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도 분쟁과 교과서 왜곡 문제가 한일관계를 급속 냉각시켰지만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인 남이섬은 여전히 일본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대장금’은 홍콩에서 ‘한류’를 재점화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는 홍콩,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서 붐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영향력을 중앙아시아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국문화가 아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공유된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인지 모른다. 한국산 제품의 인기가 치솟고 있음은 물론, 한국의 의식주와 생활문화까지 아시아로 전파되는 양상이다. 도대체 한류의 실체는 무엇이며 왜 아시아인에게 이토록 강렬하게 어필하는 것일까.
- 한류의 끝은 어디일까. 한국인도 알기 어려운 한류의 본질을 이어령 교수가 두 차례에 걸쳐 ‘범아시아적 문화코드’로 풀어본다.
하지만 막은 내리지 않았다. 한류는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역사의 뒷전에 있던 문화가 이제는 정치와 경제를 끌고 가는 앞바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류(韓流)’는 우리가 만든 말이 아니다. 영어로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고 하지만, 다른 외래어처럼 영어권에서 들여온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韓’은 ‘한국’, ‘流’는 ‘흐른다’는 뜻으로,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생겨난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1999년 11월2일 베이징 청년보(靑年報)에 처음 소개된 것으로, 한국의 대중문화와 연예인에 열광하는 중국의 젊은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그러기 때문에 단순한 한자말이지만 그 뜻과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같은 ‘韓’자라도 우리에겐 자신의 이름처럼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중국인의 반응은 다르다. 월드컵 축구경기 때 세계인의 귀에 쟁쟁했던 “대~한민국”의 그 ‘한’과는 분명 다른 의미로 들을 수도 있다. 발화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같은 호칭이라도 그 문맥적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인에게 익숙한 호칭은 ‘한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요, ‘조선인’이었다. 특히 ‘조선’은 고조선 때부터 불러온 말이고, 이성계 개국 당시에는 ‘조선’과 ‘화녕(和寧)’의 두 국명 가운데 하나를 중국에서 골라 결정해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중국인에게 조선은 가깝고 한국은 멀다. ‘한국’이란 호칭에는 ‘대한제국’처럼 중화(中華)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나라, 그리고 6·25전쟁 때에는 직접 총부리를 겨눈 적대국의 이미지까지 잠재해 있다.
한류(韓流)에 숨은 한류(寒流)
더구나 동아시아의 나라 이름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화이질서(華夷秩序)를 나타내는 문화 코드의 하나였다. 역대의 중국은 하(夏), 은(殷), 주(周)를 비롯해서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그리고 마지막 청(淸)에 이르기까지 나라 이름이 전부가 외자다. 하지만 주변국들의 이름은 거의 예외 없이 두 자 이상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조선, 안남, 일본이 그렇다.
‘호칭’에서 드러나는 중화문화의 이 같은 특징은 19세기 서양의 여러 나라와 접촉하는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잉글랜드를 영국(英國)이라고 부른 것은 영웅(英雄)들의 나라라는 뜻이고, 프랑스를 법국(法國)이라 한 것은 법을 만든 나라라는 뜻이다. 도이칠란드는 덕이 있는 나라라 하여 덕국(德國)이고 아메리카는 아름답다 해서 미국(美國)이다. 모두 우호적이고 너그러운 마음에서 나온 외자 이름들이다.
그러나 헝가리 같은 나라는 흉노족과 관련이 있다 하여 ‘흉아리(匈牙利)’라고 썼고 글자도 석 자나 된다. 물론 그 나라의 이름을 한자음에 맞춰서 만든 말이기는 하지만, 그 나라의 이미지와 특성에 어울리는 글자를 골라 붙인 것이다.
