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 채문수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5-12-30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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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나는 지금도 한국통신 장거리건설국 특수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을 떠올리기 싫다.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업무로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그해 여름이 너무도 추웠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5월13일, 춘천중계소장직을 끝으로 3년여의 지방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가 그림 같은 북한강을 끼고 달리자 소풍 가는 초등학생처럼 가벼운 기분이 됐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5월의 하늘은 푸르렀고 멀리 보이는 산들은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말마다 열차나 버스로 서울의 집에 갔다가 월요일 이른 아침 출근해서 한 주를 춘천에서 보내곤 했지만, 그날처럼 한가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한 날은 없었던 것 같다. 늘 업무에 시달렸고 그래서 피곤했다. 언제 지방근무가 끝날지 모르는 암담한 미래도 피로를 가중시키는 데 한몫 했다. 나는 늘 차에 타자마자 졸기 바빴다.

    1년 반 동안 경북 문경 점촌중계소장으로 일하던 날들과 춘천 시절을 한 페이지씩 떠올리는 동안 열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물과 산이 그림같이 어우러진 춘천에서 회색 먼지와 소음으로 시끄러운 청량리역에 도착하자 마치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가족이 이곳에 있는 것을.

    이튿날 서울 자양동 장거리건설국에서 특수과장 발령장을 받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형초 국장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특수과 업무의 미묘한 특성을 들려줬다. 당시 정부의 통신통합 정책에 따라 한국통신이 시설과 관리를 맡은 군과 해경, 경찰, 검찰의 통신업무를 관리하는 곳이 특수과였다.



    국장은 덧붙여서 올림픽 통신 지원부서의 일도 겸임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오랫동안 투자공사 업무를 전담한 채 과장이 송 부장을 도와 여의도 IBC(국제방송센터) 내 국내방송중계센터 시설공사 추진업무도 맡아줘야겠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결국 IBC에 파견 중인 송 부장과 협의해 오전엔 IBC로 출근해 그쪽 업무를 처리하고 오후엔 장거리건설국에서 본연의 업무를 처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국통신 올림픽 전담반

    제24회 하계올림픽이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에서 치러지게 되어 한국통신도 전담반을 편성해 전사적인 지원을 하고 있었다. 전담반의 핵심업무는 여의도 KBS 옆에 새로 지은 IBC 건물 안의 국제·국내 방송중계센터를 완벽하게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모든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상황을 한국 방송사 중계반이 촬영하면 그 영상을 IBC까지 완벽하게 전송하는 것이 한국통신의 책임이었다. 한국통신의 전송로를 이용하도록 기술 구성이 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 영상은 IBC 청사 내의 한국통신 국내방송중계센터로 모이고 이를 주(호스트) 방송사인 KBS로 보내면 KBS가 각 방송사와 서울올림픽 중계권자인 미국 NBC 방송사(IBC 내에 있음)로 보내주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제작된 영상은 국제방송중계센터에서 곧바로 IBC 마당에 설치된 이동용 지구국으로 보내진다. 그러면 지구국을 통해 인도양과 태평양의 3만8000㎞ 상공에 떠 있는 통신위성으로 쏘아올려 각국의 방송국으로 중계되어 세계인이 보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면 국내방송중계센터야말로 중계의 심장부였다.

    내가 IBC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국내방송중계센터에 올림픽 경기를 중계할 장비가 거의 다 설치된 상태였다. 국제방송중계센터 또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당에 태평양과 인도양을 책임지는 2기의 트레일러로 된 이동용 지구국까지 끌어다놓아 그 위용이 대단했다.

    한국통신의 기간통신망을 이용하지 않고는 올림픽경기 방송중계가 불가능했다. 한국통신은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가뜩이나 많은 기존 시설에 또 새로운 시설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다. 각 경기장과 IBC까지 새로운 회선망을 구성하기 위해 경기장 간에 광케이블 등을 새로 설치해야 했다. 메인스타디움만 해도 많은 회선이 필요했다.

    당시 우리의 광통신 기술은 지극히 열악한 상태였다. 우리 기술로 만든 광단국 장치라는 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90M 방식(1344회선 증폭)이 고작이었다. 방송중계장치인 ‘디버스’라는 장비는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통신장비 제조회사인 D사가 만들어 독점으로 납품했는데 성능을 신뢰할 수 없었다. 특히 실내 온도가 17℃ 이상이 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한심한 장비 때문에 운용요원들은 한여름에도 벌벌 떨고 지내야 했다.

    당시 외국엔 우수한 방송중계장비가 많았으나 국산화 장려 정책에 따라 수입할 수 없었다. 그나마 메인스타디움까지는 미국 로크웰사의 최첨단 장비인 565M 광단국 장치(8064회선 증폭)가 설치돼 운용요원들이 다소 위안을 받고 있었다. 이 장비는 당시 로크웰 한국지사장인 박두진씨(작고)의 도움으로 무료 임차해 설치한 것이다. 미국 카텔사의 케이블TV 장비도 메인스타디움에 설치돼 있었다. 이 장비는 올림픽이 끝나고 우리나라 케이블방송의 효시가 되는 목동 케이블방송국의 최초 설치 장비로 활용됐다.

    첫 번째 위기

    IBC로 출근한 지 일주일쯤 지나 운용요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565M 광단국 장치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전원반(電源盤)이 타버린 것이었다. 미국의 기계장치는 자기 나라에서 사용하는 전원이 지극히 안정되어 있으므로 공급받는 일반 전기로 인해 고장날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전원에 대해서도 우리처럼 이중으로 준비하지를 않았다. 그런데 입력 전원이 불안정하자 그만 고장나버린 것이다.

    올림픽 준비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이 장비를 쓸 수 없다면 국산 디버스 장비만으로는 중계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막막한 일이었다. 개막일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불안정한 국산 90M 장치를 설치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로크웰 한국지사도 초비상이었다. 세계시장을 석권할 최첨단 광단국 장치의 심장부가 고장났으니 대외 신뢰도가 무너진 셈이었다. 이곳 일반 전기에 5볼트 정도의 편차가 있더라도 광단국 장치가 안정돼야 한다는 한국지사의 보고를 접한 본사도 놀랐을 것이다. 이틀 후 미국에서 공수해온 전원반 덕분에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565M 광단국 장치는 고장 없이 제 몫을 단단히 해주었다.

    한국통신이 담당한 올림픽 준비는 이외에도 많았다. 비행선으로부터 북악산 중계소를 거쳐 특수목적 부서까지 회선을 구성하는 일도 있었다. 이 일은 회선에 비화기까지 설치해야 하는 등 더욱 복잡했다.

    일본 NHK 방송사는 HDTV(고선명 TV) 2대를 시험용으로 국내방송중계센터에 설치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도 상용화하기 전이었다. 세계에 기술을 자랑하기 위함이었다고 할까. 이 장비의 회선 구성도 한국통신이 담당했다. IBC에서 광화문 ITC(국제방송센터)를 거쳐 위성으로 전파를 보내면 일본이 수신하는 방식이었다.

    해양경찰의 숙원

    나는 날마다 아침에는 IBC로, 오후에는 건설국으로 동분서주하는 틈틈이 부임 인사차 관련기관과 부처를 순회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인지 인천해양경찰본부 방문은 자꾸 미뤄졌다. 방문하기에 앞서 그들의 평소 요구조건이 무엇인지 해경통신을 담당하는 최 대리에게 물어봤다.

    “해경에 가시면 백령도에 기지국을 세워달라고 요청할 겁니다.”

    “해줄 수는 있는 거야?”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왜?”

    “해경 통신 업무가 우리측으로 넘어오기 전에 자기네도 못했던 일이고, 우선 장비가 없습니다. 백령도까지는 스케타 회선도 없고요. 애로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백령도와 인천 간에는 전파를 하늘로 쏜 뒤 산란파를 이용해 통신을 하는 스케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총 216회선인데 당시는 전 회선을 다 써버리고 여유회선이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회선 여유가 없나? 그래도 어디서 단 2회선은 뽑아낼 수 있을 것 아냐? 만일 회선을 확보할 수 없다면 전용자들이 빌려 쓰는 회선 중에 2회선만 양보 받아 쓸 수 없을까?”

