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아찔한 소통의 즐거움

  • 손유경 아주대 강사·국문학 ogong326@dreamwiz.com

    입력2006-01-16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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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도정일·최재천 지음/휴머니스트/614쪽/2만5000원

    대화와 소통에는 기술(art)이 필요하고 따라서 대화는 그 자체로 예술(art)이 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때로 어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저건 예술이다!’ 하고 감탄할 때가 있다. 그들 서로가 서로를 발판 삼아 비상했다 추락하고, 떨어지는 듯하다 다시 날아오른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그렇다. 우리가 대화의 기술 혹은 예술에서 찾는 것은 그러니까 시소놀이나 널뛰기의 아찔한 즐거움 같은 것이 아닐까.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는 이 같은 대화의 문법에 기대고 있는 책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왜 그토록 멀어졌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왜 만나야 하는가를 화두로 문학평론가 도정일과 진화생물학자 최재천이 만났다. 전문성만을 강조해 스스로 왜소해지고 자기도취에 빠져버린 분과 학문의 폐해라든가, 학문 아닌 밥그릇 싸움으로 번진 학문의 영토 수호 전략에 대한 두 대담자의 지적이 새삼 충격적이라거나 도발적이진 않다. 정작 놀라운 것은, 각 학문분과가 활발히 소통해야 한다는 이른바 ‘간(inter), 멀티(multi), 트랜스(trans)’적 방법론의 중요성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음에도, 이제껏 그 같은 시각이 지닌 일상의 정치학으로서의 함의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대담의 전선(戰線)이 일상의 정치학에 한층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박수와 응원을 보냈다. 도정일이 지적했듯 문제는 인문학과 생물학의 만남 자체가 아니라 그 만남의 ‘접점’이 과연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하는 데 있다. 생명복제 문제, 인간 기원과 관련된 신화와 과학의 격돌,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를 통해 본 성·사랑·가족의 문제, 생명공학적 우생학 사회의 도래에 관한 어두운 전망 등 우선 생각나는 몇 개의 이슈만 꼽아보아도 우리에게는 하나같이 절실한 문제들이다.

    공통의 딜레마

    19세기 생물학이 제국주의의 요청에 맞장구치거나 남녀 불평등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 신화 전편이 아주 정교하게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로 짜여 있다는 사실 등에 대한 쌍방의 고백은, 상처를 보여주는 데서 대화가 시작된다는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인문학과 생물학의 학문적·대사회적 공과(功過)를 두 대담자가 솔직히 수용하고 시인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독자는 인문학과 생물학이 맞닥뜨린 공통의 딜레마를 진지하게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생로병사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한계와 고통을 생명공학, 생명의학, 유전자 치료와 같은 마술적 과학 기술을 통해 제거하고 건강, 장수, 심지어 영생까지 보장하는 공학적 유토피아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 ‘행복 이데올로기’ 앞에서 현재의 인문학과 생물학은 속수무책이라는 데 두 대담자는 깊이 공감한다. 우울증 치료제, 진통제, 해열제와 같은 약물 투여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최재천에게, 도정일은 행복이 인간의 최대 목적이냐 하는 문제야말로 철학의 오랜 화두라고 응답한다.

    진화생물학자가 보기에, 사실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유전자는 개인의 행복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연선택의 목적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철학과 종교는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하는 진실의 길”로 인간을 인도한다. 하지만 영원히 젊고 건강한 삶을 누리겠다는 행복주의자들 앞에서 우울, 고통, 분노, 슬픔과 같은 것의 인간학적 중요성과 가치를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어 보인다.

