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남한 사회를 좌우로 갈라놓았다. 애초 반탁을 천명했던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찬탁으로 돌아선 후 남한 사회는 좌우익의 극렬한 충돌로 대혼란에 빠졌다. 중도 성향 좌우익 지도자들의 통합 노력은 물거품이 됐고, 좌와 우, 남한과 북한은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대구폭동의 참혹한 현장.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해방가’·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1945년 8월 민족의 염원인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국제 정치는 냉혹했다. 우리 민족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대가는 기막힌 분단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뒷거래로 광복의 환희는 38선 분단의 비극으로 탈바꿈했다. 피와 땀의 독립투쟁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광복군의 국내 진주를 추진하던 백범이 일제의 항복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통탄하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조공)은 1925년 4월17일 서울 아서원에서 김재봉을 비롯한 당원 19명이 창립대회를 열었다. 김일성의 공산주의가 아닌 정통 공산당이 조직돼 활동했는데, 그 명분은, 임정 산파역이었던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동호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의 수단과 방편으로 공산당식 전위적인 항일투쟁을 펼친다는 취지였다.
이 시기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한편 공산당의 조직 활동도 억압했다. 그 탓에 조선공산당은 3년 뒤인 1928년에 해체됐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계열 운동가와 힘을 합친다고 하면서도 1920년대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뒤로는 민족계의 활동을 방해하고 규탄했다.
조선공산당은 조만식의 민족실력 양성운동이나 김성수의 민립대학 설립운동도 방해함으로써 민족진영의 발목을 잡았다. 신간회나 근우회가 좌우합작투쟁을 전개했으나 주도권을 잡지 못한 좌익계의 책동으로 얼마 못 가 해산되기도 했다. 그후 두 차례 발생한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박헌영, 찬탁으로 돌아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史) 중 중경 시기(1940~45)에도 좌우익 갈등은 있었다. 그러나 백범 주석 등 일부 국무위원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의 연립내각이 성립됐다. 좌파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으로 흡수·통합됐다. 김원봉은 임정의 군무부장을 지냈다.
광복 정국에서 선결 과제는 국내의 질서 확립과 민족 통일, 친일 잔재 청산 등이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좌우익 인사들은 마땅히 힘을 합해 미소가 그은 38선을 철폐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 진력해야 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일제의 조기 항복 선언으로 무산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잃었고,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한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됐다.
일제 강점기 내내 대립한 좌우익은 광복 정국에서 다시 분열함으로써 미소의 개입을 불러왔다. 아무리 미소가 강대국이라도 좌우익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요즘 북한 핵 폐기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일이다.
미군정은 좌익이 더 많이 가담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좌파의 조선공산당은 물론 중경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우파인 송진우 김성수 등은 임정을 지지하고 인공을 반대하면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해 미군정에 협조했다. 그에 따라 군정에 한민당 계열의 인물이 다수 참여했다. 해외인사 중 가장 먼저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결성하고 통일국가 결성을 촉구했으며 환국한 김구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을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중도 우파의 안재홍은 국민당을, 중도 좌파의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조직하고 좌우익 합작을 실현하려 했다.
한편 카이로회담을 비롯한 여러 국제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됐으나 각국의 예민한 이해관계만 처리됐을 뿐 한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돌파구는 막힌 상태였다.
그런 일련의 국제성을 띤 회담에서 일제의 패전 이후 한국의 분단과 후견제라고도 하는 신탁통치 문제가 구체적으로 입안된 것이다. 신탁통치 기간으로 미국은 40년, 소련은 10~20년을 검토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 결의안은 이 같은 미소의 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모스크바회담의 요점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4개국(미·영·중·소)의 신탁 통치안,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 설치 등을 결의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민족은 크게 분개했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좌우익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애초 반탁(反託)을 표방했던 박헌영은 1946년 1월1일 평양에 소환돼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제프 소련 민정장관으로부터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贊託)을 따르라”는 압박을 받았다. 1월2일 새벽 서울에 온 박헌영은 찬탁으로 돌변하면서 “이는 조선을 위해 가장 적당한 것이니 그 결정을 지지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아 정국을 냉각시켰다.