    “어려울 겁니다. 중요 회선도 최번시(통화량이 가장 많은 시각)일 때는 완료율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니까요.”

    “그래도 최 대리, 우리가 요청받은 지 오래됐으니 어떤 답변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일단 해경본부를 방문하기 전에 방안을 찾아봐.”

    나는 그렇게 지시하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최 대리는 이곳에 부임해 이 업무만 전담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해경의 요구를 묵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최 대리에게서 그 건에 대한 보고가 없었다. 나는 취임 인사를 미루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날로 해경본부를 방문키로 했다. 담당자인 최 대리를 앞세워 인천의 해경본부를 찾아갔다.

    해경본부에 도착해 해경본부장과 인사를 나누고 통신과장을 만나 차 한잔 하며 통상적인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해경과 한국통신이 그동안 상부상조하고 원만히 지내왔다는 덕담도 했다. 덕담이 끝나자 통신과장은 애로사항이 있으니 신임 과장인 내게 부탁을 하겠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지도를 꺼내들고 예상했던 백령도 기지국 문제를 들고 나왔다. 백령도에 기지국이 없어 영해상에서 업무 및 작전 수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면서 꼭 좀 부탁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옆에 앉은 통신계장도 한마디 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단속이 느슨해질 것으로 예상한 중국 어선이 연근해까지 밀고 들어와 조업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단속은 합동작전을 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백령도에 기지국이 꼭 필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극적인 문제 해결

    국내방송중계센터에 설치된 장비의 입력전원은 대부분 AC 220볼트였다. 만일 PVC 피복의 전원 케이블을 포설했다면 주파수가 낮은 60㎐이지만 분명히 거기서 발생하는 고주파로 통신회선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나는 실제 케이블랙에 가서 전원 케이블이 혼합 포설됐는지 살펴보았다. 눈으로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회백색의 통신케이블 속에 연초록의 전원 케이블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시 설계 전반을 검토했으나 잡음이 일어날 요인은 우선은 그뿐인 듯했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일결산회의 때 확실치는 않지만 일단 시험해보겠다는 단서를 달아 보고했다. 오후부터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38㎟ PVC 전원 케이블 두 드럼을 준비하고 야간 근무자와 공사업체 직원들을 대기시켰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관련 방송국과의 통상적 시험과 메인스타디움까지의 시험이 끝났다.

    대기하고 있던 공사업체 사람들과 우리 근무요원을 동원해 한전의 일반전기공급 전원반으로부터 전력선을 임시 포설하라고 했다. 정상적인 케이블 포설 루트가 아닌 기계실 복도 바닥과 계단을 통해 국내방송중계센터까지 전원 케이블을 포설했다. 국내방송중계센터의 방송중계장비에 UPS 전원을 절단한 다음 새로 포설한 전원 케이블을 임시로 연결하고 배전함에서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측정기인 벡터스코프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이것도 아니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는 근무조로 같이 밤을 새우고 있는 박 대리에게 말했다.

    “어이, 박 대리. 측정 좀 해봐.”

    나는 박 대리를 재촉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경직됐다.

    “과장님, 이거 회선이 연결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측정기를 연결해 시험을 하던 박 대리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데?”

    “지금 -80데시벨 이상 나오는데요.”

    나는 그때야 벡터스코프를 들여다보았다. -80데시벨 이상이라면 최상의 전송로 품질이었다.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쩌면 한숨인지도….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 너무도 기초적인 설계의 원칙을 무시한 결과가 많은 시간과 공사자재, 인력, 공사비의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더구나 다른 기술진으로부터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받지 않았던가.

    또 한번 말 못할 환희가 밀려왔다. 지금 이 순간, 드디어 해냈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는 직감으로 지금의 시험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정말 수고했어!”

    나는 박 대리에게 시험성적서를 작성토록 지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해지고 있었다. 극성스럽던 더위가 물러가고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찬바람을 쏘이자 멍했던 머릿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KBS 마당을 마냥 걸어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고장으로 많은 사람이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자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너무도 단순한 고장이어서 미처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다시 국내방송중계센터로 들어왔다. 고장 원인은 전원케이블의 220볼트 일반전원이 혼합 포설된 통신 케이블의 통신회선에 전력유도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나는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박 대리가 작성한 시험 데이터를 첨부했다. 그러는 동안 아침이 밝아왔다.

    험한 산을 넘은 기분이었다. 누가 산을 오르라고 해서 오르는가. 자기가 좋아서 오른다. 이번 일도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잘못되어 관련자들이 고생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세계 여러 나라의 방송사들로부터 기술이 낙후됐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올림픽 주최국 엔지니어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일 터였다.

    나는 야간시험을 한 직원들과 공사업체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어젯밤 잠도 못자고 수고했으니 들어가 쉬라고 퇴근을 시켰다. 그리고 국내방송중계센터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려 의자에 기대어 잠을 청했으나 머리만 띵할 뿐 잠은 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송 부장이 출근했다. 늘 일찍 출근하는 송 부장은 오늘도 여전했다. 나를 만나자마자 묻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채 과장, 어찌 됐어?”

    나는 그냥 빙그레 웃었다. 밤새 커피를 여러 잔 마신 탓에 입 안도 텁텁하고 눈도 뻑뻑하고 웃는 표정이 오죽했으랴만 송 부장은 궁금하고 초조한 모양이었다.

    “이따 회의 때 보고하겠습니다.”

    “답답해. 지금 말해봐.”

    “예, 그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정말?”

    “예.”

    “정말이야?”

    송 부장은 믿기지 않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예, 완전히 해결됐습니다. 지금 확인해보세요.”

    송 부장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송 부장은 내가 측정기의 전원을 켜기도 전에 스위치를 올리고 측정하기 시작했다. 송 부장은 우리나라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의 숨은 공로자였다.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의 창설 멤버이기도 했다. 전국 전화국의 마이크로웨이브 단말국은 물론 높은 산에 있는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소까지 이동용 차에 측정기를 가득 싣고 몇 십 년 동안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유지·보수 업무를 해왔다. 고산지대의 비포장도로를 오르내리다 차 사고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각종 통신회선 시험에서는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송 부장은 벡터스코프를 걸어놓고 꼼꼼히 시험했다. 한참 시험하던 그는 회선이 연결되지 않은 것 같았는지 연결 상태를 일일이 점검해보고 기본 잡음지수가 -80데시벨 이상인 것을 확인했다.

    “아아, 이럴 수가.”

    송 부장이 측정해보고 내지른 일성이었다.

    그는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내게 악수를 청하더니 손이 아프도록 쥐고 세게 흔들었다. “정말 수고했어.” 그 말을 몇 번인가 반복했다.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중계방송 준비 완료

    나는 아침 일일결산회의에서 시험성적 데이터와 함께 결과를 보고했다. 또 송 부장이 아침에 자신이 실제 시험해본 결과를 자세히 보충 설명했다. 오전에는 KBS 기술진과 방송 연결에 관한 합동회의가 시작됐다. 양측이 입회해서 시험도 해보았다. 시험결과는 KBS 기술진도 만족한 상태였다. 양측은 마무리 공사가 끝나는 대로 회선을 연결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오후가 되자 KBS의 기술부장인 박 부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회의석상에서는 묻지 않던 말을 내게 은밀히 물었다. 도대체 고장의 원인이 무엇이었냐고. 나는 우리측에 별 이상이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고 말았다.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말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야간을 기해 복도에 임시로 포설해놓은 PVC 전원 케이블을 철거하고 본격적인 전원 케이블 포설공사를 하도록 공사업체에 지시했다. 공사업체는 케이블랙 등 공사 자재를 오후부터 반입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밤이 되자 전원 케이블 포설을 위한 케이블랙을 별도로 설치했다. 졸리지만 퇴근할 수도 없었다. 만일 공사가 잘못된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으므로 직접 공사를 감독해야 했다. 졸음이 폭포처럼 쏟아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이 오면 커피를 마시면서, 앉으면 잘 것 같아 서서 중계소 안을 서성거렸다.

