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폭로정치’의 진수, ‘유전 게이트’ 두 달째 히트친 한나라당 전략전술

  • 글: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입력2005-05-23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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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권 제보설’에 ‘대박’ 확신-선책과 집중, 철도청 족쳐 ‘이광재’ 적힌 회의록 입수-융단폭격, 감사원 집중 공격해 특검 획득-聲東擊西, 검찰 자극, 이광재 ‘피눈물’ 나게 하기-以檢制李, 잊을 만하면 ‘실탄’ 터뜨리기-시간차 공격
    ‘폭로정치’의 진수, ‘유전 게이트’ 두 달째 히트친 한나라당 전략전술

    야 4당의 특검제 공조를 이끌어냈으며(사진 중간), 4·30재보궐선거에서도 압승했다(사진 위) .

    4월6일 국회에서 한나라당 최고중진 연석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박근혜 대표가 그 즈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한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 투자 의혹, 이른바 ‘유전 게이트’에 대해 입을 열었다.

    “철도공사 문제는 드러난 것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집중적으로 해야 됩니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이전에 보기 어렵던 화법(話法)이었다. 박 대표 측근 인사는 “누군가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듣고 하신 말씀”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날 한나라당은 권영세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철도공사유전개발 실태조사단’을 구성한다. 그간 “철저한 조사”라는 원칙만 되뇌던 한나라당이었다.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한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박근혜 대표의 선전포고, 조사단 구성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것은 최근의 한나라당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유전 게이트가 ‘대박’임을 간파한 당내 기획통 의원들이 치밀하게 사전기획해 밀어붙였다는 뒷얘기가 나왔다. 대선 패배와 총선 패배 후 한나라당은 야성(野性)을 잃어 과거 이회창 시대의 일사불란하던 공격 진용을 상실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유전 게이트에 ‘선택과 집중’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모습은 대내외적으로 꽤 특별해 보였다.



    ‘역풍 없는 꽃놀이패’ 계산서 나와

    유전 게이트가 터진 최초의 시점부터 점검해보자. 여권을 궁지로 몰아넣은 ‘유전 게이트’에 최초로 불을 지른 것은 언론, 그것도 공중파 방송뉴스였다. 유전 게이트 보도가 처음 나간 것은 3월27일 MBC 뉴스를 통해서였다. 당시 MBC 보도를 보자.

    “철도공사가 나랏돈 60억원을 떼일 처지에 놓였습니다. 수익사업 한다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러시아 유전개발에 손을 댔기 때문인데 감사원이 특별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철도청은 작년 8월17일 이 유전을 인수해 개발하겠다며 국내 한 유전개발회사, 그리고 부동산 업자와 함께 합작회사를 차렸습니다. 이어 9월초 러시아의 알파엑코사와 유전인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합작회사의 철도청 지분은 35%. 하지만 철도청장이 직접 보증까지 서가며 65억원을 우리은행에서 대출받아 계약금을 냈습니다. 당시의 철도청장은 건설교통부 김세호 차관이었습니다. 그러고는 합작회사의 나머지 지분도 20배의 가치로 쳐 120억원에 인수하기로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철도청은 어찌된 일인지 잔금 지급일이 되자 알파엑코사에 계약을 파기한다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후 이 보도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다음날 MBC는 ‘실세 개입 조사’라는 제목으로 후속 보도를 낸다.

    ‘폭로정치’의 진수, ‘유전 게이트’ 두 달째 히트친 한나라당 전략전술

    한나라당은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사업 투자의혹을 집중제기해

    “철도공사가 무리한 유전개발 투자에 나섰다가 거액을 떼일 처지에 몰렸다는 뉴스를 어제 보도했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이 투자과정에 여권 실세 모 의원이 관련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철도공사와 함께 사할린의 유전인수를 추진했던 인사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모 의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작년 8월 철도공사가 유전인수를 위해 만든 합작회사에는 부동산 개발업자인 전모씨와 허모씨 등이 지분투자 형식으로 참여했습니다.

    먼저 합작회사 대표를 맡았던 전모씨. 처음 이 사업을 제안한 전씨는 이 의원과 같은 지역 출신입니다. 철도공사를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허 모씨도 당시 이 의원의 정책자문위원이었습니다…. 500억원이 넘는 유전인수 잔금 지급을 앞둔 작년 11월에는 신광순 철도청장이 이 의원을 찾아가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석유공사의 비축유 자금을 지원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MBC가 너무 자세하게 보도했어!”