다음날 박헌영이 담화문을 발표해 신탁통치안에 대해 “조선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이라고 주장하자 우익측은 1월5일 “조선공산당이 소련 1국의 신탁 통치를 지지해 조선을 소련의 연방으로 편입하려 한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좌익은 찬탁 이유에 대해 “3상 회담 내용이 임시정부 수립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김성수 등 우익 진영은 “신탁은 식민지 노예 상태로 들어가는 치욕적인 처사”라고 규탄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임시정부 수립보다 신탁통치 문제를 더 부각시켰다.
3·1절 기념식도 따로따로
민족주의 계열은 합동으로 반탁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1945년 12월28일 수백개의 민주사회단체를 모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중앙위원 76명, 상무위원 21명)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보성전문(고려대) 학생 이철승 등은 중등 이상의 학생 수천명을 동원해 ‘전국학련’을 만들고 반탁·반공·반소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켰다.
1945년 8월18일 은둔지에서 상경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그는 이승만, 하지, 아놀드, 김일성과 면담하는 한편 이승만의 독촉 전체회의에도 참석해 발언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인공의 주석직 제의를 거절하고 공산당을 배격하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상면은 했으나 워낙 이념의 골이 깊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3·1절 기념식도 좌우익이 따로 개최했다. 좌익은 3·1운동기념준비위원회로, 우익은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라고 불렀다. 장소도 달라 각각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개최했다. 좌우익의 이러한 대결 양상은 신탁통치 논란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좌익의 절대적인 지지를 업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여운형의 건준에서 주요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노조나 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지지세력 확장에 전념했다. 물론 소련의 지령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박헌영은 ‘파시즘을 근멸하자’라는 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협조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초기엔 대미(對美) 유화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이 발생하자 양측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찬탁 운동을 펼친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7·27투쟁’을 일으키고 미소공위 촉진을 위한 대규모 군중 투쟁을 계획했다. 미 군정은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좌파 단체를 불법 단체로 간주한 까닭이다.
1946년 5월8일 미 군정의 무장 경관대가 공산당 산하 조선정판사(인쇄소)를 위폐(僞幣)제작 혐의로 수색하고 관련자를 체포·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판사 직원 대부분이 당원이었기에 공산당이 입은 상처는 매우 컸다. 미군정은 또 조공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 조치했다.
우익 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조공을 규탄했다. 10만여 명이 모인 이날 대회에서는 반소·반공 구호가 난무했고, 일부 군중은 좌익 신문인 자유·중앙·인민보를 습격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긴급 출동한 경찰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켜 좌우익의 대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박헌영은 7월26일 ‘대미 자세의 역공’이란 구호 아래 신(新) 전술을 채택했다. 미소공위의 휴회와 위폐사건으로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일본 공산당과 협조해 극동에서 반미 운동을 폈다. 미 군정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이는 조공의 노선이 투쟁 일변도로 바뀐 것을 뜻한다.
좌익 3당의 통합과 분열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법정에 선 공산당원들.
이에 8월4일 박헌영은 조공 중앙위 총비서 자격으로 여운형에게 인민당·공산당·신민당의 합당 제의를 수락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조선인민보에 실렸다. 8월13일 조공은 남조선에 수감 중인 이관술 김성숙 안기성 송언필 박낙종 등을 석방하라고 요구해 군정 당국과 또 한 차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상호 이해가 날카롭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좌익 3당은 합당의 방법론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했다. 각 당 모두 합당파와 합당 반대파로 갈려 이전투구 양상을 보였다. 그 와중에 북조선은 박헌영을 지지했다.
9월4일 조공의 간부파, 인민당의 48인파, 신민당의 합당 추진파는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합당 반대파가 별도로 사회노동당을 창설함으로써 좌익 내부의 분열은 한층 심화됐다.