    케이블랙 공사가 끝나자 전원 케이블을 포설했다. 포설을 마친 다음 전원 케이블 양끝에 터미널을 끼우고 압착기로 단단히 압착한 다음 기존 전원 케이블을 철거하고 새로운 전원 케이블을 연결했다. 접촉불량 여부를 확인하고 전원을 인가시키고 다시 장비들을 시험했다. 역시 잡음이 없는 상태인 -80데시벨 이상의 깨끗한 전송로임이 확인됐다. 그리고 복도로 임시 포설했던 38㎟ PVC 전원 케이블 등을 철거하자 아침이 밝아왔다.

    이제 기계장치 설치작업은 모두 끝났다. 아침부터 회선을 KBS 방송라인에 연결하면서 한 회선씩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KBS 실무자와 회선 인계를 했다. 올림픽경기를 중계할 각 경기장의 방송회선이 국내방송중계센터를 거쳐 IBC 청사 내의 KBS 방송국까지 구성됐다. 경기장에서 들어오는 각 회선의 신호를 KBS까지 보내 시험을 실시했다. 회선 상태는 양호하고 지극히 정상이었다.

    모든 경기의 중계방송 준비가 완료되고 최종 리허설에 돌입했다. 그날부터 필요에 따라 회선시험이 실시됐다. 국내방송중계센터는 모든 공사가 다 끝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전국의 산하기관에서 차출되어온 엘리트 운용요원들이 통상적인 시험을 하며 개막식을 기다렸다.

    돋보인 일본의 기술력

    나는 운용요원들이 최종시험을 하도록 맡겨두고 세계 각 방송사의 부스를 방문해 그들의 장비를 살펴봤다. 각국 방송사는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것 같았다. 그러나 방송장비 중 ENG 카메라와 VCR는 전세계 방송국이 일본 소니 제품을 쓰고 있었다.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이나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니라는 업체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소니의 애프터서비스 체계였다. 사용자가 고장난 장비를 고치러 오면 그 장비를 고치는 동안 사용하라며 똑같은 기계를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아! 애프터서비스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싶어 새삼 감탄했다.

    그런가 하면 좀 황당하게 보이는 일도 있었다. 중남미의 어떤 나라는 2개 방송사가 중계하러 왔다. 웬만큼 큰 나라들도 거의 1개의 중계팀을 보냈는데, 그 나라만은 엄청난 장비를 싣고 두 팀이 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TV모니터를 우리나라에 와서 구입했다. 국산 L사 제품을 100여 개 사서 설치했다. 예산절감 차원에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올림픽이 끝나자 그 많은 물량을 전부 자기 나라로 싣고 가기 위해 포장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NHK와 기타 방송사가 연합한 ‘재팬풀’이라는 방송팀이 왔을 뿐이었다. 나는 재팬풀 방송사를 업무관계로 방문했다가 교포 2세 여성인 마사코씨를 알게 됐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일본이 우리의 기술 수준을 어느 정도로 보는지 궁금해서 차나 한잔 하자고 했으나 일이 바쁘다며 나오지 않았다. 그후로도 재팬풀에 갔는데 또 커피 한잔 하자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말았다. 세 번째에는 내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자 마지못해 오비씨그램 광장으로 나왔다.

    두산그룹에서 외국방송사 근무요원 휴게소로 IBC 건물 내에 오비씨그램 광장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외국 방송사, 특히 유럽 쪽에서 온 방송요원들은 우리가 공급하는 생수를 먹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마셔도 되는 우리 금수강산의 맑은 물을 믿지 못했다. 정말 좋은 물의 진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늘 ‘에비앙’ 생수병을 들고 다녔다. 그러다 오후 3∼4시경이면 오비씨그램 광장으로 몰려와 안주 없이 생수를 마시듯 맥주를 한 병씩 마시고 가곤 했다.

    마사코씨는 미안하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 내게 혹시 특수요원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극구 부인하자 그제서야 말문을 열었다. 자기네가 일본에서 출발할 때 “한국에선 어떤 관리도 만나지 말라”고 교육받았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모두 특수요원이니까 말을 잘못했다가는 큰코다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코리아 넘버 원’

    당시 일본 방송사들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진 않았지만 팩스시설과 휴대전화(워키토키) 등이 잘 안 된다며 많이 불만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마사코씨에게서 들었다. 그들은 입버릇처럼 한국의 기술력이 자기네보다 10년은 뒤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일본 나고야는 서울과 올림픽 유치 경쟁을 벌였다. 투표결과는 서울 52표, 나고야는 27표. 한국의 예상 밖 압승에 전세계가 놀랐다. TV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국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덴바덴 기자회견장엔 태극기가 물결쳤고 만세와 환호성으로 뒤범벅이 됐다. 하지만 일본 열도는 비탄에 빠졌다. 그들은 지금 서울올림픽을 질시의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본의 실패는 자만이 원인이라는 자체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중에도 일본팀을 침울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메달 획득도 저조했지만 그보다도 일왕의 병세가 위독했다. 비가 오는데도 황궁 앞에 모여든 우산을 쓴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실시간 위성뉴스로 방영되자 그들은 숙연해졌다.

    나는 일본의 기술우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겸허히 수용했다. 팩스나 기타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시설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부서를 찾아 책임자에게 일본에 대한 편견 없이 최선을 다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런 때일수록 공직자는 초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HDTV 때문에 우리 국내방송중계센터를 드나드는 NHK팀에게도 더욱 친절히 대해주고 커피도 권하고 애로사항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들도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개막식을 앞두고 IBC 마당에서 대대적인 가든파티가 열렸다. 세계 각 방송사 요원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무대에 올라온 유럽 방송요원들의 모습은 너무도 자유분방하고 활기찼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공직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현실의 우리로선 부럽기만 했다.

    그때 해외에 입양됐다가 프랑스 방송사 요원으로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황당해한 적이 있다. 그녀는 암울한 사회에서 숨죽이며 살던 우리 국민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프랑스 사람들은 총리나 대통령의 이름을 애완견에 붙여준다면서 나보고도 애완견에게 ‘전(全)’이나 ‘노(盧)’ 같은 이름을 붙여 부르라고 했다. 나는 무뚝뚝하게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그들은 ‘코리아 원더풀’ ‘코리아 뷰티풀’을 연발했다. 그 이튿날부터 우리가 체감하는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복도에서 만나도 ‘코리아 넘버 원’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을 위시해 동구권에서 온 사람들도 이 동방의 작은 나라를 아름답게 보는 것 같았다.

    개막식 OK!

    드디어 9월17일, 서울올림픽 개막일이 왔다. 우리는 개막식 전날부터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개막식 시각이 다가오자 초읽기에 돌입하고 어느 한 회선이라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전 근무요원이 초긴장 상태가 됐다. 메인스타디움, 국내방송중계센터와 현장을 연결하는 타합선(打合線·비상연락선)도 시끄럽던 그동안과 다르게 조용해졌다. 모든 요원이 각자 맡은 부서에서 준비를 마치고 숨죽이며 개막식을 기다렸다.

    마침내 성화가 점화되고 올림픽이 개막됐다. 국내 방송중계소의 모든 모니터는 방송중계가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NBC를 통해 위성으로도 잘 나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올림픽 경기를 전세계에서 보고 있을 터였다. 우리들은 긴장 속에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개막식은 현장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동양적인, 너무도 우리 것다운 화려한 영상으로 TV 모니터를 장식했다. 개막식이 끝나자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올림픽 중계는 순항을 거듭했다. 우리는 방송중계소에서 계속 비상근무를 했다. 실내는 너무도 추웠다. 특히 과장을 팀장으로 24시간 교대근무를 했는데 야전침대를 중계소 바닥에 펼치고 자야 하는 밤에는 더 추웠다. 두꺼운 방한 점퍼를 입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또 디버스 장비를 제작한 D회사를 욕하면서 추위를 견뎠다. 중계가 계속되자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답답할 때면 IBC 건물 옥상에 올라가 한강을 바라보다 내려오곤 했는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IBC 건물에는 세계의 수많은 인종이 다 몰려와 있었다. 유럽권에서 온 방송요원 중엔 늘씬한 미녀가 많아 눈길을 끌곤 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청명한 가을날씨에 탄복했고, 틈만 나면 옥상으로 올라가서 일광욕을 즐겼다. 그런데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팬티 차림으로 햇볕을 쬐는 경우가 많았다. 쳐다보기가 민망해 내려온 후론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또 한번의 난리법석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원당 마장경기장에서 마술(馬術) 경기 중계가 있는 날이었다. 올림픽 중계의 또 다른 애로사항은 중계권자인 미국의 NBC 방송사가 미국과 유럽에서 시청하기 좋은 시간대를 택해 중계하기 때문에 너무 이른 시각에 경기 중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하루는 출근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젯밤 근무했던 팀장이 일이 생겨 집에 들어가자 숙직자가 밤중에 하도 추우니까 에어컨을 꺼버렸다. 아침 6시경에 일어나 에어컨을 다시 돌리고 기계실 온도를 규정 온도인 17℃에 맞출 생각이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만 늦잠을 잤고 그 팀장이 오전 7시에 출근해서 깨울 때야 일어난 것이었다.