    문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낙관적 비전을 제시하는 기술 발전의 가능성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실험을 멈추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윤리적 자세라는 것이 인문학자의 견해이다. 반면 어차피 열릴 판도라의 상자라면 좀더 조심스럽게 잘 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게 자연과학자의 판단이다. 하지만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하다. 물론 투명하게 내다보이는 미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자기기만과 수호천사

    이 불투명함 속에서도 저 홀로 반짝이는 불빛이 있긴 하다.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는 날”이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을 아파하고 슬퍼하지만, 아무도 늙고 병들지 않는다면, 그래서 누구도 죽어주지 않는다면, 이 땅덩어리는 순식간에 우리 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우주의 무게와 맞먹게 된다. 죽음만이 삶을 허락하는 셈이다.

    자기기만이라는 인간 특유의 본성에 대한 두 대담자의 지적도 흥미롭다. 인간의 뇌 발달 과정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있다는 최재천의 말에 도정일은 수호천사 이야기를 꺼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자기와 세계가 마치 특별한 우호관계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인다는 내용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으로 하여금 이토록 불안정한 삶을 그래도 버텨내게 하는 건 바로 그 수호천사에 대한 자기 나름의 믿음 덕택일지 모른다. 나만은 영원히 병들지 않으리라는. 나만은 죽지 않으리라는. 이 대목에 이르면, 이 시대의 ‘행복 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인간의 자기기만, 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호천사 이야기의 마술적 변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무통문명’이라는 책에서 도래할 고통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현대인은 생의 기쁨까지 온통 고통의 예방에 저당잡히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통을 예방하는 일은 나에게서 고통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능성을 앗아가는 일이다. 그의 말 그대로 가축의 안락함과 비애를 한몸에 짊어지게 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혹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얼마 전 철학자 강유원에게서 ‘두꺼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얇은 한지나 신문지라도 그걸 수십 장 붙여보세요. 그게 뚫리나.”

    인류가 정치 사회 예술 등의 분야에 남겨놓은 여러 흔적을 DNA의 명령으로 볼 것이냐 문화적 명령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로 요약되는 생물학자와 인문학자의 대립은 근원적인 문제에 가깝기 때문에 해답이 없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두 대담자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쪽은 ‘방법론’ 자체의 비과학성을, 다른 한쪽은 비논리 고유의 ‘통찰’과 ‘설명력’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에서는 결국 유전자가 부처님 손바닥 아니냐?”라거나 “신화는 ‘구라’죠?”와 같은 불꽃 튀는 질문들은, 단순히 편견을 재확인하는 절차가 아닌 선입견을 깨 나가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또한 여러 개의 접점 때문일 것이다. 해답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한 ‘설(說)’-도정일의 말대로 근원적인 질문에는 대답이 아닌 ‘설’만이 있을 뿐이다-을 여러 장 겹쳐놓은 종이는 웬만한 충격에도 잘 찢어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똑같아지면 다 죽는다”

    공학적 우생학과 부시의 대(對)테러 전쟁의 공통점은 ‘두터운 세계’를 더는 가능하지 않게 한다는 점에 있다. “투명해서 좋은 것은 회계장부뿐”이라는 도정일의 말 속에 집약되어 있는 이 ‘두터운 세계’란, 다양성과 불균형과 모순을 모조리 걷어내기보다는 그것을 공존케 하는 세계, 신조차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을 갖는 그런 세계를 뜻한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최재천이 소개하는 생태학의 ‘은신처 이론’ 또한 대단히 시사적이다. 생태학적 다양성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잡아먹히는 개체들에게 바로 숨을 곳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숨었다가 또 나오고 숨었다가 또 나오고 하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없앨 수가 없다는 것. 숨을 곳을 없애면 궁극에는 하나가 되고 그건 곧 도정일이 말하듯 “똑같아지면 다 죽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곧바로 생존의 문제가 된다.

    ‘대담’은 행복이 아닌 고통을, 하나가 아닌 여럿을,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얄팍함보다는 두터움을 자원화하는 방안에 관한 지혜를 모아본 책이다. 생물학과 인문학이, 과학과 신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모순 속에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그 속에서 ‘두텁게’ 살아가는 일일 터이다. 종(種)의 획일화는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생태학의 경고는,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인문학적 지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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