이렇게 나라 이름과 관련된 중국의 한자 표기는 그 자체가 숨은 뜻을 지닌 문화코드로 사용되었듯 ‘한류’라는 조어 역시 잠재적인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韓’은 자기네와는 체제가 다른 생소함 또는 낯설음을 내포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니고 있던, 고려인이나 중국 내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 혹은 북한을 지칭하는 조선과는 분명히 다른 이질적 말이다. 동시에 한류의 ‘韓’자에는 그와 음이 같은 차가운 ‘한(寒)’의 이미지도 숨어 있다.
그래서 사실 중국사람들은 ‘한류(韓流)’를 ‘한류(寒流)’와 같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해왔다. 말할 것도 없이 한류는 ‘차가운 해류의 흐름’으로, 난류와 반대되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중국사회로 매섭게 파고 흘러들어온다는 의미다. 즉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현상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며 그 경계심과 거부감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한국의 ‘한’이 차가운 ‘한’이 되는 것은 ‘사(四)’가 ‘사(死)’로, ‘팔(八)’이 ‘발(發)’이 되는 중국인들의 오래된 문자 사용 풍습이다. 축일에 폭죽을 터뜨리는 것도 그 같은 문자 신앙에서 나온 풍습이다. ‘폭발(爆發)’이 ‘발전하다’의 ‘發’과 같고, ‘죽(竹)’이 축하의 ‘축(祝)’자와 음이 통하기 때문이다.
중국식 신조어의 문화코드로 보면 한류란 말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안티(anti) 한류’의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한류를 ‘한미(韓迷)’라고 쓰는 경우가 있어 더욱 그렇다. ‘미(迷)’는 영어의 ‘마니아’를 음역한 것이지만, ‘미로(迷路)’ ‘미아(迷兒)’ 등 여러 관련어에서 느낄 수 있듯 한국의 대중문화에 중독되어 갈팡질팡 헤매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한류라는 용어보다 앞서 대만에 등장했던 ‘하한쭈(哈韓族)’란 말을 생각해 보면 그 이미지는 더욱 명확해진다. 하한쭈는 한류와 같은 뜻이지만 ‘韓’을 ‘寒’으로 바꾸면 말라리아 같은 열병에 걸려 추위에 떠는 병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일본문화를 추종하는 ‘하르쭈(哈日族)’가 대만의 방언인 민남어로 ‘일사병(日射病)’을 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본을 나타내는 ‘日’이 뜨거운 열을 뿜는 태양의 ‘日’로도 읽히는 까닭이다.
‘중화주의’를 뒤흔드는 징후
그렇다면 한류의 ‘流’자는 어떤 문화적 코드를 나타내는가. 원래 ‘流’라는 한자는 물의 흐름이 아니라 물에 떠내려오는 시체를 가리키던 글자라고 한다. 중국에는 홍수가 잦아 냇물에 시체가 떠내려오는 일이 많았는데, 뒤에 그 글자가 물의 흐름만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白川 靜의 ‘字統’ 참고).
이렇게 글자의 기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류’ 역시 좋은 뜻을 내포한다고 할 수 없다. 흘러왔다 흘러가는 냇물의 흐름은 공자의 그 유명한 천상탄(川上嘆·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처럼 가역불가능한 시간의 무상성과 죽음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류’라는 말에는 유행, 유언비어, 유배, 유찬 등 일시적으로 근거 없이 떠다니거나 멀리 떠나버리는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단순히 ‘강물’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중립적인 의미로 쓰일 때에도 한류는 결코 ‘황하(黃河)’나 ‘장강(長江)’같이 중국을 상징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준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자문화권’이라는 말이 있듯 중화사상의 강물은 1000년 이상을 두고 언제나 동북아시아의 주변국으로 흘러갔다고 중국인들은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아시아를 관통해온 ‘화이질서(華夷秩序)’라는 강물이다.