    그때야 에어컨을 켜고 실내온도를 내리려 했으나 방송 중계장비인 디버스는 밤새 달궈져 좀처럼 온도가 내려가지 않았다. 원당 마장경기장에서 보내오는 영상시험의 컬러패턴이 형편없이 뭉개졌다. 그림이 뭉개지면 중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디버스 장비의 뒷면 철제 커버를 벗겨내고 선풍기를 가져다 가동하는 등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그래도 컬러패턴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퇴근해야 할 중계요원과 출근한 요원까지 모두 디버스 앞에 서서 온도가 내려가기만 기다렸다.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 눈으로 확연히 보이더니 점점 괜찮아졌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쓰러졌다가 술이 깨면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모습과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10월2일 올림픽 폐막식이 끝나자 맥주 몇 병과 약간의 다과로 우리 국내방송중계센터 직원만의 자축 파티를 조촐하게 열었다. 그리고 덕담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올림픽 중계가 그런 대로 큰 사고 없이 이뤄졌던 것은 우리의 열악한 기술환경에 견주어 대단한 것이었다. 기술진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도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늘 그 알 수 없는 신이 우리를 도와줬다고 믿고 있다.

    감사패 보내준 해경

    올림픽이 끝나기 전에 철수한 방송사도 있었지만 경기가 끝나자 각 방송사는 짐을 싸 서둘러 떠나갔다. 올림픽 시작 전과 중간, 또 마지막에 화려한 가든파티가 열렸던 IBC 마당은 이제 낙엽만 쓸쓸하게 굴러다닐 뿐이었다.

    일본 방송사들도 짐을 싸고 축 처진 모습으로 떠나갔다. 마사코씨는 그동안 감사했다면서 다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날씨 탓인지 내 가슴속에도 찬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해 경찰의 날을 맞아 해경으로부터 장관상을 상신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이미 2년 전에 정보통신부장관상을 받은 바 있다면서 장관상을 꼭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사양했다. 그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의 날이 가까운 어느 날 해경으로부터 한 통의 문서가 왔다. 감사패를 받으러 기념식이 거행되는 세종문화회관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불가피하게 지방출장을 가야 했다. 시상식에 참석지 못한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몇 번 사양했지만 잊지 않고 감사패를 보내준 해경에 늘 고마운 마음이다.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백령도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기지국을 세우면 해경으로서는 서해 공해상까지 전파영역으로 장악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때까지 서해 최북단 기지국은 덕적도에 설치돼 있었다. 그래서 덕적도 권역에서만 겨우 교신하는 형편이었다. 그 권역을 넘어서면 교신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럴 때는 중간에 해경선이 1대 더 출동해 통신을 중계한다고 했다.

    첨단 통신기술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전파의 사각지대가 있다니…. 영해상에 나가 있는 해경선이 직접 해경본부와 교신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중계를 해줘야 한다니 답답하다 못해 한심한 노릇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문제는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애국자라거나 소영웅주의적 감상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평소 공직자라면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근무할 뿐이었다. 공직자가 창의적인 사고 방식을 지녔으면 많은 사람의 편리함을 도모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불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믿어왔다.

    해군의 고자세

    나는 이번에도 좌우명으로 삼은 ‘정면 돌파’를 해볼 생각이었다. 해경본부를 떠나며 한마디 했다.

    “이 문제는, 제가 담당과장으로 온 지 일천한 데다 지금까지 기지국을 설치하지 못한 것을 보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역량은 부족하지만 이 건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꼭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서로 잘 협조합시다.”

    해경본부를 나서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도대체 이 매듭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최 대리, 어떻게 생각해?”

    “내버려두세요. 전임 과장들도 해결해주고 싶어도 못했는데 채 과장님이라고 뾰쪽한 수가 있겠어요. 모른 척하세요.”

    최 대리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과장을 무시하고 있는 듯도 했다. ‘내가 못 해준다는데 감히 당신이 뭘 안다고 덤비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오기로라도 기어이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오기만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수면 밑에 얽혀 있는 게 분명했다. 해경의 통신 시설 및 유지보수 업무를 맡았으면 당연히 해결해줘야 하는 사안인데 지금까지 외면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서울로 향하던 차를 돌려 인천 스케타중계소로 가자고 했다. 차는 한참을 헤매다 인천 스케타중계소에 도착했다. 퇴근시간이 훨씬 지나 야간 근무자만 있었다. 나는 그를 통해 백령도까지의 회선 현황이 적힌 선번장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예비회선은 단 한 페어(1회선용 심선)도 찾지 못했다. 난감해서 무심히 선번장을 넘기다 한 곳에 시선이 갔다. 해군이 2개 BG(1개당 12회선)를 쓰고 있었는데 세부적인 회선명이 적혀 있지 않은 곳이 있었다.

    자세히 알아본 결과 해군이 5회선을 예비회선으로 확보해놓고 있었다. 총 24회선을 한국통신에서 임차해 쓰지만 그들은 19회선만 사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근무자에게 실제 회선이 비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해군 통신의 최번시 완료율을 물었으나 트래픽미터가 없어서 자기들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문제의 돌파구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튿날 인천 해경본부 통신계 김 계장에게 해군에 예비회선이 있으니 2회선분만 확보하라고 전했다. 김 계장은 난색을 표했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해군에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을 게 뻔하다는 거였다. 해군이 어찌나 고자세인지 업무협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엄살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놀고 있는 회선을 쓸 수 없다니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관기관에 신임 인사도 하러 가고, 우리와 관련 있는 베이스 장비라고 하는 무선장비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국제전자도 찾아가보고, 안테나 기술의 권위자인 박 사장도 만나보고 업무도 파악하는 사이 열흘여가 흘렀다.

    나는 그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위에서도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누구도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문제는 수도 없이 제기됐던 일로 국장도 다 알고 있었고,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만 기어이 해보겠다고 덤볐지만 주변에선 그러다 지치면 말겠거니 했던 모양이었다.

    우연한 곳에서 찾은 실마리

    숨가쁜 업무가 소나기처럼 지나가자, 그 일이 다시 떠올라 해경본부 김 계장에게 결과를 알아보았으나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해군측에서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짐작건대, 되지도 않을 일은 운도 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물어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해경은 이미 포기한 일이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일은 차츰 나를 강박으로 몰아갔다.

    또 다른 문제는 장비를 생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장비를 생산하는 국제전자의 영업부장에게 의사를 타진해보았으나 부품 수입률이 50%를 넘어 2대의 장비(주장비와 예비장비)를 생산하기 위해 부품을 수입할 수는 없다는 답변이었다. 이 업체는 한국통신이 초창기부터 많은 장비를 사주고 각종 특혜를 줬는데도 막상 자기네에게 별 이익이 없고 귀찮다고 판단했는지 완전히 외면해버렸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생산업체가 이익이 나지 않아 할 수 없다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실마리는 너무도 우연한 쪽에서 풀릴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채 과장님, 축하합니다.”

    출근하자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 통합부의 이 과장입니다.”

    “아, 이 과장님. 예, 고맙습니다.”

    통상적인 인사가 끝나고 언제 시간 내서 소주나 한잔하자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 과장은 자기가 내 귀경 축하주를 한잔 사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 과장과 업무상 딱 한 번 마주한 일이 있었다. 춘천중계소장으로 있던 2월경이었던 것 같다. 아직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 잔설이 쌓여 있고 호수가 많은 춘천의 날씨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가로수에는 하얗게 눈꽃이 피어났다.

