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그레이스 켈리 결혼에 개막식 늦추고, 알랭 들롱엔 苦杯 여덟 잔 안겨

  • 글: 조재룡 성균관대 강사·불문학 rythme@dreamwiz.com

    입력2005-05-25 11:5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올해로 58회를 맞은 칸 영화제. 올해도 각국에서 온 스타들이 플래시가 터지는 붉은 카펫에 발을 들여놓았고, 열광하는 군중은 한치라도 가까이에서 이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 브리지트 바르도와 소피아 로렌에서부터 이자벨 아자니와 궁리에 이르기까지,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이르기까지, 스타가 없는 칸은 상상할 수 없다.
    • 이들을 ‘진정한 스타’로 거듭나게 하는 곳 역시 칸이다.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스타는 대중의 사랑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대중은 스타의 운명을 부러워하고 스타를 거울삼아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이처럼 스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환상에 기인한다면, 이런 환상은 스타가 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탄력을 받는다. 스타라는 존재는 하나의 아바타를 창조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대중에게 감질나게 제공함으로써 성립한다. 스타란 결국 머리칼을 뽑아 수많은 분신을 창조한 손오공의 요술처럼 신비에 싸인 자신의 이미지를 복제해 무한히 증식시킴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하는 존재이다.

    올해로 58회를 맞은 칸 영화제는 이런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최상의 기회를 스타에게 제공했고, 페스티벌 고유의 권위로 스타를 ‘진정한 스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물론 칸 역시 스타의 존재와 역할을 적절히 이용해 명성을 유지했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제사장이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이후 줄곧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 사이에 재림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마다 열리는 칸 영화제에서는 만질 수 없는 스타들이 필름에서 나와 이내 사라져버릴 자신들의 한시적인 모습을 대중 앞에 잠깐이나마 직접 제공하기 때문에 스타가 탄생한다”고 했다.

    어쨌든 칸은 스타와 하나가 되어 그때마다 고유한 우상을 탄생시켰다. 어찌 보면 칸은 그 어떤 영화제보다 스타를 길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심지어 매우 의도적으로 스타의 존재를 영화제 전면에 부각시켰다.

    프랑스 영화사를 잠시 돌이켜보면 칸이 의도적으로 스타라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탄생한 지 10년쯤 지난 1910년대 프랑스 영화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타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당시 연극을 주업으로 삼던 배우들이 영화 출연을 가끔씩 즐기는 나들이 정도로 여긴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 출연료가 급등할 것이라고 판단한 영화사측에서 이들이 스타로 부각되는 통로 자체를 고의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프랑스 영화인들의 ‘절약 정신’은 할리우드에 영화산업의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프랑스 영화인들은 스타라는 존재가 고도의 상업적 능력을 갖춘 산업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스타에 대한 프랑스 영화의 적대적인 태도는 191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스타 시스템을 도입해 최대한 활용한 할리우드와 대조적인 양상을 띤다. 한 예로 당시 프랑스 연극계 최고의 여배우로 꼽히던 사라 베르나르의 세계적인 명성을 이용해 스타 시스템에 박차를 가한 사람은 아돌프 주커라는 젊은 미국인이다. 스타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했던 주커는 이후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설립해 1960년대까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 배경에는 스타의 이미지를 대중의 가슴 깊이 각인시키면서 생겨나는 시너지 효과가 자리잡고 있었다. 영화산업이 도박의 성질을 띤다는 사실, 매번 펼쳐지는 도박판의 클라이맥스를 드라마틱하게 조절하는 매혹적인 딜러가 바로 스타라는 사실을 주커는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날 칸 영화제에서 스타의 존재에 주목하고 나아가 스타를 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교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둔했던 선배들과 달리 칸 영화제 관계자들은 스타의 존재가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인식은 칸이 다른 영화제에 견주어 독특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스타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키워낸 원동력이 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칸에서는 스타 대신 ‘인기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얼마 후 칸에는 반전과 혁명으로 물든 격정의 1970년대가 밀려온다. 그리고 격정과 낭만이 조용히 물러난 1980년대 ‘이성의 공간’에서는 인기인이라는 순진하고 소박한 허울을 벗어던지고 ‘구매자 시장’의 총아로 변모한 스타들이 나타난다. 칸은 이런 변화에 맞춰 오랜 시간 고수해온 엘리트주의와 예술주의의 전반적인 경향을 뒤엎고 만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스타들을 적극 감싸안았다.