    이틀간의 MBC 보도 이후 진행된 검찰 수사 결과와 맞춰보면 ‘유전 게이트’ 상황 전반을 정리한 이 보도는 완벽한 특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전 게이트의 전체 얼개는 이미 MBC가 처음 보도한 3월27일, 28일 당시 거의 드러났다는 얘기다. MBC 보도가 사건 전반을 잘 아는 유력 고위 인사의 제보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소문은 그래서 나왔다. 유력인사 A씨가 이광재 의원과 김세호 전 건교부 차관에게 ‘물’을 먹고 유전 게이트 관련 정보를 흘렸다는 것이 소문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같은 유력인사 제보설은 한나라당의 정보망에도 포착됐다. 이는 유전 게이트가 좀처럼 찾기 힘든 ‘대박거리’임을 한나라당이 확신하는 데 일조했다. 사건 자체가 오보나 불발탄이 아닌 실체가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공격해도 국정 발목잡기라는 역풍을 맞을 염려가 없는 ‘꽃놀이패’라는 대차대조표가 나온 것이다. 이 같은 계산이 서자 한나라당은 “고(GO)!”를 외쳤다. 내부적으로는 파상공세를 퍼부을 ‘실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4월6일 박근혜 대표가 “뭔가 있다”고 얘기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말이다.

    화염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불길은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상황. 한나라당의 한 인사는 “MBC가 이슈를 제기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너무 많이, 너무 자세하게 보도하는 바람에 공격거리의 상당부분이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더구나 ‘권력을 빙자한 단순사기극’이란 소염제가 화염 위에 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적절한 시점마다 ‘번개탄’을 던져 넣을 수 있었다.

    한나라당 내에서 유전 게이트에 대해 초반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한 이는 임태희 원내수석 부대표다. 그가 들려주는 얘기다.

    “처음에 얘기를 듣는 순간 분명히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무원을 해봐서 공무원의 생리를 잘 안다. 재무부에서 철도청 공무원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을 업무처리의 기준으로 삼더라. 결국 육감적으로 철도청에서 이 모든 것을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철도청 관계자를 만났다.”

    임 수석은 철도청 관계자들을 만나고 시중 정보를 더욱 확신하게 됐다. 한나라당 안에서 유전 게이트를 키운 또 다른 주역인 검사 출신 권영세 의원은 MBC 보도 이전까지 유전 게이트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권 의원의 얘기다.

    “처음엔 4월 국회 대정부 질문용 아이템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 사무실에 대한생명과 관련된 모종의 정보가 들어와 있어서 그것을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의 주된 메뉴로 삼고 MBC가 보도한 철도청 유전개발 투자 문제는 약간만 언급할 요량이었다.”

    한나라당의 확신은 일요일(4월3일)과 식목일(5일)을 낀 징검다리 연휴를 보내고 나온 6일 더욱 굳어졌다. 얼개는 이미 그려져 있는 사건이었다. 거기에다 정보에 대한 확신도 얻었다.

    그러나 사건을 권력형 비리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뭔가가 부족했다. 열쇠는 ‘이광재 의원과의 관련성’을 보여줄 수 있느냐였다. 그가 관련됐음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했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찾는 데 당력을 집중했다. 그 임무는 조사단장을 맡은 권영세 의원에게 떨어졌다. 한마디로 벼락치기였다.

    “측근이 喪家에 안 나타났대!”

    이때만 하더라도 누구도 한나라당 실태조사단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권영세 의원은 주위 의원들에게서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일찌감치 조사단장직을 내놓으라”는 충고까지 들어야 했다. “증거를 들이대 밝힐 수 있겠느냐”는 게 주위 의원들의 걱정 섞인 반응이었다.

    실태조사단에 참여한 의원들도 급하게 뛰어들다 보니 사건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가 돼 있지 않았다. 활동 첫날인 7일 철도공사를 상대로 한 현장 조사에 참여한 건교위 소속 의원들은 신광순 사장 등을 불러놓았지만, 제대로 추궁도 못한 채 이들의 해명만 들어야 했다.