    통신망본부 통합부 직원이 출장을 온다는 통보가 왔다. 하루 전쯤 통보해주어도 되련만 당일 아침에야 연락이 왔다. 좀 언짢았지만 이런 날씨에 출장 오는 사람도 고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다. 기다리고 있자 오후 2시경에 이 과장이 내려왔다. 통합부에서 관리하는 비상장비와 특수목적 장비가 있는데, 그 장비를 파악하고 운용실태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출장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봉의산 밑의 강원도청에 설치돼 있는 비상장비까지 점검을 마치자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 과장과 도청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가 통신통합계획에 따라 해군에서 우리측으로 온 사람이라는 소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이쪽에 와서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고 판단했다. 어느 조직에나 텃세는 있게 마련이고 한국통신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괜한 자부심으로 콧대가 높았다. 외부에서 전임되어 온 사람에게 쉽게 인정을 베풀려 하지 않았다.

    해군에서 어쩔 수 없이 제복을 벗고 정책적으로 넘어온 이 과장의 애로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와 직급이나 연배도 비슷해서 그냥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그를 반강제로 끌고 소양강댐 근처의 단골 송어 양식장으로 갔다. 초면이었지만 상하관계도 아니어서 서로 흉허물 없이 해군에서 있었던 일하며 우리측이 업무상 거부한 이야기 등을 털어놓으면서 술과 저녁을 같이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먼 길을 가야 하는 그를 생각해 적당한 시간에 술자리를 끝냈다.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춘천역으로 가 표를 사주고 배웅했다.

    이튿날 출근해서 직원들과 일일결산회의를 하는데 이 과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정말 감사했다는 말과 열차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져 눈을 떠보니 청량리역이었다면서 서울에서 꼭 한번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말을 거듭했다. 예의 바르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장으로 있는 동안 나는 공사간에 찾아온 사람들에겐 대개 비슷한 대접을 했는데, 이렇게 진심 어린 감사 전화를 받은 일은 드물었다. 그날 하루가 즐거웠다. 아주 진솔한 사람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확보한 회선

    그런 기억이 남아 있는 이 과장의 축하 전화를 끊고 나서야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해군이 임차해 쓰고 있는 백령도의 전화회선을 이 과장이 나서서 2회선만 반환해달라고 교섭한다면 가능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 회의가 들었다. 단 한 번 만난 사람인데 그가 그 골치 아픈 일에 뛰어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인간성에 주사위를 던져보기로 했다.

    확신이 서자, 이 과장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해군에 그 일을 교섭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퇴근 전에 바로 회답이 왔다. 우리측이 올해 말 회선증설계획이 있으니 그때 되돌려주기로 하고 그동안만 쓸 수 있도록 해군이 양해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서만 보내주면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됐다.

    나는 최 대리를 불러 문서 기안 요지를 적은 메모를 건넸다. 최 대리는 놀라면서 정말 해군이 회선을 내준다고 했냐고 물었다. 그랬다고 확실하게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최 대리가 문서를 기안해 결재를 받으러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회선은 내가 확보했으니 장비는 최 대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확보하라고. 국제전자를 구워삶아 장비를 생산하든지, 어디 기지국에 있는 예비기계를 빼내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 문제도 이틀 만에 해결책이 나왔다. 예비기계를 1대 뽑을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다가 예비장비를 빼버린 상태에서 주장비가 고장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나 최 대리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본 결과 별문제가 없음을 알았다.

    울릉도 권역의 해경과 소통하기 위해 강원도 괘방산과 대관령 두 곳에 기지국이 설치돼 있었다. 기지국마다 주장비와 예비장비가 설치돼 있는데, 울릉도와 주로 교신하는 곳은 괘방산이므로 대관령의 예비기계 1대를 빼내서 설치해주자는 이야기였다. 육지의 기지국과 섬의 기지국은 1대1로 설치돼 있었으나 울릉도는 거리가 멀고 간혹 해상조건에 따라 방해전파가 발생하는 통에 통신이 불가능할 때를 대비해 복수의 기지국을 두고 있었다. 우선 그중 1대를 뽑는 대신 올림픽이 끝난 후 정식으로 장비를 제작해 설치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접적(接敵)지역인 백령도는 무선통신 전파가 적에게 누설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해경의 작전기밀 등이 적 첩보기관에 도청된다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관계기관으로부터 무선국 허가가 날지 걱정스러웠다. 이 문제 때문에 관련된 관서의 실무자 합동회의를 열었다. 만일 문제가 된다면 해경측이 비화기라도 써서 도청을 방지하겠다고 했다. 회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당국에 허가신청을 내기로 했다. 다행히 모든 절차가 끝나 백령도에 기지국을 설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사실을 인천 해경본부에 문서로 통보하고 가장 빠른 시일 내로 설치공사를 하기로 합의했다.

    해병밖에 없는 섬

    배는 오전 9시 정각에 인천항의 해경선 전용부두를 떠났다. 배에 오르자 함장이 정중히 인사했다. 여름의 열기가 한창인 8월의 날씨였지만, 배를 타자 시원한 바닷바람 덕분에 솟았던 땀이 어느덧 가셨다. 백령도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곧장 북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서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해경본부에서 온 이 경장은 배의 항로가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소청도와 대청도의 경도쯤에 다다랐을 때 북쪽을 향해 곧바로 올라간다고 설명했다.

    30여 분쯤 나아가자 동해의 검푸른 빛과 달리 파란 물빛이 눈을 시원하게 했다. 늘 연안에서 보던 서해의 흙탕물이 아닌 청정한 바다 빛깔이었다. 나는 이 경장의 권유대로 갑판에 의자를 놓고 앉아 무료하게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간혹 큰 화물선들이 중국으로 가는지 컨테이너를 잔뜩 싣고 지나가는 것이 보이고 어선들이 조업하는 것도 보였다.

    갑판에 앉아 한나절을 눈이 시리도록 바다만 바라보고 나자 백령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를 마중하기로 약속된 현지 직원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식당을 찾아 들어갔으나 주인은 이미 예약이 돼 있어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인천에서 오는 배가 곧 도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이 간 최 대리가 투덜대자 주인은 민망했던지 “손님들 육지에서 처음 오셨지요?” 하고 물었다. 미안해서인지 “이곳은 배가 도착하기 전에 식당마다 이미 예약이 다 돼 있기 때문에 어느 식당에 가나 마찬가지니까 배가 도착한 다음에 와보세요”라고 했다. 예약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 여유가 생기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부둣가로 나갔다. 배가 곧 도착한다는 확성기 안내방송이 울리고 부두엔 많은 마중객이 몰려나왔다. 해병들이 트럭을 몰고 와 대기하는가 하면, 군용 지프를 타고 온 영관급 장교도 있었다. 민간인 복장으로 군용차를 타고 온 사람은 특수요원인지 군인들로부터 거수경례를 받고 있었다. 짐을 받으러 나오는 리어카, 트럭, 승용차 등으로 부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타군(他軍)이나 경찰 복장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민간인보다 해병이 더 많아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배가 멀리 수평선에서 점으로 시작되어 점점 커지는 것을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는 부두에 조심스럽게 접안했다. 배 스크루의 후진하는 물살이 거세지자 선원이 밧줄로 배를 부두에 붙들어맸다. 그리고 잔교(棧橋)를 연결하자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해병 신병들이 더플백을 힘겹게 하나씩 메고 내려왔다.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그들은 새까만 얼굴에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배 안에서부터 대오를 갖춰 조금이라도 흩어질세라 조심조심 발을 맞춰 걸어 나왔다. 그들 뒤를 이어 휴가를 갔다 귀대하는지 해병 기간병이 몇명 내렸다.

    부두에는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양쪽으로 서 있었다. 그때 형사인 듯한 사람이 나서서 배에서 내린 한 승객의 신분증을 조사하더니 곧바로 수갑을 채워 체포했다. 아마 지명수배된 사람인 듯하다고, 이 배가 되돌아가는 편에 인천해양경찰서로 압송될 것이라고 같이 온 이 경장이 말했다.