    1960년대 칸을 방문한 이른바 인기인들의 삶은 198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스타들에 비해 훨씬 소박하고 인간적이었다. 이는 당시 칸 영화제가 오늘날처럼 본격적인 영화시장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기보다 순수한 페스티벌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당시 칸에 참석한 배우들은 한층 인간적이고 친숙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고, 칸 또한 배우와 대중의 직접적인 교감을 중시하면서 축제의 기능에 더 무게를 뒀다. 그런 까닭에 1960년대는 ‘매혹의 향기’를 담은 칵테일 한잔을 주고받으며 은밀한 약속을 보장받아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은 스타의 길이 열리는 낭만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낭만은 당시의 인기인들이 마치 올림픽에 참여한다는 기분으로 칸에 왔기에 한결 더했다. 1954년 실바나 만가노, 로사나 포테스타, 지나 롤로브리지다, 소피아 로렌을 포함해 총 12명의 단출한 규모로 칸을 방문한 이탈리아 ‘대표단’의 경우 단복을 입고 손에 국기만 흔들면 영락없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꼴이었다. 어쩌면 이들 자신도 자국을 대표한다는 긍지를 가슴에 품고 칸에 당도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1960년대 칸을 방문한 인기인들은 오늘날처럼 군중의 물결에 떠밀려 숨막혀할 염려가 없었으며, 보디가드 없이도 행사 퍼레이드에 별걱정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영화제 기간 내내 마음놓고 칸의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는데, 이런 모습을 지켜본 칸의 주민들 또한 고작해야 매혹적인 여배우의 이브닝드레스나 수영복을 힐끗거렸을 뿐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20세를 갓 넘긴 잔 모로가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자(1960년, 13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와 영화 관계자들이 함께한 만찬 테이블 위로 올라가 하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자유분방하게 춤을 췄다는 에피소드는 당시 칸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후 잔 모로는 다시 칸을 방문하면서 차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배우로 성장했다.

    잔 모로뿐 아니라 몇몇 스타는 나이에 비해 조숙한 모습을 칸에 드러냄으로써 칸 영화제를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는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경우인데, 대표적으로 브리지트 바르도와 킴 노박을 꼽을 수 있다. 바르도는 당시 19세의 어린 나이에 칸에 입성, 프랑스 영화 역사상 가장 선정적인 포즈를 선보이며 선풍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또 킴 노박이 1956년 칸에 참석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그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 ‘피크닉’(1955년)과 ‘황금 팔을 가진 사나이’(1955년)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음에도 대다수 기자들은 그의 고혹적인 자태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프랑스와 트뤼포는 당시 칸에서 킴 노박을 처음 대면했을 때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킴 노박은 마릴린 먼로의 관능미에 로렌스 바칼의 위엄이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지적이며 문화적으로도 매우 성숙한 소양을 갖고 있습니다. 칸의 모든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 긴밀하고 바쁘게 움직입니다. 만약 그녀가 플래시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기자들은 10초 동안에 10개의 다양한 포즈도 찍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약 반세기 동안 칸을 왕래한 스타들의 모습을 기록한 것은 플래시와 함께 남겨진 사진들, 그리고 때때로 과장으로 점철된 기사들이다. 물론 기자들 앞에선 스타들 또한 의기양양한 모습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쉽게 부서질 듯한 가련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등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동원했다. 칸 역시 스타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창출하게끔 배려했으며, 스타들의 변덕을 잘 참아냈고, 스타들의 전략을 적절히 이용해 영화제가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이렇게 탄생한 스타들과 그들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언론을 통해 세계 대중에게 당도하게 됐다.