그러기에 비록 그것이 대중문화라 해도 한류는 한국의 물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의미에서, 중국인들에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역류현상인 것이다. 중국의 과장법을 빌리자면 몇천년 동안 흘러온 황하가 요즘에 이르러서 갑자기 단류(斷流)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국민복 세대’가 주지 못한 것들
100년 전 서구의 근대 문명과 접촉했을 때만 해도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라 하여 느긋해했다. 청 말 서태후는 군함은 샀어도 서구 근대의 군대 시스템과 제도를 들여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소프트의 문화 콘텐츠가 아니라 하드만 들여왔다. 에토스는 배우려 하지 않고 결과의 실용성만을 가져오려 했다. 그 결과, 상하이의 바오산(寶山)제철소는 보석은커녕 쇳조각 하나 생산할 수 없는 제철소로 이름값도 하지 못한다는 비웃음을 샀다.
중국에 한류가 들어가기 이전에 사람들은 어째서 바오산은 한국의 포항제철이 될 수 없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대나무와 나무는 붙지 않는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중국의 근대화는 나무를 대나무에 붙이려는 것과 같다. 중국의 문화는 황하나 장강처럼 천천히 흐른다”고.
그런데 한류가 흐르는 오늘의 중국은 확실히 변했다. 옛날의 미국 부모는 밥투정하는 어린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중국에서 끼니를 굶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렴.”
그런데 오늘의 부모들은 다르다.
“얘야 밥을 안 먹으면 장차 중국 사람들과 싸울 힘이 없어 일자리를 잃게 될지 모른단다.”
13억의 중국인과 한반도의 44배가 넘는 거대한 중국대륙에서 보면 한류는 아주 작은 도랑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서용(西用)이 아니라 중체(中體·중국의 문화와 정신)를 흔드는 징후라면 황하와 장강의 물살에 변화를 일으키는 큰 강물일 수도 있다.
틀린 시각이 아니다. 중국 포털 사이트에서 ‘한류’라는 낱말을 검색해보면 ‘휴대전화 한류’ ‘바둑 한류’ ‘자동차 한류’ ‘자본 한류’ ‘한류 경제’ ‘IT 한류’와 같은 생소한 말들이 거미줄처럼 줄줄이 이어진다. ‘韓’자는 대한민국을 나타내는 약자만이 아니다.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지만 한류가 차가운 흐름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듯이 서양에서는 ‘아시아인들에 의한 아시아 대중문화의 발견’을 ‘아시안 쿨(Asian cool)’이라고 부른다.
드라마 ‘대장금’(사진 아래)이 중화문화권에서 한류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위의 사진은 대장금에 출연한 탤런트 지진희를 보러 나온 홍콩 시민들.
한류의 노래, 한류의 영상이 범상치 않게 젊은이들의 열정을 사로잡는 것도 그러한 권력이동의 하나다. 국민복을 입은 이데올로기의 혁명 세대가 주지 못한 것, 그리고 번영과 성장의 세대가 바빠서 주지 못한 것을 중국인들은 원했다. 그때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신나는 한국의 가요와 춤이 있었다는 것, TV드라마의 재미나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이 있었다는 것, 꿈꿔온 애인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한류의 방아쇠를 당긴 힘이다. 감동과 즐거움을 부가가치로 삼는 문화산업이 그 뒷받침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류라는 말에 ‘신(新)’자를 붙여 ‘신한류’라부르기도 한다.
1990년대 초부터 대만, 홍콩 등 중화문화권의 외곽에 처음으로 떨어진 한국 대중문화의 물방울이 모여 중국대륙을 관통하는 강물이 되고, 그 흐름이 바다를 건너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로 번지고, 서북쪽으로는 몽골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윽고 동쪽의 끝으로 일본 열도에 ‘쓰나미’를 일으키면서 한류는 이제 대중문화에서 생활문화로, 사회현상으로, 경제시장의 양상으로, 그리고 국가 이미지의 변화단계로 확충되고 있다.
한류를 중국 시각에서 보면 황하문화의 역류현상이지만 한국측에서 보면 주변문화가 중심문화의 수원(水源)으로 반전하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다. 한류의 ‘流’자는 ‘電流’의 ‘流’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배전소나 변전소 구실밖에 하지 못하던 한국문화의 위상이 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급속히 격상되고 있는 양상이다.