    사람들은 걷거나 차를 타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는 짐을 하역하기 시작했다. 많은 짐이 부두에 쌓이고 트럭이나 리어카에 실려 갔다. 부두는 한가해졌다. 우리도 식당을 찾아봐야 할 일이었다. 돌아서려 할 무렵 현지 직원인 김 대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연락이 잘못되어 여객선으로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때야 김 대리의 안내로 식당을 찾아들어가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에서 푸대접을 받았다고 했더니 김 대리는 웃으며 “배가 들어올 때면 현지인들도 별수없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바쁘게 김 대리가 몰고 온 지프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30여 분 만에 섬의 서쪽 끝에 있는 스케타중계소에 도착했다.

    “윗동네로 칵 붙어야지…”

    해는 이미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실외 작업을 하기가 어려우므로 옥외에 안테나를 설치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공사 자체가 긴급했고, 어느 업체도 쉽사리 하기 어려운 공사였다. 외부에 발주해 공사업체에 수의계약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도급공사 절차상 소요기간이 있기 때문에 그러다 보면 올림픽이 끝난 후에나 완공할 것이 분명했다. 접적지역이고 육지로부터 자재 운반이 어려워 부대비용이 많이 들어 공사비를 할증해줘도 업체 선정이 어려운 성격의 공사였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이런 경우 수의계약을 한다고 해도 쉽게 공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할 때 직영으로 공사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직원의 협조를 얻는 게 최선책이었다. 해가 수평선으로 기울기 전까지 안테나 설치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그 바쁜 중에도 잠시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날처럼 선명한 낙조를 나는 그후로 보지 못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수평선에 해무(海霧)가 끼어 선명한 일몰을 보기가 어려운데 맑은 날씨 탓인지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수평선이 하도 깨끗해서 프랑스 영화에서처럼 녹색광선이 보이는지 살폈으나 그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청사 옥상에 안테나를 설치한 뒤 서둘러 기계실에 장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설치 위치는 직영공사 설계서의 기계실 평면도에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기계실 도면에 표시돼 있지 않은 다른 부대장비가 바닥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위치를 다시 정했다. 콘크리트 드릴로 바닥을 뚫어 앵커볼트를 박고 랙을 설치하고 그 랙 위에 장비를 고정 설치했다. 그리고 전원 케이블과 통신 케이블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솜씨가 아마추어 수준이어서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작업이 완료됐다.

    시험을 하고 회선을 개통하는 일은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상대국의 시험요원들이 퇴근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늦은 저녁식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저녁식사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산중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식당은커녕 구멍가게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를 타고 부두까지 나와 혹시 문을 닫지 않은 식당이 있을까 기웃거렸다. 다행히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술을 파는 식당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우리는 오늘 공사가 그런 대로 잘됐다고 자평하며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아, 이거 ‘윗동네’로 칵 붙어버리든지 해야지, 이래 가지고 어디 살 수 있겠어? 해주로 가면 3시간이면 충분한데 인천까지 12시간이 걸리니 말이야. 이거 불편해서 살겠냐고.”

    “3시간은 무슨 놈의 3시간. 요즘 쾌속선으로 달리면 2시간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그래, 그럴 거야. 해주든 남포든 2시간이면 갈 수 있지.”

    “아, 옛날 어른들이 중간 연봉바위에서 잠시 쉬다 다시 헤엄쳐서 장산곶까지 갔다는 무용담을 귀가 아프게 듣지 않았어?”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이들은 어부들 같았다. 나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끼쳤다. 서울에서 이런 이야기를 술집 같은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했다가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소식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참혹하게 얻어터지고 반신불수가 되어서라도 그곳에서 나오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자위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낯선 손님인 우리를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뇌까리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잡으러 누군가 곧 쫓아올 것만 같아 앉은자리가 불안했다. 맞은편에 앉은 이 경장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일행에게 어서 일어나자고 눈짓을 했다. 그들도 어부들의 말이 언짢았던지 밥을 먹고 반주로 한잔씩 걸치던 소주잔을 비우지도 못한 채 서둘러 식당을 도망하다시피 나와버렸다. 마치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 같았다.

    드디어 회선 개통

    김 대리가 낮에 예약해놓은 숙소를 향해 우리 네 사람은 희미한 가등(街燈) 밑을 말없이 걸었다. 공직에 몸담은 사람들로서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는 게 누가 알면 문제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숙소로 와서도 못내 떨떠름했으나 최 대리가 구멍가게에서 뭔가 한 보따리 사들고 들어와서 너스레를 떨었다.

    “과장님, 시원한 맥주나 한잔씩 합시다.”

    최 대리가 봉지에서 캔맥주를 꺼내 한 개씩 돌리자 머쓱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백령도는 정말 웃기는 섬입니다. 해병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섬이지요.”

    현지 직원인 김 대리의 말은 자조 섞인 한탄으로 들렸다.

    “그리고 과년한 처녀는 한번 보고 죽자고 해도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글쎄요. 총각이 너무 많은 섬이니 딸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여고만 졸업하면 인천으로 내보내는 게 오히려 부모들에게 안심이 되는 모양입니다.”

    밤이 너무 깊어서 같이 있겠다는 김 대리의 등을 떠밀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마 그때 시각이 새벽 2시도 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장비시험을 완료하고 정오쯤에 해경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출근한 김 대리가 여관으로 전화를 했을 때에야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오전 9시였다. 일하느라고 피곤한 데다 술도 한잔했고, 또 김 대리를 보내고 난 후에도 이야기하다 너무 늦게 잔 탓이었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스케타중계소로 가서 설치해놓은 장비의 자체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이 끝나자 회선 구성을 하고 우선 인천 스케타까지 회선시험을 하기에 바빴다.

    그때 인천 해경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를 싣고 갈 해경선이 작전으로 차질이 생겨 오후 6시경에 백령항에 도착한다는 통보였다. 해경에서 온 이 경장은 마치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양 미안해했다. 나는 미안해할 것 없다고, 시간이 빠듯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이 경장을 위로했다. 시간이 충분하니까 차분히 시험하라고 최 대리에게 이르고 시험결과를 지켜보았다. 현지 직원인 김 대리는 일을 빨리 끝내고 백령도에 왔으니 두무진이라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했다.

    그러나 인천 해경본부까지의 시험은 회선 구성에서 장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인천 스케타에서 시내 전화국을 거쳐 다시 해경본부까지 회선 구성을 하는데 각 부서와 협조가 잘 되지 않아서였다. 이미 협조공문이 나가 있었으나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협조가 되지 않는 부서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다시 부탁한 끝에 회선 구성 작업이 진행됐다.

    오후 1시. 회선 구성이 완료되자 개통시험 절차에 따라 회선시험이 시작됐다. 다행히 회선시험은 별문제 없이 이뤄졌다. 서해상에서 작전 중인 해경선과 인천 해경본부 통신계장의 통화시험을 끝으로 회선을 개통했다. 해경본부 통신계장이 나를 바꾸라고 해 전화를 받았더니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통신과장이 전화를 바꾸더니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나는 “진작 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건 내 개인의 일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 똑같이 고생한 것이니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그들은 무척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 연근해까지 접근해 조업하는 중국 어선들을 단속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내 나라 내 영토를 지키는 해경이 내 영토 안에서 통신을 제대로 못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간단한 이동용 지구국인 SNG(휴대용 이동지구국)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위성 지구국의 LNA(저잡음 수신증폭기)가 엄청난 무게와 부피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수신 안테나인 카세크레인 안테나의 개구면 크기가 자그마치 야구장의 내야 넓이와 맞먹었다. 그래서 미국의 항공모함이나 구축함에 탑재하고 다녔다. 당시의 통신기술로는 필요한 섬에 기지국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령도를 떠나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회선이 개통되자 우리는 최종 정리를 하고 스케타중계소를 떠났다. 백령도에 오기 전에 자료로 파악해본 섬의 유적지나 명승지를 한 곳쯤 돌아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빠듯했다. 자료를 살펴보니 백령에는 선사시대 유물과 유적이 많고 전설도 많았다. 당초 인천을 출발할 때는 자주 올 수도 없는 곳인 만큼 일을 빨리 끝내고 간단히 몇 군데 돌아보고 갈 요량이었다. 도착해서 그 유명하다는 사곶 천연비행장만 잠시 걸어보았다. 아주 고운 모래가 탄탄하게 다져져 있어 차가 지나가면 바퀴자국이 약간 표시날 뿐이었다.