    어떤 의도에서건 칸은 일찍이 스타들을 배려해왔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왕자와 결혼식을 올리느라 불가피하게 영화제 참석이 늦어지자 칸은 그레이스 켈리의 스케줄에 맞춰 개막 시간을 조절하는 ‘인내’를 보였다. 리타 헤이워스 같은 스타는 칸에서 미래의 남편감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인기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더는 흑백의 상태로 머물지 않듯 스타 자신과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도 세월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특히 히피 문화와 록앤롤의 열정이 진정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런 변화를 알리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스타들 스스로 자신의 노출 자체를 ‘비싸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칸을 찾은 스타들은 십중팔구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육중한 보디가드들의 검은 어깨 사이로 가끔씩 드러나는 이들의 몸값은 항상 치밀하게 계산돼 있었다.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을 신중하게 선별해 그 시간에만 카메라 플래시 앞에 노출되기를 원했고, 이마저 끝나면 매듭 풀린 풍선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듯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스타를 직접 볼 수 있는 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더는 인간적이고 순진한 인기인이 아닌 스타들은 자신들의 몸값을 정확히 계산한 후 사진과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때문인지 1980년대 칸 영화제에서 스타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 텔레비전에서 칸을 소개하는 시간과 일치했다.

    매일 아침 140여 개의 카메라가 행사장 궁전의 테라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스타들은 상기된 얼굴로 붉은 카펫 위를 단 몇 초만 거닐 뿐이다. 결코 10분을 넘기는 적이 없는 인터뷰에 응하고, 이내 카펫 위를 휙 지나 철두철미하게 방비된 화려한 고급 호텔의 휴식처로 다시 사라진다. 사람들과 어울려 해변에서 노니는 스타는 이미 스타가 아니다.

    스타 자신과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다고 해도 스타는 스타다. 감추는 것이 많을수록 알아내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 역시 커져만 간다. 그러기에 아무리 피하려 해도 카메라와 기자의 펜은 항상 스타의 뒤를 좇을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지난 50년간 칸을 빛낸 스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 브리지트 바르도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브리지트 바르도는 비교적 어린 나이인 19세 때 영화감독 로제 바딤의 팔짱을 끼고 칸 영화제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바딤은 자신의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년)에 필요한 자금을 대줄 투자자를 칸에서 찾고 있었다. 바딤 곁에 ‘묻어온’ 바르도는 칸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칸에서 알게 된 영화 관계자들과 고위 관리들을 대상으로 신분상승에 필요한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딤과 함께 칸을 방문한 브리지트 바르도의 모습을 묘사한 당시의 기사에는 “찬양자들의 행렬에 둘러싸인 젊은 여배우는 몹시 매력적이고 한없이 귀여웠으며 그녀의 모습은 오로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 있다. 이렇듯 칸을 찾아온 19세의 귀엽고 도발적인 젊은 여배우는 이후 세계적인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당시 수많은 사진기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르도의 모습은 한마디로 ‘포즈’였다. 빨간색 자동차 위에 수영복 차림의 그는 어린 나이에 배어 있게 마련인 천진한 이미지에다 요염함을 극단적으로 포갬으로써 긴장감을 증폭시켰고, 이런 긴장감은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처럼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이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67년 칸을 다시 찾은 바르도는 그때껏 선호하던 붉은색을 벗어던지고 정중해 보이는 검고 진한 파티복 차림으로 나타나서 대중을 놀라게 했다. 칸에서 도발적인 이미지로 사람들의 얼을 빼놓은 그는 이후 쇄도하는 출연 제의를 모두 거부하고 미쉘 시몽의 ‘늙은이’와 ‘아이’에 출연하고 이 작품으로 칸의 문을 다시 두드린다. 하지만 수상은 물론 본선 진출에도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칸에서 영화보다 스캔들 주인공으로 더 유명했던 바르도는 실제 칸에서 어떤 남자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진한 갈색 머리가 매혹적인 이탈리아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1952년부터 칸을 자주 왕래한 스타 중 한 명이다. 특히 예쁜 가슴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분홍색 드레스와 검은 눈을 더욱 진하게 해주는 마스카라는 수차례 칸을 방문하면서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고수한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몇 편 되지 않은 영화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는 마릴린 먼로,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브리지트 바르도, 소피아 로렌과 더불어 섹스 심벌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연기력도 매우 뛰어났다. ‘튤립 팡팡’(1952년, 5회) ‘시골여자’(1953년, 6회) ‘위대한 게임’(1954년, 7회) ‘왕, 왕비, 기사’(1972년, 25회) 등 네 편의 영화로 칸을 방문한 그는 그때마다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 않았다.

