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미국 출판시장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킨 ‘치킨 릿(Chicken lit(literature의 준말))’의 대표작이다.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치킨 릿’은 속되게 말해 ‘영계 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끈 ‘할리퀸 로맨스’ 문고판 시장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인공들은 대개 패션(패션지 기자, 퍼스널 쇼퍼, 디자이너, 미술가 등)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쇼퍼홀릭이다. 무엇을 입고,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곧 인물의 캐릭터가 된다. 그러므로 소설에 등장하는 각종 브랜드의 특징과 쇼핑의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지 못하면 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쇼핑에 카드와 현금 지급 외에 또 어떤 순간이 가능하냐고? ‘쇼퍼홀릭’은 쇼핑에 샘플 세일에서 퍼스널 쇼핑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며, 그 속에 인간 내면과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을 꿰뚫는 장치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찍이 ‘쇼퍼홀릭’에서도 보지 못한, 쇼핑몰의 천국이라는 뉴욕이나 런던에서도 보고된 바 없는 새로운 쇼핑 경험을 서울에서 할 수 있었다. 한 백화점에서 평일 오후에 매장 전관의 문을 닫고, ‘선택된 고객’(대개 VIP)들만 약속한 시간에 입장시켜 쇼핑하게 하는 행사를 연 것이다.
쇼핑하던 손님들을 ‘소개(疏開)’하고 저녁에 다시 문을 연 백화점은 주차장을 통해 초대한 고객만 입장시켰고, 시간대별로 패션쇼를 열었으며, 핑거 푸드와 샴페인을 제공했다. 패션쇼에서 본 옷을 성미 급한 손님들이 빨리 살 수 있도록 별도의 패션쇼 카탈로그가 만들어진 건 물론이다. 게다가 ‘핑크’와 ‘블랙’이라는 드레스 코드(표준옷차림)도 있었으니 쇼핑은 거의 비밀스러운 의식처럼 됐다.
쇼핑의 치명적인 매력은, 특히 젊은 소비 세대에게 브랜드와 상품이 곧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줄 거라는 착각에 빠뜨리는 데 있다. 이날 행사는 이 점을 정확히 꿰뚫었다. ‘핑크’와 ‘블랙’의 밤, 특별한 초대에 응함으로써 자신의 ‘친구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워너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쇼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이 백화점은 ‘아무나 드나들던’ 날보다 훨씬 더 붐볐기 때문이다.