    조사단 소속 의원들은 이후 기자실을 찾아 이날 조사내용을 브리핑했지만 신 사장 등의 해명만 고스란히 전했다.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들도 제대로 내용을 모르면서 무슨 실태조사를 하느냐”는 비아냥이 터져나왔다. 그때만 해도 한나라당 실태조사단의 앞날은 뻔해 보였다.

    실태조사단에 참여한 의원과 실무진은 이광재 의원과의 관련성을 찾기 위해 떠도는 소문을 모조리 확인하기로 했다. 한나라당에 “왕영용 철도공사 사업개발본부장이 러시아로 출국해 있는 동안 이광재 의원 측근이 동행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제보자가 모 인사의 상가(喪家)에 갔다가 반드시 와야 할 이 의원 측근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유를 물었고 “러시아에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제보를 받은 당 관계자는 무릎을 쳤다.

    이후 며칠 동안 확인 작업이 이뤄졌다. 본인과 연락이 닿았지만 부인했다. 결국 출입국 기록까지 뒤졌다. 하지만 이 의원 측근은 국내에 있었음이 확인됐다. 당 관계자는 허탈하게 돌아서야 했다.

    의원회관 내 이광재 의원 사무실의 출입기록을 모조리 뒤져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 사무처는 “출입기록도 개인정보에 해당되기 때문에 해당 의원실 외에는 열람할 수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 의원과의 관련성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임태희 수석은 “이 의원의 이름이 등장하는 의사록이 있다는 얘기를 철도청 관계자에게서 이미 들었다”고 말했다. 철도청 내에서 유전개발 사업 투자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이광재 의원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자료만 찾으면 되는데….” 임 수석과 권영세 의원은 연일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부쩍 커지던 시점이었다. 철도청이 보내온 한 장짜리 자료에 눈길이 미쳤다. 권 의원이 대정부 질문을 준비하기 위해 철도청에 요구해 받아놓은 ‘사할린 유전 정유 및 북한 건자재 채취 사업참여’라는 제목의 내부 결재 공문이었다. “2004년 8월12일 설명 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사할린 유전 정유 사업은 매장량 및 경제성을 감안할 때…안정적 수익창출이 기대되므로…안전장치를 철저히 하여 추진코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공문에 첨부된 것으로 표시된 서류였다. 공문에는 ‘신규진출 사업 설명 토론회의 결과 1부’와 ‘설명 토론회의 의사록 1부’가 결재를 받기 위해 첨부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그런 첨부 서류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문에 의사록이 첨부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거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배부처가 어디요? 우리가 알아보겠소.”

    “…”

    권영세 의원실과 철도공사 사이에 이 같은 실랑이가 며칠 계속됐다.

    하지만 한나라당 쪽에서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서 요구한 상황이다보니 철도공사로서도 더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권 의원은 이 같은 상황을 4월8일 아침회의에서 보고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강재섭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슬쩍 운을 띄웠다.

    “철도공사 왕영용 사업개발본부장이 회의 석상에서 ‘이광재 의원이 우리 뒤를 봐주고 있으니 열심히 하자’고 말했다는 정황 증거를 이미 확보했어.”

    이날 강 대표의 말은 언론에 보도됐다. 아직 의사록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이광재 의원은 물론 여권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 의원은 출입기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드러난 것 이상이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며 “증거를 제시하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최고의 책임을 지겠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박 대표도 최고의 책임을 지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철도공사에 압력을 행사 또는 권유했거나 은행 대출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일요일(10일)까지 3일 이내에 제시해달라”고 시한까지 못박았다.

    이 의원뿐만이 아니었다. 여권은 물론 청와대까지 나서서 “재보선을 겨냥한 무책임한 정치공세를 중단하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 같은 상황이 벌어진 몇 시간 뒤 권영세 의원 사무실의 팩스가 요란하게 울렸다.

    팩스를 타고 건너오는 문서는 한나라당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신규진출 사업 설명 토론회 의사록’이었다. 의사록 한 장을 넘기자 ‘이광재’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등장했다. 8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유전사업 참여 동기는 이 사업을 주도하는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에서 청에 사업참여를 제의”라는 내용이 의사록에 뚜렷이 박혀 있었다.

