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고3 부모보다 바쁜 초등학생 부모

퇴근 후 밤샘 숙제 도우미,주말엔 품앗이 일일교사

  • 장옥경 자유기고가 writerjan@hanmail.net

    입력2005-12-29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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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초등학생 부모는 정말 바쁘다. 아이 숙제 챙기느라 매일같이 도서관을 찾고, 유명 학원을 순례하며 정보를 수집한다. 폭넓은 체험학습을 위한 해외여행 스케줄도 짜야 한다. 전업주부는 아이의 매니저 겸 운전수를 자처하고,‘워킹맘’은 정보를 얻기 위해 ‘학부모 네트워킹’에 열을 올린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는 초등학생 부모들의 고군분투기.
    고3 부모보다 바쁜 초등학생 부모
    초등학교 6학년, 3학년 남매를 둔 주부 한모(42)씨는 요즘 하루 일과를 인터넷 서핑으로 시작한다. 낮에는 검색한 정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일일이 찾아다닌다. 어제 오전에는 서울 강남 C학원에서 주최하는 설명회에 다녀왔고, 오늘은 또 다른 학원의 일정이 잡혀 있다.

    건강이 나빠져 지난 여름 다니던 회사를 휴직한 그는 기력이 회복되자 그동안 소홀했던 아이들 공부에 신경쓰기로 했다. 두 아이 다 반에서 상위권에 들어 공부에는 그다지 신경을 안 썼는데, 쉬면서 귀동냥으로 다른 엄마들의 이야길 듣자니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10등 안에 들면, 강 건너 갔을 경우에는 20등 이하래요. 강북 학교의 성적만 가지고는 아이의 실력을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중학교에 가서 배치고사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해요. 그래서 몇몇 엄마에게서 유명하다는 강남의 영어학원 두 곳을 소개받아 6학년인 큰아이를 데리고 갔어요.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한 후 상담을 받았는데, 글쎄 2~3년 늦었다는 거예요. 눈이 확 떠졌어요. 첫째가 정규반에 들어갈 수 없다니….”

    그간 큰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안 시킨 것도 아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큰아이의 경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간 집 근처의 영어학원에 보냈는데, 아이가 학원 가기를 싫어해서 이후 1년 동안은 매일 아침 전화로 관리해주는 학습지로 영어 공부를 시켰다. 회사 생활로 바쁜 틈틈이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가끔 진도를 체크하기도 했는데, 또래 아이들에 비해 늦었다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네 가지 영역에서 어느 하나가 뒤처지지 않고 고르게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 아이는 듣기와 쓰기가 뒤떨어져 있대요.”



    큰아이가 메이저 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크게 실망한 한씨는 ‘수학은 어떨까’ 했지만, 테스트 결과는 역시 비슷하게 나왔다. 공부하는 스타일이 정돈돼 있지 않아 학년이 올라갈수록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뒤처진 2~3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회할까’를 고심하며 그는 입소문이 난 학원의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게시판에 올라온 리플까지 샅샅이 검색했다. 이렇게 해서 아이에게 맞는 최선의 계획표를 짜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자녀가 초등학생이라고 해서 그 시기만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 아이를 입학시키려면, 늦어도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요. 중·고등학교, 대학입시까지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과정마다 무엇을 집중적으로 공부시킬지 흐름을 꿰고 있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고등학생, 특히 고3이 돼서는 이미 게임의 승패가 정해져 운신의 폭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가 최근 한 달 동안 이웃 엄마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중학교 1학년 성적이 대학입시까지 이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떨어지면 더 떨어졌지 거기서 실력을 높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뒷바라지하는 엄마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학습 환경 만들기에 만전을 기하고, 고학년이 되면 아이의 학습과 진로 구상에 집중적으로 관여한다고 한다.

    초등학생의 엄마들은 자녀를 특목고에 진학시키기 위해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간다. 자녀가 영어와 수학을 마스터할 수 있도록 학습 계획표를 짜놓는 것은 물론, 숙제를 돕기 위해 도서관에서 자료 수집에 열을 올린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자녀를 둔 주부 정모(43)씨는 ‘숙제 지도의 명수’다. 그는 자녀를 등교시킨 후 여러 과목의 참고서를 펴놓고 아이의 학교진도에 맞춰 단원별로 학습내용과 배경지식을 익힌다. 자녀의 학습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아이가 꼭 읽어야 할 책들도 메모한다.