    1991년 다시 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롤로브리지다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긴 목덜미 주위를 두르는 치장 또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0년 만에 칸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요즘 영화 출연 제의를 받지 않는다”고 기자들 앞에서 투덜거리기도 했다. 64세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영화에 복귀할 꿈을 꿨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순진하고 스타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자신의 명성과 아름다운 자태가 만들어놓은 환상의 궁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팬들도 과거를 회상하며 롤로브리지다가 만들어놓은 궁전의 문을 여전히 기웃거리고 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칸 역사상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주목을 끈 스타다. 1957년 처음 칸에 왔을 당시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평범한 여배우에 불과했다. 또 칸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도 쉽사리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칸을 방문했다기보다 남편이자 영화 제작자이던 마이크 토드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선전하기 위해 참석한 듯하다. 이후 남편의 죽음, 질병, 약물 과용, 반복되는 이혼과 재혼 등을 통해 그는 영화보다 스캔들 주인공으로 부각됐다. 그는 이따금 칸을 방문했지만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캔들을 변명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할리우드를 상징하듯 붉은 옷차림을 하고 휘날리는 머리칼 위에 군용 모자를 쓴 채 1993년 칸을 다시 찾았을 때조차 테일러는 영화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 헌신적으로 일해온 에이즈 퇴치 운동의 일환으로 칸을 거닐었을 뿐이다. 그는 영화 외의 목적으로 칸을 자주 찾은 대표적인 스타다.

    [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마스트로이안니처럼 자주 칸을 방문한 배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확한 횟수를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다. 2회에 한 번, 최소 스무 번 이상을 방문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칸과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 멋쟁이 이탈리아 배우는 칸 영화제가 극심한 변화를 겪을 때마다 항상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자신의 소견을 밝힐 뿐이었다.

    이따금 영화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던 그는 스타들에게서 으레 목격되기 마련인 속물 근성에 빠져드는 일도 없었다. 과격한 발언을 일절 삼갔기 때문에 칸에서 그는 배우라기보다 오히려 노련한 정치인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대부분 스타들과 달리 마스트로이안니는 그저 칸에 ‘들른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그는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질투의 드라마’(1970년, 23회)와 니키타 미하일로프 감독의 ‘다크 아이즈’(1987년, 40회)를 통해 ‘조용히’ 두 번의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티 나지 않게 칸을 왕래하던 그도 칸에서 겪은 두 가지 별난 에피소드를 고백해 눈길을 끈다. 펠리니의 ‘여인들의 도시’(1980년, 33회)가 상영된 다음날 ‘리베라시옹’ 신문에 “펠리니가 죽었다”는 오보 기사가 났다. 아침 일찍 이 기사를 본 펠리니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우리 빨리 여길 떠나는 게 좋겠어.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야”라고 말하면서 전날 파티에서 쌓인 피로로 곯아떨어져 있던 마스트로이안니를 흔들어 깨웠다고 한다. 이 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죽은 자’답게 서둘러 칸에서 빠져나와 로마로 향했고, 기차 안에서 태연히 식사를 즐겼다고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탈리아 여감독 릴리아나 카바니의 ‘살결’(1981년, 34회)을 위해서 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 상영이 끝나고 호텔 로비를 지나는데 관객 한 명이 그를 향해 “엿 먹어라”며 비아냥거린 것. 하지만 그는 놀라기는커녕 침착한 모습으로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게”라고 대답했고, 옆에서 우연히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기자가 이 이야기를 신문에 실었다.