문화 수신국에서 문화 발신국으로
한국의 문화는 근대 이전 중국에서, 그리고 근대 이후 서양과 일본에서 줄곧 받아오기만 하던 달빛의 문화였다. 문화 수신국이요, 문화 소비국이었다. 그러던 한국이 후기 근대의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문화 발신국이요, 문화 생산국으로 반전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정한 한류의 시작이요 그 의미다.
왜 지금 한류인가. 왜 지금 아시아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한류 붐이 일고 있는가. 그 발생 배경을 캐 올라가면 한류 현상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세계 문명의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냉전이 종식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13억의 중국인이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죽의 장막’ 속에 살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장주의 경제로 바뀌지 않았더라면, 세계가 ‘물건을 만드는 산업’에서 ‘마음을 소통시키는 산업’으로 변하지 않고 ‘규모의 경제’가 ‘범위의 경제’로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정보혁명이 일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젊은이들이 CCTV로 외화를 즐기고 CD와 MP3로 한국의 팝을 손쉽게 들을 수 있는 뉴미디어와 접할 수 없었더라면 한류란 말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천지인(天地人)의 삼함일치(三函一致), 유불선 삼교가 회통(回通)하는 동북아의 전통적 문화 공유기반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동북아에서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간 문명 충돌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한류현상과 한류라는 말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류의 문화코드는 ‘한류’라는 한자 분석을 통해서 어느 정도 기본적 해독이 가능하다. 하지만 드라마 ‘겨울연가’를 기폭제로 하여 쓰나미처럼 일고 있는 일본의 한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G7에 진입한 일본,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라는 일본, ‘문명의 충돌’이라는 세계의 화두를 몰고 온 헌팅턴도 아시아 문명권과는 별개의 독자적 문명으로 분류한 일본. 그런 일본에서 이는 한류가 이제 막 시장경제에 낯을 익혀가는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일고 있는 한류와 같을 수 있겠는가. 누구나 반문하는 의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대표팀과 응원단이 아시아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 한류의 기폭제가 됐다.
‘사랑이 뭐길래’에 고무된 중국 남성들 사이에선 아내보다 일찍 직장에서 돌아와 저녁밥을 짓던 평소의 관습을 깨고 바깥에서 놀다 늦게 돌아오는 유행이 일기도 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중국 여성이나 젊은 층에게도 작가 김수현의 재능과 준수한 탤런트들의 연기력이 가미된, 한국인의 밝고 자유로운 사랑 이야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대중문화는 홍콩과 대만의 대중문화만으로는 부족하던 중국인들의 문화 욕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시차와 온도차가 있을 뿐 일본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본격적 한류 붐이 일본에서 일어난 것은 2004년 4월 NHK의 위성방송을 통해서 TV 드라마 ‘겨울소나타(겨울연가)’가 방영되면서부터다. 시청률도 중국에서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와 비슷한 15%대로,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40~50%를 점유하는 수치다. 인기도에서도 일본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경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여세를 몰고 ‘겨울연가’가 세 번 이상 앙코르 방영하게 된 것까지도 중국과 비슷하다. 이순재가 중국 남성에게 가부장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일본에서는 배용준의 청결하고 섬세한 모습이 40, 50대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시절 영국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일본 방문에서 비롯된 ‘사마(樣)’ 붐이 배용준으로 옮아가면서 ‘용사마’는 한류의 대명사가 됐다. 2004년 일본의 세태를 반영하는 연례 ‘창작 4자성어’ 대회에서 ‘樣樣樣樣’이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표기하는 조어법과 같은 현상이 일본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일본말로 4의 숫자를 “욘(용)”이라고 발음한다. 배용준의 가운데 자인 ‘용’은 넷이라는 숫자와 같기 때문에 용사마는 사마가 네 개인 4사마(樣)라는 풀이다.