    ‘숙제 도우미 사이트’에 SOS

    “이번 주에 큰아이가 사회시간에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를 배운다’고 하면 각 고장의 민속놀이가 뭔지, 문화축제는 무엇이 있는지 인터넷을 뒤져 프린트해놓고 구립도서관에 가서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빌려옵니다. 그러면 아이가 학교 갔다와서 학원에 가기 전까지 제가 빌려다준 책을 읽습니다.”

    둘째아이가 ‘슬기로운 생활’ 시간에 ‘주렁주렁 가을동산’에 대해 배운다면 ‘한국의 자연탐험’이나, ‘자연의 신비’ 같은 책을 찾아 읽게 만든다. 그러자니 그는 하루나 이틀에 한 번꼴로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 사서는 이웃집 아줌마보다 더 자주 보는 사람이 됐다.

    아이들과 함께 가서 책을 골라오면 좋겠지만, 주중에 아이들은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다. 정씨는 자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이의 학습 목표를 ‘영어, 수학 마스터’에 뒀다. 두 아이가 6학년을 마칠 때까지 귀가 뚫려 웬만한 영어 문장은 들을 수 있게 하고 수학 경시대회 입상 경력도 쌓아 특목고 진학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자녀를 기본적으로 영어, 수학 학원에 보내고, 보조적으로 집에서 영어 동화책을 읽히고 수학 학습지를 풀린다. 학원 수업과 학습지가 가진 장단점을 보완해 시너지 효과를 높이려는 전략이다.

    두 아이는 하교 후 매일 영어와 수학 두 과목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르다. 그래서 나머지 과목은 엄마가 알아서 자료를 준비하고 숙제를 챙기는 것이다. 만들기 숙제 같은 것은 능력이 못 미치다 보니 ‘숙제 도우미 사이트’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때로는 주변의 미술 전공 대학생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돈은 좀 들지만, 숙제를 확실하게 잘 해가서 교사나 친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아이 공부를 돕는 데는 남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남편도 퇴근해서 돌아오면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영어 동화 테이프를 듣고, 큰 소리로 영어책 읽기를 합니다. 아빠가 옆에서 공부를 봐주면 아이들이 더욱 신나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정씨는 두 아이 사교육비로 월 100여 만원을 쓴다. 그래도 자녀를 외국에 보내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초등학생 부모가 바쁜 가장 큰 이유는 아이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숙제가 많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직장인 이모(38)씨는 “7차 교육과정으로 바뀌고 나서부터 아이들 교육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소연한다.

    ‘워킹맘’의 삼중고

    21세기의 세계화, 정보화, 다양화 추세에 발맞춰 인재육성을 위한 수준별 교육과정이 도입된 것은 좋은데, 보충·심화학습이 늘고 체험학습의 비중이 높아져 대다수의 과제물이 아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 게다가 토요 자율학습의 날이 확대되면서 부모가 모든 일을 제치고 아이와 현장학습에 나서야 하는데, 부부가 토요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다.

    “주5일 근무제가 됐다지만, 토요일에 쉬기 위해서는 주중의 업무량이 폭주합니다. 공무원이 아니고서야 자리 보전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직장인은 없지요.”

    야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자마자 아이 숙제를 봐줘야 한다. ‘가족신문 만들기’ ‘환경신문 만들기’ ‘식물의 생장 연구관찰 보고서 작성’ 같은 숙제라 도와주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마도 막막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 동네 모형도 만들기’ 숙제를 받아왔을 때는 야심한 시각에 대형 도화지를 사고 크고 작은 상자를 구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잠은 부족하고 신경 쓸 일은 많다 보니 위궤양이 생길 정도다. 수준별 교육으로 학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창의력을 키운다는 교육 취지가 본의 아니게 맞벌이 엄마를 더욱 피곤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씨처럼 전업주부가 아닌 ‘워킹맘’들은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데 이중고, 삼중고를 겪는다.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면서, 이웃 학부모들에게 ‘왕따’ 당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워킹맘 임모(38)씨는 ‘학부모 네트워킹’에 열을 올린다. 맞벌이 엄마는 전업주부에 비해 정보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어 주기적으로 아이 친구 엄마들을 집이나 음식점으로 초대해 못 들은 정보를 듣고 공부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엄마들이 그룹화되어 있어요. 정보가 있어도 그 안에서만 교류해요. 특목고 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중학교에 들어가기 3년 전쯤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특목고는 학교마다 문제 유형이 달라요. 여기에 대한 훈련이 돼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폭넓은 정보 수집이 필수적이지요.”

    고3 부모보다 바쁜 초등학생 부모

    ‘가족신문 만들기’는 부모가 함께 작업해야 하는 대표적인 숙제 중 하나다.

