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이, 그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살만큼이나 세상은 많이 변했다. 오랫동안 움츠렸던 그가 느끼는 변화는 더욱 크다. 하지만 마 교수는 오히려 그게 더 반갑다. 1980년대 후반, 그를 검열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페티시즘’ ‘페티시’ ‘피어싱’ ‘염색’ 같은 단어가 이젠 그를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느덧 일상용어가 됐다.
소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에서 밝혔듯 마 교수의 성적 취향은 ‘손톱이 긴 여자’다. 과거 보수 문학계는 그를 ‘변태’로 취급했지만, 오늘날 ‘네일 아트’라는 산업이 생겨나 호황을 누리고 있다.
1989년 마 교수의 첫 장편소설 ‘권태’에 등장한 여주인공은 10㎝의 손톱에 머리는 초록색으로 염색을 하고 12㎝에 달하는 하이힐을 신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그래서 사회평론가 강준만 교수(전북대)는 마 교수를 “염색 하나만 예로 들더라도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변화를 바라보는 마 교수의 심경은 어떨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즐거운 사라’에 대한 변명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전해진다.

이날 요리는마 교수의 개인 사정으로 제자(이대 청강생이었음) 최유미(맨 오른쪽)씨 집에서 했다. 맨 왼쪽은 정신과 전문의 신승철 박사. 최씨 왼쪽은 최씨의 선배 공남윤씨.
1992년 구속, 1993년 해직, 1995년 유죄확정, 1998년 복직, 2000년 재임용 탈락. 그후 마 교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스트레스에 하루 담배 3갑, 술로 지새는데 버틸 장사가 없다. 결국 중증 우울증에 당뇨질환까지 겹쳤다.
이 시기에 그나마 그의 기력을 지탱해준 음식이 바로 ‘러시안수프’다. 1971년 대학 2학년 때 함께 몰려다니던 친구의 애인에게서 레시피를 전수받은 후 30여 년째 마 교수가 즐겨 먹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