다시는 어떤 인기 연예인도 ‘사마’를 네 개씩이나 갖는 ‘광영’을 누리기란 아마 힘들 것이다. 일본의 독특한 조어법인 ‘다샤레(음의 유추로 만들어내는 재담)’의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나 한류의 한을 차갑다는 ‘한(寒)’으로 바꿔 부정적 뉘앙스를 부가하듯이 ‘욘사마’ 붐 역시 일본에서 ‘욘푸렌자(ヨンプレンジャ)’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섭게 퍼지는 용사마 붐을 독감을 뜻하는 영어 ‘인플루엔자’에 빗댄 것이다. 용사마 붐은 사스 가 유행하던 때와 거의 시기적으로 겹친다. 또한 드라마 타이틀이 마침 독감이 유행하는 계절인 겨울이 들어간 ‘겨울연가’이기 때문에 붙여진 절묘한 네이밍이라 할 수 있다. 한류현상이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추위’의 이미지로 둔갑한다는 것은 우연이면서도 우연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여기엔 한류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문화 콤플렉스 현상이 중국과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한류도 ‘추위’의 이미지
어떤 붐이든 그것이 강렬한 폭발력을 지니려면 그 바닥엔 부정적인 의미나 이미지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게 대중문화의 패러독스 원리다. 이 원리는 한류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차가운 이미지의 한류가 좋은 의미로 역전되어 아시안 쿨이 되었듯이 겨울연가가 지닌 추위와 독감의 이미지는 반대로 일본인 특유의 겨울에 대한 동경심을 자극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그렇고, 미야코 하루미의 최고 히트 송 ‘후유노 야토(겨울 여인숙)’가 그렇듯 일본인에겐 묘한 ‘겨울의 북국(北國)’ 정서가 있다. 한 일본 사회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서양사람에게 ‘실연(失戀)을 하면 어디로 가겠냐’고 물으면 대개 남태평양 타히티 섬 같은 남쪽 나라로 가겠다고 대답하지만, 일본 사람은 열이면 열 모두 “홋카이도(北海島)같이 흰 눈이 쌓인 북쪽으로 간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용사마의 열풍’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용사마의 한풍’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겨울연가는 강원도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으로 일본인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스노 건이 품어내는 눈보라의 밤 신과 썰렁한 남이섬의 가로수가 자아내는 서정적인 영상미가 감상적인 여성의 심리를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작가 김수현이 한 일을 ‘겨울연가’에서는 프로듀서 윤석호가 개인적 재능과 그 취향으로 해낸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용사마의 한류 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트집을 잡고 있다. 대사나 줄거리가 일본에서 한때 유행하다 흘러간 순애물이라고 폄하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왜 2조원이 넘는 이런 순애물 시장을 그대로 놔두고 엉뚱한 트렌디 드라마에만 열중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국민복을 입은 혁명세대가 중국의 대중에게 주지 못한 것을 ‘사랑이 뭐길래’가 채워준 것처럼, 일본이나 할리우드의 연예인이 주지 못한 감동을 베드신 하나 없는 ‘겨울연가’가 채워준 것이다. “섹스 없는 사랑은 허상이요 환상”이라는 대담기사가 씌어질 때(‘중앙공론’) 일본의 한 주부는 “꿈이라도 좋다, 깨지만 말아다오”라고 고백한다(‘주간문춘’). 여러 가지 분석과 대립된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숲속에서는 숲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제3자의 입장인 서양에선 일본의 한류 붐을 어떻게 볼까.
미국 ‘뉴욕타임스’는 2005년 4월23일자 인터넷판에서 ‘한국인은 어째서 진정한 남자인가 일본 여성에게 들어보자’는 매우 자극적인 한류 기사를 올렸다. ‘6백만불의 사나이’라는 TV극을 만들어낸 미국인답게 아예 배용준을 ‘23억불의 사나이’라고 부르는 기자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인기의 절정을 지난 32세의 배우 배용준은 그가 출연한 순애물 드라마로 수많은 일본 여성을 매료시켜 최고의 인기스타로 부상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 약 23억달러의 경제효과를 가져다줬다.”
