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5·16 직후 ‘우리 편이 잡았다’ 오판, 서울 문리대 학생회 핵심간부가 中情 프락치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2/10
민비연이 결성된 것은 1963년 10월이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주축인 이 모임의 지도교수는 사회학과 황성모 교수였고, 김씨는 2대 회장을 지냈다. 민비연은 제3세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연구활동을 벌였는데, 이종률·박범진·김경재·현승일·김도현씨가 주요 회원이었다. 이중 김도현씨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뒷날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정부 때 문화부 차관을 지낸 김씨는 16·17대 총선 때 서울 강서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거푸 낙선했다.

1차 민비연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65년 9월. 군사정권은 김중태씨를 비롯한 민비연 주요 회원들을 간첩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이 사건을 크게 다룬 ‘조선일보’는 ‘정부 전복을 기도’라는 큰 제목 아래 ‘서울대 김중태군 등 11명 구속 6명 수배’라는 소제목을 붙였다(1965년 9월26일자). 김씨는 내란음모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15개월 만에 출옥했다.

2차 민비연 사건은 1967년 7월에 일어났다. 중정은 동백림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민비연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검찰에 따르면 민비연은 황성모 교수가 동베를린에서 북한대사관과 접촉한 후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만들었다는 것. 이 사건으로 서울대 제적생이던 김씨는 황 교수와 더불어 반공법 위반죄로 2년간 실형을 살았다.

“정보부는 황성모 교수의 인민군 복무 경력을 문제삼았어요. 황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붙들렸어요. 그는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참여했다가 낙동강전투 때 국군에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 일과 독일 유학시절에 동베를린을 방문한 사실을 두고 황 교수를 빨갱이로 몬 겁니다. 사실 인민군 복무는 비자발적인 경력이고,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에 갔다오는 것은 38선 넘나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해야죠. 게다가 황 교수는 동베를린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정보부는 황 교수가 거기서 서울대 후배인 정모, 임모 등 동백림 사건 연루자들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간첩으로 몰고 민비연 회원인 우리 학생들에게는 ‘간첩의 지도를 받았으니 너희도 간첩 아니냐’고 몰아붙였어요. 그래서 (민비연이) 반국가단체라는 겁니다. 내가 잡혀 들어가보니 이미 각본이 다 짜여 있더라고요.”



친구집 전전하고 강의실에서 눈붙여

김씨는 자신이 학내시위에 앞장서게 된 이유에 대해 “집안에 좌익 연루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 생각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 바로 국민을 좌우익으로 갈라 단죄한 것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남북한 국민 10명 중 9명이 좌익에 연루됐거나 우익 반동분자와 관련돼 있었어요. 좌가 옳으니 우가 옳으니 정치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민족의 아픔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남이나 북이나 모두 그렇게 하지 않았죠. 서울대 문리대에도 집안이 좌익에 연루된 학생이 많았어요. 이들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앞장섰던 겁니다. 우리 집안은 좌익과 전혀 관계가 없었거든요.”

김씨가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다. 그의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도쿄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일본으로 끌려간 부친, 즉 김씨의 외조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모친이 사망한 탓에 부친을 수발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외조부의 영향으로 유관순 여사와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외조부는 일본에서 신학대를 나와 목사가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쿄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외조부는 아버지의 신앙심이 좋다며 사위로 받아들였다. 김씨의 부모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와 경북 의성에 정착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김씨 가족은 대구로 피란 갔다가 거기서 눌러앉았다. 김씨는 경북고를 다녔는데, 뒷날 대학에서의 활동을 예고라도 하듯 그때 이미 공부보다 사회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2/10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목록 닫기

6·3사태 주역 김중태가 털어놓은 1960년대 학생운동 비화

댓글 창 닫기

2022/08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