    자녀에게 그룹 과외를 시킬 때는 엄마의 기여도에 따라서 팀을 짜는데, 일반적으로 맞벌이 엄마는 소외되기 일쑤다. 엄마가 당번을 정해 승용차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거나 간식을 챙기는 등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는데, 맞벌이 엄마는 시간 제약이 많아 팀 구성원으로 잘 끼워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임씨는 한 달에 한 번 토요 자율학습의 날, 승용차에 서너 명의 아이를 태우고 다니면서 일일 현장학습 교사 노릇을 한다. 그런 방법으로 주중에 봉사하는 다른 엄마들에 대한 미안함을 상쇄한다.

    또한 엄마는 완벽한 매니저가 돼야 한다. 자녀가 자신의 적성을 조기에 찾아 개발하도록 뒷받침하는 것도 엄마의 중요한 역할이다. 초등학교 3학년 외동딸을 둔 주부 송모(43)씨는 얼마 전 아이를 데리고 한 기관을 찾아가 인성검사와 적성 테스트를 받았다. 아이가 공부보다는 노는 쪽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테스트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면 아예 그쪽으로 특기를 살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공부할 머리가 아닌데 자꾸 공부하라고 성화하면 부모와 아이 둘 다 지치게 될 것 같아요. 하기 싫은 것 억지로 시켜선 결실이 없고요. 차라리 특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이도 즐겁고 아이 장래를 위해서도 낫다고 판단했어요.”

    송씨는 아이를 연기학원에 등록시켰고, 아이의 몸매와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서 재즈댄스와 롤러스케이트도 가르치고 있다. 해외로 나갈 것에 대비해 회화 위주로 영어공부도 시킨다. 서울 시내 유명하다는 학원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듣기에, 아이가 하교하면 엄마는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한다. 아이가 배고프지 않게 틈틈이 간식을 챙겨 먹이는 것은 물론이다.

    서울 강남권의 모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2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김모(43)씨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아이의 체험학습 계획표를 미리 짜느라 분주하다. 교사 연수가 잡혀 있는 기간을 빼고 날을 잡아보니 장기간 유럽 여행은 무리겠다는 판단이 섰다. 결국 별자리나 조류 탐사, 도자기 마을이나 박물관 방문 등 국내 체험학습 계획을 중점적으로 수립하고, 일본의 친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짧은 해외여행 일정을 잡았다.

    “학생들에게는 부모님과 체험여행을 많이 하라고 당부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는 데리고 다닐 시간이 없어요. 학기 중에는 바빠서 그랬다 쳐도 방학만큼은 아이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일주일에 3~4일은 할애할 생각입니다.”

    김씨는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으로 얻은 지식이 아이의 머리에 오랫동안 남게 되고 훗날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보고가 된다”고 말한다. 김씨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에는 해외에서 살다온 경험이 있는 아이가 수두룩하고 아직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아이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맞벌이 주부 이모씨는 “요즘 강남이나 분당의 초등학교에서는 초등학교 시절 해외여행 세 번은 기본이라는 게 상식”이라고 전한다.

    초등 4학년 성적이 평생 성적?

    ‘평생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의 저자인 김강일씨는 “많은 부모가 한결같이 자신의 아이가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도 하지 않고 부모가 참견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잘하는 아이가 되기를 기대하지만, 그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학원도 안 가고 과외공부 한번 안 했는데 반에서 1, 2등을 하는 아이들은 그만큼 엄마가 집에서 관심을 갖고 관리하기 때문이라는 것. 엄마는 아니라고 해도 잘하는 아이 뒤에는 반드시 ‘매니저 엄마’가 있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역할은 교사나 학원 강사가 하지만, 엄마는 매니저가 되어 정해진 목표에 따라 실천하도록 관리를 충실하게 해줘야 한다. ‘스스로 잘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만으로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자녀는 모두가 달리는데 홀로 멈춰선 상태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은 시작부터 뒤처지지 않도록 자녀의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선다. 부모는 책읽기, 독서록 만들기, 독서 감상문 쓰기부터 자료 찾고 활용하기, 각 과목의 개념과 원리 이해하기, 오답 노트 만들기, 테마학습· 현장학습 참여, 사고력 키우기, 관찰일기 쓰기 등에 이르기까지 자녀의 공부를 일일이 곁에서 지도한다. 한 단계가 체화됐다 싶으면 다음 단계로 간다.