    칸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마스트로이안니가 느낀 감정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칸 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고립되어 있었다거나 심지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누구보다 칸을 자주 왕래했지만, 그만큼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 소피아 로렌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소피아 로렌이야말로 칸을 통해서 능력 이상의 것을 얻어간 배우다.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이 이탈리아 여배우는 다른 배우들에 견주어 ‘약간 더’ 위대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더’ 매력적인 입, ‘약간 더’ 요염한 가슴, ‘약간 더’ 긴 다리, ‘약간 더’ 증오와 우수를 담아낼 줄 아는 눈동자를 소유한 그에게 칸이라는 ‘공식적인 경쟁의 무대’가 펼쳐지지 않았다면 그저 자국 내에서 벌이는 경쟁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 앞다퉈 그와 롤로브리지다를 비교하며 스타 만들기에 열을 올리던 공간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바로 칸이었다.

    소피아 로렌은 자나 롤로브리지다와 차별되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장점이 비극을 연기할 줄 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수상 운이 따르지 않은 롤로브리지다와 달리 소피아 로렌은 1961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두 여인’(14회)에서 장 폴 벨몽도와 호흡을 맞추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특별한 하루’(1977년, 30회)에서는 마스트로이안니 곁에서 수녀복을 입고 비련의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1966년 소피아 로렌은 칸 영화제에서 보수주의 영화 관계자들과 작가들에 둘러싸여 심사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정작 영화제가 열리자 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심사위원장은 자리를 비웠는데, 그는 같은 날 영국 런던에서 자신이 출연한 ‘홍콩의 공작부인’을 보고 있었다.

    [ 잔 모로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프랑스 여배우 잔 모로는 1997년 칸 영화제 50주년 행사의 절정을 상징하는 개막식과 폐막식을 모두 선언하는 영광을 얻는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1960년 이후 그는 칸 영화제에 꼭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칸과 함께 성장했다고 할 만큼 칸이 주는 온갖 혜택을 독차지해온 잔 모로는 배우로서 갖추어야 할 권위와 지성, 변하지 않는 매력을 통해서 칸에 은혜를 되돌렸다. 그와 칸은 마치 궁합이 잘 맞는 커플과 같았다. 배우로서의 커리어 자체가 바로 칸이라고 할 정도였다. 50주년 당시 인터뷰에서 잔 모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배우에 필요한 기초 과정을 연마한 것은 바로 칸 영화제를 통해서다. 칸에 처음 머물던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영화의 모든 과정을 알게 됐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거나 때론 패배의 상처를 어루만졌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선배들에게서 위로를 받았으며, 나 또한 후배들을 위로했다. 지금은 낡아버린 칸의 복도를 지나면서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났고, 오손 웰스를 재발견할 기회를 갖게 됐으며, 통역도 했다. 칸의 빛바랜 계단을 오르내리며 몇몇 동료 여배우들을 추락시키기도 했다. 칸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다시 시작되어야 했고, 그때마다 내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 킴 노박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킴 노박은 칸 영화제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여왕 중의 여왕이었다. 하얀 머리칼에서 우러나오는 폭발적인 매력을 바탕으로 부드러움과 정열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동시에 연출했던 이 여배우야말로 칸의 관계자들이 모두 함께하는 저녁 만찬에서 항상 톱을 차지했다. 1959년 ‘밤의 한가운데’로 처음 칸을 방문한 킴 노박에 대해 프랑수아 트뤼포는 ‘아트’와 한 인터뷰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4년 후 그는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으로 다시 칸을 방문한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외모뿐 아니라 연기로도 인정을 받는다.