하지만 이 기사는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불확실성과 비관론에 가득찬 일본사회에서 배용준은 여성이 그려내는 과거의 향수와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감정적 유대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는 존재”라고 분석한 것이 바로 그 대목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코멘트가 이어진다.
“과거 한국을 식민지배하고, 파란 눈을 한 서양인들에게만 눈길을 주던 일본 여성들이 이제는 배용준의 인기로 한국인 남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둡고 짜증나고 냄새나는 나라’
배용준이 일제강점기 이후의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는 일본 오차노미즈대 객원교수 김은실씨는 “지금까지 일본인에게 한국은 ‘어둡고 짜증나고 냄새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배용준 팬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해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탈(脫)아시아 정책으로 근대 국가를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일본 근대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탈아시아의 역사라고 할수 있다. 한국을 식민지배한 것도, 중국대륙을 침략한 것도 모두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결과였다. 그러기에 용사마의 한류 붐은 한류가 단순히 한국의 대중문화 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역사에서 한 세기 만에 아시아로 회귀하는 복아(復亞)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적인 정치 평론이나 논평, 추론이 아니라 실제로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TV 광고에 배용준은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의 출연료를 웃도는 개런티를 받고 등장했다. ‘겨울연가’의 한류 붐을 중년층 여성 마니아들의 변태적인 반응으로 몰아가려는 일본인일수록 시대착오적인 탈아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일본 남성이 군국주의를 일으켰다면 일본 여성은 군국주의의 희생자인 측면이 있다.
한류가 중국에선 변화에 가장 민감한 1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난 것처럼 일본의 한류는 10년의 불황과 그 전환을 가장 많이 체험한 주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국가라는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개인의 마음으로 한국을 본다. 그것이 용사마를 통한 한국인관(觀)이다. 어차피 환상이라면 국가의 환상과 주부의 환상 중 어느 쪽이 더 리얼한 것일까.
지금과 같은 일본의 한류 붐은 처음이 아니다. 1000년 전 아스카 문화는 백제를 비롯한 한국에서 전래된 한류가 만든 것이다. 2차 한류는 12번에 걸쳐 경서와 시와 그림을 가져와 일본을 들끓게 한 조선통신사였다. 그리고 이번의 한류는 TV 드라마나 DVD 타이틀 같은 안방극장으로, 3차 한류다.
일본과 중국은 정치 체제도 다르고 대중의 의식이나 문화시장도 다르다. 동남아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본 뒤 한국의 주방기구를 장만하거나 한국산 화장품을 구매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긴 힘들다. 중국에선 한국의 성형수술이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성형수술을 터부시하고 있어 수술 사실이 알려질 경우 파혼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중국, 동남아, 일본에서 일고 있는 한류에는 공통적 흐름이 있다. 이질적인 것을 뛰어넘는 아시아적인 동질성이 한류 붐에 녹아 있다. 종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한류라는 큰 흐름 속에 하나가 되는 ‘로컬리즘’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대중을 이루는 하나하나는 국가의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개인 차원에서 한국의 문화를 맛보고 공감하는 감정의 유대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류의 의미는 소비로서의 대중문화 자체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류는 어쩌면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고 의식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아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할리우드 문화의 아시아 버전일 뿐이어서 독창성과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을 하나로 꿰뚫는 어떤 문화적 동질성이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한류가 하나의 아시아의 지도를 그려가고 있다. 이 때문에 새 문명의 씨앗을 한류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은 물론 수십억이 넘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인이 같은 드라마, 같은 노래에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문화적 유대를 맺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한류의 전파국인 한국은 작고, 남의 나라를 제압할 만큼 강한 나라도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의 괴롭힘을 주지 않은 나라다. 그러니 한류는 문화제국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다음 호에 하편이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