    4월10일 권영세 의원은 염창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늘이 이광재 의원이 증거를 제시하라고 시한을 못박은 날”이라며 짐짓 여유를 부리며 시작한 기자회견에서 권 의원은 며칠간 애태우며 찾았던 의사록을 내밀었다.

    한나라당이 8일 들어온 자료를 이틀간 ‘숙성’한 뒤 10일에야 공개한 것은 이 의원이 10일까지 증거를 대라고 한 만큼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날인 월요일 조간신문은 의사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광재 의원이라는 이름이 공문에 등장하는 이상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어 보였다.

    무시무시한 팀플레이

    한나라당은 이전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물증을 제시하면서도 결코 그 선 이상을 넘지 않았다. 권 의원은 기자회견장에서 섣부른 추측을 하지 않았다. 의사록 중 ‘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라고 표기된 부분에 대해 기자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도대체 외교안보위가 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권 의원은 “외교안보위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추측되지만 추후 확인을 통해 밝히겠다”고만 했다.

    이후 이광재 의원도 “한나라당이 공개했다는 문건에서 내가 외교안보위 소속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소속”이라며 “국회에 존재하지 않는 상임위이고 내가 산자위 소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폭로정치’의 진수, ‘유전 게이트’ 두 달째 히트친 한나라당 전략전술

    ‘유전 게이트’를 수사 중인 검찰이 철도교통진흥재단 사무실에서 압수한 자료를 옮기고 있다.

    이광재 의원과 유전 게이트의 연관성을 문서로 보여준 한나라당은 이번엔 ‘외교안보위= NSC’임을 밝히는 데 포커스를 맞추기 시작했다. 권영세 의원은 4월13일 대정부 질문을 통해 왕영용 사업개발본부장이 러시아 유전사업을 설명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4쪽은 “국제기업간의 거래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채굴권 불인정-한국과 러시아국과의 국가간 인수계약협정서 추진 중임(국가 외교안보위원회 주관)”으로 돼 있었다. 권 의원은 이를 근거로 국가 외교안보위가 의사록에 외교안보위로 표시됐고 이는 곧 NSC라고 주장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첩보가 한나라당에 입수됐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수시로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 관련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 문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동원됐다. 4월24일 일요일, 권 의원은 또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지난해 초부터 10월까지 러시아대사관으로부터 사할린 유전개발 현황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고받았다”며 보고 공문과 함께 문서목록을 공개했다. 그는 이번에도 첩보를 사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 대목에선 조사단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들의 개별적인 활약도 두드러졌다. 안상수 의원은 20일 국회 건교위에서 “의사록 원 자료에는 ‘NSC외교안보위(이광재 의원)’라고 적시돼 있었다”며 입수한 자료를 제시했다. 안택수 의원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해 말 엄삼탁 국민생활체육협의회장의 제의로 콩고의 유전 등 자원개발사업에 참여키로 결정하고 NSC가 관여토록 지시했다”는 내용의 NSC 관련설을 흘렸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인 팀 플레이였다. 언론도 또박또박 증거를 제시하는 한나라당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권영세 의원의 얘기다.

    “언론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폭로 방식으로 해서는 언론이 써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확인된 것만 얘기하고 작은 증거라도 세세하게 챙기려고 했다.”

    ‘사개추위’ 언급하며 검찰 자극

    ‘지상전’에서 승기가 굳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공중전’도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찰을 자극해 적극적으로 수사에 내모는 일이 그것이었다. 한나라당은 특별검사 카드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 역할은 강재섭 원내대표가 맡았다. 사실 한나라당이 특검 카드를 내밀었을 때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검찰도 거치지 않고 왜 특검이냐”는 것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문제점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4월14일 야(野) 4당 공조로 유전 게이트 특별검사법을 관철한다. 한나라당이 이 사건 감사를 부실하게 했다며 감사원을 집중 성토한 것이 성동격서(聲東擊西) 격으로 여권에서 특검 수용을 이끌어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특검제는 수사권 독립을 둘러싼 검·경 갈등, 사법제도개혁추진위(사개추위)와의 갈등, 공직자비리수사처 문제로 사면초가에 처한 검찰을 ‘성역 없는 과감한 수사’로 내몰기 위한 압박 카드였던 셈이다. 5월10일 강재섭 원내대표가 주요당직자회의에서 한 발언은 그 속내를 잘 드러낸다. 여기서 강 대표는 검찰을 괴롭히는 위의 세 가지 사안을 ‘슬쩍’ 끼워넣는다.