    한편 칸에서 그의 곁에는 항상 브리지트 바르도가 있었다. 이 두 여배우는 서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회상 속의 여인’(1955년, 8회)으로 처음 칸의 문을 두드린 그레이스 켈리는 칸 영화제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패션을 창출한 이지적인 스타였다. 칸에서 선보인 그레이스 켈리풍의 옷차림은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칸은 그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정성껏 대우해줬다.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자의 결혼식에 맞추어 개막 시간을 연장하는 ‘애정’을 보였고, 그레이스 켈리가 방문할 때면 어떤 배우보다 정중하게 맞이했다. 숱한 염문으로 결혼 생활이 파국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아픔을 달래고 스타로서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었고, 1982년 자동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를 프랑스를 대표해서 추도한 것도 칸이었다. 그는 1955년과 1978년 단 두 차례만 영화를 통해 칸을 방문했고, 주로 영화 외적인 일로 칸을 자주 찾았다.

    [ 이자벨 아자니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칸은 고혹적인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하는 데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아직은 젊은 이 여배우에게 1997년 심사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김으로써 칸은 그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자벨 아자니에 대한 칸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은 칸에 출품한 그의 영화 목록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76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임대인’을 시작으로 1994년 ‘여왕 마고’에 이르기까지 총 여덟 편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목록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태작(?作·보잘것없는 작품)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1993년 출품한 ‘중독’은 이자벨 아자니가 열연하지 않았다면 결코 칸에 출품되지 못했을 작품으로 평가된다. 칸은 평범하던 이 여배우가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진정한 스타로 거듭나는 순간을 애정어린 눈으로 묵묵히 지켜보는 것만으론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 알랭 들롱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수없이 칸을 드나든 배우 중에서 수상과 인연을 맺지 못한 스타로 단연 알랭 들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여덟 차례나 작품을 가지고 칸을 방문했지만 남우주연상 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1960년대 처음 칸을 찾았을 때부터 이미 그는 스타였지만 칸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수상 범위 안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1960년대에는 감독들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이처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에클립스’(1962년, 15회)로 특별상을 수상하고,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살쾡이’(1963년 16회)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때 두 영화의 주인공인 알랭 들롱은 박수를 보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알랭 들롱과 칸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반항적 이미지를 한껏 담은 두 작품을 가지고 1968년 칸을 찾았을 때는 6·8혁명으로 갑작스레 영화제가 중단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1976년 ‘미스터 클레인’으로 다시 칸을 노크했을 때 수상을 노리기에는 영화 자체가 수준 미달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틴 스콜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1990년대 들어 그와 칸의 악연은 한 번 더 되풀이된다. 고다르의 ‘누벨바그’(1990년)와 ‘카사노바의 귀환’(1992년)을 내세워 칸의 품에 안기고자 했던 알랭 들롱은 자신과 함께 ‘암흑가의 두 사람’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신인 배우에 불과하던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시라노’(1990년)를 통해 한껏 성장한 모습을 보는 데 만족해야 했고, 1992년에는 ‘플레이어’의 팀 로빈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칸 영화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인생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이정표 노릇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칸은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프랑스와 미국 문화의 교량으로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주목했고, 그 역시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한낱 B급 배우에 지나지 않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진정한 감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한 고비 고비에는 칸의 배려와 안목이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페일 라이더’(1985년, 38회) ‘버드’(1988년, 41회) ‘추악한 사냥꾼’(1990년, 43회)으로 감독이자 배우로서 칸의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버드’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4년 47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이후 두 차례나 비공식 경쟁부분에 초청받았다.

    [ 궁리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흔히 1990년대 칸 영화제의 특징을 다양성의 반영에 있다고 평한다. 우선 칸은 중국 영화에 대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일본 영화 붐이 사라진 후 칸에는 장이모, 후샤오센, 첸 카이거, 왕자웨이를 위시로 일종의 중국 커넥션이 구축된다. 이는 이 감독들의 영화가 칸 영화제 수상 범위 안에 들었음을 말한다.

