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여행 1’ ‘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라 할 수는 없다. ‘그리운 것들 쪽으로’에서 펼치는 선암사 화장실과 배설에 대한 담론이나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 빛이 있다’에서 들려주는 안동 하회마을 도산서원에 대한 건축문화적 담론은 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다. 그 사당은 한옥의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이런 문장에서 김훈의 두루 넓고 깊은 인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는데, 그리하여 ‘자전거 여행’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문학적 지리지로 읽히게 만든다.
김훈은 첫머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고 썼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몸이지만 그 몸을 끌고 나아가는 것은 길이다. 그때 흘러가는 길 위에서 지각되는 것은 언제나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시간 속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의 세 차원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고 과거와 미래는 시간 속에 있는 현재에 대해 상대적인 두 차원”이라고 말한다.
김훈은 풍경 속에서 존재함의 현재들을 포착한다. 풍경으로 거기 있는 ‘존재함의 현재들’은 빛과 소리, 혹은 냄새로 몸과 감각기관에 달려와 그 실감을 비비댄다.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올리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라고 쓸 때, 봄 산에 진동하는 수목의 비린내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몸으로 들어와서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몸과 풍경을 이어주는 것은 현재다. 그것은 흘러가 사라지기 때문에 덧없지만, 외부의 풍경을 관조하는 자의 몸에서 명멸하게 하는 조건이다.
풍경으로 남은 ‘존재함의 현재들’
봄들에서 뜯은 냉이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냉이된장국을 떠먹으며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 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고 쓸 때, 혹은 재첩국을 두고 “그 국물의 빛깔은 봄날의 아침 안개와 같고, 그 맛은 동물성 먹이 피라미드에서 맨 밑바닥의 맛이다”라고 쓸 때, 김훈은 세계의 복잡한 현존을 감각적인 명증으로 간단하게 뒤바꿔놓는다.
감각은 익명적 현상이다. 감각은 ‘감각들’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경험과 인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로 귀착한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인간을 ‘감각의 총 중추’라 규정하고 “지각된 신체의 주위에는 나의 세계가 유인되고 빨려드는 와동(渦動)이 팬다”고 썼을 것이다. 몸과 감각은 앎과 지각의 기반이다.
김훈은 눈 쌓인 소백·노령·차령산맥과 재를 넘어 이미 봄이 당도한 남쪽 해안선으로 나아간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재를 넘어가는 그의 몸은 푸르고 강성하나, 몸속에 있는 또 하나의 몸은 춘수(春瘦)를 앓는다. 춘수는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담양 들판에 흩어진 식영정, 소쇄원, 면양정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범상한 관찰을 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