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가 일본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일본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40만 회원을 둔 일본 최대 교원단체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도 후소샤 역사교과서 채택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단체 산하 국민교육문화종합연구소장인 미네이 마사야(嶺井正也) 일본 센슈대 교수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반성하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 이를 요약, 소개한다.
왜곡된 내용이 담긴 일본 후소샤의 역사교과서.
가나자와 시의회의 모리 도시카즈(森一敏) 의원이 필자와 동행했다. 본래 초등학교 교사이던 모리 의원은 ‘평화교육’에 앞장섰고, 그 때문에 2000년 8월4일 가나자와 시내의 호국신사가 이른바 ‘대동아성전대비(大東亞聖戰大碑)’를 세운 것을 문제삼아 “대동아성전대비를 철거하라”고 주장하면서 ‘전쟁 미화를 허용치 않는 모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물이다.
가나자와의 윤봉길 의사
필자도 대동아성전대비를 처음 보고, 그 뒷면에 새겨진 ‘팔굉위우(八紘爲宇) 네 글자를 보고 마음이 아팠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식민지주의를 긍정하는 이른바 ‘팔굉위우’에 의한 대동아성전 때문에 총살, 암장되었기 때문이다.
노타산의 윤 의사 순국기념비와 암장터를 둘러보기에 앞서, 모리 의원은 자그마한 신사로 필자를 안내했다. 그곳은 일본이 1945년 8월15일 패전한 후 한때 731부대(일명 이시이(石井)부대)가 숨어 있던 장소라는 설명을 들었다(731부대는 인간 생체실험이라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3000명에 대한 이 만행은 1936년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 하얼빈시 남쪽의 부대 안에서 자행됐다-옮긴이).
따지고 보면 가나자와라는 고장은 메이지 시대(1867∼1912)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줄곧 바닷가의 군도(軍都)였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교육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없다.
필자가 처음으로 가나자와를 방문한 것은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립 초·중학교의 ‘학교선택제’ 도입이 이곳에서 행해질 것 같으니 그 문제점을 강연해달라고 모리 의원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학교선택제는 ‘고이즈미 구조개혁’ 교육방식의 하나로,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것이다. 이 구조개혁의 또 다른 측면은 교육에서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맞물려 일본 교육의 구조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가나자와시에 세워진 대동아성전대비를 긍정하는, 즉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등장과 학교선택제가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적 시책에는 꿍꿍이가 있다. 이런 움직임이 집약된 것이 교육기본법 개정이며, 일본 평화헌법(1946년 제정) 개정인데, 이는 한마디로 개악이다.
일방적인 왜곡
3월31일 끝난 교과서 검정 결과가 4월5일 언론에 공표됐다. 그후 신문을 비롯한 수많은 매스미디어가 후소샤가 펴낸 교과서 내용에 관해 보도했다. 이는 한국 언론에도 잘 알려졌는데, 다음은 후소샤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중 한국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신라는 독자적인 율령(율령제 국가의 기본법전-옮긴이)을 갖지 못했다. 일본은 독자적 율령을 가졌다. ▲원구(왜를 침공한 원나라-옮긴이)의 거점이 된 곳은 조선반도였다. ▲청나라에 복속돼 있던 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기를 거절했다.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국과의 합병이 필요했다. ▲한국은 일본식 성(姓)을 쓰는 것을 인정했다.
이상과 같이 일방적이고 왜곡된 역사 기술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이뤄진 조선인 징용에 대해서도 ‘법에 의한 징용’이었다고 왜곡했다.
그런데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후소샤의 교과서 검정 신청본 70권을 교원과 교육위원회 관계자들에게 미리 돌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처사다.
‘검정 심사 중에 신청 도서, 검정 의견, 수정표(修正表) 등에 관한 정보가 외부로 누출될 경우 본 심의회(교과서 검정 조사심의회를 말함-옮긴이)의 중립성과 공정성 면에서 원활한 심사에 지장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 이 때문에 표현의 자유 등에 유의하면서 공정한 심사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신청자에 대해 검정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심사 중인 신청도서에 관한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지 못하게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 문부과학성의 방침이다. 그런데 문부과학성은 이 방침을 지키지 않았고, 후소샤 교과서에 검정 합격 결정을 내렸다. 후소샤의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문부과학성이야말로 용서치 못할 존재다.
교과서 검정 자체에도 중대한 문제가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후소샤의 공민교과서 화보 부분의 다케시마(독도) 사진 설명에 문부과학성의 검정 의견이 씌어 있고, 본래는 없던 ‘불법적인’이란 표현까지 첨가되어 ‘한국이 불법 점거하는 다케시마’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문부과학성의 이런 처사가 과연 진지하게 이웃 여러 나라와 우호관계를 이루려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행보를 같이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이같이 왜곡된 후소샤 교과서의 검정을 신청해 합격시킨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은 4월5일,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 검정 합격에 처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이렇게 자화자찬했다.