    1993년 46회 칸 영화제에서 ‘패왕별희’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아시아 영화의 파워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상 선정의 배경과 문제점들도 표출됐다. 즉 칸에서 수상한 아시아 영화들이 과연 진정한 아시아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지, 나아가 서양의 구미에 맞춰 각색된 아시아의 모습은 아닌지에 대한 질문들이 영화 비평지에서 거론되곤 했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궁리라는 아시아계 슈퍼스타가 탄생한다. 칸의 관계자들과 평론가들은 그의 표정에 묻어 있는 동양의 분노와 깊이 감춰진 슬픔에 관심을 가졌다. 궁리의 얼굴에 담긴 표정은 그들이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얼굴, 새로운 이미지였다. 붉은색의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궁리의 모습은 칸의 붉은색 카펫과 매우 잘 어울렸고, 당당하게 파리에 입성해 샹젤리제 거리에서 수많은 팬에 둘러싸인 궁리는 회색 톤의 12차로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 그 자체였다.

    [ 샤론 스톤 ]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칸 영화제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유럽과 동구권 영화를 위시해 탄탄하게 구축된 아카데믹한 경향을 헤집고 어떻게 할리우드 영화가 칸에 입성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흥미롭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의 칸 입성은 쉽지 않았다.

    1992년 ‘원초적 본능’이 칸에 도착하자 영화 관계자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심지어 칸 영화제를 아예 없애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드뷔시관(館)에서 ‘원초적 본능’을 관람하고 나온 관객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당당히 인터뷰에 응하는 샤론 스톤을 보고는 마치 ‘전기 쇼크’를 받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가 칸에서 대중을 향해 손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 관객 대다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시아의 발견에 버금가는 1990년대 칸 영화제의 또 다른 경향은 바로 할리우드 영화의 대거 등장이다. 1990년대 칸에는 두 종류의 미국 영화가 존재했는데, 우선 ‘궁전’에서 화려하게 개막되는 영화들과 조그마한 스튜디오 한 칸을 빌려 외로이 칸의 문을 두드리는 소위 독립영화들이었다.

    사실 영화란 텔레비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커다란 화면에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장면과 이에 부합하는 스타들의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이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전 개막용은 선정적인 여배우를 앞세워 이들을 스타로 만드는 데 열중하는 영화들이었다. 스타의 존재는 칸 영화제에서 더욱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이런 상황에서 샤론 스톤이 칸을 찾은 것이다. 칸 관계자들은 한편으론 불편한 심기로, 한편으론 매우 적극적으로 ‘원초적 본능’을 이야기하면서 샤론 스톤의 영화 경력을 살피게 된다.

    칸(Cannes)을 빛낸 스타들

    1990년대 이후 미국 영화가 칸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칸을 빛낸 스타는 비단 배우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축제의 중요한 목적이 예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의 발견에 있다면 칸의 진정한 수혜자는 감독들이다. 칸 영화제는 평범한 영화인들이 절치부심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나아가 세계 영화사에 족적을 남기는 감독이 되도록 지원과 배려를 아까지 않았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칸을 통해서 스타로 떠오른 전형적인 감독이다. 1989년 처녀작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를 가지고 칸을 방문했을 때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질 자콥이 이 무명의 감독에게 주저 없이 황금종려상을 주었다. 이처럼 능력 있는 ‘올챙이’ 감독을 적극 발굴해 스타로 만드는 일은 칸이 수행하는 중요 임무였다. 처녀작을 출품해 수상의 영광을 맛본 감독은 소더버그뿐이 아니었다. 알란 파커, 나니 모레티, 파벨 롱긴, 라르 본 트리에 등은 모두 칸이 처음 주목한 후 오늘날 세계적인 스타 감독으로 부상했다.

    물론 처녀작이 아니어도 초기작으로 칸의 주목을 받은 감독도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우스키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칸에서 얻은 명성을 토대로 자신들의 커리어를 구축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이 두 감독이 칸 영화제에 앞서서 베를린 영화제에서 먼저 부각된 데에 따른 칸의 경쟁심과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칸에서 스타로 부각된 감독들 중 토르나토레와 루이스 부뉴엘은 좀 각별하다. 만약 ‘시네마 천국’이 1989년 42회 칸 영화제에 출품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토르나토레 감독이 이처럼 강렬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충격적인 영화를 선보이며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긋던 루이스 부뉴엘이 대중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게 된 데에는 ‘바리디아나’(1961년, 14회)의 황금종려상 수상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면 과장된 말일까.