    백령항으로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 있었다. 출장 중 보너스로 관광까지 할 행운은 없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휴가를 얻어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관광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해경선은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백령항에 들어왔다. 타고 왔던 배보다 작았다. 우리 일행이 승선하자 함정은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향했다. 함장은 우리 일행을 정중히 맞았다. 해경본부의 연락이 있었던지 함장은 백령도 기지국을 신설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동안 백령도 연근해에서 본부까지 통신이 되지 않아 애로가 많았는데, 이제 백령도 기지국이 개설됨으로써 답답했던 서해 북방지역의 해경 통신이 원활해졌다고 했다.

    함상에는 우리를 위한 저녁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점심 먹은 지 3시간밖에 안 된다고 사양했으나 함장은 그러면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생선물회에 술을 권했다. 술은 중국 마오타이주라고 했는데 향료 냄새가 약간 역겨웠으나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함장과 우리 일행은 술을 몇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공직자의 마음가짐

    나는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국가를 위해 무제한의 봉사를 해야 한다고 부하직원들에게 강조하면서도 간혹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러 갓 입사한 직원들로부터 “왜 우리가 국가를 위해 밤늦게까지 근무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히곤 했다. 그들에게 “국가가 있고 나서 개인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나는 함장에게 경외감을 갖게 됐다. 한번 경계근무에 돌입하면 해상에서 일주일 동안 밤낮 없이 영해를 감시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그래도 근무할 만하다고 했다. 추운 겨울엔 함정의 갑판이 꽁꽁 얼어붙어 흔들리는 빙판 위에서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준비된 저녁식사 식단을 보니 부식 등이 부실한 것 같았다. 빠듯한 정부 예산으로 주·부식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할 것은 뻔했다. 그들의 고생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통신담당이 다른 해경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함장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당초 어제 인천항에서 과장님 일행을 백령항까지 모시고 갔던 함정이 오려고 했으나, 긴급 상황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경계근무중인 우리 배가 인천과 백령도의 중간지점까지 모시고 가면 다시 그쪽에서 경계근무중인 배로 바꿔 타서 인천항엔 내일 아침에 도착하시게 될 겁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는 함장을 비롯한 이쪽 배의 승조원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배를 옮겨 탈 때 주의할 사항을 함장은 몇 번씩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교신하는 소리가 들리고 해상에서 불빛 신호를 주고받더니 서로 서치라이트를 켜고 접근했다. 난생 처음 해상에서 배를 바꿔 타는 모험을 해야 했다. 파고가 높지 않아 바다는 잔잔했으나 배가 서로 뱃전을 나란히 하고 정박하자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뱃전이 좌우로 흔들려서 심하면 이쪽 뱃전에서 저쪽 뱃전까지 1m 이상 벌어졌다. 흔들리는 배에서 한 사람씩 옮겨 타는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반대편 배로 건너뛰는 순간 해경 두 사람이 잽싸게 내 팔을 한쪽씩 잡았다. 그러나 순간 반대편 뱃전이 아래로 쑥 꺼지는 바람에 나는 공중에 매달리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일 손을 놓치면 배와 배 사이의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해경대원 여러 사람의 조력으로 우리 일행은 간신히 배를 옮겨 탈 수 있었다.

    새로 승선한 배의 함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수인사가 끝나기가 바쁘게 식당으로 안내했다. 이 배의 함장도 백령도에 해경 기지국을 세워줘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백령도 기지국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식탁에는 이미 생선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피곤해서 빨리 눕고만 싶었으나 함장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일로 해상에서 수고하는 해경요원들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그리고 기지국을 세워줬다고 고마워하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새벽 5시경에야 우리 일행은 인천항 해경전용 부두에 내렸다.

    애국자 vs 애국자

    하루를 푹 쉬고 IBC로 출근하자 또 골치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방송 중계팀은 연일 회의를 했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기술적 어려움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경기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신호를 우리가 IBC의 국내방송중계센터에서 주방송사인 KBS로 넘겨줘야 하는데, KBS 기술팀에서 우리측 중계구간에 잡음이 많아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우리측에서는 단장인 황 국장이 나와 있었지만 실질적인 책임자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의 초창기 시설공사를 했고 전국방송 중계망을 관리하는, 무선통신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송 부장이었다. 선로 분야에는 최 부장이 나와 있었으나 서울 시내 전송선로는 올림픽 경기를 대비해 거의 모두 광케이블로 새로 깔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방송망이었다. 선로 잡음을 제거하기 위한 기술 문제를 시설공사업체 기술진과 우리측 기술진이 몇 번씩 검토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원인을 찾지 못해 고심하던 차에 KBS와 몇 차례 절충했으나 기술부장인 박 부장은 그런 상태의 선로 잡음이 있는 한 회선을 인수할 수 없다고 버텼다.

    나는 처음부터 박 부장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 들지 않는 태도부터 마뜩지 않았다. 한국통신 기술요원들을 깔아뭉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방송기술 분야에서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식의 안하무인 격으로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통신 기술요원들 중에도 두 번째 서라면 서러워할 전송기술의 권위자가 수두룩했다.

    그러나 나는 차츰 박 부장의 설명에 공감하게 됐다. 그가 세계 각국에서 온 방송사에 기울인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KBS가 올림픽 경기 중계를 맡은 주방송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일과시간 이후에도 세계 각국 방송사의 부스를 찾아다니며 장비 설치를 직접 돕거나 아예 대신해주곤 했다.

    나는 박 부장에게 뭣 때문에 방송사마다 찾아다니며 공짜로 일해주느냐고 핀잔 을 준 일이 있었다. 박 부장은 “유럽대륙에는 많은 방송사가 있고 그들이 세계 방송계의 여론을 주도한다. 우리가 만일 이번 올림픽에서 그들을 홀대한다면 우리는 세계 방송계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라고 했다. 듣고 보니 공감이 갔다. 나는 처음의 선입견과는 달리 그도 애국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평소 전국 방송망의 네트워크는 한국통신이 구성해 운용하고 있었으나 각 방송국은 마치 자기들이 독자망을 구축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시청자에게 심어줬다. 간혹 전송로가 고장나면 그때야 본색을 드러내 한국통신의 전송로가 고장이라고 방송에 자막을 내보냈다.

    그런저런 일로 방송국 기술진과 전송을 담당한 한국통신 기술진은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물론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잡음이 깔리는 전송로의 통신신호를 그대로 받을 리는 없었다. 지금도 메인스타디움의 카메라가 잡은 영상이 여의도 국내방송중계센터까지는 양호하게 들어오고 있으나 국내방송중계센터를 거쳐나가면 미세한 잡음이 깔렸다.

    난제로 떠오른 선로 잡음

    나는 장거리 시외전화 라인의 전송기술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으로서 시설공사에 대한 경험은 어느 정도 갖고 있는 편이었다. 기술검토 회의에서 접지(接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100여 대의 모니터 장치와 방송재생장치인 VCR 장치의 접지공사를 전부 새로 했다. 시간이 없으므로 공사업체를 독려해 주야 구분 없이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업체 처지에서는 당초 계약과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만일 이런 긴급 상황을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수의계약 등에 불리할 수 있어서인지 협조적이었다. 공사업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당시 우리 사회는 마치 올림픽만 치르고 나면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로 진입하고 선진국이 되는 것처럼 민과 관이 착각하는 분위기였다. 5공화국이 가고 6공화국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체력이 국력’이라는 5공 정부의 황당한 우민화 정책 구호에 순치되어 온 국민에게 올림픽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치러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6공 정부도 모든 국력을 올림픽 경기에 쏟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였으므로 만일 소홀함이 있다면 해당 책임자는 역적 아니면 빨갱이쯤으로 몰릴 판이었다.

    며칠간의 공사가 끝나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을 때 큰 기대를 갖고 측정기인 벡타스코프를 응시하던 우리는 다시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다시 비상회의가 열리고 갑론을박하며 장시간 토론을 했으나 결론은 전반적으로 기술 검토를 해보자는 것으로 났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투입된 내게 공사 설계와 시설공사 감독 등 많은 경험이 있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전반적으로 검토해보라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었다. 나는 역량미달이라고 극구 사양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피할 수도 없는 일인 데다 시간 여유까지 없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기술 검토의 중책을 맡다

    KBS 박 부장의 말이 과장됐다고 해도 주방송사 기술부장의 판단이 완전히 거짓일 리는 없을 터였다. 주방송사는 각 경기장의 경기실황을 양질의 영상으로 제작해 서울올림픽 세계중계권사인 미국 NBC 방송사의 요구에 맞도록 넘겨줘야만 하고 국내 방송망에도 공급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만일 양호하지 못한 방송을 내보낸다면 국가적 망신이었다.