“‘개정판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학습지도요령에 제시되어 있듯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애정을 깊게 하며,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키운다’고 하는 ‘목표’ 및 그것에 바탕을 둔 ‘내용’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교과서다. ‘우리나라 역사’를 우리와 핏줄이 이어진 선조들의 역사로 다루고 있다. 조상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우러나도록 씌어 있다. 교과서로서 완성도도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교실에서 배우기 쉬운 교과서가 됐다. 안심하면서 자신감을 갖고 채택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한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이는 실로 역사적 사실을 덮고 숨기려는, 일본의 미래는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기본적 입장을 내팽개친, 더욱이 ‘우리와 핏줄이 이어진 선조들의 역사’라는 단조로운 역사인식을 나열한 교과서라는 것을 스스로 폭로한 성명이다.
자화자찬도 모자라 다음과 같은 호소까지 이어진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교과서 채택의 적정화다. 4년 전처럼 외국의 내정간섭과 협박, 테러행위가 방치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삼아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상적인 채택이 이뤄지게끔, 당 회는 솔선하여 평온한 채택 환경 확보에 협력할 것을 표명하는 동시에 정부와 문부과학성을 비롯하여 전국 지방자치단체 관계자 여러분의 협력을 요청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의 내정간섭’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과 중국의 반응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난번 교과서 채택에서 후소샤의 역사교과서 채택률이 극히 낮았던 것은 이들 국가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인 수많은 양심적 일본 시민이 스스로 궐기해 대처한 결과다.
‘궐기회’의 활동
2001년 3월8일 ‘평화·인권·민주주의 교육의 위기 궐기회’(이하 ‘궐기회’)가 결성됐다(필자도 발기인 중 한 사람이다). 당시 다음과 같은 궐기문의 서명자 중에는 재일 대한기독교회 이인하(李仁夏) 명예목사도 있다.
“지금 평화, 인권, 민주주의 교육이 위기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의 취지에 따라 교육 본연의 자세를 생각하여 교육개혁을 널리 외치며 활동해온 우리는 이 위기상황을 묵인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다양한 활동을 행할 것을 결의하며 궐기하게 됐습니다. 주지하듯, ‘자유주의 역사관’을 표방하는 그룹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그룹은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부터의 탈각’을 외치며 지난날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긍정하는 역사인식의 형성을 꾀하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새역모’의 움직임입니다. 이 단체는 지금까지의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뿐 아니라, ‘자기 나라의 정사(正史)를 회복하기 위한 양식 있는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면서 자국 중심주의적이며 사실을 왜곡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검정 신청까지 했습니다. … 이것은 교육의 위기만이 아닙니다. 일본 사회 전체의 위기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등 이웃한 여러 나라가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001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군 위안부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등 왜곡된 교과서를 검정한 일본을 규탄하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
지난 1월 히로시마에서는 ‘제23회 교육문화 포럼’이 열렸다. 이날의 강연자는 류큐대 다카지마 시노부(高嶋伸欣) 교수였다. 그는 ‘이에나가 사브로(家永三郞) 교과서 재판’에 뒤이어 교과서 재판을 벌이고 있다(‘이에나가 사브로 교과서 재판’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에 정면으로 항의하며 싸워온 도쿄대 이에나가 사브로 교수가 승소한 교과서 재판으로 이름높다-옮긴이). 다카지마 교수는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는 연제의 강연에서 후소샤가 2001년에 이어 또다시 저지른 왜곡의 문제점을 강하게 성토했다.
알려지지 않은 지리교육 왜곡
다카지마 교수는 ‘알려지지 않은 지리교육의 전쟁 책임’이란 연구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논고를 통해 다카지마 교수는 후소샤의 중학 역사·공민교과서만이 문제가 아니며, 전쟁의 책임을 자각해 자기비판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 일본 지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수신과 국사 과목에서는 신화(神話)를 사실로 내세워 천황의 신격화를 유지시켜 칙어(勅語·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천황의 유시)와 어진영(천황의 사진)을 다루는 의식(儀式)과 체벌(體罰)로 공포감과 동물적 충성심을 심었다. 그 때문에 전쟁 후 강력한 사회적 반발이 나타나 전쟁 책임을 정면에서 추궁받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 지리학과 지리교육은 신화의 경우만큼 극단적으로 사실이 왜곡되지는 않았다. 본래 지리학은 지형·기후 등 자연분야가 연구대상이다. 따라서 전쟁 전과 전쟁 중 대다수 지리학자는 자원을 획득하려는 침략전쟁을 위해 자원조사에 참획(參劃)한다는 정도로 관대했다. 그러나 인문지리학 분야는 달랐다. 소위 ‘대동아(大東亞)’의 여러 민족을 멸시하고, 일본이 맹주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내용의 아시아관을 체계화했으며, 그것이 곧 황국사관이다.”