    일상을 지배하면서도 억눌려 있던 성, 정치, 권력, 종교, 욕망의 담론을 프랑스와 멕시코, 미국을 배경으로 다양한 화면 속에 충격적으로 담아내면서 오늘날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으로 부각된 부뉴엘이 난해함의 틀을 벗고 대중에게 한층 친숙하게 다가가는 데는 칸 영화제 수상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드레이 와이다의 활약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그에게 폴란드 최고의 영화감독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면, 이런 평가 이면에는 칸에서 활약한 다양한 이력이 밑바침하고 있을 것이다. 와이다는 스타 감독이 되는 데 필요한 커리어를 칸에서 쌓았다고 할 정도로 1957년부터 1997년에 이르기까지 총 아홉 차례나 출품했고 1981년 ‘철의 인간’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네 차례나 수상의 범위 안에 들었다. 와이다야말로 칸이 주목해 발굴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키운 대표적인 동구권 감독이다.

    유고의 에릴 쿠리트리카 또한 칸에서 주목받아 세계에 알려진 대표적인 감독이다. 총 네 번 출품하여 ‘아빠는 출장 중’(1985년, 37회)과 ‘언더그라운드’(1995년, 47회)로 두 번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총 다섯 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캔 로치는 칸 영화제를 절치부심하는 계기로 삼아 스타의 반열에 올라선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는 1981년 ‘룩스 앤 스마일’, 1991년 ‘리프 라프’, 1993년 ‘레이닝 스톤’을 칸에 출품했는데, 비평가들로부터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1995년 ‘랜드 앤 프리덤’을 출품한 이후 비평가들과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스타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

    한편 1990년대 미국 영화가 칸에서 스타를 대량으로 생산해내기 이전인 1980년대, 칸이 미국 영화감독 우디 앨런에게 보인 사랑은 좀 각별한 것이었다. 우디 앨런은 1980년대에 한 번도 칸에 직접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뉴욕과 브루클린을 오가며 만든 그의 지적인 코미디 ‘맨해튼’(1979년) ‘브로드웨이 대니 로즈’(1984년)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년) ‘한나와 그 자매’(1986년) ‘라디오 데이즈’(1987년) ‘뉴욕 스토리’(1989년)가 차례로 비공식 부문에 출품되어 각광을 받았다.

    미국보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더 환영받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상당수 프랑스 팬을 확보한 우디 앨런의 영화를 주목한 곳, 1980년대 우디 앨런이라는 스타를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리고 선전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곳이 바로 칸 영화제다.

    1990년대는 미국영화가 칸의 구심점을 형성했다. 미국영화는 데이비드 런치의 ‘루나와 항해사’에서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으로 이어지며 4년 동안 세 번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들은 1990년대 미국 영화의 현주소를 반영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칸의 진정한 스타는 바로 타란티노 감독이다. 전통적인 권위와 엘리트주의에 빠진 소재를 일체 배격하고 시나리오를 짜 이에 맞는 가벼운 연기를 펼치는 기법은 현대 미국 영화의 특징으로 부각된 ‘영감의 판타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감각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팀 버튼의 ‘에드 우드’, 짐 자무시의 ‘데드 맨’,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같이 B급 영화의 세계에서 보석 같이 빛나는 작품들은 대부분 ‘저수지의 개들’에서 타란티노가 선보인 새로운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감각을 중시하는 범죄 영화다.



    1990년대 칸의 진정한 스타는 한마디로 미국 영화 그 자체였다.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 영화가 ‘관객과 함께 연기하는 즐거움’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1991년 44회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이었던 로만 폴란스키가 ‘바톤 핑크’에 3개 부문 상을 수여하면서 “어떤 영화가 두 시간을 가장 즐겁게 지나가게 하는 영화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말한 것은 1990년대 칸이 미국 영화를 선정하게 된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이 글은 칸 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1998년 출간된 칸 영화제 50주년 특집호 ‘카이에 뒤 시네마’와 ‘텔레라마’지, 칸 영화제 관련 프랑스 원서들을 자료로 삼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