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하기 곤란했겠습니다.
“그만큼 미국인들이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뭐라 답변했나요.
“직접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런 건(지휘권) 자주 행사돼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최후에 강구해야 할 방법이 아니겠느냐’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검찰은 법률에 의해 충분히 견제받고 있다고 했지요.”
그 얘기는 이따 다시 하기로 하고, 먼저 대선자금 수사가 한국 검찰사에서 갖는 특별한 의미를 짚어보기로 했다.
“수사는 검찰이 했지만, 그 배경엔 국민의 염원이 있었지요. 수사를 할 만한 여건도 됐고. 영어로 말하자면 ‘must’이자 ‘can’인 상황이었어요. 총장을 중심으로 검사, 수사관 등 검찰 전체가 일체감을 갖고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대선자금 수사의 의미는 첫째 정치개혁입니다. 깨끗한 선거, 돈 안 드는 선거풍토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둘째는 투명한 회계처리 등 기업문화 개선입니다. 셋째는 법치주의 확립입니다. 검찰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높아졌고 정의라는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물론 갈등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만.”
안 고검장은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놓은 채 눈길을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다. 얼굴에 살이 오른 탓인지 작은 눈이 더 작아보였다. 어눌한 말투와 굵직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이런 것에도 역사가 있는 것 같아요. 1987년 대선 당시 법무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여의도에서 열리는 여당 후보 유세에 청중으로 참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물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검사는 가지 않았지만, 간 사람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법무부 검사한테 공공연히 그런 지시를 할 수 있는 시대였죠. 그때만 해도 국민은 공무원이 여당 편드는 것을 여당 프리미엄으로 생각했지 범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후 시대가 바뀌면서 그런 행위가 커다란 국가범죄로 규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선거문화가 발전한 거죠. 수사팀 모두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수사했습니다. 국민 앞에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형평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고요.”
-외압은 전혀 없었습니까.
“그건 분명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언론에서 가끔 형평성 문제를 지적했지만, 외압은 전혀 없었어요. 이 정부의 참을성이랄까, 그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는 수사가 제대로 안 될 것이라고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강금실 장관, 수사 지장 없도록 배려
-법무부 장관 외 다른 사람에게는 수사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강금실 장관에게는 독대 보고를 자주 했습니다.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알려주라는 총장님 지시가 있었죠.”
-강 장관이 자신의 의견이나 대통령 뜻을 전달한 적은 없나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강금실 장관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런 것 아닌가요. 저희가 일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많이 배려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을 텐데요.
“100%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강 장관께서는 할 얘기 하면서도 수사에 간섭하지는 않았고 우리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불협화음이란 게 없었어요.”
-정권 초기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한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을 텐데요. 심적 부담도 컸을 테고. 사법시험 동기생인 대통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요.
“제가 의식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죠. 검사와 수사관들이 의식을 안 하는데…. 검찰이라는 조직이 하는 일이었지, 저 개인이 하는 일이 아니었잖습니까.”
집권한 지 1년도 안 된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된 것은 기존 권력구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야당은 형평성을 문제 삼았지만, 여당은 여당대로 검찰 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여당 의원들은 이상수 정대철(서울지검 특수2부 구속) 등 ‘대선 공신’을 지켜주지 못한 청와대를 원망했다. 청와대는 검찰을 원망했다. ‘대통령의 왼팔’이라는 안희정씨를 비롯해 ‘집사’ 최도술, ‘그림자’ 여택수, ‘후견인’ 강금원·문병욱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속되는 걸 맥놓고 지켜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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