미 군정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펴 조선인민보 등 3개 신문을 정간 처분하고,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 조공 지도부에 대한 검거령을 발동했다. 여기에는 친(親)군정파인 우익의 입김도 작용했다.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일으켰다. 체포령이 떨어진 지 3주 후 남한 전 지역에 파업과 폭동이 일어났다. 박헌영은 도피 상태에서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을 배후조종해 남한 전역을 혼란과 무질서, 공포로 이끌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1월23일부터 양일간 3당 합당을 기반으로 남조선노동당(남노당) 결성대회를 열었다.
남노당의 노선에 대해 허헌은 “근로대중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호한다”고 천명했고, 박헌영을 지지한 이승균은 “근로대중을 투쟁대열로 영도한다”고 했다. 또 인민당의 김오성은 “남로당은 근로인민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후 남노당은 우익과 미 군정에 맞서면서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등을 일으켜 남한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편 소련 군정은 1945년 12월17일 김일성을 조공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로 임명했다. 다음해 1월5일 반소·반공을 주장한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감금한 뒤 2월8일 실질적 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 33세의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을 위원장에 선출했다. 그러므로 남한에서 이승만이 먼저 단독정부 수립을 기도해 한국을 분단국가로 몰아갔다는 좌파의 주장은 궤변이다.
과도정부에서 배제된 김구와 이승만
김일성은 3월5일엔 토지개혁법을, 3월23일엔 정강정책, 남녀평등법, 산업국유화법을 잇따라 공표하면서 ‘국정’을 수행했다. 북조선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꾼 김일성은 당·정·군을 장악하고 파업, 파괴, 살상, 납치 등 남한 교란을 책동했다. 1947년 2월17일 ‘북조선인민회의’가 출범했다.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게양됨으로써 남북은 완전히 분단됐다.
북한이 정적(政敵)을 살육, 숙청하면서 독재체제를 굳히는 동안 남한에서는 좌익이 우익을 매수하거나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광복 후 남한에서 결성된 정당 중에는 혼란을 배제하고 민주주의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우국적인 관점에서 좌우합작을 지향하는 중도파가 많았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극심하게 대립하면서 중도파의 존재 의의가 크게 약화됐다.
혼란이 가중되던 1946년 10월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 우익인사 5명과 중도 좌익 5명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토지개혁 실시와 입법의원 구성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7개 원칙을 발표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는 민족의 통합이라는 원대한 꿈을 성취하기 위한 대결단이었다.
실무추진위원이었던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이는 우사(김규식)가 먼저 제기해 백범(김구)을 움직여 실행에 옮긴 것으로 당시는 이것만이 좌우익의 갈등과 대결구도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자 민족 통일의 첩경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각 정당의 견해는 달랐다. 김구의 한독당은 절대 찬성이었고 이승만은 조건부 찬성, 김성수의 한민당과 박헌영의 조공은 반대했다.
그 무렵 미 군정이 설치한 과도정부는 좌우익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인 김구와 이승만이 불참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 군정은 과도정부 입법의원 의장에 ‘말 잘 듣는’ 김규식을, 민정장관에 안재홍을 임명했다. 1947년 좌우익 통합을 추진하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공산당을 철저히 배격한 이승만의 논리는 우선 남한만이라도 건국한 다음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선(先) 건국 후(後) 통일이라는 그의 단정(單政)론은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더욱 굳어졌다. 먼저 정부가 수립돼야만 남한 사회가 안정을 찾고 국제무대에서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는 국제 정치학자다운 해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일부 우익인사들이 좌익과 함께 남한 단정에 강하게 반대함으로써 정국은 또다시 소용돌이쳤다. 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도 결렬되자 한국의 통일 문제를 좌우익 세력에 맡기지 않고 세계적 권능을 가진 유엔에 상정,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통한 단일정부 수립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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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비현실적인 주장이었다. 평양에 건너가 김일성과 회담한 후 크게 실망한 김구는 서울로 돌아온 후 민족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는 등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이듬해 6월 암살당했다.
광복 직후 남한 사회가 좌우로 갈라져 극한대립 양상을 빚은 것은 오늘날 도처에서 벌어지는 좌우익의 이념적 충돌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역사학 교수로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