이번에는 ‘마음의 노트’를 살펴보자. ‘마음의 노트’는 문부과학성이 일본 초·중학교(국·공·사립 포함) 학생의 부교재로 만들어 2002년 4월부터 배포한 것이다. 초등학교는 저학년용과 중학년용, 고학년용이 있고, 중학교는 한 종류여서 모두 네 종(種)이다. 그것의 교육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이 풍요롭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고, 세계평화에 공헌하려 힘써왔다. … ‘야마토 정신’과 자연을 외경하고 조화하려는 마음, 종교적 정서 등은 우리 생활에서 소중하게 여겨져 왔다. 그러한 우리 선인들의 노력, 전통과 문화를 자랑삼으면서 지금부터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일본인을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 전 일본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주의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은 전혀 없으며, 다만 일본의 ‘뛰어난’ 전통과 문화만 강조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마음의 노트’를 교재로 쓰도록 강제당하는 일본 도덕교육의 기초다. 일본 청소년은 비(非)역사적인 일본 가치에 바탕을 둔 도덕교육을 받는 셈이 된다. 실로 근현대의 역사를 망각한 ‘일본인’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전쟁 전에 교육을 받은 전직 중학교 교사들은 당시 ‘교육에 관한 칙어’에 바탕을 둔 수신 교과서와 이 ‘마음의 노트’가 그 구성과 내용에서 극히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마음의 노트’는 국가에 대한 잘못된 일체감을 심어주는 내용이 되고 마는 것이다.
후소샤의 교과서는 일본의 내셔널리즘 교육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의 교육이 총체적으로 그런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데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졸업식과 입학식에서 ‘일장기 게양’, ‘국가 제창’을 전국적으로 강제하는 사태는 심각한 노릇이다.
일본에 ‘평화교육’은 없었다
필자는 교육기본법이 제정·공표된 1947년에, 오키나와현 출신의 아버지와 가고시마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가 1954년 4월이다. 전후 교육을 받고 자라난 것이다. 그런 교육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탄 피폭이다.
아시아에 대해 배운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근대국가로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저지른 처참한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한 채 대학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필자가 배운 일본의 ‘평화교육’ 내용은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에 패한 ‘피해자적’인 사항이다.
필자가 아시아 여러 나라와 그곳 국민에 대한 일본의 가해행위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인 이른바 ‘대학투쟁’(1968∼69년 도쿄대 등의 학원 분규가 각지에서 격화됐다-옮긴이)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일본에서도 조금씩이나마 일본 국가와 천황만이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로 전쟁 책임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천황신민교육 비판해야
그렇지만 그것이 전후 책임문제와 맞물려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 무렵 평화교육에서도 가해자성에 입각한 실천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일본에서는 가해자성에 입각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지가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 대응하는 것과 같은 ‘역사수정주의’파의 움직임, 교육행정에 입각한 일장기·국가 관련 강제 시책 등이 나타났다.
어째서 이렇게 됐는가.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후소샤 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교육기본법 개악의 움직임을 비판했다.
오늘과 같은 상황을 낳은 원인의 하나는 교육기본법 제정과정에서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의 수많은 침략전쟁과 그것에 공헌해온 천황신민교육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97년 국민교육문화종합연구소에서 거행한 교육문화포럼에서 필자는 ‘교육기본법의 성립과정’이란 특별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기한 바 있다.
“교육기본법의 제정과정을 보면 일본의 패전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언급하고 있으나, 아시아인에 대한 전쟁 책임에 관한 것은 일절 없다. 그것이 오늘의 종군위안부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교육이 잘못을 저질러 일본이란 국가가 망하게 됐다, 그것이 큰 문제라는 논의는 있었으나, 그 결과 아시아인이 어떤 피해를 보았냐에 대한 시각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지금도 이런 생각엔 변함이 없다. 교육기본법 제정 당시에 태어나 전후 교육을 받고 성장한 필자 자신이 실로 일본의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을 생각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생각은 명확한 것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면 후소샤 교과서 문제와 교육기본법 개악 문제에 적극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나자와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와 대동아성전대비라는 두 개의 비석을 겹쳐 떠올리며 다시금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