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t짜리 매실 침출주 저장통.
몽고정은 몽고인이 팠던 우물을 말한다. 몽고인이 언제 마산까지 찾아왔던가? 고려가 몽고족(원나라)의 말발굽에 짓밟힌 충렬왕 원년(1274), 몽고군과 고려군은 합세해 일본 원정에 나섰다. 당시에 합포라고 부르던 마산은 원정대의 출정기지였다.
일본 원정은 2차에 걸쳐 시도됐다. 1274년에 총병력 4만여 명이 900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원정길에 나서 쓰시마를 점령하고 하카타와 이키까지 진출했으나 일본군의 저항과 태풍으로 패퇴했다. 1281년에는 4400여 척의 배에 총병력 15만여 명이 타고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이때도 일본군의 저항과 또다시 닥친 태풍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비록 원나라의 주도로 이뤄진 일이긴 해도 우리 역사상 최초로 대일정복을 시도했던 기지가 마산이었다.
당시 일본 원정대로 내려온 몽고군은 한꺼번에 집결한 수많은 병사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5~6개의 우물을 팠다. 무학산 아래,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탑 옆에 지금도 당시 몽고정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물은 있지만 이미 우물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몽고정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 아쉽다. 우물을 잃으면서 ‘물 좋은 마산’이라는 말을 앞세울 수 없게 된 것도 아쉽다. 마산 물이 좋다는 말은 단순하게 좋은 약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주도(酒都)’, 즉 술의 도시라는 말을 듣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마산에 일본인의 발길이 잦았다. 1899년 마산이 개항한 후 한일강제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마산으로 이주해온 일본인이 5941명에 달했다.
과거 두척산이 지금의 무학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마산에 살던 일본 거류민이 창원 감리에게 ‘무학산 기슭에 일본인 전용 공동묘지를 만들어달라’고 청원하면서 무학산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그때부터 두척산을 무학산으로 불렀다. 그후 오래도록 익숙하게 사용해서 다시 과거의 산 이름으로 바꾸기가 어렵게 됐다고 향토사학자인 이학렬(77세)씨는 말한다.
몽고정도 1932년에 일본인 단체인 고적보존회가 명명한 이름이다. 그전에는 고려정(高麗井)이라고 불렀다. 마산에는 이렇게 일본의 흔적이 구석구석 박혀 있다.
‘술의 도시’라는 말도 일본인들 때문에 생겼다. 1904년에 아즈마 다다오(東忠男)가 마산에 아즈마(東) 청주양조장을 세웠다. 마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공장이다. 1905년에는 이시바시(石橋) 양조장이, 1906년에 고단다(五反田) 양조장과 나가다케(永武) 양조장이 세워졌다.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까지 마산에 7개의 일본식 청주 양조장이 생겼다. 1920년에는 13개로 늘었고, 연간 생산량은 792㎘에 달했다. 마침내 1928년에는 부산의 청주 연간 생산량 1800㎘보다 더 많은 1980㎘를 기록하면서 마산은 전국에서 청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도시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술의 도시, 술의 고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오늘날 마산은 술의 도시라고 하지는 않지만, 술의 명성은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일본식 청주공장은 1970년대까지 가동하던 백광 양조장을 마지막으로 모두 없어졌지만, 경남 소주시장의 맹주인 무학소주가 건재하고, 하이트 맥주 마산공장과 일본 수출용 진로소주를 만드는 진로저팬 공장이 있다. 또 주정공장인 무학주정이 있고 함안군으로 이사한 뒤 부도가 났지만 주정공장 유원산업도 오래도록 마산에 있었다. 지난해 롯데그룹 계열사로 편입된 부산의 소주회사 대선주조를 키운 사람도 마산에서 주류업으로 기반은 닦은 최재형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