    우리측 송 부장에게서 “이 정도면 KBS가 받아줘도 될 텐데…”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아무튼 미세한 기술적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접어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실무자들은 “KBS가 괜히 큰소리를 치는 것이니 그냥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험트랜스(잡음억제장치)를 써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험트랜스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수입하거나 새로 발주하기엔 불가능한 시점이라는 게 문제였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다. 올림픽방송 중계권을 가진 미국 NBC 방송팀에 험트랜스가 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협조해줄지는 의문이었다. 협조해준다고 해도 최소한 50여 개를 지원해줘야 하는데 NBC가 그만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마침 NBC 기술팀에 한국 교민이 있어 의사를 타진해보았으나 한두 개는 빌려줄 수 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그날부터 기술검토가 시작됐다. 주간에는 공사가 계속되고 관계기관 등에서 드나드는 사람도 많아 일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야간에 점검해볼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 속 겨울

    밖은 뜨거운 여름인데 국내방송중계센터는 겨울이었다. 17℃를 넘지 않게 실내 온도를 맞추고 있어서였다. 우리는 두꺼운 방한 점퍼를 입고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산 방송중계장비 중 D회사에서 생산한 디버스라는 장비 때문이었다. 디버스는 실내 온도가 18℃만 되어도 정상가동이 되지 않았다. 17℃ 이하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했다. 국내 생산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억제한 결과가 한여름에도 방한 점퍼를 입고 버텨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디버스 장비 내에 실장된 회로는 트랜지스터나 IC로 구성돼 있었는데 방열판을 쓴 냉각회로 등의 기술이 미흡해 열이 많이 발생했다. 냉각팬을 2개씩 붙여봐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기계가 열만 받으면 컬러 패턴(방송 기본 시험신호)이 좌우로 뭉그러졌다. 그래서 실내는 한여름 속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생산업체인 D사에 보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술 부족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과연 잡음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그 원인과 소재를 파악해야 했다. 경기장에서 가장 먼저 중계실에 들어오는 신호를 점검해보았다. 그게 원인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입력전원의 전압을 측정했는데 지극히 정상이었다. 전원 전압에 이상이 없다면 무엇에 이상이 있단 말인가?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잡음이라는 것이 고조파(기본 주파수에서 파생되는 주파수)의 문제이므로 자연히 입력전원의 주파수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었다.

    국내방송중계센터로 공급되는 입력전원의 주파수를 측정해보았다. 측정기상의 주파수가 아름다운 사인 웨이브(반원 곡선)가 아닌, 그러니까 곡선의 형태는 같았으나 톱날 모양의 트리거 펄스(톱니 모양 같은 파장)가 나타났다. 이거구나! 여기서 발생하는 고조파가 잡음이 되어 회선의 영상신호를 침범하는구나!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순간 환희에 젖었다. 별것도 아닌 고장 때문에 많은 시간과 인원이 동원될 뻔했는데 그것을 고칠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이란….

    너무나 추웠던 그해  여름
    나는 측정기에 나타난 트리거 펄스를 즉석에서 촬영했다. 촬영할 때는 일본 NHK에서 HDTV를 설치하러 온 기사의 협조를 받았다. 우리는 당시 촬영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 우리 국내방송중계센터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HDTV 시제품이 NHK의 주관으로 설치돼 있었다. 우리는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그들의 첨단기술을 접했다. HDTV 시제품은 메인스타디움과 여의도 간 시험용으로 설치됐다. 또 그 영상신호는 ITC를 통해 위성을 거쳐 일본으로 전송됐다. 당시는 세계의 전자산업 선진국들이 HDTV 기술 개발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다. 그 화면의 선명도는 지금엔 별것 아니게 보일지 몰라도 일반 브라운관 TV의 선명도가 지금 같지 않을 때인지라 머리카락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선명도를 접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의 국력이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인지 회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다른 면에서는 몰라도 통신장비를 통한 전송기술 분야에서는 충분한 기술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기술 우위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 로크웰사에서 무상 지원한 565광단국 장치도 우리가 개발하고자 하는 꿈의 장비였다. 565광단국 장치가 아니었다면 메인스타디움까지 여러 대의 국산 장비를 설치해야 하고 그러자면 엄청난 공사비와 인력과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광케이블 한 가닥에 이 기계장비를 설치함으로써 8000회선 이상이 증설된다는 사실이 꿈같이 여겨졌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IBC는 세계의 방송사들이 입주해 마치 기술의 각축장 같은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기도 했다. 나는 아침 출근과 동시에 시작되는 일일결산보고회의에서 어젯밤의 시험결과를 보고하고 KBS와 협의해 원인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KBS 기술부장인 박 부장을 만나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자기네는 아무 결함이 없으므로 시험에 협조할 이유가 없다고 배짱을 부렸다. 나는 트리거 펄스 사진을 들이대면서 이래도 당신들이 완벽하냐면서 협박하다시피 했다. 그제야 박 부장도 놀라며 이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합동시험 결과, 정전을 대비해 IBC 건물 내에 설치한 국산 UPS(무정전 발전기) 장비의 출력전원이 문제임이 밝혀졌다. 정전이 되면 0.3초 이내에 자동으로 전원을 공급해주는 장치였다. 그 UPS 장비를 거친 전원 주파수가 변형돼 나왔다. 그 일로 KBS에도 비상이 걸려 우리의 시험에 적극 협조했다.

    하지만 시험결과는 참담했다. 잡음 원인이 UPS에 있다고 속단한 우리는 한국전력의 정상적인 주파수 전원을 공급받아 국내방송중계센터에 전원을 공급하고 시험해보았으나 잡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허탈했다. 일일결산회의에서 시험결과를 다시 보고했고 험트랜스를 써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시간은 없고, 주방송사인 KBS는 회선 잡음 때문에 방송신호를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고…. 정말 사면초가였다.

    나는 적어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험해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길을 잃으면 원점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길을 찾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는가.

    공사설계부터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설계도를 가져다가 세밀히 검토하는 중에 한 가지 설계 오류를 발견했다. 전원 케이블의 포설 문제였다. 통신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을 같은 랙(케이블을 포설키 위한 철제 사다리)에 포설하도록 설계돼 있었는데, 이것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갔다. 실내 통신시설 공사에서 포설하는 전원 케이블은 교류와 직류 두 종류이지만 직류가 아닌 교류 전원 케이블은 되도록 한 랙에 포설해서는 안 된다. 단 전원 케이블의 피복이 연피(鉛皮)로 싸여 있을 때는 상관이 없다. 공사하면서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었다.

    통신용 전원 케이블은 초창기엔 연피로 생산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연피 전원 케이블은 생산되지 않았다. 연피 케이블의 생산비가 고가일 뿐 아니라 납을 만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납 중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산업체마다 납을 다루는 사람들을 상대로 특수 건강진단을 하고 그 결과 체내에 클로로폴피린이 600㎍ 이상이면 그 업무를 떠나 상당 기간 요양해야 했다. 특히 납 성분이 함유된 광명단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영세했다. 최종 포장하는 곳에서 작업하는 사람을 6개월 이상 그 자리에 두지 않는 것도 납 중독의 우려 때문이었다.

    단순노동이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리어카를 끌며 파지 수집하는 사람이나 부랑자를 불러 취직을 시켜주면 아주 좋아했다. 그런 사람을 채용해 일을 시키다 6개월 후에 그만두라고 하면 고용주에게 매달려 고용을 연장해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납은 체내에 흡수되면 축척되어 결국은 손발이 마비되는 치유 불능의 납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저런 이유에서 전원 케이블의 피복이 PVC로 바뀌어 생산된 것이다. PVC 전원 케이블이 생산되고 나서 또 하나 좋은 점은 가벼워서 운반이 편리해졌다는 것이다. 지게차 등 상하차 장비가 부족하던 당시에 연피 케이블 한 드럼을 상차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점이 있으나 결정적인 취약점은 전력 유도 발생을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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