    “검찰이 보다 심기일전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검찰은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검찰의 여러 현안을 돌파해 나가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개추위의 공판중심주의에 관해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경찰과는 수사권 독립 문제가 있다. 또 여권과는 공수처 문제가 있다. 지금 검찰은 사면초가다. 이럴 때 이런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서도 이런 사건을 명쾌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나라당은 지금 특별검사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검찰 수사를 며칠 지켜볼 것이다. 압수수색 등 모양을 갖추어놓고 깃털만 수사하고 빠지는 그런 수사가 된다면 특별검사제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경고해둔다.”

    검찰을 자극해 검찰로 하여금 이광재 의원에게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하게 하는 ‘이검제이(以檢制李) 전략’은 5월12일 현재로선 딱 들어맞았다. 검찰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국회 의원회관 이광재 의원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국회 의원회관은 수사망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의원들에게 인식되고 있었기에 국회 압수수색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광재 의원이 “피눈물이 난다”고 심정을 밝힌 것은 검찰 압수수색이 당사자인 자신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그에게 엄청난 불안과 충격을 안겼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광재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에 깊이 참여했고,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지척에서 보좌한 만큼 그가 가진 자료가 검찰의 손에 송두리째 넘어갔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선 상당히 의미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한나라당은 유전 게이트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한꺼번에 터뜨리지 않는 운영의 묘(妙)도 발휘했다. 잊을 만하면 ‘실탄(새로운 사실)’을 공개해 유전 게이트의 불씨를 4·30 재보선 때까지 이어갔다. 이는 어떤 자료를 어떤 시점에 내놓아야 언론의 구미에 맞는 뉴스성을 갖는지를 한나라당이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3월27일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래 두 달이 되도록 한나라당은 이 사안의 생명력을 계속 이어가는 놀라운 이슈 관리능력을 보인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첫 보도 때 얼개가 대부분 드러나 있었다.

    지상전에서 압승, 공중전에서 굳히기

    조사단은 지상전에서, 당 지도부는 청와대와 여권, 검찰을 상대로 공중전을 펴는 적절한 역할 분담을 통해 재보궐 선거 쟁점화, 최초의 야 4당 공조,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 특검제 통과 등 상당한 전리품을 챙겼다.

    반대로 이광재 의원은 치명상을 입었고 청와대도 사건의 회오리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건 핵심 관계자들이 “이광재 의원 측근에 돈을 줬다”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의 대선 실패 이후 한나라당엔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당직자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정보는 반대급부가 있어야 들어온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반대급부를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안 들어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말기에 한나라당으로 쏟아지던 정보는 ‘이회창 대통령’에 대한 줄서기의 양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권 말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차기 한나라당 집권에 대한 확신도 없다.

    유전 게이트의 경우 정보가 저절로 들어오지 않아도 비리 감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한나라당은 기본으로 돌아가 또박또박 접근했다. 사건 전반을 꿰뚫고 하나하나 증거를 제시하며 단계를 밟아 나갔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결코 ‘오버’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과잉 반응하도록 적절히 자극했을 뿐이다. 결국 그것이 성공한 셈이다.

    유전 게이트의 위력은 재보선 결과가 한나라당의 일방적 승리로 마무리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한나라당은 이전의 어떤 게이트보다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이끌고 정국을 지배하면서 여권을 공세적으로 몰아붙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나라당의 유전 게이트 전략을 보면서 당 관계자가 한 말은 인상적이다.

    “폭로정치란 게 있다면 한나라당은 이번에야말로 폭로정치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회창 총재 시절, 폭로도 이렇게만 했다면 얼마든지 정권을 찾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아직 몇 가지 인화성 있는 재료를 더 갖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이기명씨와의 관련 의혹도 그중 하나다. ‘특검제 카드’를 쥔 한나라당으로선 아직도 다양한 전략전술을 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러나 일부에선 “한나라당의 유전 게이트 매니지먼트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이는 권영세 의원 등 소수의 당 인사가 주도한 것이다. 운이 따라준 측면도 많다. 대선 패배와 총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의 본류는 여전히 여당도, 야당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회의론을 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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