    ‘영어 1등은 초등학생 때 만들어진다’의 저자 서석영씨도 사교육이나 흔한 해외연수 한번 안 시키고 딸 최원양을 서울과학고에 입학시켰다. 그의 자녀 매니지먼트는 아이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됐다.

    원이가 여섯 살 때 DPT 추가접종을 받으려고 보건소에 들렀는데, 한 엄마가 “깜빡 잊고 아이에게 주사를 못 맞혔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서씨는 그 광경을 보며 ‘그래, 영어도 예방주사야. 입시와 취업실패, 승진 누락 등 영어병(病)에 걸리지 않으려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예방주사를 맞아야 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자녀의 발달단계에 맞게 영어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주변에 널린 간판을 비롯해서 EBS의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을 딸에게 보여주고, 아이가 적응이 됐다 싶어 교재를 AFN의 아동용 방송으로 바꿨다. 서점을 뒤지면서 아이 수준에 맞는 적당한 영어동화책을 찾아, 딸과 함께 공부했다. 이런 과정은 엄마의 정성과 시간 투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양은 초등학교 때 이미 고교과정의 영어까지 끝마쳐 중학교에 가서는 다른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고, 덕분에 과학고에 무난하게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 등쌀에 우울증 앓는 아이

    초등학교 때부터 나타나는 과열된 학습경쟁은 불가피한 일일까.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극성맞지만 않다면 엄마의 매니지먼트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는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요즘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학생이 갑자기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지 않아요. 그러니 자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가 바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중학생, 초등학생 두 아이를 둔 학부모여서 정말 공감하거든요. 이건 엄마들 탓도, 사교육 탓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 교수는 “‘누구는 이걸 하고 누구는 저걸 하고’ 식으로 자꾸 비교하며 눈높이를 높이다가, 결국 과열경쟁으로 치닫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경쟁이 과열되면, 아이는 안 보이고 목표만 보이게 된다”며 이런 경우 부모의 욕심이 아이를 부적응아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남들도 다 하는데’라는 생각 때문에 아이에게 맞지 않는 기준을 들이대면 아이는 상처만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남들도 다 하는데’라는 기준이 아주 소수의 특별한 아이만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상위 몇 퍼센트 안에 드는 뛰어난 사람이길 바라고, 적어도 그 근처에 있어야 아이의 장래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러한 부모의 욕심이 아이의 행복을 방해하고 자녀를 절망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엄마가 독주하며 무리하게 아이를 이끌면, 자녀가 스트레스와 자신감 저하로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방학이 되면 소아정신과가 부모의 등쌀 때문에 우울증이나 불안감, 강박 증상을 호소하는 아이들로 가득찹니다. 이들은 감정조절이 안 되거나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고, 이유 없이 눈을 깜박거리거나 어깨를 으쓱거리는 ‘틱(tic) 장애’를 보이기도 합니다.”

    일부 엄마들은 심한 우울증을 보이는 아이를 ‘집중력 장애(ADHD)’로 진단해달라고 의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집중력 장애는 뇌기능의 저하, 즉 체질적 요인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이가 집중력 장애라고 하면 교사가 깊은 관심을 쏟는다고 한다. 반면 우울증은 체질보다 환경에 의해 나타나기 쉬운 증세다. 자녀의 병이 우울증이 아닌 집중력 장애이길 원하는 데는 엄마가 발병 원인의 제공자임을 숨기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티처 보이’ 증후군

    엄마가 매니저가 되어 아이의 인생에 적극 관여할 경우 목표를 달성할 수는 있어도, 뒤늦게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찾겠다”며 대학생이 전공을 갑자기 바꾸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는 것. 신의진 교수의 설명이다.

    “병원에 오지는 않지만, 선생님이나 엄마가 없으면 공부를 못하는 ‘티처 보이(teacher boy)’도 많습니다. 엄마가 학원과 과외 프로그램을 제시하면 아이는 주어진 길을 달려가는 식인데, 티처 보이는 학원과 과외 없이 혼자서는 공부에 손도 대지 못합니다.”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조금만 어려운 일이다 싶으면 징징거리며 도망가고, 결국 엄마가 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고 한다.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노인 92명을 자신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뇌의 기능과 크기 변화를 15년 동안 추적한 연구가 있다. 그 결과 자신감이 적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뇌의 크기가 20%나 작고, 기억력과 학습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신 교수는 “흔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자신감이 넘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수동적으로 살게 되면 결코 진정한 자신감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자신감은 실수를 경험하며 스스로 힘든 상황을 극복했을 때 생기는 것임을 ‘매니저 엄마’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신 교수의 조언은 귀기울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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