체들을 한두 곳 선정해 둘러보고 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죠.”
허태학 사장 앞에 붙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혁신의 귀재’다. 그는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해오며 유난히 신규 프로젝트에 배치될 기회가 많아 늘 남보다 세 배쯤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또한 기업혁신 프로그램인 6시그마운동의 선구자로서 삼성그룹 변혁에 앞장서왔다.
일각에서는 그가 서비스업체인 삼성에버랜드와 호텔신라의 CEO에서 제조업체인 삼성석유화학의 CEO로 변신하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사령탑을 맡은 삼성석유화학의 성과는 눈부셨다. 경영혁신운동을 전개함으로써 3년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했기 때문이다. 올해 매출 목표는 1조5000억원. 지난해 성과급은 연봉의 30%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는 특히 제조업 분야에 ‘서비스 마인드’를 결합하는 ‘3.2차 산업론’을 주창하며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서비스업 CEO에서 제조업 CEO로 옮겨와서 겪은 어려움은 없습니까. 아울러 서비스 기업을 이끌던 경험이 현재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삼성석유화학이 생소한 곳임에는 틀림없었죠. 그러나 임직원과 자주 만나고 부단한 공부를 통해 비교적 빨리 기업문화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제가 삼성 입사 35주년을 맞는 뜻 깊은 회사이기도 해요.
사실 업종을 떠나 기업경영의 핵심가치는 똑같습니다. ‘기업 경쟁력 강화’가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지요. 경쟁력 강화는 특성화·차별화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 전공분야인 서비스 노하우를 삼성석유화학에 투입하기로 한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3.2차 산업론’인가요?
“3차 산업인 서비스산업의 관점에서 2차 산업인 제조업을 경영해야 한다는 게 바로 ‘3.2차 산업론’의 핵심이죠. 삼성석유화학은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아니라 섬유, 식·음료 용기의 원재료로 쓰이는 PTA, 즉 중간재를 생산하는 업체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對)고객 마인드가 다소 부족했던 게 사실이죠.
그런데 임직원에게 ‘친절 서비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자 회사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어요. 에티켓 강사를 모셔와 걸음걸이부터 전화 예절, 용모 꾸미기 까지 가르치게 했죠. 친절이 몸에 배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이 되거든요. 그러자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던 직원들도, 고객인 협력회사가 뭘 원하는지 더욱 고민하게 됐습니다. ‘고객만족경영’을 중시하는 ‘3.2차 산업론’의 정신을 모든 사원이 체화함으로써 급격한 매출 성장을 이루기 시작한 거죠.”
허 사장의 꼼꼼한 협력회사 챙기기는 업계에도 정평이 나 있다. 그는 협력사 생산현장을 방문해 일일이 애로사항을 듣는다. 협력사 직원들을 만나 삼성석유화학이 공급하는 물건이 제대로 하차되는지, 인수·인도는 잘 이뤄지는지, 납품된 물건의 질이 균질한지를 섬세하게 살핀다. 고객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제품의 질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또한 삼성석유화학의 선진 시스템을 협력업체에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자발적으로 환경기준을 준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삼성석유화학은 협력업체의 안전사고에 대해 본사의 그것과 동일하게 취급한다고 들었습니다. 여건이 비교적 열악한 협력회사에 ‘환경안전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뚜렷한 환경 마인드를 갖고 있어도 협력업체가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지요. 사실 삼성석유화학은 작으면서도 큰 회사입니다. 서울·울산·서산 사업장의 전체 종업원수가 현재 300명 수준이니 작은 업체이지요. 그러나 회사 내에 상주하는 협력업체와, 상주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공장 가동과 관련된 협력업체의 종업원수는 10~20배나 많습니다. 그만큼 협력업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죠.
먼저 삼성석유화학은 작업을 시작할 때, 모든 협력업체 사원의 혈압을 측정하고 음주 여부를 검사합니다. 이 두 가지 검사에서 이상이 나타나는 직원은 작업에 투입하지 않지요. 안전사고 예방과 직원의 건강관리를 위해서입니다.
또 우리 회사와 관련된 모든 협력업체는 ‘Q-Vendor’라는 제도를 통해 환경·안전·품질에 대한 수준평가를 받습니다. 일단 삼성석유화학에서 인정받는 관리수준을 갖췄다는 것만으로, 해당 업체는 다른 경쟁사보다 우위를 차지합니다. 결국 평가를 통해 협력업체들의 환경안전관리를 자율적으로 유도하는 셈이죠.”
삼성석유화학은 올해 ‘토털 마케팅’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허태학 사장은 4월28일 창립 31주년을 맞아 울산사업장에서 창립기념식을 열고, 유화업계 최초로 ‘토털 마케팅’ 계획을 발표했다. 단순히 영업활동을 통해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에게 믿음을 주는 관계구축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고, 전 임직원이 ‘파트타임 마케터’로서 서비스를 판매한다는 것이 바로 ‘토털 마케팅’의 기본 개념이다.
-‘토털 마케팅’의 구체적 내용이 궁금합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은 사장이 아니라 고객이지요. 고객의 마음을 더 깊숙이 파고들어야 회사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삼성석유화학은 B2C(기업-소비자간 거래) 업체가 아니라 중간재 업체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그 이미지가 뚜렷이 각인되지 못했죠. 그러나 ‘토털 마케팅’을 통해 고객과 의사소통을 활성화하고 회사의 인지도를 높일 계획입니다.
21세기는 브랜드의 시대 아닙니까. 서울대 경영학과 이유재 교수와 본사 직원들로 꾸려진 ‘토털 마케팅’ 태스크포스팀을 통해 삼성석유화학의 새 브랜드가 탄생할 예정입니다. 기업 이미지(CI)도 곧 선보일 예정이고요. 5월말이면 1단계 완성품이 나올 겁니다.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허허….”
-최근 화학섬유업계가 내수 침체와 원재료 가격 폭등으로 구조조정의 태풍에 휘말려 있는데요.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계획입니까.
“내수도 좋지 않지만, 특히 중국 수출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지를 몇 차례 방문해 수출 촉진 방법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합작사인 BP에서도 홍콩 등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며 마케팅 전면에 나섰고요. 내부적으로는 해외영업팀을 해외마케팅팀으로 정비해 한층 적극적인 수출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5월 중순을 넘어서면 경기가 조금 풀리지 않겠냐는 관측도 있어요.”
최장수 CEO의 사명
1969년 삼성그룹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한 허태학 사장은 현재 삼성그룹 내 최장수 CEO다. 삼성에버랜드 사장,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삼성석유화학 사장에 이르기까지 CEO로서 13년의 세월을 쉼없이 달려왔다. 그는 삼성에버랜드 사장 시절, ‘캐리비안 베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해 리조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삼성석유화학을 세계 3위 PTA 생산업체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20여 년간 나무 심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의 답변은 이렇다.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가슴속에 간직한 ‘사명의식’입니다. 개인 홈페이지에 ‘서비스 아카데미’라는 코너를 개설한 것도, 33년간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얻은 노하우를 전파하겠다는 사명에 따른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이웃, 부족한 나를 채우고 가꾸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늘 저를 채찍질했고요. 그리고 ‘나무 심기’는 이제 평생을 함께할 가장 소중한 사명으로 자리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